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 제3장. 비무제 전 (3)
보름간 출전 신청을 지속해서 받았던 터라 신청 기간 막바지에 이르렀던 탓인지 대기 줄은 길지 않았다. 반 각 정도의 시간을 기다린 후에 천서은, 도태무, 여희선은 모두 등록서를 작성하고 실력에 대한 심사를 받기 위해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세 사람이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중에 주유현이 진도건을 툭 건드렸다.
“자네는 정말 나갈 생각이 없나?”
“소인이 무슨 재주가 있어 나가겠습니까? 아가씨를 지키는 임무만으로도 버겁습니다.”
“훗! 버겁기는. 서은이의 실력이 자네와 비교해서도 충분한데. 내가 보기엔 직책만 호위무사지 서로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좋은 경쟁상대가 될 수 있어.”
“과찬이십니다. 아마 아가씨의 실력을 본다면 주 대인께서도 놀라실 것입니다. 소인은 많이 부족합니다.”
“오, 그 정도인가? 기대되는구나. 그런데 그 정도 실력이라면 호위무사도 사실 필요가 없을 텐데. 굳이 자네를 계속 대동하는 게 설명이 안 되지 않나?”
“아……, 그렇긴 하군요.”
“겸양도 과하면 좋지 않아. 사내가 패기가 있어야 여자들의 관심도 끄는 법이네.”
“하하하……”
주유현의 말에 진도건이 멋쩍게 웃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도판수와 전연의 관심을 끄는 부분이 있었다.
두 사람이 보기에도 천서은은 이 비무제에서 최대 강적이나 다를 바 없었다. 여자의 몸이라고는 하나 그 천무방주의 딸이니 범상치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도태무가 무례를 무릅쓰고도 도발해 보려 했던 것은 그녀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가늠해 보고자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고 되려 호위무사란 자에게 당했는데, 그들이 보기에 아무런 존재감도 느껴지지 않았었기 때문에 조금 심적 충격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도 호위무사란 자의 실력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호위무사는 당연히 지켜야 할 대상보다 강했을 때 성립되는 지위였지만, 진도건이라는 세 글자의 이름은 88세의 난약파 장문인이라는 백전을 경험해 본 노괴도 들어 보지 못한 무명(無名)이었다.
천무경이 제자를 아직 들인 적이 없다는 소문과 더불어 천무방이라는 문파가 대외적으로 폭넓은 활동을 보여 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양성하고 있는 젊은 무인들의 잠재력이 궁금해지는 대목이었다.
“거기 도판수 형님 아니요?”
뒤에서 걸걸한 외침이 들려왔다. 도판수를 비롯한 진도건도 제법 익숙했던 주태소의 목소리였다.
“주태소? 네가 여긴 웬일이냐?”
껄렁대며 걸어오는 주태소를 보고 도판수가 반갑게 다가갔다. 서로의 전완까지 두텁게 잡고 당기며 동지의 끈끈한 정을 확인했다.
“하하하! 난 여기 오지 말라는 법 있소?”
“이 자식! 몇 년 동안 본산에도 코빼기 한 번 안 비추냐?”
“그래서 내 여기 누구 하나 와 있을 줄 알고 왔소이다. 비무제 끝나면 본산에 가서 총표파자(總票巴子)도 뵐 생각이오.”
“그래, 나와 같이 가자꾸나. 널 보면 총표파자께서 성을 내실 게다.”
“영감탱이는 아마 신경도 안 쓸 거요. 왔냐? 하고 말겠지.”
“으하하하!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태무 출전시키려고?”
“그래, 자격시험 때문에 경기장 안에 들어갔다.”
그 이름이 불리길 기다렸던 것처럼 마침 경기장에서 천서은과 도태무, 여희선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특히 도태무는 멀리서도 주태소를 바로 알아보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태소 형님께 인사 올립니다.”
“오냐! 오랜만이구나, 태무야.”
주태소가 도태무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으면서 푹 끌어안았다. 두 사람 나이 차이가 7세로 많지 않았고, 도판수 일가와 주태소가 오래전부터 친했기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관계가 깊은 편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천무방 따라 겸사겸사 놀러 왔지. 너도 출전할 것 같았는데 과연. 실력 좀 늘었느냐?”
“형님에 비하면 아직 많이 부족하구나.”
“좋다! 그럼 오랜만에 지도를 좀 해 주마. 저 샌님을 꺾을 수 있는 비책을 알려 주마.”
“예?”
주태소의 손가락이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누굴 가리킨 것일까?
도태무가 주태소의 팔을 따라 뒤를 돌아보니 그 끝에 서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진도건이었다.
“하…… 하하! 형님 저까짓 출전도 안 하는 겁쟁이 놈이 뭐라고……. ”
“너 출전 안 하냐?”
“그렇소.”
주태소가 물어 진도건은 대답했다. 주태소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데 한쪽 검미가 치켜 올라가며 기분 나쁘다는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이번에는 천서은을 바라본다.
“이봐, 천가 공녀. 너 얘 출전 안 시킬 거냐?”
“전 하라고 하지만, 욕심이 없다며 거절했어요. 본인 의사가 그런데 제가 별수 있나요?”
“하아…….”
주태소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 천무방은 뭐 그리 잘 나서 저런 놈들을 숨겨 두려고 하나? 이런 때일수록 힘을 과시하는 게 정상 아닌가?”
“뭐예요?”
천서은이 순간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 반응에 주태소가 피식 웃었다. 그는 진도건을 잠시 힐끗 바라보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출전 신청을 하는 자리였다.
그는 출전 신청을 받던 흑패단 무사를 노려보았다.
“이봐, 나 녹림의 낭아도 주태소다. 내 이름 들어봤겠지?”
“엇! 예, 옙! 그렇습니다!”
“출전은 본인이 직접 해야 하나?”
“그, 그렇습니다만…….”
“오늘만 그 규칙 수정하지. 내가 보증해서 출전시키고 싶은 놈이 있거든.”
“아……, 원래는 그럴 수 없긴 하지만, 이미 몇몇 분은 대리로 작성하고 가셨으니 크, 크게 문제될 것은…….”
“시원해서 좋군.”
주태소가 씩 웃으며 무사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곧장 붓을 들어 명부지(名簿紙)에 가져갔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도판수와 도태무가 궁금해서 그의 옆으로 쫓아왔다. 그리고 그는 주태소가 써 내려 간 아홉 글자를 읽었다.
천무방 탈명검 진도건(天武幇 奪命劍 進刀乾).
도태무가 키득거리더니 그 아홉 글자를 큰 소리로 읽었다.
“천무방 탈명검 진도건!”
“무슨 짓이오?”
진도건이 놀라 다가왔다. 그의 기척에 주태소의 눈이 빛났다. 손은 이미 허리춤의 도병을 쥐고 있었다. 진도건의 목소리에 반응하여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몸을 돌린다. 진도건은 조금 화난 기색으로 주태소에게 다시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그의 오른팔의 위치와 보이지 않는 그 손에서 섬뜩함을 느낀다.
슛!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뒤로하며 도광이 그의 허리에서부터 시작해 진도건을 목을 노렸으나 그에 반응한 진도건의 목젖 앞으로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진도건이 황급하게 뒤로 몰러섰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가까이 있던 천서은, 주유현도 난약파와 대붕채의 사람들 모두 당황하며 거리를 벌렸다.
공간이 발생하자 주태소가 신나서 주저하지 않고 칠랑구유도를 펼쳐 냈다.
채채챙!
불꽃이 연달아 튀며 철의 비명이 고막을 자극한다.
어느새 진도건의 손에 들린 검이 주태소의 도와 어지럽게 어울리며 그 기세에 물러섬을 보이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보고 놀란 것은 도판수, 도태무 일가와 전연, 여희선 사제들이었다. 주태소가 보여 주는 도세가 그의 전력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스스로 그 전면에 섰을 때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만큼 그의 명성이 주는 위압감과 더불어 제삼자 관점에서 바라보는 도세는 무척 날카롭고 파괴적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그저 겉보기에 평범하게 보이던 호위무사란 자가 위축된 것 없이 받아 내는 것이다. 특히 최초의 발도는 그 누구도 쉬이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빨랐는데 그것을 피해 내고 다음 자세로 이어가는 진도건의 반응을 떠올리면 놀라운 구석이 있었다.
카캉!
짓쳐 드는 연격을 흘려 내며 반격하는 진도건의 검에 주태소도 무리 없이 피해 내며 재반격을 이어간다.
일순 주태소의 안광이 번뜩인다.
무겁게 한 호흡 담아낸다.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기운과 함께 일순간 십여 개의 도광을 뿜어낸다. 열 마리 늑대들에 포위당하는 형국.
견랑격세의 일초.
익숙하다.
최초의 만남에서 겪었던 한 차례뿐인 경험에 불과했으나 이미 진도건의 몸은 그때를 기억하여 반응한다.
격랑 같이 덮치는 도세 속에서 그의 검이 다시 한번 그때와 같은 기묘한 호를 그리며 몇 개의 도광을 감싸 부쉈다.
눈에 보이는 도세의 흐름 속 허맥을 찾아 꿰뚫는 순간,
주태소도 그의 기이한 검격에 당했던 기억에, 뚫렸던 오른손과 가슴팍으로부터의 후유증으로 올라오는 통증을 잘근 씹어내며 도세의 변화를 가져간다.
그때처럼 견랑격세의 도세가 무너지는가 싶더니 주태소의 신형이 진도건의 검을 지나쳐 파고든다. 좌권을 뻗으며 하단을 노리고 끊어 차는 견제에 진도건이 급히 피해 내는데 아주 잠깐 균형이 무너진다.
주태소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도를 쥔 손으로 진도건의 오른팔을 쳐 내니 흔들렸던 균형이 완전히 꺾인다.
다시금 내지른 하단 차기에 가격당하며 무릎을 꿇는 진도건의 목은 어느새 주태소의 서슬 퍼런 낭아도의 칼날 앞에 놓여 있었다.
진도건은 저항을 그만두었다.
주태소의 공격에 반응하긴 했지만, 스스로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지금 같은 상황에선 발악하려고 하는 순간 아마 목이 날아갈 것이다.
물론 주태소가 그의 목을 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가 겪어 본 주태소는 시원스러운 성격을 가졌다. 게다가 그에게서 경계해야 할 만한 살기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주태소!”
천서은이 화가 나 소리쳤지만, 그녀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녀가 어쩌지도 못하고 당황하고 있을 때,
주태소가 자신의 칼날 앞에 무릎 꿇은 진도건을 거만한 얼굴로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날. 네 검에 입은 부상 따윈 내게 문제 되지 않았다. 그저 순순히 잡혀 준 것은 네놈에게 흥미가 생겼을 뿐이지. 그런데 출전하지 않는다면 널 여기서 살려 줄 이유가 없다. 내가 네놈에게 가진 흥미가 헛된 것이 아님을 보여 줘라.”
주태소의 말은 장내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출전명부를 담당하던 흑패단 무사들은 명부에 적힌 탈명검 진도건이란 이름과 그 주인을 놀란 눈으로 번갈아 바라보았다.
전연의 실눈 사이로 진도건을 바라보는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여희선은 흥분에 몸을 떨었다. 강한 사내는 언제나 흥미로웠다. 당장이라도 비무대 위로 올라가 실력을 겨뤄 보고 싶은 마음과 침소로 끌고 들어가고 싶어 하는 생각이 교차했다.
도판수와 도태무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낭아도 주태소는 단순히 녹림칠악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자였다. 모두 오십 줄 이상의 나이임을 고려했을 때 현재 36세라는 그의 나이는 상징성이 있었다. 잠재적인 실력만으로 그는 차기 총표파자에 오를 수 있는, 녹림이 가장 아끼는 재능이었다.
그가 만약 20대에 비무제에 한 번이라도 출전했다면 그가 우승했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목소리가 녹림 내에서 나왔을 정도였다. 그런데 어디 그가 방심했기로서니 쉽게 당할 인간이던가?
“후우……! 알겠소. 출전하겠소.”
진도건이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주태소는 픽 웃음을 흘리곤 도를 거뒀다.
진도건은 하의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그는 잠시 주태소를 노려보았다.
주태소는 태연하게 웃는 표정으로 그 눈빛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말이야. 남자 새끼가 아랫도리에 고추 달고 좀생이처럼 굴어 대면 네 아씨가 좋아할 줄 아느냐?”
퍽!
“억!”
지근거리에서 갑자기 배를 때리는 손에 진도건은 미처 반응을 못 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패설(悖說)에 놀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아프지도 않으면서 입에선 비명이 새어 나오고 자기도 모르게 몸을 살짝 웅크렸다. 그의 당황한 시선이 천서은에게 닿았는데 그녀의 표정이 묘했다.
“크하핫!”
그의 귀가 빨개지는 모습을 본 주태소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는 천서은에게 다가갔다.
눈이 마주치자 주태소가 다시 씩 웃는다.
“천무방의 공녀라면 어설프게 배려할 생각은 말고 당당하게 원하는 걸 얘기하라고. 저렇게 감질 맛나게 우물쭈물하면 어디 나중에 남자 구실 하겠어?”
“무슨 이상한 말을!?”
“크크! 신경 쓰지 마.”
화들짝 놀라는 천서은의 모습에 주태소가 연신 킥킥거리면서 손을 휘휘 저었다. 그리곤 도판수와 도태무의 사이로 들어가 두 사람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끌어당겼다. 그에겐 너무나 당연한 으레 거만한 표정으로 진도건을 바라보았다.
“걱정 마라, 태무야. 저놈 검이 요상해서 그렇지, 별거 아니다. 내가 깨뜨릴 수 있도록 알려 주도록 하마.”
“예, 옙!”
진도건은 녹림의 세 사람을. 아니, 정확히는 주태소의 거만한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걸어갔다. 그가 향한 사람은 주태소가 아닌 천서은이었다.
시선을 돌려 천서은을 바라보았다.
천서은은 아직 주태소의 패설 때문에 당황한 기색을 벗지 못하고 있었는데, 순간 진도건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아……!”
천서은은 천혼당에서 진도건이 곽유소와 한판을 벌인 후에 보았던 그의 눈빛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지금이 바로 그러했다.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어, 그래요.”
진도건은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다시 한번 주태소의 거만한 시선을 힐끔 마주했다.
천서은에게 그리고 자신에게도 들으라는 식의 희롱에 가까운 말을 내뱉은 것이 그를 조금 자극하긴 했다. 산적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수준이 어디 가겠느냐라고 생각하면 별거 아닌 일이다. 하지만, 방금 그에게 제압당한 상황은 묘하게 그의 자존심을 흔들었다. 스스로 애초에 주태소를 사로잡았다는 것을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그것이 설령 운에 의해 가능했던 일이라도 그에겐 너무나 분명하게 경험한 사실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처음엔 무덤덤했던 감정이 그의 도발 섞인 말에 의해 흔들리면서 자존심까지 건드렸다.
오기(傲氣)라는 것이 생겼다.
거만할 지위도 아니고 승리에 오만해질 생각도 없지만, 주태소의 말과 행동과 그 눈빛은 묘하게 경쟁의식을 자극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는 모두를 지나쳐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청검단, 적도단, 흑패단에서 선별된 검시관(檢視官)이 보였다.
거의 막바지였기 때문에 오전부터 대기 줄이 거의 없었다.
그는 청검단 검시관에게 다가갔다.
시험을 보겠냐는 말에 대답하면서 그가 던지는 목검을 받는다.
검시관은 검을 들고 자세를 잡으며 말한다.
스무 합을 받아 내면 통과이며 자신을 꺾어도 된다고 한다.
시작이라는 말과 함께 그가 빠르게 파고들어 정교한 일초를 선보인다. 그리고 그의 접근을 가만히 기다리던 진도건이 출검한다.
뻑!
목검이 부러지며 반 토막 난 것이 땅에 떨어졌다.
미처 초식을 펼쳐 내지도 못하고 그대로 선 채 굳어 버린 청검단 검시관에게 진도건은 멀쩡한 자신의 검을 건네주었다.
손을 포개 목례로 예를 갖춘다.
검시관의 허망한 눈빛을 뒤로하고 진도건은 경기장을 빠져나간다.
경기장에 시험 보러 들어갔는지도 까먹을 정도로 금방 걸어 나오는 진도건의 모습에 그를 기다리던 6인의 얼굴에 놀라움과 어이없다는 표정이 동시에 떠오를 때.
주태소가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넌 뭐 가서 오줌 싸고 왔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가뜩이나 진도건과 주태소의 한 판으로 모두의 이목을 끌었던 터였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소문은 그 웅성거림을 타고 사패련과 허창 전체로 퍼져 나가며 비무제에 대한 기대감에 들썩거린다.
청검단, 적도단, 흑패단의 검시관은 모두 강호무림에서 그 명성이 대단했던 자들.
그 시험을 단 일초에 끝내 버린 자의 이름.
탈명검 진도건.
그럴싸한 그 무명(武名)은 놀랍게도 무명(無名)이었다.
“재밌군.”
장내의 소란이 잦아들었다. 객잔 2층의 창가 탁자에 홀로 앉아 있던 양자성의 얼굴엔 흥미로운 표정이 아직 가시지 않고 있었다.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세 사람.
첫 번째, 소문으로만 듣던 천무방 공녀의 미모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는 것.
차가운 듯한 눈매를 가졌으나 백옥 같은 피부 위에 마치 신이 조각한 것만 같은 미모는 소문대로 아름다웠다. 화려한 예복을 입고 있었으면 오히려 아쉬울 만큼 무복 차림 위로 드러나는 가슴과 허리, 둔부의 굴곡을 보고 있으니 가슴 깊이 감춰둔 욕정을 들끓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당장이라도 취하고 싶군.’
멋대로 굴었다가 천무경의 주먹에 목숨이 성치 않을 것이니 그 생각은 도저히 길게 가져갈 수 없다.
두 번째, 녹림칠악 낭아도 주태소의 존재.
녹림의 위세는 사패련 3강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다. 천하오절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는 없었지만, 그 바로 아래에 있을 만한 절정고수들이 많다. 주태소도 그중 하나인데 그의 나이를 참작한다면 그 위치는 양자성 스스로가 단숨에 뛰어넘어야 할 자다.
당장에 그와 겨뤄본다면 이길 수 있는가?
모르겠다.
아마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그를 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왜?
‘나는 검림의 수장 백령신검 강정학의 제자이자, 천하제일검이 될 남자니까.’
당연히 뛰어넘어야 하는 대상인 것이다.
세 번째, 진도건이라는 이름을 가진 천서은의 호위무사.
소문들을 동냥에 취합해 본다면 본래 비무제 출전할 생각이 없었지만, 주태소의 도발에 휘말려 출전할 모양인 것 같다.
실력이 좋은지는 모르겠다.
내공을 수련한 자라면 경지에 올라 스스로 기운을 갈무리할 수 있기 전까지는 자연스럽게 나오는 기운의 흐름이 있는데, 그가 보기엔 보잘것없었다.
주태소에게 제압당한 것을 보면 상정 외의 절정고수라던가 하는 수준은 당연히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검을 쓰는 방식은 어딘가 모르게 독특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와 꽤 닮아 있었다.
결국엔 제압당하긴 했지만, 주태소의 도세를 파훼하는 솜씨가 그의 방식과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었다.
한 번쯤 검을 섞어 보고 싶었고 멋지게 굴복시킨 후, 천서은을 취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앞선 두 사람에 비해 생각의 비중은 작지만, 그래도 꽤 생각이 닿게 되는 자다.
그의 야심과 욕심은 저 하늘 태양에 닿아 있었다.
그 누구도 그의 위에 서 있을 수 없고, 그가 갖지 못할 것도 없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힘이 필요했으며 그만한 힘을 가질 자격도 있었다.
현시대 천하제일검이 그의 스승이며, 백령신검의 모든 것을 가져올 수 있는 재능이 자신에게 있다고 자신했다.
‘비무제는 그 시작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