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22화 (22/432)

22화 - 제5장. 검객 (1)

“흠! ……흠, 흠!”

단맹전에서 나오면서 한 손에 고급 삼주(蔘酒)가 담긴 술병 한 병을 챙길 수 있었던 천무경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천무방을 위해 마련된 숙소로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은 제법 가벼웠다.

무공의 경지가 극의에 달하면 여러 가지에 초연해지는 면이 있어서 흥미를 자극할 만한 일을 찾기가 참 어려웠다. 그래서 가족에 신경을 쓰거나 자제 또는 제자를 육성하며 그 성장의 기쁨으로 대리만족하기도 한다. 이것을 악취미로 대체하게 되면 온갖 잔혹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도 있고 또는 여기저기 도발하고 다니며 일부러 싸움을 일으키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천무경은 전자에 의미를 두고 있었다. 딸의 실력이 성장하는 것과 관심을 두고 있는 진도건의 검술을 지켜보는 것은 나름 그의 무료한 일상에 활력을 주는 일이었다.

숙소에 도착하고 그의 방에 이르렀을 때쯤 문 앞에서 그의 발걸음이 잠깐 멈춰졌다.

안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경계심을 갖진 않았다. 그 기척은 딸의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왜 그의 방을 찾았는지 생각을 해보다가도 별일 아니지 않으냐는 생각에 천천히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서은아.”

“아버님.”

한쪽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던 천서은이 그를 맞았다.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제 아버지를 맞이하는 겉모습은 평범했지만, 어째서인지 느껴지는 차분한 분위기가 묘하게 신경이 쓰이게 했다.

“회포는 잘 푸셨나요?”

“그래. 뭐 서로 돈독한 사이라고 볼 수도 없지만, 그래도 사패련 아래 묶인 관계이니 적당히 상대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셨군요.”

“넌 어쩐 일이냐? 잠이 오지 않는 게냐?”

“음…… 그런가 봅니다.”

천무경은 천서은의 말에서 묘하게 뜸을 들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 부녀의 관계는 전혀 경직되지 않고 서로에게 솔직한 편이라 할 수 있었다. 딸은 부인을 잃어 큰 상심에 젖은 아버지의 아픔을 공감했고, 아버지는 딸의 어린 시절을 술로 놓쳐버린 탓에 이미 한 번 경직됐던 관계를 오랫동안 풀고자 소통하려 노력해왔다.

그는 대화를 좀 더 편하게 풀어낼 필요가 있다고 느껴졌다.

“비무는 잘 치렀느냐? 아직 상대할 만한 놈들이 없지?”

“예, 첫날이라 그런지 순조롭네요.”

“하하하! 역시 내 그럴 줄 알았다! 이 아비가 잠깐 보기에도 우리 딸내미 따라올 만한 놈들 별로 없더구나.”

“보셨어요?”

“오후에 사패련에서 논의할 사항이 있다 하여 오전에 미리 보고 왔지. 이 아비가 네 비무제를 신경도 안 쓸까 봐?”

“에이, 그건 저도 알죠. 그래도 아버지 눈에는 시시한 어린애들 장난일 테니까 본선 때나 보시려나 싶긴 했어요. 그런데 관중석에는 안보이던데요?”

“단맹전 지붕이 끝내주게 잘 보인단다.”

“그 멀리서……. 뭐 가능은 하시겠지만, 정말 보신 것 맞아요?”

“그럼! 너 친구 사귀었지? 어떤 여자애랑 어울리던 걸 봤는데.”

“호호! 정말 보시긴 했나 보네요.”

“봤지, 그럼!”

“나중에 인사 한번 시켜드릴게요. 난약파의 여희선이라고 하는데 의외로 잘 맞는 언니예요.”

“난약파라. 봉술과 기공이 괜찮고, 음공 조예가 대단한 문파지. 전연 장문인이 생각나는데 정정하시려나 모르겠구나.”

“아직 정정하세요. 사패련 앞 객잔에 머물고 계셔요.”

“그래, 같이 인사하면 좋겠구나. 오랜만에 뵙겠군. 이 아버지가 어릴 때 그 장문인의 음공에 혼쭐난 기억이 있단다.”

“하핫! 정말 그러셨어요?”

“그럼! 현재 이 아비가 최강이라고 어릴 때도 그랬겠느냐?”

“호호호……!”

천서은의 밝았던 웃음소리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다소 무겁게 가라앉아 보였고 힘 있는 눈매가 조금 처져 있었다.

“아버지.”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게냐?”

“제가 아버지의 자부심을 이을 수 있을까요?”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

“제가 아버지의 길을 뒤따를 수 있을지, 아버지께서 얼마나 믿고 계실지 모르겠어요.”

“이런. 제 자식을 믿지 않는 부모도 있느냐? 이 아비를 그 정도로 봤다면 이거 내가 실망인데?”

천서은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천무경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반문하면서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기분이 풀렸거나 하는 기색이 아직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이룬 경지는 저에게 분명한 목표예요. 그리고 그렇게 천무방의 이름을 계속 빛내고 싶어요.”

“기특하구나.”

천서은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녀의 표정에서 부담감이 읽힌다.

“하지만, 저도 알고 다른 사람도 모두 알고 있죠. 오늘날 도달하신 아버지의 경지는 손에 닿지 않는 저 하늘의 태양이나 달과 같다는 것을.”

천무경은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토닥토닥 어루만졌다.

보통 슬하에 아들이 있다면 그가 짊어졌어야 할 부담을 그녀가 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미라도 어릴 때부터 줄곧 함께 해왔다면 오히려 무공이 아니라 다른 것에 관심을 두면서 곱게 자랐을지도 몰랐다. 되려 너무 일찍 철이 들어 버린 바람에 가문과 방파의 미래를 걱정하게 되고 그녀에게 가해지는 기대를 과대해석 해 버렸다.

어쩌면 이런 고민을 토로하는 것도 없이 지금까지 흔들림 없이 성장해 온 그녀의 정신력이 대단하다고 칭찬할 수 있을 터. 그런데도 그녀가 이런 고민을 토로하는 데는 다른 원인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네가 그동안 부담이 참 컸겠구나. 하지만 딸아, 그러지 않아도 된단다. 이 아비는 네가 의무나 책임에서 자유롭게 자랐으면 싶다.”

“아버지. 전 부담, 의무, 책임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제겐 이미 익숙한걸요. 하지만, 아버지의 기대가 제게 있지 않다면……, 전 어떤 길을 가야 할까요?”

“그게 무슨 말이냐?”

천무경이 다소 놀란 기색을 드러내며 물었다. 그녀의 고민이 그저 단순한 부담감으로 고통스러움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진 위사를 제자로 들이실 것인가요?”

사뭇 진지해지고 또 다소 심각해진 표정으로 묻는 천서은에게 천무경이 다시 한번 놀랐다.

“허허! 그건 또 무슨 말이냐?”

“……난약파 장문인을 뵈었던 자리였어요. 장문인께선 아버님과 겨뤄본 적이 있다 하셨는데 진 위사에게서 파천신공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 얘기에 전…… 잘 모르겠습니다. 제게 믿음을 주시기에 부족한지.”

“하아. 아비가 널 어찌 믿지 않겠느냐?”

천무경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푹 숙였다. 어째서 천서은이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녀는 스스로 천무방의 공녀의 의무와 책임을 기꺼이 짊어졌다. 무공에 대해 욕심을 부렸고 걸맞은 재능도 있었다. 그가 생각했을 때, 천서은이 가진 재능과 보여주는 열정은 그녀를 기꺼이 여류 최고수 혹은 그 이상으로 평가받을 경지로 올려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천서은이 얘기한 믿음.

그것은 천서은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천무경이 그녀에게 거는 믿음은 천무방과 제 아비의 위상을 떠맡아야 하는 책임이 아니라 아버지가 딸에게 전하는 매우 순수하고 무한히 보내는 신뢰였다. 그런데도 그녀가 처한 복합적인 환경은 아비가 보내는 믿음을 그녀에게 지우는 책임처럼 잘못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가 이렇게 왜곡되어 버린다면 그야말로 이보다 슬픈 일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훗!”

천무경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웃음소리인가 싶어 천서은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를 보았다.

고개를 천천히 든 천무경의 입가에 미소가 살며시 그려졌다.

“서은아, 양자성을 아느냐?”

“예? 검림 총수님의 제자이지 않습니까?”

“마주쳤었느냐?”

“……예.”

“그럼 내 진지하게 물어보마.”

“……말씀하세요.”

“양자성이 오늘 저녁 내게 와서 네 마음을 얻고 싶다 하더구나.”

“그게 무슨?”

반문하는 천서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 말뜻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했다. 일련의 기억들이 잠시 뇌리를 스쳐 지나가면서 억지로 끄집어낸다.

“잘 생겼고 적극적이고 남자답게 야심도 넘치고 말이야. 넌 어떠냐? 혹시 만나볼 생각은 있느냐?”

“아버님,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원래 얘기하던 흐름이 아니잖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격앙되었다. 이런 식으로 말을 돌리는 것이 무시당하는 기분을 들게 했다. 정말 자신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주던 믿음이 이제는 유효하지 않은 것인가 의문을 들게 했다. 그러나 그 심각한 걱정거리는 다음 이어진 천무경의 물음에 의해 꺾여 버렸다.

“그럼 진도건이는 마음에 드느냐?”

“……네, 네?”

웃음 짓고 있는 천무경의 얼굴을 본 천서은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양자성이를 얘기할 때와는 다르군.’

천서은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은 마음의 향배가 현재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아,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인지?”

“좋아하냔 말이다, 이 녀석아. 네가 한 달 동안 그놈과 대련하면서도 끝나면 찰싹 붙으면서 행복해하던 네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느니라.”

나무라는 듯한 말투였으나 이미 천무경의 얼굴엔 웃음기가 가득하다.

심각하게 고민을 털어놓았던 천서은도 본래의 취지는 잊어버린 채 부친의 심문에 당황한 나머지 얼굴부터 귀, 목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여기에 천무경이 쐐기를 박는다.

“이제 와 돌이켜 생각해 보니 한 달만 더 붙여 놨으면 입 맞추는 것도 봤겠다 싶더라. 하……, 이 아비가 벌써 그런 걸 봐야 하겠느냐?”

이번엔 천서은이 고개를 떨군다. 얼굴을 감추어도 빨개진 귀와 목은 가려지지 않는다.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천무경은 의기양양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디 제 아비를 혼내려 하다니. 후후후!’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나 방 안의 무거웠던 이전 분위기와는 확실히 달라졌다. 바뀐 향배의 방향이 정해지진 않았으나 확실히 가라앉았던 기분들은 위로 둥둥 떠 오르고 있었다.

천서은이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아직은 다소 숙이고 있어서 눈을 마주하지 않았지만, 많은 생각이 교차하는 듯했다. 마음을 들켜버린 것에 대한 부끄러움도 보이는 것 같았다.

“말해봐라. 네가 정말 녀석을 점 찍었는지. 아니면 간만 보는 게냐?”

“그, 그런 것 아니에요. 갑자기 그런 걸 물어보세요?”

“왜? 아비가 물어볼 수도 있지? 하나뿐인 내 딸 아무 놈팡이나 눈독 들이게 둘 순 없다, 이 녀석아.”

놀리는 듯 성을 내는 제 부친의 말에 천서은은 뾰로통해져 입술을 삐죽 내밀며 째려본다.

“파천신공은 왜 전수하신 지나 얘기해 보세요.”

“허! 이 녀석이 이 아비가 질문하는 거는 대답도 안 하고.”

“제가 먼저 물어봤거든요?”

“으이구! 녀석아. 둘이 알아서 할 일이지마는 너무 기 세게 굴면 남자 위축돼서 딴 여자 찾으러 떠나 버린다.”

“아버지!”

“푸하하하!”

빽 소리치는 천서은의 목소리에 천무경이 웃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곧 웃음을 멈추고는 조금 진지해진 표정으로 천서은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너의 미래를 속단하진 않으마. 이 아비도 네가 남편 될 놈으로 누굴 데려오든지 간에 널 존중하마. 그러나 조금은 진 위사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아비도 녀석을 아끼는 것을 너도 알 것이다. 참 특별한 재능을 가진 녀석이야. 나는 그 재능을 썩히고 싶지 않았다. 파천신공을 가르쳐 주었느냐고? 그저 녀석이 익힌 평범한 태을신공의 구결과 운기조식법만 손봐 줬을 뿐이다. 아, 자고 있을 때 닫힌 기경팔맥을 뚫어 주긴 했지. 내 진기에 녀석의 내력이 영향을 받았으니 전연 장문인이 그런 소리 한 것 같다. 제자로 거두는 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아비에게 더 중요한 것은 네가 녀석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것이 문제란다.”

“그, 그게 무슨 문제에요?”

“문제지 그럼! 사위냐, 제자냐? 상견례(相見禮)냐 구배지례(九拜之禮)냐? 하나만 하는 게 편하지 않겠느냐?”

“아, 아버지!”

이젠 노골적으로 놀리기 시작하자 천서은은 도저히 그 공격을 감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질문에 대답은 주지 않고 이렇듯 그녀의 마음을 갖고 놀리는데 심각했던 기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기고 말았다. 더는 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여전히 얼굴에 떠오른 홍조가 채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갈게요. 주무세요.”

작별하는 그녀의 팔을 잡는다. 그리고 종전의 가득했던 장난기를 줄이며 천무경이 따뜻한 목소리로 의견을 건넨다.

“딸아. 믿음과 책임. 그에 따르는 부담감. 이런 것에 연연할 필요 없이 너의 길을 가거라. 인생은 그렇게 결과를 단정 지어 놓고 살기엔 세상은 너무 넓다. 무공의 경지도 너의 열정적인 노력을 순수한 의지로 이어간다면 너도 모르는 사이에 거기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삶의 반쪽을 찾을 수만 있다면 삶에 그만한 가치가 없으며 그게 이 아비가 걸어왔던 길이다.”

진지하게 말을 이어가는 천무경의 눈앞에 딸아이의 모습 위로 잠시 사별한 아내의 모습이 겹쳐 지나갔다. 잠시 감상에 젖어버리지 않을까 내심 경계하면서 팔을 붙들었던 손을 풀었다.

물끄러미 부친의 얼굴을 바라보던 천서은은 다시금 정중히 인사를 건네고 방을 나섰다.

돌아선 그녀의 표정엔 어정쩡하게 해소된 의문과 더불어 복잡미묘하게 교차하는 감정들이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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