29화 - 제6장. 작별 (3)
* * * *
진도건은 방 안에서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가만히 집중하면서 파천신공을 운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선 천서은이 그의 운기조식을 돕고 있었다. 천무경이 최대한 그의 내상을 보호하긴 했지만, 이미 양자성에게 당한 내상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천무경의 십성에 이른 파천신공의 정제된 기운이 진도건의 몸에 다시 한번 머물렀다가 가면서 거름을 뿌리듯 좋은 토양을 가꿔 놓은 꼴이 되었는데 이것은 잠재적으로도 진도건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터였다.
한 시진이 넘게 운기조식을 돕고 나서야 마침내 두 사람이 눈을 떴다. 반쯤 열린 창밖으론 어느새 어두워진 밤하늘로부터 희미하게 달빛과 차가운 바람이 솔솔 스며들어 오고 있었다.
천서은은 앉은 채 그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가부좌를 튼 정강이나 무릎이 진도건의 엉덩이에 닿을 정도로 붙었다. 그리고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가는 팔이 진도건의 두꺼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아가씨.”
“……몸 상태는 어때요?”
“괜찮습니다.”
진도건은 그녀의 행동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등으로 느껴지는 체온과 호흡으로 느껴지는 따스함이 어색하면서도 안락한 기분으로 이어졌다. 잠시 기다려도 떨어지지 않자 진도건은 두 손으로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은 그녀의 손을 덮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물리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당장 내일 아침부터 서로 떨어져야 하는 상황이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었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상황 때문에 그저 아쉬움만 삼킬 따름이었다.
“부디 몸조심해요.”
“물론입니다.”
“평상시의 임무와는 달라요. 쉽게 끝날 일일 수도 있지만, 예상치 못한 위험이 닥칠 수도 있어요. 정말, 정말로 조심해요.”
“꼭 돌아오겠습니다, 아가씨.”
천서은이 진도건의 등에 묻었던 얼굴을 떼었다. 자연스레 풀린 팔은 그의 옆구리를 붙잡게 되었다.
“제 이름 불러 봐요.”
“제가 어찌…….”
“불러 봐요.”
수년간 공칭으로만 천서은을 불러왔었다. 쉽게 나올 리가 없었기 때문에 말꼬리를 흐리자 그녀가 다시 재촉했다.
잠깐 1, 2초의 정적이 흘렀을까.
그는 옆구리 옷자락을 붙잡은 그녀의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돌아앉아 천서은을 마주 보았다. 밤하늘 창밖에서부터 흘러들어 온 어스름 달빛 사이로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아름답게 피어난 꽃을 본 것처럼 홀린 듯 손이 나아가 그녀의 볼과 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천서은.”
“훗.”
나지막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천서은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두 손이 진도건의 목을 감싸 안아 조심스레 당겼다. 그녀의 턱 근처에 머물던 진도건의 손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기며 목을 부드럽게 감싸 당겼다. 그렇게 서로를 가볍게 끌어당기며 입술이 부드럽게 맞닿았다. 그 촉감의 황홀함과 감정이 교차하는 기분은 눈을 감고 입술을 맞추면서도 두 사람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도록 하였다.
“후후후!”
천서은이 웃으며 진도건을 가볍게 밀쳤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가자 진도건도 일어나서 그녀를 쫓아갔다. 문 앞에서 두 사람은 다시 한번 끌어안고 입맞춤을 나누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이름을 불러 줘요.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있도록.”
“그럴게요.”
* * * *
인시가 되어서 노지신과 진도건, 장학, 관무영, 나자룡, 장우태, 하소정 총 7명은 조용히 숙소를 빠져나와 도시 서문(西門)으로 향했다. 거대한 성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미리 매수된 군졸들이 말 7필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7개의 인마(人馬)는 곧장 북서쪽으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정주에서 하룻밤을 자고 황하에 배를 타고 서쪽으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렇게 섬서 화음(華陰)에서 배를 세우고 화산과 여산(驪山) 사이를 연결하는 산기슭에 도착해서 말에서 내리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종남산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그들은 이 일대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일찌감치 느끼고 있었다.
한편 천무방에 남아 있던 일장로 백두기는 인급 무사의 보고를 받고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내부 회의를 거쳐 천준과 지혼당, 인혼당은 천무방을 지키기로 한다. 백두기와 이장로 장태환은 천혼당 천급무사를 22명씩 나눠서 인솔하여 섬서 지역으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노지신과 진도건 일행이 출발한 지 3일째 새벽에 천무방에서 출발했다.
비무제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양자성과 진도건의 비무는 진도건의 승으로 판정하였으나 부상으로 인한 불참으로 선언되었다. 양자성의 규칙 위반으로 천무방이 불이익을 당했다고 여겨져 부전승이 결정되었고 나머지 6인의 비무가 월요일 첫날에 차례대로 치러졌다.
지난주 금요일에 힘들게 싸워 승리를 쟁취했던 여희선은 6강 비무에서 황사열을 만나 패배하였다. 옥적을 휘두를 때마다 발산되는 그 단발적 운율은 모두가 들을 수 있었지만, 그것이 음공으로써 황사열에게만 특정하여 영향을 미치는 정교함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황사열의 내공이 뛰어났고 여희선 본인이 이전 비무들로 지쳐 있었던 탓에 금방 제압당하였다.
소문적은 백사편법(白蛇鞭法)의 고수 이견(李犬)을 만나 물리쳤다. 긴 채찍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편법은 그동안의 비무에서 병기를 다루는 자들에게 큰 어려움을 주었었는데 소문적은 외공이 매우 강력하여 오히려 맨손으로 채찍을 틀어쥐고 박투전(搏鬪戰)으로 이끌고 가서 승리를 취하였다.
마지막 대진은 흑풍양인도(黑風陽兩刃刀) 마청래(馬靑來)와 해남검파(海南劍派)의 제자 송가유(宋哥遊)였다. 변방에 위치하긴 했지만, 명문검파로 명성이 높았던 해남검파답게 매서운 검술과 검기마저 선보인 송가유였지만, 마청래의 양인도술과 기공 능력이 모두 한 수 위였다.
두 사람의 비무 결과를 관중석에서 건조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천서은의 옆으로 한 사람이 다가와 앉았다.
“똘마니가 안 보이는군. 부상이 심한가?”
천서은이 옆을 보니 주태소가 잠깐 힐끔 눈을 마주치곤 다시 고개를 돌려 비무대 쪽을 보았다. 그녀도 그에게서 바로 시선을 떼었다.
“부상은 괜찮지만, 임무가 생겨서 일찍 떠났어요.”
“임무라. 날 잡으러 왔을 때 같은 뭐…… 그런 건가?”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아, 참고로 오해를 할까 봐 얘기해 주는데 그땐 내가 잡혀 준 거야.”
천서은이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가슴에 구멍 뚫려 놓고요?”
“에이씨, 그건 방심해서 그런거고. 놈 검술이 좀 특이하냐? 그래서 궁금해서 잡혀 준 거라고.”
“네에~, 그러시겠지요.”
“하! 거 참.”
이런 얘기로 투닥거리기 싫었던 주태소는 더 들을 것은 없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관중석을 떠났다.
‘임무?’
그는 경기장을 빠져나와 걸어갔다. 문득 노점상의 수레에 빨간 사과가 눈에 띄었다. 상인에게 동전을 던져 주고 사과를 하나 들어 크게 베어 물었다. 아삭거리는 소리로 주변 소음을 덮어가며 걸어가던 그의 눈에 숙소를 나서는 도판수와 도태무 부자가 눈에 들어왔다. 무기는 물론 가져온 짐까지 챙겨 나온 모습이었다. 마침 경기장 쪽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곧장 눈이 마주쳤다. 도판수가 어서 오라는 손짓을 했다.
“무슨 일인데 벌써 가려고?”
“총표파자께서 보낸 전갈이 도착했네. 중원 지역의 모든 녹림채는 삼문협(三門峽)에 있는 황하수채(黃河水寨)로 수령급과 정예 10명씩 꾸려서 집결시키라는 지시야.”
“엥? 갑자기 무슨 일이오?”
“글세. 무슨 보물이라도 찾았나 보지.”
“보물?”
“난 대별산으로 내려가 수하들을 추려야 하니 자네가 먼저 태무와 함께 가 주게.”
“총표파자 영감탱이는 무슨 꿍꿍이야.”
주태소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녹림십팔채라고 하지만 이 18개의 녹림채들은 모두 독자적인 행동을 이어 왔었다. 총표파자 오경방이 각 산채의 두령들을 소집하는 경우는 중양절(重陽節)과 여름에 있는 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한 해에 이틀 정도뿐이었다. 이 이외의 집결령(集結令)이나 총궐령(總蹶令)은 대개 공동체의 존립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중대사가 발생했을 때 동원되는 것이었다.
“부탁함세.”
“뭐 갑시다. 나야 원래 빈손이었으니 바로 출발하면 되지.”
세 사람은 말 세 필을 마방에서 구매하여 각자 올라탔다. 먼저 남문으로 가 도판수의 출발을 배웅한 후에 남은 두 사람은 북문을 통하여 삼문협으로 출발하였다.
“언제까지 모이라 하더냐?”
“오늘 기준으로 닷새 뒤입니다.”
“오랜만에 형제들을 보겠구나. 재미있는 일 좀 벌어졌으면 좋겠어.”
“그 정도로 집결하라는 거 보면 심상치 않은 일 같습니다.”
주태소의 시선이 잠깐 멀어지는 허창 도시의 성곽을 비추었다. 오늘 새벽 진도건이 떠났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기 때문이었다. 왜 지금 그 생각이 떠올랐는지 몰랐지만, 왠지 멀지 않은 시기에 다시 만나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들었다.
* * * *
다음 날 대진표가 공고되었다.
천서은의 상대는 흑풍양인도 마청래였고 황사열이 소문적과 상대할 예정이었다. 모든 비무는 오후에 차례로 치러질 계획이었기에 천서은은 시가지 거리를 여희선과 함께 산책하고 있었다.
“져서 아쉽겠어요, 언니.”
“아쉽긴. 난약파가 비무제 8강에 이름이 알려졌으니 난 만족해. 그리고 상대가 너무 강했어.”
“황사열의 실력은 어때요?”
“나로선 그의 실력을 반도 못 끄집어내지 않았을까 싶네. 양자성만큼 강하지 않을까? 근데 벌써 결승전을 생각하는 거야? 마청래도 보통 고수가 아니던데.”
“후후! 방심하면 안 되겠죠. 하지만 제가 이길 거에요.”
“네가 마지막 비무까지 진출한다면 그가 좋은 예비전이 될 수도 있겠네. 재밌겠는걸?”
여희선이 천서은에게 바짝 붙으며 팔짱을 꼈다.
“그런데 네 짝은 어딜 갔을까?”
“쉿! 짝이라뇨, 언니. 아직…… 말할 단계는 아니에요.”
“호호호! 미안. 근데 정말 어디 갔어? 한시도 안 떨어지는 사람인데.”
“임무가 있어서 떠났어요.”
“호위무사가 무슨 임무? 널 지키는 게 임무 아니야?”
“그러게 말이에요. 에휴…….”
천서은이 정말로 깊은 한숨을 내쉬자 여희선이 새삼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이 점점 부러운 눈으로 바뀌어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여희선은 개방적인 성격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남자를 가볍게 만나는 성격은 아니었다. 엄연히 난약파를 이끌어야 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사내에 관심을 오래 둘 수 있는 여유는 없었다. 반면 천서은은 거대 방파 주인의 딸임에도 불구하고 지위에 대한 구속력도 없어 보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계속 같이 다니면서 도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식사는 난약파 장문인 전연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서 같이 먹고 나서 경기장으로 다시 향했다.
“내 친구가 딴 길로 샜다니까 내가 옆에 있어 줄게.”
“호호! 고마워요.”
두 사람이 같이 경기장으로 들어가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공 사용에 대한 제한이 사라진 탓에 평석(平石)을 깔아 만들었던 비무대는 모두 치워놓은 상태로 싸울 공간이 넓다는 것을 느꼈다. 경기장 안의 사방에는 네 명의 판관이 서 있었다. 여희선은 구석의 대기석에 가서 앉았다.
천서은은 비무장 가운데로 가서 기다리고 있는 마청래를 마주 보고 섰다.
와아아아아!
주변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제는 정말 뛰어난 젊은 고수들만이 선별된 4강 전의 시작이고 여기서 승리한 사람이 내일 최후의 자리를 놓고 겨루게 될 것이었다. 이 비무제가 여기까지 오면서 흑풍양인도 마청래의 명성은 크게 치솟았고 그 이상으로 천서은은 실력과 아름다운 미모로 언제나 관중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제는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별호가 만들어져 불리고 있었다.
“백봉천녀(白鳳天女) 천 낭자와 겨루게 되어 영광이오.”
“흑풍양인도를 견식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청래는 잠시 혀를 질끈 깨물었다. 약간의 통증을 빌리기 위해서였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미모에 홀리게 되니 자신의 평정심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꼈다. 흑풍양인도법에 자신감이 있었지만, 상대는 그 천무방의 정수를 잇는 여인이었다. 여인의 몸이라도 결코 얕봐서는 안 될 일이었다.
판관 장이풍이 나서서 두 사람을 소개하는 내용을 관중들에게 간략히 전달했다.
흑풍양인도 마청래.
흑풍가(黑風家)라는 작은 무가로 1인 전승 방식으로 사사하는 무공 흑풍양인도법이 유명하며 그 세가 없다시피 하지만, 오랜 시간 연구된 이 도법은 상승절학으로써 무림계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다. 끝단의 가운데가 수직으로 반쯤 갈라진 쌍첨양인도(雙尖兩刃刀)의 형태로 폭은 조금 넓고 길이는 일반 도검보다 다소 짧았다. 대신 손잡이가 일반 도검보다 3배는 더 길어서 사용하기에 따라 사정거리의 변화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 특징인 병기였다.
백봉천녀 천서은.
천무방주 천하오절 파천무봉 천무경의 금지옥엽이라는 글귀로 모든 것이 설명 가능했다. 비무제에서 주로 검술로 능력을 보여 주었지만, 알려지기론 권각술도 뛰어나고 내공의 수준도 동년배 가운데서는 최고 수준이라는 예측이 있었다.
그렇게 판관의 소개와 두 사람에 대한 설명들이 관중들 사이에서 설왕설래했다.
둥! 둥! 둥!
짧게 세 번의 북소리가 울려 퍼지며 비무제 4강전의 첫 시작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