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 제5장. 검객 (4)
* * * *
비무제 개최 닷새째.
총 16명의 무인이 선별되고 2개 조로 나뉘어 8명씩 오전 오후로 나뉘어 대진이 발표되었다.
이른 아침 진도건은 숙소 앞 정원에 나와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몸을 풀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목검의 손잡이 부분은 그의 진검처럼 가죽으로 잘 감싸 놓아서 손안에 좋은 질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휙! 휙!
가볍게 목검을 휘두르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법을 밟으면서 하체는 충분히 탄력적이게, 상체는 더욱 부드럽게 움직였다. 보이지 않는 상대를 쫓아 검무를 추니 어스름하게 지붕 너머로 비추는 아침 햇살과 조금 뿌옇게 낀 안개에 부딪혀 자줏빛 검영이 연신 날개를 펼치는 듯했다.
마음이 움직이고 생각이 닿을 때, 어느새 손과 거기서부터 이어진 검은 이미 베고 지나갔다. 사고의 회로가 빛살처럼 작동할 때면 검은 이미 그보다 앞서 시공간을 관통한다.
파천신공의 깨우침은 운신을 더 가볍게 하였고 힘을 더욱 충만케 하였다.
그 성취는 바닥에 불과했지만, 축기된 진기의 양 자체는 3성의 성취를 뚫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파천신공의 성취보다 그 진기의 성질이 더욱 가치가 있었다.
강력하고 신속하게 혈맥을 뚫고 사지로 뻗어 나가는 파천신공의 기운은 가히 직선적이고 또한 파괴적이었다. 검에 의한 동작 하나하나 할 때마다 진기가 따라 흐르는 원류검결의 근간과 결합하여 강력함, 예리함, 부드러움 이상의 자유로움을 부여했다.
밤사이 굳어 있던 관절들이 파천신공의 기운과 신체적 발열로 부드럽게 이완되어 파고를 그리던 마음의 긴장감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한 호흡, 한 호흡이 분명하게 단전으로 전달되고 진기가 되어 동작마다 휘몰아치니 이 순간 진도건은 자신을 관조하며 다시 한번 눈을 뜨고 있었다.
천무경은 그의 인기척을 느끼고 밖에 나와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무아지경으로 이어지는 검무가 길어질수록 천무경의 옆에는 어느새 천서은이 앉아 있었고 노지신, 남궁평, 이혁성에 몇몇 천혼당 무인들까지 다른 방향에서 나와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허허, 녀석. 본래 이미 신검합일(身劍合一)의 경지에 도달했었지만, 이젠 신검합일(神劍合一)의 문을 두드리는구나.”
작게 중얼거리는 천무경의 목소리를 들은 천서은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천무경이 힐끔 바라보았다가 천서은을 팔꿈치로 툭 건드렸다.
“온전한 파천신공이 되었구나.”
“초단공(初段功)만요.”
“그래, 마음은 정해졌느냐?”
“조금.”
“에이! 그게 뭐냐? 그렇게 애매하게 간만 보고 그러면 남자는 다 떠난다고.”
“치! 알지도 못하시면서.”
“다 안다, 이 아비는.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네 어머니와 혼인하기 전에 여자 한 번 안 만났을 것 같으냐?”
“잊을만하면 방에서 훌쩍이시는 분이.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서 이 소릴 들으면 섭섭해하시겠어요.”
“내가 언제 울었냐?”
“울었다곤 얘기 안 했어요.”
“그게 그거지.”
가만히 앉아서 한 손으론 턱을 괸 채 서로를 보지도 않는다. 그저 시선을 진도건의 검무에 던지며 중얼거리듯 티격태격하는 부녀의 모습은 지나가는 사람이 본다면 꽤 우스운 광경이리라.
어느덧 검무는 끝이 났다.
진도건은 눈을 감고 가만히 선 채로 햇빛을 받았다.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태양의 빛과 열에 눈이 따뜻하게 풀렸다. 몸엔 활력이 넘쳐 났으며 감각도 예리하게 깨어났다.
검을 거두고 몸을 돌린 진도건이 가장 먼저 천무경 부녀를 시작으로 노지신, 남궁평, 이혁성 등에게 차례로 예의를 갖추었다.
천무경이 다가와 그의 몸을 살피면서 씩 웃었다.
“몸 상태가 좋아 보이는구나.”
“예.”
“상대는 검림의 양자성이다. 이길 수 있겠느냐?”
“글쎄요.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하하! 그래, 너답구나. 할 수 있는 만큼 다 해 보아라. 부상만 조심하고. 내 딸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알겠습니다.”
진도건이 웃으며 대답했다. 잠깐 눈을 돌려 천서은을 보았는데 그녀도 천무경의 뒤에서 미소로 화답했다.
“너도 준비해야지?”
“전 이미 끝났죠.”
“그럼 준비되는 대로 출발해라. 우리도 관중석에서 응원하도록 하마.”
진도건과 천서은이 먼저 출발하고 다른 사람들도 곧 뒤를 따랐다. 그들도 이번엔 사패련에서의 배려로 관중석에서 필요한 자리를 모두 확보받을 예정이었다. 무사들은 대부분 월요일부터 비무들을 지켜보았고, 당주 이상급의 인물들은 쉬면서 여행을 즐겼었다. 하지만, 이젠 비무제의 생존자들의 실력이 상향 평준화되었고 때마침 오후에 있을 진도건과 양자성의 비무는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충분히 볼만한 수준이라 나름대로 기대감들이 있었다.
노지신은 일행의 제일 뒤에서 쫓아가고 있었다. 많은 구경꾼과 상인들 사이를 걷던 노지신의 옆으로 한 봇짐상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의 손이 아주 잠깐 노지신의 요대를 툭 건드렸다.
노지신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힐끔 보았다. 쫓아 추궁할까 하면서도 문득 요대에 시선을 주었는데 요대와 허리 사이로 작게 접힌 종이를 발견했다. 그것을 펼쳐 보니 하오문의 전갈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내용을 확인한 노지신은 그 작은 종이를 접어 품에 넣고 천무방 무인들의 뒤를 다시 쫓았다.
천무경 등은 게시대에 모여 서 있었다. 비무제의 대진이 공개된 것을 보고 있는데 때마침 노지신이 도착했을 때, 천혼당 조장 장학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진 배치가 왜 이래? 이거 좀 노골적인데?”
4개의 비무대를 사용하고 이곳들에서 오전과 오후에 각 한 번씩 비무가 치러질 예정이었다. 장학이 투덜거린 이유는 비무제 기간 동안 많은 사람에게 화자가 된 무인들이 많았는데 특히 가장 이름이 많이 오르내린 6명 중 4명이 오전에, 2명이 오후에 배치되었다. 그 중 천서은은 가장 약체로 평가받은 장호영(張湖英)을 상대로 오전에 배치되었고, 양자성과 진도건의 대진이 오후에 배치되었다. 또 비무제에서 가장 유력주자로 손꼽히는 황사열의 대진도 오후였다. 즉, 금주의 비무제의 마지막을 장식함으로써 주목을 이끌어 보겠다는 의미였다.
“전 쉬워서 좋네요.”
“오후에 선보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차피 네 사람이 동시에 치르는 비무이기 때문에 주목도가 떨어져요. 한 개 대진씩 치러지는 다음 주 비무제가 있잖아요.”
장학의 불만에도 천서은은 여유롭게 보았다.
어제 진도건과 입맞춤한 사건이 있은 뒤로 비무제에 대한 욕심이 조금은 수그러든 탓이었다.
남궁평이 오전 대진 가운데 한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친구 실력이 괜찮습니다. 비무제가 끝나면 방의 가입을 추진해 볼 만합니다.”
천무경이 그 이름을 읽어 내려갔다.
“소문적(蘇雯赤).”
“권각의 투로(鬪路)가 천재적인 데다가 내공이 대단합니다. 실전 경험도 아주 많아 보여서 큰 전력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자네가 그렇다니 기대가 되는군.”
천무경은 고개를 돌려 천서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담갖지 말고 실력을 보여 줘라.”
“걱정 말아요.”
이번엔 진도건을 보았다.
“진도건.”
“예.”
“널 보여 주거라.”
그 말 한마디를 전하며 진도건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만 남기고는 손짓을 하여 관중석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이동했다. 남궁평은 판관 업무를 위해 경기장으로 직접 들어갈 참이었다.
“우리도 가지.”
그가 앞서가자 천서은이 진도건과 눈을 마주치며 싱긋 웃었다. 두 사람은 곧장 남궁평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관중석과 성벽 위에서 관전하는 사람들도 점점 빈 자리가 없게 되었다. 천무방은 미리 정해진 자리에 앉았고 곳곳에 유력한 문파의 사람들도 보였다.
사패련의 다른 주축들도 보였는데 그들은 다섯 명 전후의 인물들만 관전하고 있었다. 오후에 있을 양자성과 황사열의 비무 전까진 볼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것인지도 몰랐다.
천무방은 언제나 천하에서 실력과 재능을 겸비한 자들을 모집했기 때문에 노지신과 이혁성은 꾸준히 5일간 이 비무를 모두 관전하고 있었다. 일찍 탈락했으나 일부 재능을 보인 자들은 노지신과 이혁성이 직접 제안함으로써 11명의 인혼당 가입을 끌어냈다. 그리고 지금은 앞서 남궁평이 직접 지목했던 소문적을 포함하여 추가로 영입할 만한 자들이 있는지 확인할 예정이었고, 그들은 천혼당이나 지혼당으로 편입될 것이었다.
모두 자리에 앉고 있을 때, 노지신은 천무경 옆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 품에서 하오문으로부터 받은 쪽지를 건네며 작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장소가 특정되었답니다.”
천무경이 쪽지를 펼쳐 안의 내용을 확인하였다.
그 내용인즉슨, 홍천환의 위치가 종남산으로 좁혀졌으나 정보가 새어나가면서 노리는 자들이 많아져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천무경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내용이 하나 더 있었는데 사교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내용이었다.
새외 세력들은 각각의 규모로 보면 크게 두려울 것은 없으나 일부 교조적인 집단들은 그 성질이 잔악하고 사술에 가까운 무공을 구사하여 까다로운 부분이 있었다. 그들은 이합집산(離合集散)의 형국으로 무시할만한 수준으로 여겼었다. 그런데 종종 힘의 논리로 일부 집단이 힘을 합쳐 중원무림을 침공했던 역사가 과거에도 있었으니 그때는 분명 큰 위협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오랫동안 나타나고 있었음을 알고 있기에 천무경의 신경을 긁는 것이다.
“노 장로님.”
“예, 방주님.”
“천혼당에서 몇 명 차출하여 내일 아침 일찍 종남산으로 조용히 출발하세요.”
“알겠습니다.”
“이 당주.”
“예, 방주님.”
“인혼당 인급 한 명을 시켜 백 장로에게 전하도록 하게. 잔류한 천혼당과 지혼당의 지휘 전권을 줄 테니 혹시 모를 적들의 준동에 대비하라고.”
“알겠습니다.”
이혁성이 잠시 일을 처리하기 위하여 자리를 떠났다.
천무경은 다시 비무대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곧 시작하려나 보군.”
마침내 네 곳의 비무대에 출전한 무인들이 모두 올라섰다. 그리고 판관들이 시작을 외치면서 네 개의 비무가 동시에 시작되었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이따금 터져 나왔지만, 천무경을 비롯한 천무방 무인들은 비교적 침착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천서은은 시종일관 압도하며 금방이라도 끝날 것처럼 보였고, 다른 두 개의 비무도 한쪽이 비교우위를 보여 주며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과연.”
천무경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남궁평이 직접 판관으로 있던 비무대에선 소문적과 왕쌍(王雙)이 비무를 치르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양자성은 일부러 저런 대진을 주었을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왕쌍은 두 자루의 단극(短戟)을 다루는데, 무투에 가까운 근접 기술에 더해 기형의 병기를 이용한 기술은 오히려 맨손 박투의 소문적에겐 상성이 좋지 않았다. 소문적은 오로지 각반(脚絆)과 호완(護腕)만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기의 수단이 한정적이었다. 이에 반해 왕쌍은 자단목으로 가공된 쌍극이어도 내력이 실리기 때문에 목병기(木兵器) 이상의 예리함을 갖고 있어서 맨손으로 제어하기 어려웠다. 할 수 있어도 8강 이전까지는 초식의 우열을 가리기 위한 비무제의 취지상 개인별로 제약을 주기도 했다.
잠시 지켜보던 나지룡이 입을 열었다.
“왕쌍의 솜씨도 제법이군요. 소문적도 까다로워하는 것 같습니다.”
비슷한 거리를 공유하다 보니 아무래도 쌍극을 다루는 왕쌍이 몰아붙이는 형국이었다. 거기에 관무영은 다른 생각을 하는 듯했다.
“그래도 쌍극이 닿지 않는 걸 보니 소문적에게 여유가 있어 보인다.”
“쌍극의 거리 안에서 계속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있어.“
그 말에 동의하는 장학.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문적이 쌍극의 한쪽 경로를 예측하여 막아 내면서 그 틈으로 가슴에 일권을 꽂아 넣었다. 이후의 형국은 소문적에게 점점 유리하게 흘러갔다. 아슬아슬하게 쌍극을 피하다가도 도중에 적의 투로를 차단하고 그 지점을 파고들어 반격했다. 몇몇 반격은 왕쌍도 피해 내곤 했지만, 두 번 세 번 타격 횟수가 쌓이니까 점점 체력이 소진되는 것이 보였다. 왕쌍의 공세가 거칠게 펼쳐졌으나 틈이 점점 보이게 되었고 결국 소문적이 빠르게 몸을 뒤집으며 펼쳐 낸 번신각(翻身脚)이 왕쌍의 안면에 꽂히면서 비무는 끝나게 되었다.
“괜찮군.”
지켜보던 천무경도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적은 초근접전에도 강점이 있었는데 남궁평의 말처럼 내공이 깊다면 훨씬 창의적인 투로가 나올 수 있었다. 그것의 대표성을 띠는 예가 바로 천무경과 일장로 백두기였다.
“일단 계속 지켜보지.”
천서은은 이미 비무를 마치고 진도건과 같이 서서 다른 비무 중인 무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천무경은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확실히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진 것으로 보였다.
‘생각해 보니 괘씸하군. 비무제라고 자유롭게 풀어놨더니 도대체 어디서 눈을 맞춘 것인지.’
속으로 투덜거리던 천무경은 문득 머릿속에 장난스러운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그렇게 꼭 붙어 있으면 티 난다.]
천무경의 전음술이 천서은의 귀에 닿았다. 진도건과 팔이 맞닿을 정도로 붙어 있었던 천서은은 스윽 옆으로 한 발 떨어졌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관중석에 있는 천무경을 노려보았다.
“흥! 가요, 우리.”
천서은이 앞장서서 걸어가자 진도건이 그 뒤를 쫓아갔다. 그 모습을 남궁평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관중석에 있는 천무경의 얼굴을 보았는데 그도 미소 띤 얼굴로 두 사람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 예전에 했던 예상이 맞아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천준, 이 사람아. 저 진도건이 파천신공의 날개를 달아 날아오르려 하고 있다네. 재미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