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24화 (24/432)

24화 - 제5장. 검객 (3)

목정이 비무대에서 내려가자 천서은은 다시 이현탁을 보았다.

“오전 비무는 끝인가요?”

“그래, 오후에 한 번 그리고 내일 오후에만 한 번 더 치르면 주말 쉬고 다음 주부터 8강 비무전이다.”

“알겠습니다.”

네 개의 비무대 중에 가장 먼저 내려온 천서은은 곧장 진도건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팔을 잡고 말했다.

“가요.”

천서은이 손을 잡아끄는 데로 진도건은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이렇게 재촉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무슨 일일까?’

궁금해하면서도 요 며칠 느껴졌던 약간의 거리감에 알게 모르게 불편했던 터라 복잡한 예감으로 그녀의 발걸음을 쫓았다.

경기장을 나서자 인급 무사 한 명이 말 두 필을 준비해 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타라는 말과 함께 바로 말 안장에 오르는 그녀의 모습에 진도건도 뒤따라 말을 탔다. 말을 달려 도시의 동문(東門)을 빠져나갔다. 가까운 곳에 수풀림에 얼마간 들어가 주변 시야가 가려져서야 천서은은 비로소 말에서 내렸고 진도건도 뒤를 따라 내리며 말 고삐들을 잡아 한쪽 나뭇가지에 걸어 두었다.

“이리 와 봐요.”

말 고삐를 손에 놓자마자 천서은이 불렀다. 그가 다가가자 그녀는 장심을 보이게 하며 손을 내밀었다.

“손 줘요.”

“이렇게 말인가요?”

진도건은 손을 직접 대진 않고 똑같이 장심을 보이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천서은이 직접 손을 가져다 대었다.

이윽고 진도건은 장심을 통해 그녀의 내력을 느꼈다. 공격은 아니었고 탐색의 느낌이었기에 그녀가 어떻게 하든지 간에 모든 길을 열어 두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내력을 흘려보내던 천서은은 잠시 뒤 손을 떼고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알고 있죠? 아버지께서 파천신공을 전수하신 것을.”

“그게 무슨……. 아아!”

예상하지 못한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진도건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지만, 그는 이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날 천무방 천혼당의 자신의 방에서 운기조식하고 있을 때, 누군가 침입하여 그의 몸에 손을 대면서 기절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이후로 체내를 관조할 수 있는 감각들이 깨어나면서 확실히 축기의 양과 운기함에 있어서 그 질이 크게 개선되었다. 그것은 천무경이 태을신공의 구결과 운기법을 고쳐 준 것 이상의 효과였다.

“정확하게 뭐라고 얘기하긴 어렵지만……,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것이 어느 정도는 맞는 것 같습니다.”

천서은은 그의 상황을 천무경으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물어본 것은 그의 태도를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

천서은은 진도건의 두 손을 잡았다. 그녀의 행동에 그가 당황해할 때.

“제 눈을 보세요.”

눈을 마주치는 진도건의 눈빛이 가볍게 떨렸다.

당황스럽다.

알 수 없는 마음에 심장의 박동은 더 빠르고 세차게 울려 퍼지고,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복잡하게 얽혀 까맣게 물들었다.

천서은의 마음은 어떠한가?

불태웠던 열정이 믿음에 배반당한 것이 아니냐는 두려움이 앞서 있었다.

천무경의 목소리가 그녀를 설득했었지만, 믿음이 흔들린 것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런 생각과 다르게 마음은 왜 이렇게 무거운가?

노력의 증명과 명예의 전승은 그녀가 이뤄 내야 할 목표인 것은 지금도 분명하지만, 오로지 거기에 매달렸던 인생의 가치관이 지금 한 사내에 의해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다.

노력과 그것을 대하는 자세, 방법과 방향에 관한 생각들 모두 중요한 가치지만, 인생에 있어서 그것이 전부였냐 한다면 그것은 아니었다.

눈앞의 사내는 평범한 호위무사로서 옆에 있었지만, 지난 3년 이상 함께 한 시간은 그녀의 삶에 또 다른 중요한 가치를 만들어 주었다.

어릴 때 잃은 어머니의 모습은 기억에서 흐리게 남아 있고, 아버지는 슬픔에 젖어 딸의 주변을 돌기만 했다. 오로지 무공을 수련할 때만이 함께 할 수 있었으나 그조차 셈을 해 보면 10대 때를 통틀어서도 한 손에 꼽지 않을까 싶다.

주변에 사람은 넘쳐났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외로웠다. 그렇기에 그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하여 이 비무제에서 이름을 알리는 것은 어느 순간 숙명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화산에서 이 호위무사에게 목숨을 구함 받은 일로 그는 그녀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어쩌면 가족 다음으로 중요할지도 몰랐다.

이 사람은 내게 어떤 사람인가?

그저 공녀를 지키는 호위무사인가?

검술 대련을 해 주는 사람?

아니면…… 좀 더 의지해도 되는 사람은 아닐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녀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마음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몇 초나 흘렀을까. 순간 귀에 들린 목소리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은 천서은의 눈이 동그랗게 떠질 때.

동시에 그녀의 떨리는 침묵을 정면으로 바라보던 진도건의 마음 깊숙이 잠재되었던 불씨로부터 불길이 일어났다.

진도건은 맞잡은 손을 뒤로 당겼다. 잠깐 멍하니 있던 천서은이 그대로 한걸음 딸려 오며 지척으로 가까워졌다. 그리고 맞잡았던 손을 놓아 천서은의 어깨를 붙든다. 흑요석처럼 맑은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 눈동자에 더욱 가까이 얼굴을 비추었다. 지저귀는 새소리와 스삭거리는 수풀 소리마저 서로의 호흡 소리로 고막을 뒤덮는다.

잠깐의 1초.

어느새 천서은은 그가 자신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진도건은 꽃을 발견한 꿀벌처럼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상념을 모두 지워 버렸다. 적매화(赤梅花)의 꽃잎 같은 입술이 그 머릿속 빈자리를 가득 채워 버렸다.

그것을 다시 깨달았을 때 어느새 그녀의 촉촉한 입술과 그의 입술이 서로 포개져 있었다.

짧은 몇 초의 순간,

“하아!”

두 사람의 입술이 마침내 떨어지며 마치 몇 분 막혀 있던 것처럼 날숨이 거칠게 토해진다.

여전히 떨리는 천서은의 눈동자에 가만히 눈을 마주치는 진도건.

맞잡았던 손을 잃고 진도건의 옆구리에서 뻣뻣하게 뻗은 채 놀고 있던 천서은의 손이 두 사람 사이로 파고들어 그대로 진도건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대로 끌어당겨 이번에는 천서은의 입술이 진도건의 입술을 덮친다.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던 진도건의 손도 그녀의 가는 허리를 감싸서 꼬옥 끌어안았다.

서로의 체온과 심장의 두근거림이 어느 때보다 한없이 가깝게 맞닿은 서로의 피부를 통하여 고스란히 전달된다. 새들이 서로의 부리를 물었다 떼며 장난치는 듯 입술을 탐하는 그 주변으로 가늘게 떨리듯 이어지는 호흡이 따뜻하게 맴돌았다.

입을 맞추며 감정을 전달하는 느낌의 황홀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서로의 마음을 관통하는 감정의 달콤함이란 그 어떤 욕구로도 채울 수 없는 것이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

누가 먼저 떼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천서은은 진도건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진도건은 그런 그녀의 들썩거리는 등을 천천히 쓸어 내려준다.

가만히 그의 손길을 느끼던 천서은이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며 고개를 들었다. 처음의 불편했던 느낌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그녀의 입가는 기분 좋은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진도건이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서로의 생각이 침묵으로 교차할 때 천서은이 먼저 진도건의 입술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다가 손바닥으로 그의 눈을 가리며 가볍게 톡 쳤다.

“으.”

“진 위사님.”

“예, 아가씨.”

“예의 좀 지켜주실래요? 다음에도 또 이러면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무슨 말을 해도 이 좋은 기분이 휘발되지 않았다. 정면으로 눈빛을 마주 보는데 서로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천서은의 얼굴에 미소가 더 짙어진다. 무의식적이었는지 갑자기 몸을 돌렸다.

“앉아 보세요. 파천신공의 운기법을 알려 줄게요.”

“아! 예.”

진도건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 손을 모았다. 천천히 호흡하는 그의 뒤에 따라 앉은 천서은이 그의 등에 두 장심을 가져다 대었다.

그녀는 진도건이 파천신공을 태을신공의 바뀐 구결을 빌려 어설프게 운영하느니 아예 제대로 전수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녀를 포함한 천무방의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진도건의 내공이 강력해질수록 그의 진가가 더욱 높아질 거라는 것을.

천무경이 물꼬를 터놓았으니 그녀는 아예 물길을 만들어 놓을 심산이었다.

스승과 식사를 마치고 다음 비무가 열리길 기다리던 여희선은 멀리서 천서은과 진도건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 거리가 점차 가까워지는데 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음을 느꼈다.

“어머! 너희 뭐니?”

“뭐가요?”

입꼬리가 씨익 올라가며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녀에게 천서은은 모른 척 대답했다.

“뭔가 있는데? 냄새가 나. 냄새가.”

여희선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일전에 전연 장문인과 식사 후에 이어졌던 어색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처음 만났을 때로 다시 돌아간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 가까워……. 응?’

무언가를 발견한 여희선이 씩 웃었다. 여희선은 진도건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불편했던 진도건이 고개를 뒤로 뺄 때 여희선이 손을 빠르게 움직여 그의 입술을 문질렀다.

“무슨 짓이오?”

진도건이 불편해하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나 여희선은 이미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 그녀가 천서은의 어깨를 팔로 감싸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신의 엄지를 보였다.

“이거 봐봐, 동생.”

천서은의 귀가 빨개졌다. 여희선의 엄지엔 그녀의 입술에 발랐던 홍화연지(紅花臙脂)가 묻어 있었다. 그녀와 진도건이 무얼 했는지 들켜 버렸단 기분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곤 엄지를 내밀고 있는 여희선의 손을 잡아 내렸다.

“진 위사의 입술이 갈라져서 발라 줬을 뿐이에요.”

“아아, 오해다?”

“그래요.”

천서은은 대답을 하면서도 힐끔 눈치를 보았다. 그때 여희선은 진도건을 힐끔 돌아보고 있었다. 천서은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뒤를 보았는데 진도건은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천서은은 그 모습을 보고 조용히 풉 하고 웃었다.

여희선은 천서은과 거리를 두며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그래~, 이렇게 혼자 동떨어져서 따돌려지는 것 같은 기분 참 오랜만에 느끼네.”

천서은이 다시 여희선에게 바짝 다가가며 팔짱을 꼈다.

“에이, 그게 무슨 얘기에요. 전 친구도 없어서 언니밖에 없는 데에…….”

“쓸쓸하다, 쓸쓸해.”

“호호호!”

세 사람은 대기석에서 호명을 기다렸다. 장내가 정리되기 시작하면서 판관 네 사람이 중앙 비무대를 비우고 동서남북 비무대에 올라섰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표지목에 적힌 이름들을 확인하고 호명하기 시작했다.

진도건과 여희선의 이름이 호명되고 황사열의 이름도 들려왔다. 세 사람 모두 다른 비무대로 대진이 짜였다. 점점 실력 있는 자들만이 대진표에 남아 있으니까 비무들이 보다 긴장감이 생기면서 관중 수도 늘어나고 환호성도 따라 커졌다. 때때로 들려오는 박수 소리와 함성에 대기하던 무인들은 잠깐씩 시선이 돌아가기도 했다. 마침내 비무가 시작하고 긴장감이 돌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함성이나 장탄식이 파도치듯 출렁거리며 터져 나왔다.

그 소리를 노래 삼아 진도건의 비무를 지켜보던 천서은은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양자성이 예의 그 미소 띤 얼굴을 한 채 걸어오고 있었다.

가볍게 목례로 인사를 주고받은 다음 양자성이 먼저 말을 걸었다.

“오늘도 역시 아름답습니다. 식사는 맛있게 했나요?”

“네, 간단하게 해결했어요.”

“오늘 비무의 감은 어떻습니까?”

“뭐 평범해요.”

“피로가 여자의 피부에 안 좋다던데. 제가 확인해 보니 낭자는 그나마 가장 쉬운 상대로 파악하는 서기호(西旗號)인 것 같습니다.”

양자성이 한 손을 활짝 펼쳐 보였다.

“다섯 합이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그렇게 예측해 보지요.”

“상대를 얕보다가 큰코다치는 꼴을 너무 많이 봐서요. 응원한다는 말로 이해할게요.”

양자성은 펼친 손을 거둬들였다. 친절하게 대답하는 듯하지만, 그 어투 같은 것은 공적인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것만 같은 거리감이 있었다. 그의 잘생긴 용모를 마주한 여자들은 대개 부끄럽거나 수줍어하는 모습들을 숱하게 보았음을 떠올려 보면 오히려 익숙지 않은 느낌이었다.

“내일은 비무가 한 번밖에 없고 주말에 시간도 많을 텐데, 우리 둘이 식사 아니면 산책이나 하면서 얘기 좀 할까요?”

“따로 만나는 것은 내키지 않네요.”

양자성의 물음에 잠깐 그의 얼굴을 보며 대답한 천서은은 다시 시선을 진도건이 있는 비무대 쪽으로 돌렸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서 양자성의 눈동자도 힐끔 돌아보았다.

“호위무사의 비무에 관심이 참 많으시군요.”

“같은 문파의 무인인데 당연하죠.”

“낭자 정도면 호위는 필요 없을 것 같은데. 필요하다면 더 강한 고수가 곁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천서은이 다시 양자성을 쳐다보았다.

남자치고는 제법 고운 얼굴선에 짙은 눈썹과 분명한 이목구비가 매력적인 잘생긴 용모였다. 며칠 전에 처음 봤을 때, 살짝 떨렸던 것이 지금 시점에선 괜히 민망한 기억이 되었다. 이젠 그의 관심거리가 되려 불편하게 되었으니까.

“내일 진 위사와 비무를 치르시죠?”

“그렇소.”

비무의 대진은 당일 공개가 원칙이었다. 그러나 양자성이 지난 사패련 수장들의 연회에 나타나 말한 내용이 천무경을 통하여 그녀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질문이 나온 것이었다.

양자성도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그만한 힘과 영향력이 그와 검림에게 있었고, 이런 사실이 알려진다 한들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알려진 자만 남모르게 처벌을 받을 일이었다.

“양 공자는 강정학 총수께서 사사하셨으니 당연히 검술이 경지에 오르셨을 터. 진 위사의 실력이 호위무사로서 쓸만한지 한 번 시험해 보시죠.”

“하하하! 낭자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내 한 번 해 보리다. 하지만 아무리 목검이라도 힘 조절이 쉽지 않은데 괜찮겠소?”

“도산검림(刀山劍林)의 무림에서 절 지켜주어야 하는 위치인데 아무리 목검 비무임을 고려해도 진 위사가 충분히 이해할 거로 생각해요.”

“낭자도 꽤 냉정하군요.”

“후후! 글쎄요.”

천서은이 그에게서 시선을 다시 거두었다. 때마침 진도건이 일찍 비무를 마치고 다가오고 있었다. 꽤 합을 주고받긴 했지만, 땀 한 방울이나 먼지 한 톨 더럽혀진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천서은이 일어나 마중 나갔다.

“고생했어요. 진 위사.”

“예.”

진도건이 대답하면서 그녀의 어깨너머로 양자성을 힐끔 보았다.

마침 진도건의 비무가 끝난 서쪽 비무대로부터 양자성의 이름이 호명되자 그가 두 사람 옆으로 웃으며 다가왔다. 그리고 천서은에게 목례로써 인사하며 입을 열었다.

“내일 제가 만약 실수한다면 이 양자성이 낭자의 호위무사가 되어드리겠소. 그럼.

그렇게 말을 남기며 양자성은 비무대를 향해 걸어갔다. 가만히 그의 뒷모습을 보던 천서은은 진도건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리 와 앉아요.”

“예.”

진도건이 자리에 앉자 천서은도 그의 옆에 앉았다.

“궁금하지 않아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어제라면 궁금했겠지만, 지금은 관심이 사라졌습니다.”

천서은은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 앞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입가엔 실실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말의 내용으로부터 지금 그의 마음가짐이 어떤지 충분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잠시 기다리자 여희선이 비무를 승리로 장식하고 내려왔다. 진도건과는 달리 그녀는 제법 치열하게 겨뤄 고생한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다.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에 가슴을 살짝 가리고 있던 앞섬을 살짝 들추자 여기저기서 낮게 탄식이 들려왔다. 여희선은 그런 관중의 관심들을 즐기면서 진도건과 천서은에게로 다가왔다.

“후후! 고생했어요, 언니.”

“난 아무래도 다음에 떨어질 모양이야.”

“왜요? 8강에 오르셔야죠.”

“우린 음공이 주력인데 봉술로만 겨루려니 오히려 벌써 한계에 부딪히네.”

“힘내셔요. 8강에 오르면 난약파의 명성도 오를 텐데.”

그때 천서은을 호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희선이 웃으며 그녀를 응원하였다.

“너도 힘내. 가볍게 물리치고 와.”

“예, 다녀올게요.”

천서은은 진도건에게도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비무대로 향했다. 잠깐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여희선이 씩 웃음을 짓더니 진도건에게로 바짝 당겨 앉았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접근에 진도건이 당황해하며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것마저 쫓아서 몸을 기울여 바짝 붙인 여희선이 차갑게 얘기한다.

“둘이 무슨 일 있었어? 설마 합구(合口)했니?”

“크흠! 흠! 마,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당황해하는 진도건을 빤히 바라보던 여희선이 그로부터 한 뼘 떨어져서 바로 앉으며 장난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했네,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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