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 제4장. 사패소룡비무제 (3)
양자성은 한발 물러섰다가 오른쪽으로 한 걸음 몸을 옮겼다. 자연스럽게 황사열과 그 주변의 풍경으로 채워져 있던 천서은의 시야를 양자성이 자신의 얼굴로 가렸다.
“사패련주의 제자 황사열입니다. 싸움만 좋아하는 거만한 짐승이죠.”
그의 얼굴이 갑자기 앞을 채우자 천서은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살짝 뒤로 젖혔다. 그러자 양자성은 더 가까이 다가가며 손을 내밀었다.
“소저의 이름은……?”
텁!
그때 진도건이 그의 어깨를 짚고 밀어냈다.
양자성은 흘끔 그를 바라보았다. 항상 미소를 짓는 일이 그에게 있어서 일상화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전도건을 쳐다보는 눈빛엔 날카로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호위인가?”
“그렇소.”
“이봐. 난 내 몸을 함부로 건드는 것을 싫어하네. 더욱이 내가 누구인지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거라면…… 자네는 내 손에 진검이 들려 있지 않은 걸 감사해야 할 거야.”
툭!
양자성이 그 말을 끝으로 자신의 어깨를 짚고 있던 진도건의 손을 쳐 냈다.
진도건은 그의 말에 전혀 주눅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행색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터라 경계심이 더 커졌을 뿐이었다.
“무례를 범한 자, 사정을 두지 말라 하셨으나. 보는 눈이 많으니 당신에겐 참 다행이오.”
“뭐?”
양자성의 얼굴에서 미소가 조금씩 사라져간다. 그 뒤를 대신 노여움이 차지했다.
그때 천서은이 진도건의 팔을 붙잡고 뒤로 살짝 당겼다. 그가 물러서면서 대신 앞으로 나서서 양자성에게 손을 뻗었다.
“천서은이에요. 제 아버지이신 방주님께서 그에게 맡긴 임무이니 그쪽이 이해해 주세요.”
천서은의 자기소개에 양자성이 다시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잠깐 자리를 차지했던 노기는 사라지고 예의 그 미소와 관심 어린 눈빛이 대신하고 있었다.
“아, 이런. 파천무봉 천무경 선배님께 아름다운 따님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거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소문에…… 좀 더 과장이 필요할 것 같네요.”
“좋게 봐주셔서 고맙네요.”
“우리 서로 친해질 기회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비무제는 다음 주까지 진행될 것이고 시간은 많지 않겠어요?”
“전 그동안 비무제에 집중하고 싶어서요. 미안해요.”
천서은의 대답에 양자성이 여희선을 보았다. 그녀는 그저 웃음만으로 답했다.
‘쉬운 여자는 아니라는 건가? 재밌네.’
여희선 한 사람만 꼬신다면 당장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았지만, 두 사람 모두를 놓고 본다면 주도권은 아무래도 천서은에게 있었다. 그의 신분을 고려해서도 그렇고 먼저 대답하여 방향을 결정지어 버린 것도 그러했다.
“승패가 많이 갈려서 출전자가 점점 줄어들면 시간 여유가 충분할 겁니다. 언제 차라도 한 번 하시죠.”
그렇게 얘기한 양자성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목례만 하며 물러났다. 두 여인에 대해서. 특히 천서은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따로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들 참이었다. 그렇게 물러나던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진도건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넨 비무제에 참가하나?”
“그렇소.”
양자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솜씨가 궁금해지는군.”
“난 아닌데.”
“아하하하!”
양자성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그들을 유심하게 지켜보던 사람들도, 관심 없던 사람들도, 비무를 막 시작하거나 끝난 사람들도 양자성에게 이목이 쏠렸다.
양자성이 들고 있던 목검을 들었다. 그 끝은 정확히 진도건의 얼굴을 겨눴다.
한 손은 여전히 뒷짐을 진 채 겨누고 있는 목검을 까딱거리는 모양에서 그의 자신감과 상대를 얕보는 태도가 역력히 드러난다.
“기왕이면 한 번 겨뤄 봤으면 좋겠군. 그리고 또 기왕이면 8강 전에 만났으면 좋겠어. 그 이후에 만난다면 다시는 검을 잡지 못할지도 모르니.”
8강부터는 목검이 아닌 자신의 무기를 사용한다. 판관은 되도록 출전자를 보호하는 데 집중하지만, 언제나 막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은 존재하는 법이다.
진도건은 자신을 쳐다보는 양자성의 미소가 조소로 비쳤다. 또한 웃음으로 반달을 그리며 가늘게 뜬 눈에선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그것이 엿보였다.
“동감이오.”
“크크! 이름을 묻지 않았군.”
“진도건이오.”
“넌 내가 기억해두지. 후후!”
양자성이 웃음을 흘리며 시선을 거뒀다. 검을 쥐고 뒷짐을 진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재밌군. 생각보다 더 재밌겠어.’
비무제의 참가를 결정했을 때부터 그는 우승을 자신했다. 누군가는 황사열을 이야기하면서 오만이라 하겠지만, 그들의 예측이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증명할 자신이 있었다. 양자성이라는 석 자 이름이 주는 무게감이 어떤 것인지 천하 강호인들의 머릿속에 각인시킬 것이었다.
결과에 확신이 있으니 다른 관심사에 눈이 돌아간다. 여자에게 시선이 미치는 것은 당연하다. 기녀나 평민 여자는 그의 욕심을 채워 줄 수 없으니 여희선이나 천서은이 그의 지대한 관심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아름다운 용모뿐만 아니라 무림에서의 지위를 생각한다면 특히 천서은은 그에게 있어 환상적인 여자였다.
여기까지가 그가 이곳에서 가져갈 수 있는 최대한의 기대치였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를 도발하는 자가 나타났다.
사실 진도건은 아무것도 아닌 자다. 천무방의 이름을 등에 업고 있다고 해도 검림 총수의 제자와 일개 호위무사의 가치가 동일할 수 없다. 그가 공적인 자리에서 진도건을 죽인다고 해도 천무방주가 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느껴지는 기운도 별 볼 일 없으니 손쉽게 요리할 수 있을 것이다.
문득 천서은에게로 생각이 미친다. 그와 진도건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그녀가 진도건의 팔을 잡아끌며 말리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 모습을 생각해 보면 그저 시종 노릇을 하기 위한 호위무사는 아닌 것 같다. 둘 사이에 유대감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
‘놈. 운이 좋군.’
그를 죽인다면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를 테니 그런 도박을 할 수는 없다. 그에게 신경을 쓰는 것도 우습다. 황사열의 이름값과 비교하면 하찮기 짝이 없다.
‘대진표를 조정해서 8강 전에 몸풀기로 상대하면 적당하겠군.’
양자성은 참가자일 뿐이지만, 스승 강정학의 영향력이라면 충분히 쉬운 일일 것이다.
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사패련의 본전으로 향할 때, 진도건과 천서은, 여희선 사이에선 두 사람의 신경전이 화두로 떠오른 상태였다.
천서은은 웃으며 진도건에게 물었다.
“왜 그랬어요?”
“예?”
“굳이 거칠게 나갈 필요는 없었잖아요”
그 말의 내용과 다르게 그녀의 목소리는 꽤나 차분했다.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었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가씨께 무례를 범하게 둘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제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래요?”
“주제넘은 행동이었다면 주의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말아요.”
“친구, 다시 봤어. 세상에 양자성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황사열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글쎄…….”
“친구는 그가 무섭지 않나 봐? 그 백령신검 강정학의 제자라고. 천하에 이름난 검객들이 뭉친 검림에서도 천재라고 소문난 남자야.”
진도건은 거기에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살짝 돌려 대답을 회피했다.
여희선이 얘기한 사실은 그에게 결코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상대를 선택한다면 호위무사로서의 직분이 의미가 없지 않은가?’
설령 강정학을 적으로 마주한다고 하더라도 진도건은 천서은을 위해 검을 들 것이었다.
그의 생각을 알지 못했던 여희선이 심술 어린 표정을 짓는다.
“칫! 왜 내 말엔 대답을 안 해 줘?”
“언니.”
천서은이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렸다.
“전 걱정 안 해요. 진 위사는 검술에 관련해서 제 스승이나 마찬가지예요. 전 그보다 뛰어난 검객을 본 적이 없어요.”
“정말? 믿기지 않는데.”
여희선이 다시 진도건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있는 그를 찬찬히 뜯어본다. 감각을 끌어올려 그의 기운을 읽어 보려 노력했다.
‘역시 평범한데.’
여희선은 그 또래에 비해서 공력의 깊이가 뛰어난 편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난약파의 절기와 더불어 장문인 전연의 진기(眞氣)까지 직접 전수받았기 때문이었다.
진기의 격체전공(隔體傳功)은 그것이 바로 격발할 때는 전달한 공력 전체를 사용할 수 있지만, 그것을 온전히 전수자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공력의 소실을 생각하고서라도 진기를 인도하여 일부라도 전수자의 단전에 안착시킬 수 있다면 수십 년의 성취를 단축하게 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전연의 고령이라는 나이 난약파에서 무공을 배우고 장문인으로서 이끌어 온 시간을 고려한다면 여희선이 거머쥔 것은 그 값을 매길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이 비무제에 함께 따라온 전연도 사실상 과거의 위력을 잃어 버린 상황이었다. 만약 여희선이 불의의 일로 목숨을 잃는다면 난약파로써도 존폐의 기로를 맞이한다고 볼 수 있었다.
여희선은 이미 천서은의 공력이 그녀보다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눈치챈 상태였다. 사실 천서은의 미모는 그녀로서도 시기심을 가질 만했지만, 괜히 천무방을 적으로 돌려봐야 자신과 문파의 미래에 좋을 것이 없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렇게 친근감을 표시하는 것도 그런 미래를 위한 포석이었다.
반면 그가 느낀 진도건의 공력은 그저 평범했다. 형편없다 얘기할 수는 없었지만, 이 비무제에서 그보다 내공 수준이 낮은 사람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검술의 스승이라.’
진도건이 거리낌 없이 양자성과 신경전을 치른 것도, 천서은이 자신감을 보인 것도 어쩌면 거기에 해답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좀 전 비무대에서는 상대의 낮은 수준을 생각한다면 제대로 된 실력을 보여 준 것은 아닐 터.
“그렇게 얘기하니까 내 친구의 진짜 실력이 궁금해지네.”
“아마 놀라실걸요?”
“기대해도 돼?”
“그럼요.”
천서은과 여희선이 서로를 보며 까르르 웃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진도건은 난감함에 시선을 돌릴 따름이었다.
땡! 땡! 땡!
곧 비무제의 정회와 더불어 오시(午時)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같이 식사하러 갈까요?”
“난 스승님이 지금 객잔에 혼자 계셔서 어려울 것 같네.”
“그럼 언니만 괜찮으면 저희도 인사드리고 싶은데.”
“어머, 그럼 정말 좋지.”
난약파와 천무방의 관계를 새로 개척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기에 여희선으로서도 환영하는 바였다.
“아마, 스승님도 좋아하실 거야.”
세 사람은 바로 경기장으로 빠져나가서 난약파 장문인 전연이 머무는 객잔으로 향했다.
객잔에 도착하자 여희선이 먼저 스승의 방으로 가서 그들의 의견을 전달했다. 전연은 흔쾌히 승낙하여 네 사람 모두 같은 탁자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