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 제5장. 검객 (5)
마침내 오후가 되었다.
정오 전후로 자리가 비워졌던 관중석은 다시 들어찼고 각 비무대에도 판관들이 올라 오늘 마지막 비무 출전자들을 호명했다. 그리고 양자성과 진도건은 마침내 비무대 위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판관은 구룡문의 장이풍이었다. 그는 일찍이 양자성이 진도건과 대결하기 위해 대진 순서를 건드렸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두 사람의 비무를 두세 번씩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당연히 양자성이 이기겠지.’
양자성은 다름 아닌 백령신검 강정학의 직계 제자였다. 강정학이 평하기를 세 명의 제자들 가운데 재능에서 가장 앞선다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기대치를 증명하듯 모든 비무에서 그는 상대를 농락하는 압도적인 실력 차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이 녀석 검술이 꽤…… 특이해.’
상대는 모두 만만치 않을 거라는 예측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해 온 진도건이었다. 그 내용을 보면 특이한 부분이 있었는데 초식의 공방 자체는 꽤 치열하게 진행되는 듯했음에도 결국 마지막에 서 있는 사람은 진도건이었다. 놀라운 것이 그도 직접적인 타격을 받은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판관이라는 위치에서 볼 때 이번 주 치러지는 모든 비무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대진이라는 점은 틀림없었다.
곳곳에서 시작을 알리는 외침이 들려오자 장이풍도 그 신호를 알렸다.
“시작!”
저벅저벅.
장이풍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곳곳에서 목병기들이 부딪치며 그 격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양자성과 진도건은 바로 시작하지 않았다. 양자성은 옆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진도건을 바라보고 있었고 진도건도 제자리에서 몸을 돌리면서 양자성을 마주 보고 있었다.
양자성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탐색이라. 의미가 있나? 들어와라. 선공을 받아주마.”
“글쎄. 나도 선공을 받는 게 편해서.”
“하하하! 이거 자존심이 상하는군. 이거 먼저 공격하라 부탁하기도 뭐하고 말이야.”
“흐음! 고민스럽군.”
진도건이 한 걸음 떼었다. 평범한 걸음이었다.
다시 한 걸음 걸었다. 이번에도 평범한 걸음이었다.
방향은 양자성을 따라 쫓았다.
양자성이 피식 웃었다.
탓!
그의 신형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거리를 포착하고 횡격을 휘두르려 준비를 하는 순간 진도건의 검이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검극일점(劍極一點)
목검의 자줏빛 검극이 순식간에 양자성의 눈앞에 이르렀다.
슛!
‘흡!’
양자성이 찰나 고개를 틀어 진도건의 검을 피해 냈다. 급히 피해 내면서 돌진하던 신형이 크게 기울여진 상태로 검을 휘둘렀으나 허공을 갈랐다.
텁!
바닥에 장력을 쳐 내며 빠르게 몸을 바로 세우는 양자성.
진도건의 목검은 이미 출발한 상태였다.
슈슈슛!
타타탕!
3연속의 일섬뢰가 양자성의 지척에 이르러서 그의 검에 의해 빗겨 나갔다. 세 번째 검격이 무산에 이른 순간 어깨를 노리고 뚝 떨어졌다. 양자성이 몸을 피하니 이번엔 사선으로 쳐올렸다.
텅!
슛!
횡격이 막히는 순간 바로 거둬들였다가 다시 양자성의 머리를 노리고 검을 찔렀다. 지척에 이른 순간 양자성이 앞으로 숙여 피하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허공을 갈랐다.
좌측으로 보법을 밟아 양자성의 뒤로 이동하며 횡격을 휘둘렀다.
퍽!
”큭!“
양자성이 신음과 함께 땅을 한 번 굴렀다. 급히 몸을 바로 세운 양자성의 깔끔했던 청학의엔 먼지들로 부분 얼룩졌고 얼굴엔 미소가 사라졌다. 그에 반해 진도건은 옆으로 천천히 걸어가면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관중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양자성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비무제의 우승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이라고 모두 입을 모아 떠들 정도였는데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지자 환호가 터진 것이다.
심지어 다른 비무대 위의 출전자들도 그 함성에 잠시 멈춰 양자성과 진도건 측을 바라볼 정도였다.
여유 있게 상대를 농락하던 황사열도 얼굴에 놀라워하는 기색이 드러났다.
‘그 양자성이 땅을 구르다니.’
그것은 이 광경을 본 대부분이 한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진도건의 이름이 관중들 사이에서 다시금 떠돌았다. 그리고 그들은 어쩌면 이변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맴돌았다.
“이거 참…….”
천무경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옆에 있던 노지신이나 이혁성 등이 그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 있음을 확인하고는 그들도 피식 웃고 말았다.
‘강 영감 당황했으려나?’
그의 시선이 모이며 건너편 관중석에 있던 강정학을 찾았다. 침착함을 유지하려는지 무표정으로 비무대 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천무경도 다시 비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양자성은 청학의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털어 내었다.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다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인정한다. 내가 널 얕보았어. 이번엔 제대로 해 주마.”
말아 쥔 손안에서 검을 가볍게 굴려 본 양자성의 신형이 순간 궁신탄영(弓身彈影)의 경신술로 진도건을 향해 쏘아졌다.
탕!
백령검법(白靈劍法) 일섬탈백(一閃奪魄).
양자성이 뿌리는 쾌검에 맞서 진도건의 목검이 반응하며 자단목 두 자루 목검이 비명을 질렀다.
양자성의 쾌검에 반응하는 진도건의 쾌검.
타타타타타탕!
서로 반대 지점에서 출발한 자색 검영들이 연달아 빠르게 충돌했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다른 한쪽이 방어하는 것이 아닌 서로 공방을 주고받는 쾌검들의 충돌이었다.
가장 먼저 변화를 가져간 것은 양자성이었다.
백령검법 백화요리(白華搖利).
직선으로 솟구친 검영들이 꺾인 궤적을 만들며 직접 타격을 노리기보다는 전면의 검로(劍路)를 어지럽혔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튀어나오는 다른 꺾인 궤적의 검영은 직접 진도건의 급소를 노리고 파고들었다.
타타탕!
진도건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검격을 쳐 냈다. 그의 검로는 위협이 될 수 있는 공간과 거리를 직접 베어내면서 예측하기 어려운 양자성의 검격을 차단했다.
타탓!
검격과 호흡의 박자가 맞아떨어질 때.
진도건은 빠르게 우측으로 지면을 스치듯 이동하며 검을 휘둘렀다. 마치 다섯 개의 검을 동시에 휘두른 것처럼 그의 빠른 쾌검으로 인해 다섯 줄기 검영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양자성에게 쏘아졌다.
타다다당!
백령검법 백무풍호(白舞風湖).
원형으로 펼쳐 내는 검영들에 진도건의 검영이 쓸려져 나갔다. 동시에 더 많은 변화의 바람이 양자성의 손에서 일어나며 수십 개의 검영이 꽃봉오리가 피어나듯 진도건을 향해 피어났다.
그 검세가 대단하여 진도건도 뒷걸음질을 연속하며 위협을 쳐 내는 수준에 그쳤다.
그 검세 속에서 일섬탈백의 직선으로 뻗어오는 검영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핑!
가슴을 노리고 들어오는 것을 몸을 틀어 겨드랑이 사이로 흘려 낸 진도건이 손목을 틀어 양자성의 팔을 노리고 베어 낸다.
이에 양자성은 빠르게 검을 거두고 신형을 회전시키며 역시 팔을 노리고 베어 낸다. 진도건이 검을 회수하며 피해 내길 기다렸다가 짧은 참격을 연속하며 그를 쫓았다.
타타탕!
스슷!
이를 받아치던 진도건이 순간 검세를 정면으로 파고들었다. 양자성의 검이 허리를 베려는 순간 그의 신형이 지면으로 바짝 누웠다. 양자성의 검이 가슴 위로 지나가자마자 진도건의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며 검을 뿌렸다.
슈확!
텅!
묵직하게 울림이 퍼져 나가며 양자성의 신형이 뒤로 세 걸음이나 밀려났다. 급히 검을 가슴으로 당기며 검신으로 뒤를 받쳐 진도건의 검격을 막아 낸 것이었다.
양자성 스스로는 느낄 수 없었지만, 그의 얼굴에 걸려 있던 여유로운 미소는 어느새 살짝 뒤틀려 있었다.
‘내가 밀린다고?’
백령신검의 검초들은 만 가지의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일섬탈백을 기본으로 한 쾌검은 검림의 선배 검객들을 상대로 승기를 잡을 수 있을 만큼 그 속도에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번번이 진도건의 검에 틀어막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진도건이 지난 비무들에서 출중한 실력으로 연승해 온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실력이 다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이런 식의 상황에 직면하자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걸어오는 진도건을 보면서 양자성은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들숨 그리고 날숨이 이어질 때.
탕!
순간 접근하며 전개하는 일섬뢰에 양자성이 몸 가까이 검을 당겨 옆으로 쳐 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전개된 일섬뢰에 팔을 가격당했다.
퍽!
“윽!”
와아아아!
다시금 터지는 환호성.
급히 거리를 멀찍이 벌리는 양자성을 진도건이 쫓았다.
양자성은 잠깐 되찾은 시간 여유를 뒷받침해서 다시 한번 절초를 펼쳐 낸다.
백령검법 인화부곡(燐火不哭).
검극이 작은 원들을 그려 내며 연속된 검격이 진도건을 향해 쏟아졌다. 타타탕!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며 막았다 싶은 순간 또 다른 각도를 노리고 양자성의 검이 파고들었다.
연속되면서도 엇나가는 박자로 파고드는 검세가 자뭇 예리하여 진도건도 이번엔 파고들지 못하고 거리를 벌렸다. 그 순간 양자성의 신형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며 중심을 베었다.
타앙!
그의 경신술은 검속을 더욱 빠르게 하여 이번엔 진도건도 거리를 제어하지 못하고 검을 당겨 벽을 세워서 간신히 막아 내었다.
‘놈! 경신술이 약하구나.’
초식을 주고받고 거리를 벌렸다가 붙었다가 하면서 양자성은 진도건의 약점을 발견했는데 진도건의 거리가 그의 느린 발 때문에 충분히 길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보법으로 두세 걸음 수준의 거리를 제어하는 것은 분명 위협적이었지만, 그 이상은 분명히 한계가 있어 보였다.
속도라는 것은 결국 상대적이다.
정말 순수하게 쾌검 자체가 진도건에 비해 반 치 늦다면 경신술을 이용한 거리 제어로 그 속도를 추월하면 되는 것이다.
‘제길!’
양자성은 자신의 검이 진도건보다 느리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검림에서조차 그보다 검속이 빠른 사람은 같은 백령검법을 익힌 스승과 두 사형뿐이었다. 하지만, 이기기 위해서는 싫어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백령경신공(白靈輕身功).
슈아악!
크게 물러났다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참격을 날렸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진도건의 검에 참격이 막혔지만, 양자성의 신형은 이미 진도건의 뒤에서 다시 짓쳐 들고 있었다.
슈악!
퍽!
“음!”
처음으로 진도건이 신음을 흘리며 옆으로 주르륵 밀려났다. 양자성의 목검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검신을 팔에 바짝 붙여 검격을 받아 냈기 때문에 그 충격이 전해진 것이었다.
멈춰 있을 순 없었다. 다시금 짓쳐 드는 참격에 몸을 틀어 피해 내곤 바로 양자성의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슈악!
다시금 그의 신형이 쏘아져 나올 때를 노려 반보 전진하며 일섬뢰를 뿌렸다. 그러나 이번엔 그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예상했다!’
진도건의 시선이 급히 하늘을 올려다볼 때 어느새 공중에 날아오른 양자성의 신형이 갑자기 뚝 떨어졌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다시 미소가 걸린다.
백령검법 승룡영도(乘龍靈刀).
뚝 떨어지면서 팽그르르 도는 양자성을 중심으로 회선참이 휘몰아쳤다.
타타타타탕!
양자성의 위력적인 검세에 진도건의 검이 어지러워졌다. 마치 짓눌리듯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던 그를 쫓아, 양자성은 발이 지면에 닿자마자 밀어내면서 백화요리를 펼쳐 진도건의 시선을 현혹한다.
꺾여져 들어오며 일순 시야를 가린 검영들을 쳐 낸 순간 진도건은 옆에서부터 기척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몸을 틀며 검을 휘둘렀다.
틱!
퍽!
”큭!“
이번엔 양자성의 속도가 워낙 빨랐던 탓에 그의 참격에 진도건의 검 끝이 살짝 걸림으로써 막지 못하고 옆구리를 허용해 버렸다.
고통에 신음과 함께 진도건이 비틀거렸다. 그 틈을 노리고 그의 등을 노리며 다시 양자성의 신형이 쏘아져 나갔다.
핑!
진도건의 손에서부터 출검되어 직선을 그리는 찌르기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공간을 갈랐다. 양자성은 미처 접근도 하지 못하고 온몸을 비틀어 간신히 피해 내고는 비틀비틀 간신히 몸을 바로 세웠다.
‘뭐지?’
한 박자 더 빠르게 날아온 일섬뢰에 양자성은 소름 끼쳤다. 마치 그의 경신술을 동반한 쾌검을 진도건은 한 단계 더 빠른 쾌검으로 잡아먹겠다는 일종의 선포와도 같은 일격이었다.
”후욱! 후!“
진도건은 폐부 깊숙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토해 내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눈이 양자성에게 향했다.
‘아무래도 새로운 운기법에 서둘러 적응해야겠어.’
태을신공의 작은 강줄기 물흐름처럼 이어지던 내력의 운기를 멈추었다. 그 강물은 이미 소나기를 맞아 불어난 그것처럼 더는 평범한 강줄기에 담아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젠 파천신공으로 물길을 열어 단전에서부터 육체 전체로 단숨에 기를 관통시킨다. 치열함을 쫓아오는 활력과 찰나를 다투는 흥분도에 물결이 출렁이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파고를 만들어내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진도건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차갑게 중얼거렸다.
”다시 시작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