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 제3장. 비무제 전 (4)
* * * *
비무제가 시작되기 이틀 전.
두 개의 중요한 움직임이 아주 은밀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감숙 기련산맥(祁連山脈)의 끝자락 어느 동굴.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 부딪혀 나뭇잎이나 수풀들이 고통스럽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세웠다 반복한다. 최대한 우거진 곳에 숨어 바들바들 떨던 사슴은 동굴 안쪽에서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둘러 앉아 있는 사람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잘못 짚었어. 앞서 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씨발!”
곽중(郭仲)의 자조 섞인 중얼거림에 매경엄(梅境掩)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사공흠(司空欠)의 표정도 다른 이들처럼 걱정이 가득하긴 했지만, 최대한 침착해 보고자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분석을 열심히 한 것이 실수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매경엄은 손에 든 불붙은 나무토막으로 바닥을 비추었다. 바닥엔 다섯 장의 양피지로 된 지도들이 깔려 있었는데 네 장은 산속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고 우측 하단에는 작은 글씨로 어떤 산인지 표시문이 쓰여 있었다. 다른 한 장도 특정 마을을 표시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건 치워 버려.”
매경엄이 두 장의 지도를 한 손에 쥐어 곽중에게 넘겨주었다. 곽중은 그것을 다시 품에 챙겨 넣었다. 이젠 필요 없는 정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냥 불태워 버릴 수는 없었다. 정보가 주 무기인 하오문에게 있어서 정보를 함부로 다루는 행위는 범죄나 다름없었다.
“기련산에 분명 홍천환이 있어야 했는데.”
지도상에 기련산에 표시된 지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 산 흔적은 있었지만, 그 이상의 무엇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일대를 샅샅이 뒤져도 똑같았다.
“은거지니까 너무 앞서 생각한 걸까?”
“아오, 머리 아파!”
“이젠 진짜 특정 지어야 해.”
사공흠은 기련산이라 적힌 양피지도 치워 버렸다. 남은 두 개는 모두 섬서 지역에 있는 종남산과 소화산이었다.
“한 곳으로만 특정했다가는 늦을 수도 있어.”
“그래, 둘 다 뒤져야 해.”
“섬서지부가 북쪽에 있으니까 전서를 띄워서 소화산을 뒤질 수 있게 하자.”
“그럼 우리는 종남산?”
“그래. 내 생각엔 종남산일 가능성이 커.”
“이유는?”
“강호의 눈길을 피해 숨는다면 새외로 나가거나 혹은 그만큼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도망가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겠지. 만약 그렇지 않고 등하불명(燈下不明)의 계책을 써 본다면?”
“그래서 종남산이다?”
“그래. 천무방에 의해 멸문했던 종남파와 종남산은 정파 무림의 성지. 감시의 눈길도 종남파 폐허 주변에만 그칠 뿐이지 산 전체에 미치지 않을 거야. 게다가 그들이 잠적하기 직전 혈마를 처단한 장소가 어딘가?”
“화산!”
“화산?”
“충분히 가능성 있지. 소화산이든, 근처의 여산(驪山)이든.”
“그런데 종남산으로 숨어들었다면 기련산과 무당산의 지도는 뭐지? 우리가 수색했던 지역들은?”
“개방의 기록지를 떠올려 봐. 그 세 사람 중에 악의사(惡醫師) 유변은 혈마에게 중상을 입었다고 했네. 그래도 의술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했으니 스스로 치료할 수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자신은 화산에 숨어 있고 주백자와 파사검창(破邪劍槍) 조강선이 꾸준히 흔적을 남겨 유인하면서 도망쳤다면 우리가 이 생고생을 한 이유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일리 있군.”
사공흠의 분석에 곽중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혈마와의 대결 이후에도 그들 두 사람은 중상을 입은 유변을 보호하면서도 천하오절과 정사 고수들의 협공마저 빠져나가 버린 절대고수들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도 모두 백전을 경험한 노괴들이었음을 고려하면 그 정도 꾀는 충분히 낼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기록을 떠올려 보면 그들은 개방이나 우리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각자 때로는 같이 움직이면서 유인했어. 무림맹은 그들을 어느 한 지점으로 몰아넣어서 사로잡든 죽이든 하려고 했지만, 이미 천하오절 그 위의 경지에 있던 사람들이었으니 사실 의미 없는 짓거리들을 한 것이지.”
“거지새끼들 아주 분통 터졌겠군. 무림맹은 사패련에 다 무너져가고, 자기들도 기반이었던 고수들이 혈마에 의해 죽어 나갔으니.”
“그깟 의협심 때문에 깝죽거리다 목숨 버린 거지 뭐.”
“어쨌든!”
사공흠이 다시 대화의 흐름을 바로잡는다.
“우리는 종남산으로, 섬서지부는 소화산으로 보낸다. 우린 일단 난주(蘭州)로 가서 전서부터 날리세.”
곽중과 매경엄이 사공흠의 정리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각각의 뒤에 놓았던 녹사의(綠蓑衣)를 입고 갓을 썼다.
모래로 모닥불을 덮어 불씨를 정리하고 동굴 밖 빗속으로 나갔다. 비 내리는 가운데 어둠은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세 사람은 이런 것이 일상이었다. 야행(夜行)을 위한 무공을 수련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그들이 어둠 속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빗소리에 발걸음 소리마저 묻혀 들리지 않을 때가 되었을 때, 근처 수풀에서 숨어 있던 사슴 한 마리가 슬그머니 기어 나오더니 동굴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아직 모래에 덮인 모닥불엔 그 열기가 남아 있어서 그랬는지 사슴은 그 주위를 맴돌았다. 또 몸을 세차게 흔들어 물기를 털어 냈다.
동물의 직감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갑자기 털기를 멈추고 주변을 휙휙 돌아보더니 갑자기 몸을 파르르 떨었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 작은 동굴 안쪽 조금 큰 바위 뒤에서 인형(人形)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 달아날 법도 한데 사슴은 바들바들 떨면서 그 자리에서 발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둠에 가려졌던 사람의 그림자가 계속 걸음을 옮겨 사슴의 옆에까지 다가간다. 그리고 그대로 그의 손이 사슴의 몸통을 꿰뚫었다.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몸통을 꿰뚫은 손은 간을 뽑아 버렸다. 푸드득! 하면서 엄청난 선혈이 바닥에 떨어졌다. 비에 촉촉하게 젖어 있던 갈색 털은 몸에 뚫린 구멍의 주변부터 검붉은 피로 빠르게 번져갔다. 그럼에도 사슴은 여전히 쓰러지지도 못하고 계속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마치 몸의 통제권을 잃어버린 것이기라도 한 것 마냥, 눈물이 그득한 까만 눈망울에선 죽지도 못하고 말도 안 되는 고통을 삼키고 있는 것이 비치고 있었다.
어둠에서부터 등장한 남자는 간을 그대로 입에 가져가더니 뜯어먹기 시작했다. 입 주변을 피칠하고 또 목을 타고 몸에까지 흘러내리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입안 가득 뜯어낸 간 조각을 잘근잘근 씹어 내고 또 꿀떡꿀떡 삼키는데 직전에 사공흠 등 세 사람이 그 광경을 보았다면 소스라치게 놀라 기절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 뱃속이 뜨뜻하구나. 크크크!”
뜨거운 간과 핏물을 들이키고 배불렀는지 남은 것들은 바닥에 버려 버리고 옷에 쓰윽 손을 닦았다. 피에 물들어도 티가 나지 않는 흑의와 대비되게 머리카락은 완전히 새하얀 백발의 노인이었다. 수염은 깔끔하게 면도하였는데 씩 웃음으로 드러나는 이빨 사이사이 핏물을 가득 머금은 모습이 섬뜩하기 그지없다. 두 눈엔 광기마저 엿보인다.
“종남산이라…… 슬슬 가 볼까.”
장포의 두꺼운 두건을 머리에 덮어쓰고는 옷이 비에 젖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지 주저하는 기색 없이 동굴 밖으로 나섰다.
그제야 사슴이 철퍼덕하며 쓰러졌다. 백발노인이 억지로 붙잡고 있었던 목숨이, 영혼이 이제야 비로소 떠나갔는지 눈망울의 빛이 꺼져 있었다.
어둠과 빗소리는 백발노인의 오감을 흐트러뜨릴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오문의 세 사람을 발견하고 나무 위로 몸을 날렸다.
“홍천환을 찾을 때까진 죽일 수 없지. 크크크!”
백발노인은 홍천환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하오문이 그것을 찾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을 목숨으로 겁박하는 것보다 조용히 뒤따라가는 것이 찾을 확률이 높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비단 그들뿐이랴.
작금 무림의 정보를 다루는 문파들과 유력자들 사이에선 홍천환의 정체가 암암리에 퍼져 있었다. 그 위치에 가장 근접한 문파가 하오문일 뿐. 이미 많은 그림자가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하오문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그 위치를 추적하고 있었다.
백발노인.
그렇다면 그는 누구이기에 홍천환을 찾는 것일까?
감숙의 성도 난주에는 서방만물점(西方萬物店)이라는 고물상이 있었다. 서역에서부터 온 진귀한 물건들이나 혹은 변방에서 찾기 힘든 중원의 물건들을 취급하는 곳이어서 많은 상인이 오고 가는 곳이었다. 그 건물 바로 뒤편에는 반대쪽에 입구를 낸 모란객잔(慕蘭客棧)이 있었다.
난주를 찾은 상인들 대부분은 다양한 물건들의 매매를 서방만물점에서 진행하고 쉴 때는 모란객잔을 찾기도 해서 서로 다른 업종이었지만 상부상조하는 관계였다.
하지만 두 건물의 구조를 살펴보면 그사이에 석조 벽이 세워져 작은 공간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양 건물에 가려져 있고 위로도 두 지붕에 대부분이 가려져 있어서 그런 구조물이 있다는 것조차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사공흠, 곽중, 매경엄은 모란객잔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그곳에 간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곳이 하오문의 감숙지부였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두 건물 사이 공간 아래의 지하에 거점이 있었고, 두 점포의 점원들 모두 하오문의 관리하에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점원들과 눈빛을 주고받고는 일반 손님인 척 동전을 건네 방을 잡았다. 그리고 점소이는 약속된 2층 구석의 방들로 안내하였다.
“쉬고들 있게. 전언은 내가 날리고 오겠네.”
“젖은 옷은 내놓으면 새 옷들을 드리겠습니다.”
점소이의 말에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사공흠은 제일 구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은 비밀공간과 연결된 방이었기 때문에 인접한 방들은 언제나 빈방으로 두는 것이 이곳의 규칙이었다.
사공흠은 익숙하게 침상 아래 다리 쪽에 있는 기계장치를 건드렸다.
드드득!
작은 마찰음이 들리면서 침상이 사선으로 들렸고 그 아래로 계단이 드러났다. 사공흠은 그 지하로 통하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일반 층고의 절반밖에 안 되는 높이의 어두운 복도를 기어서 얼마간 들어가자 곧 다시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나왔다. 거기까지 내려가 마주친 철문을 열자 촛불들로 어둠을 밝힌 공간이 나왔다. 천장과 벽면으로 작은 창이 있어서 그곳으로도 희미한 빛이 들어왔고 한쪽 벽면엔 비둘기들이 있는 새장 20여 개가 눈에 들어왔다. 구석엔 침상이 있었고 새장이 걸려 있는 곳 반대쪽엔 세 개의 탁자들이 벽면을 따라 있었다. 거기서 한 노인이 작은 전지(傳紙)에 글씨들을 적고 있었다. 붓을 든 그의 손 옆엔 이미 접수된 다양한 정보들이 담긴 전지들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 쌓여 있었다.
“장 영감. 아무래도 소화산과 종남산을 수색해야 할 것 같소. 섬서지부가 소화산을 수색하고 지금 감숙에 넘어와 있는 사람들은 종남산으로 가는 게 좋겠소.”
“잠시만.”
그는 쓰던 내용을 마무리 짓는 데 집중했다.
사공흠이 그 글귀를 힐끗 보았다.
『사교도 준동 감지, 감찰과 잠행에 주의 요망』
사공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교도 준동?”
중원은 도교와 불교 정도가 종교의 주를 이루고 있었지만, 새외에는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교(邪敎)가 다양했다. 불교와 도교처럼 어떤 신이나 깨달음, 선지자 등을 추종하는 형태의 종교도 있었지만, 자연의 신을 추종하거나 어떤 선동가가 종교적인 교리를 만들어 사람들을 모으는 일도 있어 매우 다양했다.
하오문은 이런 것들을 사교도라 보고 감시해 왔는데, 대부분 무림인의 그것처럼 무공을 다룰 수 있는 자들이 주축이 되어 움직이는 무리가 많았다. 이들 중 일부는 장성을 공격하거나 장성에 보호받지 못한 국경을 넘어 백성을 약탈해가는 무리도 많아 주로 관군이 견제를 해 왔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나라의 치안이 다소 어지러워지면서 이들이 움직이는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관군은 무림에도 협조를 요청하였는데 사패련에선 하오문이 이런 변방에까지 지부를 설립하여 이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각 사교마다 개성이 강해서 잘 뭉치지 않는데, 10여 년 전부터 이들이 하나로 모이려는 조짐들이 보이었네. 그런데 아무래도 그게 현실이 되지 않았나 싶네.”
장 영감이 가래 끓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심상치 않군요. 그런데 준동이라면 침략 행위가 있을 수 있다는 겁니까?”
“침략이라. 청해에 유목민과 기마민족들을 이끄는 종파가 있어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놈들이 제일 위협적이겠지만, 아직 통일된 움직임은 없네. 그런 거야 사실 관군이 움직여야 할 일이고. 그것보단 몇 개 종파가 하나로 뭉쳐서 중앙의 지휘 아래 움직이는 듯한 조사 결과가 나오고 있네. 이들의 종자로 파악되는 인간들이 최근에 이곳 감숙이나 사천으로 들어온다는 보고도 있네.”
“그래요?”
“몇 년 동안 홍천환만 쫓느라 변방 소식은 잘 모르는구먼?”
“하하……, 그런 것 같네요.”
“놈들이 어떤 목적으로 움직이는지는 모르지만, 조심할 필요가 있네. 놈들이 만약에 홍천환을 알고 있다면 어찌 되겠는가?”
“중원에 세력도 없는데 오랑캐 사교도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끌! 자네가 그들에 대해 모른다면 지레짐작해 봐야 좋을 것 없네. 가능성은 모두 고려해서 움직이는 게 자네 목숨 길게 가져갈 수 있는 길이야.”
“마주칠 수도 있다는 말씀이시오?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는 말이네.”
“흐음……!”
그들이 어떤 규모와 힘을 가졌는지 알고 있는 바가 없으므로 사공흠도 어떤 식의 위험이 다가올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크…… 머리 아프구먼.”
잠재된 위협이라고 하더라도 도무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그는 일단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을 접기로 하였다. 그가 생각하는 더 분명한 위협은 다른 지점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문과 비혈단은 어떻습니까?”
“조심하고 신속하게 움직여야 하네. 같은 사패련의 비호 아래 있지만, 놈들은 우리를 아래로 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공격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네.”
“후우……! 역시 그런가요?”
“살문은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비혈단은 검림이나 구룡문 둘 중 한 곳과 은밀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모양이야.”
“역시……. 저도 그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습니다.”
“구룡문이야 자체 세력이 크지만, 검림은 소수 정예이지 않나? 비혈단 같은 조직과 연대하면 충분히 대외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니까 같은 편이라 보는 게 맞을 걸세. 문주님도 같은 생각으로 그들을 주시하고 있는 것 같더군.”
“그렇다면 차라리 천무방주님께 소식을 전달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좋은 생각이군.”
장 영감도 사공흠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방에서 고수 몇 명을 추려서 홍천환을 찾는 그들과 일찍 합류할 수 있다면 그 이후엔 하오문도 더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이후에 벌어질 수 있는 혼란은 천무방이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오문의 입장은 그들에게 그럴 만한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천하제일을 다투는 천무경은 둘째 치고 그 휘하의 삼장로는 모두 엄청난 괴물들이었다. 천하오절을 제외하면 다음으로 거론되는 것이 천무방 일장로 대호거궐 백두기였고, 장태환과 노지신 두 장로 또한 상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한 고수들이었다.
천하제일을 논할 때 파천무봉과 백령신검은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사파제일의 문파를 논한다면 단연 천무방을 꼽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세 장로에게 있었다. 그 아래 세 당주도 그들보다 위의 고수들을 쉬이 찾기 어려울 정도로 실력과 명성이 대단하니 검림과 구룡문이 힘을 합치지 않는 한 단독으로 천무방을 무너뜨릴 힘을 가진 문파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럼 전서 잘 써서 날려 주십시오.”
“며칠간 긴장 속에 살아야 할 테니 푹 쉬고 가게나.”
“고맙습니다, 영감님.”
쉬고 가라는 말 때문인지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는 장 영감에게 꾸벅 인사를 건네곤 계단을 올라가 숙실로 빠져나왔다. 마침 방 안엔 그 점소이가 새 옷을 들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준비한 뜨거운 물로 몸을 깨끗이 씻고 이내 침상에 몸을 뉘었다. 앞으로 며칠 간은 쉬지 않고 달려서 종남산을 뒤져야 할 터였다. 생각만 해도 피로감이 더해지는지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젖은 옷을 받은 점소이는 2층 탕비실의 빨래통에 젖은 옷을 던져넣고는 1층으로 내려왔다. 늦은 밤, 술시(戌時) 마지막에 이르렀기 때문에 점주는 이미 집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그래서 비번(非番)인 그가 해시(亥時)가 지날 때까지 객잔을 지킬 예정이었다. 그 이후엔 문을 닫고 1층 쪽방에서 잠을 청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끼익!
문이 열리면서 흑색 장포와 두건을 두른 채 비에 쫄딱 젖은 자가 들어왔다.
“잘 방 혹시 있수?”
두건에 가려져 인상착의는 잘 보이지 않지만, 사이사이 보이는 백발과 늙수그레한 목소리로 보아서는 나이 지긋한 노인인 듯했다. 말투는 변방 사투리가 살짝 섞여 있어서 그런지 억양이 조금 특이했다.
“예, 3층에 방이 남아 있습니다. 내어드릴까요?”
“부탁 좀 함세.”
“그럼 저기 탁자에 앉아 계시면 방에 뜨거운 물을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그러지.”
노인이 탁자에 앉자 점소이는 그에게 뜨거운 차를 가져다주었다.
“몸 좀 녹이고 계십시오.”
점소이는 차를 건네주면서 힐끗 얼굴을 살폈다. 탁자 가운데 양초 불빛에 비친 노인의 얼굴은 주름이 제법 있긴 했지만, 소싯적 꽤 잘 생겼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특히 수염을 전혀 기르지 않은 것이 특이했다.
“고맙네.”
노인이 웃으며 찻잔을 받았다. 그 웃음을 본 점소이가 속으로 생각했다.
‘표정이 참 자상하구나.’
점소이는 다시 한번 미소로 예를 갖추고 3층으로 올라갔다. 뜨거운 물을 길어 나를 생각하니 벌써 어깨가 쿡쿡 쑤셔 온다.
그런 점소이의 뒷모습을 노인은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호록!
찻물을 한 모금 들이킨다.
이때 노인의 눈빛을 점소이가 보았다면 소름에 몸을 떨었을 것이다. 반달을 그린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의 그 빛은 얼음장보다 차갑기 그지없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