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21화 (21/432)

21화 - 4장. 사패소룡비무제 (5)

음식과 술이 오고 가며 경직됐던 분위기가 조금씩 누그러졌다. 아무리 도수가 높은 술을 마셔도 그들에게 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 분위기가 전도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금태하와 천무경이 연신 건배를 하며 웃음소리와 함께 술 마시는 모습으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 그러했다.

“그래서. 항가에선 비무제에 출전한 사람이 없단 말이오?”

“이놈들이야 돈으로 노는 놈들인데 각파의 젊은 용들과 어디 비교가 되겠습니까?”

“가주의 뛰어난 무공을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모르지 않은데 겸손이 지나치시구려.”

“하하하! 그것을 떠나서 내 아들 수(遂)아가 올해 서른하나이니 사실상 비무제에 출전할 수 있는 나이를 지났습니다.”

“녀석이 벌써 그렇게 되었소?”

“그렇습니다. 언제 한 번 제 아들에게 지도편달을 해 주시지요.”

“항수 녀석이 천무방주를 존경한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지. 오래 잠적했다가 비로소 세상에 나왔으니 이참에 우리 사패련의 동지에게 선심 좀 쓰시는 것이 어떻소?”

“언제 한 번 보내시오. 기꺼이 그렇게 하겠소이다.”

강정학이 항연의 부탁을 거들었다. 천무경도 서호항가가 사패련에 어떤 지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또한 항연은 천무경이 칩거에 가깝게 대외적인 활동을 금하였을 때부터 상실에 대한 위로와 교류에 대한 선물을 주기적으로 보내왔기 때문에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단맹전의 입구 계단에 앉아 쉬고 있던 황사열은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양자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여긴 무슨 일이지?”

“못 올 곳은 아니지 않나.”

양자성은 그를 지나쳐 들어가려고 했지만, 황사열은 도를 뻗으며 막아 세웠다.

“다시 묻지. 용건은?”

양자성은 피식 웃으며 황사열을 보았다. 그리고 한 손으론 패도의 칼등을 지그시 눌러 내렸다.

“벌써 이럴 필요 있나? 우리의 승부는 비무제 마지막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도망칠 생각은 아니었나 보군.”

“후후! 내가 뭐하러 도망치겠나? 난 그저 빨리 상대하고 싶은 놈이 있을 뿐이야.”

“흐음.”

황사열은 도를 거두어 길을 비켜 주었다. 양자성은 다시금 피식 웃음소리를 흘리곤 단맹전 안으로 들어갔다. 황사열은 그런 그의 뒤를 따라갔다.

단맹전 안 대회의실에선 여섯 명의 사파 거두들이 제법 분위기를 타며 잡다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들어오고 앞서 있던 양자성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그의 스승인 강정학이었다.

“셋째는 예까지 무슨 일로 왔느냐?”

“스승님. 이곳에 계신 대선배님들께도 양자성이 인사 올립니다.”

“황사열이 인사 올립니다.”

양자성이 정중히 예를 갖추어 인사를 건네자 황사열도 뒤따랐다.

양자성과 황사열이 각각 강정학과 금태하의 제자들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모두의 관심이 차례로 쏠렸다. 특히 금태하가 웃으며 맞이하면서도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희 둘이 같이 들어오는 건 꽤 묘한 느낌이구나. 클클! 비무대 앞에서 서로 으르렁거리던데?”

“하하! 그랬었죠. 다른 게 아니라 련주님과 천무방주님께 요청 하나 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오호! 그으래?”

금태하의 표정이 흥미롭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천무경도 인사만 받고 시선을 거두었다가 그의 얘기에 다시 시선을 던졌다.

“련주님께 먼저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것이 비무제 출전자들의 대진표를 제가 손을 좀 대고 싶습니다.”

“발칙한 놈! 너한테 유리한 대진을 짜 보겠다?”

“하하! 유리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비무제의 우승은 제 것이라고 보는데 말이죠.”

“크하하하하!”

금태하의 웃음소리가 대회의실을 흔들 정도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는 예의를 과하게 차리거나 가식적인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황사열이 가진 무한한 패기를 마음에 들어 했듯 양자성의 거만하기 짝이 없는 발언도 그의 마음에 쏙 들게 하는 것들이었다.

“사열아! 사열아! 너 괜찮으냐? 크크크!”

“흥!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아 버리면 그만입니다. 마음대로 하라고 하십시오.”

황사열의 말에 양자성이 어깨를 으쓱했다. 금태하가 연신 웃음을 흘리면서 젊은 두 무인의 패기를 두 팔 벌려 환영했다.

“크크크! 이거 어린 녀석들이 꽤나 기대하게 만드는구나. 좋다. 그럼 허락하기 전에 천무경에게 할 말이라는 게 뭔지나 들어 보자.”

양자성과 황사열의 시선이 천무경에게 닿았다. 의자에 앉아 있어 자연스럽게 다소 내려다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거인이 오히려 그들을 내려다보는 느낌을 받았다.

‘내 스승의 평생의 적수.’

‘엄청난 위압감이로군…….’

두 사람의 머릿속에 서로 다른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간다.

양자성은 다시 한번 천무경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처음 인사를 드리는데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방주님의 금지옥엽 천 공녀의 마음을 얻고 싶습니다.”

술자리의 좋은 분위기로 다소 여유로운 표정이었던 천무경의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올라왔다. 머릿속으로 잠깐 여러 생각이 스쳤지만, 굳이 이 자리에서 떠들 얘기들은 아니었기에 그는 양자성의 의중을 묻고자 마음먹었다.

“내 딸을 만나 보았나?”

“예. 무척 아름다워 첫눈에 마음을 뺏기고 말았습니다.”

“아비인 나도 내 딸의 취향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지만, 제 아비 못지않은 무골 기질이 있어서 말이야. 쉬이 마음 주지는 않을 걸세.”

“모두 제 노력이 달린 일 아니겠습니까?”

천무경이 강정학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당돌한 제자를 두셨습니다, 총수.”

“허허허…….”

강정학이 난감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제자의 재능을 누구보다 아끼는 그였지만, 그가 제자로부터 느낄 수 있는 유일한 흠결이라면 여색을 밝히는 점이었다. 본인은 나이를 먹을 대로 먹어 품위 유지 이상의 외모적인 편견은 초탈하였지만, 그런 노인네의 눈으로 보아도 셋째 제자의 용모는 무척이나 출중했다. 아마 천하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를 뽑는다면 충분히 거론될 만한 외모였다.

또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의 눈에도 천서은의 미모는 내로라하는 미녀들마저 한 수 접어줄 정도로 아름답다 평할 수 있었다. 아마 두 사람이 배필이 된다면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환상적인 한 쌍이라 노래를 부를 만도 했다.

문제는 양자성의 성격이다. 그는 여색을 밝히고, 그 이상으로 무공에 대한 욕심도 강했다. 그는 천서은을 얻으면 파천신공까지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할 것이다. 설령 그것을 익히기는 어려워도 분석하기에는 충분한 여건이 갖춰질 터. 만약 두 사람이 맺어지면 먼 미래에 그는 천무방과 검림을 발아래 두는 그림을 그릴지도 몰랐다. 그러나 맺어지지 않고 되려 천서은을 함부로 대하여 파국으로 치닫는다면 천무방과 검림은 전쟁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 제자지만, 말릴 수도 없구나. 욕심이 과하면 화를 입을 수도 있음인데. 뭐, 저놈의 운명이 그런 길이라면 막을 수도 없고.’

강정학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난 아무 말 않겠네. 내가 가르칠 때 빼고는 내 말도 안 듣는 녀석이라네. 허허!”

그의 말뜻을 이해한 천무경이 피식 웃고는 다시 양자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끝인가?”

“허락해 주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공녀께 무례하게 굴지 않을 것이니 염려 놓으십시오.”

“참고로 내 딸은 아마 자신보다 약한 녀석에겐 관심을 두지 않을 걸세.”

“간단하군요.

양자성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문제없다는 뜻이다.

“재밌는 놈이로군.”

그의 눈이 양자성과 황사열을 살폈다. 그들의 가진 진기의 양이나 그 힘, 성질이 한눈에 읽혔다. 두 사람 모두 또래에서 충분히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비교해 본다면 천서은이 조금 부족할 수도 있어 보였다. 하지만 무인들의 대결이란 것은 다룰 수 있는 진기의 양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천무경은 자신의 딸이 강호의 경험은 없으나 누구와 겨루어도 쉽게 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대신 특별한 재능을 가진 진도건과 함께 수련함으로써 그 특별한 경험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천무경이 손을 휘휘 저으며 고개를 돌렸다.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뜻이었다. 딸이 무시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딱히 기분 나쁘지 않았다. 본래 자만이 극에 달한 자들은 큰코다치기 마련이니.

대화를 끝내려는 천무경의 의지와 다르게 양자성은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었다.

“천무방에선 공녀와 그 진도건이라는 호위무사가 함께 비무제에 출전했더군요.”

“응?”

머릿속에 흐르던 생각의 끝에 떠오른 이름이 뜻밖에도 양자성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천무경도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진 위사와 비무를 했나?”

“아닙니다. 다만 원하는 시기에 그자와 비무를 하고 싶은데 다치게 할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아무래도 공녀가 아끼는 호위무사인듯하여…….”

“핫핫핫핫!”

이번에는 천무경에게서 웃음이 크게 터져 나왔다. 그것은 양자성으로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오전에 진도건에게 무시당했던 기억이 갑자기 떠오른다.

그의 웃음소리에 다른 사람들도 모두 주목했다. 일개 호위무사에 대한 말이 나오자 자신의 딸을 이야기했을 때보다 더 눈에 띄는 반응을 보여 준 것이 꽤 놀라웠기 때문이었다.

한편 강정학은 천무방 행렬을 맞이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별 것 아님에도 불구하고 눈에 잠시 밟혔던 무사가 생각났다. 그자의 이름이 진도건이었던가?

“지난번에 봤던 그놈을 말하는 것인가?”

강정학은 정확히 기억에서부터 그 호위무사의 인상착의를 떠올리며 중얼거리듯 물었다.

“응? 누구 말하는 것이오?”

금태하는 바로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구치소, 구치상 형제와 항연도 천무경과 강정학의 색다른 반응에 관심을 드러낸다.

“공녀와 같이 출전했다면 대단한 실력을 갖췄나 봅니다.”

“그건 아닌 것 같았는데. 글쎄…….”

가진 내력만 파악했지 실력은 보지 못했기에 말꼬리가 흐려졌다. 그러나 이내 강정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가진 내력 수준으로 발휘할 수 있는 실력에는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무경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천무경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후후! 그래, 자네 의견은 그렇다 치고. 언제 겨루고 싶다는 말인가?”

양자성은 아주 잠깐 두통을 느꼈다.

‘그렇다 치고?’

왠지 천무경은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듯한 말.

“8강 전에 겨룰 생각입니다. 그 위로 올라오면 자칫 제 검에 크게 다칠 수도 있을 텐데 그런 식으로 천무방에 죄를 짓고 싶진 않습니다. 물론 본선에 오를 만한 실력이 있진 않아 보이니 내일 예선이라도 비무를 치르고자 합니다.”

“특별히 녀석의 이름을 얘기하는 이유는?”

“그자와 작게 시비가 붙었습니다. 천무방의 위신을 지키려 했다 하더라도 그 이상으로 제게 도발을 해서 말이지요.”

“하하하힛!”

천무경이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여러 사람이 다시 한번 의아한 눈으로 바라본다. 천무경이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위상과 그 자식의 무공 수준이 어떨지 고려해 본다면 정말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에야 호위무사라는 존재의 역할은 무의미했다. 어찌 보면 시종 이상의 의미도 아니었다. 특히 그를 한 번 본 적이 있는 강정학은 그런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천무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좋을 대로 하게. 그러나 심하게 다칠 일은 피해 주게나. 내 잔심부름을 많이 하는 녀석이라서.”

“하하!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적당히 계도하는 선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아, 그렇게 얘기하니까 나도 자네가 참고할 수 있도록 하나만 더 보태지.”

“말씀하십시오.”

“기왕이면 8강 직전으로 대진을 짜시게. 그래야 자네도 녀석의 비무를 보고 준비를 할 수 있지 않겠나?”

“그쯤이면 이미 명성 높은 고수들의 경쟁이 가장 치열해질 시점인데 가능하겠습니까?”

“자네를 생각해서 해 주는 말이니 내 말 꼭 듣게. 8강 직전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품은 얼굴을 일관되게 유지해 오던 양자성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천무경의 말 뒤에 진도건의 도발적인 언행들이 뒤따라 들려오는 듯하다. 마치 그의 실력을 조롱하는 듯한 말들.

천무경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강정학은 무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금태하와 황사열은 킥킥거리며 웃는다. 칠성파 구씨 형제들과 항연은 진도건에 대한 인물을 잘 모르니 이런 대화 내용이 그저 흥미롭기만 하다.

천무경의 표정엔 그 어떤 걱정도, 진지함도 읽히지 않으니 심기에 상처를 입는 것은 양자성 뿐이었다.

“송구하지만, 방주님께선 그 호위무사의 실력을 꽤 신뢰하시는가 보군요.”

그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해졌다. 그 모습에 천무경이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잔심부름해 주는 부하를 신뢰해 봐야 얼마나 하겠는가? 그저 나중에 본선을 치를 자네가 미리 몸풀기에 괜찮은 상대가 될 것 같아 하는 말이네.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진 말게나.”

“……알겠습니다. 그럼.”

양자성이 작별의 인사를 하고 뒤를 돌아섰을 때, 그의 표정은 평상시에 결코 볼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모습을 그와 스쳐 지나치며 보게 된 황사열이 내심 놀랄 정도로.

‘감히 날 무시해?’

양자성은 조용히 노기를 억눌렀다. 그런데도 투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을 온전히 제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장내의 거두들의 눈치를 보는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진도건을 농락시킬 생각만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눈빛에 날을 세우면서 조용히 단맹전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고소하게 여기며 지켜보던 황사열도 뒤따라 떠나려 할 때였다.

구치상이 천무경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실력이 괜찮은가 봅니다.”

“나도 궁금하군.”

강정학도 그 말에 동조했다.

“총수님. 본방의 인혼당주 이혁성을 기억하십니까?”

“비뢰검 이혁성? 아아! 내가 그 친구를 기억 못 할 리가 있는가?”

이 자리에서 이혁성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천무방이 보유한 천재 검객으로 과거 강정학이 대놓고 탐을 냈던 역사도 있었다. 말이 영입이지 세간에선 강정학이 제자로 삼고 싶어 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2년 전에 진도건은 이혁성과 스무여 합을 겨루고 졌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에 항연이 끼어들며 다시 물었다. 그리고 천무경은 여전히 강정학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진도건이 축기를 제대로 시작한 것은 불과 4, 5년에 불과합니다.”

“뭣이?”

이번만큼은 강정학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잠깐 그의 사고가 정지하다시피 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비뢰도 이혁성이라면 검의 천재이면서 동시에 쾌검의 달인이었다. 무림의 뛰어난 검객들이 모인 검림 안에서도 그의 쾌검을 쫓을 수 있는 자는 열 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과거의 기억을 기준으로 말이다.

그가 기억하는 진도건의 내력은 그의 기준에선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물론 한 문파의 소속 무사로서 나쁘지 않은 수준이긴 했다. 그러나 천무방의 위상을 고려하면 공녀의 호위무사를 맡기기에도 이혁성이나 양자성과 견주기에도 너무 부족한 수준이었다. 말 그대로 경지의 급 자체가 다른 이야기였다.

‘이혁성과 스무여 합을 겨뤘다고 했다. 쾌검 특성상 길지 않은 비무였을 것을 고려하면 오히려 꽤 길게 끌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정도 내력임에도 그 쾌검을 견뎠다면 역설적으로 외공이 대단히 뛰어나다고 생각해야 하나?’

자리에서 천무경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금태하나 구치소, 구치상과 항연 등 모두의 머릿속에서도 강정학만큼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진 못했지만, 그들도 최소한 한 가지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진도건이라는 인물의 실력이 쉬이 무시할 만큼 녹록지 않을 거라는 것.

“방주 얘기를 듣고 나니 흥미로워지는군.”

“그래도 총수의 제자가 이길 것입니다. 촌부의 검객 치고 생각보다 실력이 쓸 만해서 고용한 것일 뿐이라 어찌 백령신검을 이은 녀석의 상대가 되겠습니까?”

“후후! 어째 진심이 아닌 것 같소이다.”

“진심이올시다.”

구치소가 웃으며 말하자 천무경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항연은 옆에서 강정학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제자분께 충고 정도는 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강정학이 신중한 성격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물음이었다.

강정학이 대수롭지 않은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놈이 알아서 할 일이라네. 끌끌!”

금태하는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 복잡한 관계가 얽혀 있음을 이해하고 그 흥미로움에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핫! 비무제는 어린 애들 놀이라 신경 쓰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재밌는 구경거리가 나오겠군. 그렇지 않으냐, 사열아!”

“예, 스승님!”

“대진표를 관리하는 자에게 전하라. 8강 전까지 진도건이 탈락하지 않는다면 양자성이와 붙일 수 있게 짜라고 일러라. 마지막 네 자리는 너와 양자성, 천서은 모두 도달할 수 있도록 대진을 조정하라고도 하고. 비무제의 재미를 위하여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올라오지 못하는 녀석이 있다면 사문에 먹칠하는 일이니 다들 쪽팔린 일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명 받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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