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 제4장. 사패소룡비무제 (1)
마침내 도시는 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사패련 성곽 주변으로 많은 점포와 노점상들이 자신들의 요리나 기념품 같은 것을 팔기 위해 호객하는 소리가 가득 찼고, 그 사이사이를 구경하는 무림인들과 일반 백성들도 축제를 즐겼다. 여기저기 축제의 노랫소리도 들렸다. 무림인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호사가들은 누가 경기에서 승리할지 떠들어댔고 투기꾼들이 군중들로부터 돈을 걷으며 빈 명부에 그들의 이름을 채워 넣어 배당을 계산했다.
사패련과 관청은 경기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성벽까지 개방하여 사람들이 올라와 경기장 내부를 구경할 수 있게 하였다. 성벽에도 노점상들이 들어서서 술과 음식을 판매하도록 하였고 곳곳에 군인과 흑패단 등이 배치되어 치안이 흔들리지 않게 감시할 수 있도록 했다.
사패련 내 경기장 주변도 마찬가지였다. 일반 백성들에게도 일부 개방되면서 상인들이 들어서 더 많은 노점이 세워졌다. 본관과 경기장 주변에선 출전하기 위해 대기하는 참가자들과 그들의 문파 관련자들이 꽤 긴장감 있는 모습으로 서로의 눈치를 보기도 했다.
경기장 앞 게시판에는 당일 출전하는 참가 대기자들의 명단을 작성해 붙여 놨다. 그리고 흑패단의 무인들을 두어 경기장 안의 상황에 따라 경기장 안으로 참가자들을 들일 수 있도록 배치했다.
경기장 관중석은 무림인들과 부유한 백성들 일부가 그 자리를 가득 메웠고 5개 비무대에는 승패의 판정과 참가자의 안전을 도와줄 고수들이 올라와 있었다.
진도건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지시된 북쪽 비무대로 올라갔다.
비무대별로 판관(判官)을 담당한 고수들이 한 명씩 있었는데 그곳엔 남궁평이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남궁평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출전 안 한다더니 무슨 바람이 불었느냐?”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진도건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지금은 역시 주태소에게 휘말렸다는 생각이 컸다. 그날 돌아가는 길에 천서은이 잘 생각했다며 계속 허파에 바람을 불어넣어 주는데 그녀의 응원을 들으면 들을수록 묘하게 부담감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녀가 아주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생각을 바꾸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반대편에서도 상대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때 진도건은 그를 보지 못하고 중앙의 비무대를 보고 있었다. 거기선 이미 천서은이 비무대에 올라 상대를 가볍게 압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관중의 환호성이 들썩거리는데 단연 모든 비무대에 오른 무인 중에서도 가장 돋보였다.
“하북의 청운검(靑雲劍) 남건(南乾)이오.”
“천무방의 타…. 아니, 진도건이오.
먼저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를 듣고 진도건도 서둘러 화답했다. 그는 탈명검을 자신의 입으로 얘기하려다가 뭔가 오글거리는 느낌에 말하길 거두고 이름만 얘기했다.
그런 대답에 남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에 남궁평은 피식 웃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둘 사이를 잠시 중재했다.
“규칙은 사전에 공지하였듯이 과도한 내력 사용은 금지한다. 초식을 펼치는데 뒷받침할 수 있는 정도로 사용하는 것은 상관없다. 즉, 기공류의 대응은 금지라는 얘기다. 목검을 놓쳐도 상관없지만 다섯을 셀 동안에도 회수하지 못하면 탈락이다. 타격 횟수가 5회를 넘어가거나 완전히 제압된 상황이 발생하면 비무는 종료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라 판단될 경우 판관의 재량으로 제지하고 승패를 판정한다. 양측 이해되었나?”
“예.”
“알겠습니다.”
“시작하지.”
남궁평이 손을 거두자 남건은 역수로 목검을 쥐고 다시 한번 포권지례를 보였다. 그 모습에 진도건도 화답해야겠다는 생각에 마찬가지의 자세로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였다.
쉬익!
그 순간 남건이 검을 돌려 머리를 노리고 내려쳤다. 무례한 짓이다. 그러나 그렇게 투정을 부릴 수 없는 자리였다.
마치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진도건은 미끄러지듯이 뒤로 물러나며 검격을 피해 내었다.
기습의 성공을 확신해서 다음 수를 생각하지 않는 우를 범하진 않는다.
청운섭풍(靑雲葉風).
상하단을 노리고 빠른 연격이 들이닥친다. 목검의 궤적을 보며 진도건도 침착하게 대응한다.
딱! 따다닥!
‘소리가 맑은데?’
자단목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고막을 자극하는 느낌이 상쾌하다.
퍽!
“윽!
남건의 연속된 검격을 흘려 내더니 어느 순간 그를 지나쳐 허리를 베었다. 타격하는 소리에 남건의 허리가 꺾이며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남건의 신형이 많이 무너졌기 때문에 진도건은 얼마든지 그를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한 발 뒤로 물러서서 그가 호흡을 가다듬는 것을 기다렸다.
‘어차피 비무제에 참가했다면 많은 수를 경험해 보는 것이 좋지.’
남건은 정파 청운문(靑雲門)의 검객이었다. 무림맹이 무너진 지 오래였기 때문에 자신의 실력을 검증받고 싶어 하는 젊은 무인들은 정사 구분 없이 유일한 창구였던 사패소룡비무제에 참가하는 자들도 있었는데 그도 그중 하나였다.
청운검법도 그 역사가 깊은 검술이었고 진도건도 그 초식의 정교함을 알아보고 몇 합을 좀 더 받아보고 싶은 마음이 컸었다.
‘이 비무제에서 한 번도 이기지 못하는 것인가?
남건은 합을 주고받으며 한 번 가격 되고 나니 단번에 진도건의 실력이 자신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을 어지럽히는 절망감에 기세가 한풀 꺾인다.
“한 수 더 배우고 싶습니다.”
벌써부터 기죽은 눈으로 진도건을 돌아본 남건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그에게서 예상했던 어떤 거만함도 보이지 않았다.
천무방이라는 거대 방파의 후광을 등 뒤에 두고 있으면서도 지금 이 비무대 위에선 오로지 진도건이라는 석 자 이름만 보여 주고 있었다.
거만하지도 겸손하지도 않다.
눈빛은 진지하고 자세에 흐트러짐 없다.
‘내가 먼저 쪽팔리게 굴었구나.’
남건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푹 쳐졌던 모습도 잠시 자신감에 약간의 분노를 더해 의지를 불태웠다.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금 청운검법의 초식을 풀어낸다.
휙! 가슴을 노려 찌르고 들어가면서 진도건이 피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손목과 팔 관절의 회전을 주어 쫓아 공격한다. 들어오는 반격에 맞서 검세를 당기고 몸을 회전시켜 검격을 뿌린다.
따다닥!
검신이 강하게 부딪치며 진도건의 목검이 멈칫할 때, 남건의 목검이 하단에서부터 위로 검격을 뿌렸다.
따악!
진도건이 뒤로 뛰어오르며 검으로 막자 타격 소리가 시원하게 터진다. 지금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 냈던 남건이 내력을 끌어올려 전신을 팽팽하게 당겼다 튀어 올랐다.
청운비상(靑雲飛翔).
베기와 찌르기가 연환격으로 진도건을 덮쳤다. 예측이 어려운 궤적들을 그리며 짓쳐 드니 검초(劍招)를 펼쳐 내는 남건의 눈에 자신감이 그득했다. 하지만, 진도건은 그보다 더욱 침착하게 초식의 흐름을 관조하고 있었다.
청운검법 검결의 특성을 눈으로 보고 이해하며 그것을 파훼하기 위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머릿속에서 빠르게 그려졌다. 그리고 그에 따라 공중에 불안정하게 뜬 상태에서도 목검은 망설임 없는 호를 그려 낸다.
탕! 탕!
서로의 목검에 좀 더 내력이 실리며 그 타격 소리가 바뀌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연달아 터질 때마다 남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이 진도건의 목검은 그의 초식을 완벽하게 대응해 나갔고 그의 두 발은 무리 없이 땅을 딛으며 보법을 밟아 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남건은 특정인이 겹쳐 보였다.
‘사부님!’
스승과 대련을 하면서 ‘내 손바닥 안이지.’라는 말을 하며 받아 내는 그 모습이 진도건의 모습에 그대로 투영된다.
공중을 쫓아 날았으니 땅에 발을 딛는 것은 진도건보다 늦을 수밖에 없었고 그 점을 놓치지 않고 그의 검격이 허벅지를 퍽! 하고 때렸다. 그것을 예상했던 남건의 대응보다 더욱 빨랐기에 그의 방어 동작은 허공을 갈랐을 뿐이었다.
‘큭! 대응과 반격을 위한 지점까지 사부님이 떠오르는구나.’
충격에 휘청거렸지만, 다시 몸을 바로 세웠다.
다행히 통증은 참을 만했다.
남건은 이미 승패가 갈린 비무라 생각했고 이것을 길게 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절초(絶招)를 펼쳐 전력으로 부딪치는 것만이 그 결과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이었다.
청운산산(靑雲散山).
타탓!
어지러이 종횡으로 보법을 밟아 내는 그의 신형이 잔상을 남긴다.
모든 움직임에 내력을 돌려 내며 동시에 펼쳐 내는 검무.
검격에 변칙적인 박자 따위 계산하지 않고 한 호흡에 수십 개의 빠른 연격을 펼쳐 낸다.
찌르고 베고 보법을 축으로 회전하며 다시 이어 나가고. 자주빛 목검의 그림자들이 사방을 둘러칠 정도로 펼쳐진다.
끝을 알 수 없는 연격에 진도건은 그의 전심전력을 이해하였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 보답하고자 했다.
퉁!
강하게 튕겨 내며 작은 거리의 여유를 만들어 내는 진도건.
그의 두 눈이 흐름을 쫓으며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연격의 흐름을 잘게 쪼갠다. 그리고 보이는 틈 사이로 과감히 사선으로 쫓아 전진, 일뢰섬을 응용하여 참격으로 뿌린다.
퍽!
“끄윽!”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로 빠르고 호쾌한 참격에 그대로 몸통을 가격당하며 남건은 결국 무릎을 꿇었다.
승부가 결정났음을 알았기에 진도건도 멀찍이 물러났다.
남궁평의 미소 띤 얼굴과 눈이 마주치자 진도건도 멋쩍게 웃었다.
‘8강은 무난히 가겠군. 역시 재밌는 녀석이야.’
남궁평은 남건에게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무릎을 꿇은 채 돌아오지 않은 호흡을 조절하기 위해 연신 끅끅! 거리며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의 등에 손을 가만히 데고 그의 운기를 도우며 경직되었던 흉근과 폐부를 풀어 주었다.
“푸하! 하아, 하아……!’
막혔던 숨이 트이자 남건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간신히 감사하다 말하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준 남궁평은 품속에서 이름이 적힌 두 개의 표지목(標識木)을 살폈다. 그리고 남건의 이름이 적힌 표지목을 부러뜨렸다.
“두 사람 모두 고생했다. 진도건, 너의 승리다. 다음 비무를 기다리거라.’
진도건과 남건,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다가가 뜨겁게 악수하였다.
“진 형 덕분에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깨달았소. 비무제 마지막까지 활약을 기대하겠소.”
“정련된 검술에 저도 크게 감탄했습니다.”
“고맙소.”
칭찬을 하는 표정에 가식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자 남건은 패배의 쓰라림에도 불구하고 기분 좋게 웃었다. 두 사람은 각자 올라왔던 방향으로 비무대를 내려갔다.
“잘했어요.”
비무대를 내려가니 일찍이 승리를 챙기고 내려온 천서은이 기다리고 있었다.
“쉽게 이긴 것 같은데요?”
“운이 좋았습니다.”
그녀가 진도건의 배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맨날 운이 좋았대.”
“하하. 아가씨께선 어떠셨습니까?”
“전 당연히 가볍게 이겼죠.”
천서은의 말마따나 그녀의 압승으로 비무는 끝이 났다.
상대는 패도(佩刀) 형태의 목도를 들고 나왔는데 무림에서도 일찍이 폭렬도(爆裂刀)이란 별호로 이름을 날린 젊은 고수였다. 만약 운만 따랐다면 8강에도 올랐을 만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는 천서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천서은도 강호에서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상대의 다양한 초식들을 두루 경험하고 싶어 했고 그 생각이 진도건과 같았다. 경대훈(經大熏)의 폭렬도법(爆裂刀法)은 그 이름만큼이나 초식 하나하나가 매우 거칠고 도세를 크게 펼쳐 내는 것이 특징이라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는데 그의 공격을 매번 수월하게 피해 내고 흘려 내면서 자색 목검을 휘두르는 그녀의 모습에 군중들의 감탄사가 관중석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게다가 최종적으로는 깔끔한 금나수법으로 상대의 목도를 빼앗아 버렸으니 경대훈은 크게 좌절하며 물러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경험을 얘기해 주며 비무대 바깥의 대기석으로 향했다. 방향을 잡은 그곳엔 때마침 여희선이 벽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한 손으로 손짓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딘가 요염한 자세에 손짓하는 모양도 교태가 흐르는 느낌에 진도건의 표정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 기색을 포착한 천서은이 그보다 한발 앞서가며 여희선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언니. 순서를 기다려요?”
“응. 난 이미 한 번 비무를 치렀고 이겼어.”
“축하해요. 난약파는 봉법을 다루나 봐요?”
팔짱 낀 손으로 목봉이 보였는데 길이가 짧은 단봉이었다.
“맞긴 한데, 정확히는 음공(音功)을 같이 써. 우리의 원래 무기는 옥피리(玉笛)라서 봉법은 사실 보조적인 수단이야. 본 실력을 발휘하려면 역시 8명 안에 들어가야겠지만, 운이 좋아 올라간다 해도 동생처럼 내공이 높으면 힘을 많이 못 쓰겠지.”
“전 강호 경험이 부족해서 왠지 언니가 어려운 상대가 될 것 같아요.”
“어머!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호호호!”
여희선의 아름다운 용모와 묘하게 흐르는 색기(色氣)는 겉으로 보기엔 부담스러운 구석이 있었지만, 의외로 붙임성이 좋고 말도 많아 천서은도 서로 대화가 잘 통한다고 느꼈다. 불편함과 편함이 묘하게 공존하고 있는 것인데 그녀와 다르게 진도건에겐 그저 불편하기만 한 존재였다.
“우리 친구 검 쓰는 솜씨도 끝내주던걸?”
“아……, 그, 그렇…… 소?”
“친구, 내 눈 좀 보고 대답해 줄래요?”
“크흠!”
진도건이 헛기침을 세게 하자 여희선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천서은의 팔짱을 끼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친구가 그렇게 쭈뼛대니까 서은이한테 내가 다 미안해져. 남자가 거침없이 굴어야 여자도 좋아하는 법이라고.”
그녀의 말에 진도건과 천서은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천서은의 얼굴이나 뒤통수를 보이는 진도건의 두 귀도 살짝 빨개지는 것을 본 여희선은 즐거워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들 사이로 잠시 어색한 공기가 돌았을 때였다.
천서은에게 귓속말을 하며 연신 쿡쿡거리며 웃던 여희선이 문득 누군가를 발견하고 중앙 비무대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사람이 양자성이야. 이번 비무제의 우승을 맡아 둔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