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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0화 (20/432)

20화 - 제4장. 사패소룡비무제 (4)

얼굴이나 드러난 손의 주름들은 전연의 나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었다. 상대적으로도 옆에 앉은 여희선보다 더욱 왜소하고 다소 수척한 모습이었는데 그것은 제자에게 자신의 진기를 나눠 준 이유가 컸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검은 머리카락이 부분 남아 있는 정정한 모습이었다. 그런 외모와는 다르게 시선을 마주했을 때 검은 눈동자 속에서 느껴지는 깊은 현기(玄氣)는 그녀의 연륜이 전혀 가볍지 않음을 알게 해 주었다.

어색하면서도 생각보다는 좀 차분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마치게 되었다. 어색함의 원인이었던 전연은 포만감에 기력이 돌아왔는지 그제야 천서은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천무경이의 딸이라고? 참 이쁘게 컸구나.”

“아니에요. 언니가 더 이쁜걸요.”

“너의 어릴 적 모습을 내 본 적은 없다만, 네 어미는 한 번 본 적이 있다. 주씨 성을 가졌던 것 같은데 네 얼굴을 보니 기억이 나는구나. 닮았어.”

“고맙습니다. 어르신.”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천서은은 자리가 조금 불편하게 여겨졌다. 전연의 표정은 따뜻한 미소를 그려내고 있었지만, 눈빛에 담긴 진의는 그녀의 속까지 파헤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모든 무림인의 공통된 특성일지도 몰랐다.

강정학이나 금태하도 그랬고 양자성이나 여희선도 그러했다. 수준을 가늠해 보고 자신과 비교했을 때 우열을 따져본다. 그리고 그에 따라서 취해야 할 태도를 결정짓는 모습들을 천무방을 떠나면서 계속해서 보고 있었다.

옆에 있던 여희선도 자신의 스승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은 행동 저변에 자연스럽게 깔린 습관처럼 무의식에 둔 채로 예의 유혹하는 듯한 미소로써 같이 바라보고 있다면 그녀 자신도 담담하게 현실을 마주 볼 필요가 있었다.

“과연 그 아비에 그 딸이라고. 이 노구의 힘이 떨어져 예전 같진 않지만, 너의 성취가 범상치 않음은 알겠구나.”

“과찬이십니다.”

“내 제자가 좀 까지긴 했지만, 속은 깊은 아이니 잘 지내길 바란다.”

갑작스러운 고백에 천서은이 당황하여 웃는 사이, 여희선이 발끈했다.

“어머! 스승님! 그게 다 큰 숙녀한테 하실 말이에요?”

“이 년아, 내가 어디 틀린 말이라도 했더냐?”

“아잇…….”

여희선도 당황해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천서은도, 진도건도 웃음을 참고 있으니 그녀의 얼굴이 화끈 붉어졌다.

“웃어?”

여희선의 말에 진도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진다.

“잘못 보았소.”

그 대답에 여희선의 표정이 야릇하게 바뀌었다. 새침하게 눈을 뜨며 탁자 위에 한 손으로 턱을 괴어 얼굴을 들이밀면서 다른 한 손으론 옷깃을 당겨 한쪽 어깨를 드러내 보였다.

그 모습에 진도건이 당황하여 눈을 돌렸다.

“……친구야. 밤에 쓸쓸하지? 내가 옆을 따뜻하게 해 줄 수도 있는데.”

“으흠!”

진도건은 헛기침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인은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호호호!”

진도건이 객점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여희선과 천서은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들이 익숙한 유희에 공감하며 웃는 사이에 전연은 진도건이 걸어 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호위무사라고 했느냐?”

“아, 예.”

“천무경이의 제자는 아니고?”

“네, 아니에요.”

“흐음.”

전연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만히 턱을 쓰다듬는데 옆에서 여희선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동생 말로는 검술이 엄청 뛰어나다고 그랬는데 전 아직 믿지 못하겠네요. 가끔 절도 있는 모습을 보면 그런가 싶기도 하고 또 저렇게 가는 모습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비무 상대로 수준 높은 자를 만나면 보실 수 있을 거예요.”

“감추고 있어서 내가 못 느끼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력도 약한 편인 것 같은데. 그치?”

“그의 약점이긴 하죠.

천서은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그런 말을 해서 정말 진도건에게 약점으로 작용할 거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내력이 낮다는 것이 약점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적당한 우위로는 그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이 이미 여러 차례 증명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천무경이 저 녀석에게 관심을 두고 있느냐? 제자는 아니라 했지만 말이다.”

“그건 맞아요. 아버님이나 장로님들도 그를 자주 칭찬하셨거든요.”

“그렇군. 그랬어.”

“왜요?”

이제야 무엇인가 깨달았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다른 느낌을 받은 여희선이 물었다.

“그 약점이 머지않은 때에 사라질 것 같구나.”

“그게 무슨…….”

피식 웃는 전연의 눈빛이 번뜩였다.

“녀석의 기에 파천신공의 기운이 묻어 있어.”

“네?”

천서은이 놀라 물었다. 생각지 못한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 진기를 이년에게 물려줘서 예전 같진 않지만, 하늘 아래 이 노구보다 사람의 기를 잘 파악하는 자는 없네. 제아무리 천하오절이라 해도 말이지. 우리의 음공이 높은 내력을 뚫고 타격을 주기 위해선 그 기질(氣質)을 파악하여 음공의 음질(音質)에 변화를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본파가 어려운 무학을 이어감에도 불구하고 여태 살아남아 있는 것은 그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란다. 이 노구의 눈은 아직 죽지 않았네. 천무경과도 이미 겨뤄 본 적이 있어 잘 알고 있지. 천무경은 저 녀석 몸에 손을 댔어.”

천서은은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복잡하게 엉키면서도 애써 겉으로 그런 심경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데도 전연은 그녀의 생각이 어떤 흐름인지는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가 살아온 세월이 표정이나 눈빛만 봐도 그 속을 엿볼 수 있음을 증명해 주는 부분인 것이다.

“속사정이야 잘 모르니 어떤 생각을 하든 함부로 속단하지는 마라. 정말 네 아비가 저놈을 끌고 가고자 했다면 너나 나도 모르는 깊은 속뜻이 있지 않겠느냐?”

“……알겠습니다.”

전연의 말에 천서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가 불필요한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녀가 싱긋 웃음을 짓는데 그 모습을 보던 전연이 내심 쓴웃음을 삼켰다.

“슬슬 가 봐야겠어요, 사부님. 오후 비무 준비를 해야 하니까요. 보러 안 가시겠어요?”

“내일 지켜보도록 하마. 오늘 일정이 끝나면 시시껄렁한 녀석들은 모두 떨어져 나가지 않겠느냐? 내일이면 볼만한 구경들이 나오겠지.”

“그럼 쉬셔요. 저희는 가 볼게요.”

“그러려무나.”

천서은과 여희선은 전연에게 인사를 하고 객잔을 빠져나왔다. 객잔 문 옆 기둥에 등을 기댄 채 기다리던 진도건은 두 사람이 나오자 바로 서서 길을 내었다. 여희선이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오래 안 기다렸지?”

“그렇소.”

여희선은 다시 한번 그에게 장난을 걸까 생각했다가 멈추고 천서은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눈치나 여자의 촉이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생각하는 편이었기에 자신의 사부와 천서은의 대화에서 어색한 기류를 감지해 냈다.

“갑시다.”

그렇게 말하며 웃는 천서은의 미소가 여희선은 다른 어느 때보다 인위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머릿속에 고민이 많은 눈치였다. 그게 무슨 고민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당장 캐물어 봐야 좋을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가는 두 사람을 뒤따라 가던 진도건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전연과 여희선이 직전에 있었던 대화의 흐름으로 천서은의 심경의 변화를 눈치챘다면 진도건은 근 몇 년간 그녀의 곁에 가장 오래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 변화를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나와서 기다린다고 했던 것이 무례했었나?’

단순히 그런 거라면 천서은이 그에게 직접 얘기했을 거라고 생각도 든다.

어쨌든 나온 이후의 대화 내용을 몰랐기 때문에 그것이 그에게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게 되었다. 그렇게 진도건은 찝찝한 기분으로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 * * *

비무제 첫날 저녁.

사패련의 본전은 단맹전(斷盟殿)이란 현판을 달고 있었다. 정파 무림맹의 결속을 끊어 내고자 했던 목적을 반영한 이름이었다.

단맹전 대회의실에는 거대한 원탁이 중앙에 있었고 그 원을 따라 다섯 방향에 여섯 개의 의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중앙의 상석(上席)은 다른 의자보다 더 크게 제작되었는데 화려한 용장식과 호피 가죽을 푹신하게 깔아 놓아 사패련주의 지위를 돋보이게 해 주었다.

중앙 상석은 당연히 사패왕 금태하가 자리를 차지했으며 그 오른쪽에 강정학이 앉아 있었다. 그 옆엔 서호항가의 가주 항연(杭淵)이 후덕한 풍채를 자랑하며 순금으로 만든 염주를 손에 넣고 굴리고 있었다. 이어 옆자리엔 의자 두 개가 붙어 있는데 한 자리엔 칠성파 장문인 구치소가 다리를 꼰 채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있었고, 그 옆엔 칠성도존 구치상이 의자에 깊이 등을 묻고 있었다. 다른 각파의 수장들은 부하 등을 뒤에 세워 둔 반면 구치상은 그의 천하오절로써의 지위를 존중하여 구치소와 동렬에 자리를 준 것이다.

금태하와 구치소의 사이의, 중요한 사패련의 행사나 회동에도 언제나 빈 자리로 둬야만 했던 그곳에 오랜만에 그 주인인 천무경이 앉아 있었다.

“천무방주님 참으로 섭섭합니다. 이리 얼굴 보기 힘들어서야 하마터면 알아보지 못할뻔했습니다그려. 껄껄껄!”

항연의 목소리가 회의실을 가득 메웠다. 그의 풍채가 그대로 울림통 역할을 하는지 그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크고 울림이 있었다.

“처를 잃은 상심이 그만큼 컸던 게 아닌가?”

“상심이란 것도 1, 2년이면 뭐. 그런데 아직 그런 핑계를 대는 거라면 정신병 아닌가?”

“이거 시도 때도 없이 찔러 대면 난 참아야 하는가?”

“클클! 요새 나랑 놀아 주는 놈이 없어서 말이야. 제발 참지 좀 말게. 앙?”

도발적인 자세를 취하는 금태하와 그에게 살기등등한 눈으로 바라보는 천무경의 모습에 강정학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오랜만에 모인 김에 우리끼리 회포나 풀자 하여 모였는데 꼭 서로 으르렁거려야 하겠는가?”

“허허! 차주에 비무제가 끝나면 기념 무대를 꾸며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큭큭! 그건 너무 나간 것 같소, 항 가주. 저 두 사람이 붙으면 아마 이 일대는 초토화가 될 것이오.”

그렇게 말하면서도 구치소는 재밌을 것 같다는 듯 눈빛을 번뜩였다. 그 옆자리에 있던 구치상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천하오절이라고 하나 만약에 서로 경쟁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어디까지나 그는 도전자의 입장에 설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호승심이 끓어오르는 것을 자제하는 것이 참으로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듯 천하오절이 서로 바라보는 관계는 결코 대칭적이지 않고 묘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천무경과 강정학이 천하제일을 다툰다면 금태하는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자였다. 실제로도 그의 강함이란 것은 앞선 두 사람에 비해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는 게 천하오절을 바라보는 많은 고수의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천하제일을 논할 때 금태하는 언제나 세 번째로 거론되는 이름이었다.

금태하가 강정학보다 천무경에게 더 강한 경쟁의식을 가진 이유는 그가 가진 완벽한 무인의 모습 때문이었다. 천하제일검은 강정학이지만, 천무경은 모든 것에 능하여 검을 들어도 강정학에게 지지 않는다는 소문이 금태하를 더욱 강하게 자극하는 것이었다.

구치상은 순수한 무골이자 도객으로써 비록 후발주자였지만, 그들과 같은 대열에 선 것을 큰 자부심으로 여기는 남자였다. 강정학은 도검의 우위를 놓고 자웅을 겨뤄 보고 싶다면 천무경은 금태하의 생각과 비슷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질투보다는 역시 존경에 가까웠다. 자신보다 다섯 살 어린 천무경이 그보다 더 일찍 올랐다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경이로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천하오절의 마지막 자리는 철갑권왕(鐵甲拳王) 안효철(安梟鐵)란 자였다. 비록 그의 이름이 알려진 계기가 천자철갑(天子鐵甲)이라는 기보(奇寶) 때문이었지만, 그 실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가 사패련에 소속되지 않은 것은 그가 타고난 낭인(浪人)이며 정도(正道)를 걷는 협객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어찌 됐든 누구라도 싸움이 붙는다면 그것을 멈추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기 때문에 대부분 천하오절 간의 다툼이 아무리 흥미를 자극하더라도 크게 부추기지 않으려 했다.

탕탕!

강정학이 탁자를 가볍게 두 번 두드렸다. 그의 깊은 공력이 담긴 울림이 천무경과 금태하를 붙들었다.

“서로 싫은 소리는 그만하지. 각자 자식 자랑, 제자 자랑하기 위해 만든 비무제인데 어른들이 깽판 놨다는 소리나 듣고 싶은 겐가?”

“허허허! 그거 맞는 말씀입니다. 총수 어르신.”

강정학의 충고에 항연이 맞장구를 쳤다.

항연이 이어서 일어나 손뼉을 쳤다.

짝짝!

“음식과 술은 아직 준비가 안 되었느냐? 어르신들 기다리기 지치셨지 않느냐?”

사패련을 운영하는 자금 대부분을 충당하는 절강 항주(杭州)의 거부답게 그의 신호에 맞춰 각지에서 올라온 특산물로 요리한 산해진미(山海珍味)와 술들이 이십여 명의 하인들에 의해서 옮겨지기 시작했다.

후각을 강하게 자극하는 요리의 향취에 금태하도 절로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서호항가가 중원의 이름난 숙수를 싹 쓸어갔단 소문이 있던데. 정녕 사실인가?”

“허허허! 과대해석입니다. 련주님.”

“살면서 한 번 구경해 보지 못한 요리도 있고……, 담음새도 훌륭한데 황제의 숙수를 뺏어 온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군.”

탁자에 깔린 요리들을 본 금태하가 크게 흡족해하며 감탄을 연발했다.

그 모습이 만족스러웠는지 항연이 선 채로 두 팔을 활짝 펼치며 입을 열었다.

“편하게들 드시지요. 이 항연. 우리 사패련의 영걸(英傑)들에게 결코 대접을 아끼지 않을 것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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