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 제3장. 비무제 전 (2)
허창은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이 북적이며 활기가 넘쳤다. 다만 갑자기 불어난 사람들 절반 이상이 무림인이다 보니 그들이 패용하고 있는 도검이나 각종 병장기가 분위기를 흉흉하게 만드는 구석도 있었다. 그 때문에 관청에서도 곳곳에 군관과 병사들을 배치하여 치안이 유지되도록 노력하였고 사패련도 무사들을 파견하여 감시할 수 있게 하였다.
사패련의 무사들은 가입된 각 문파에서 차출된 자들이었다. 사패련은 무사들의 실력 수준으로 계급을 나누고 다루는 병기나 특징에 따라 4개 단으로 구분 지었다. 합격진을 짜기 적절한 도검을 다루는 무사들은 각기 적도단(赤刀團), 청검단(靑劍團)으로 묶었고 개개인의 개성을 중점으로 난전에 유리한 자들을 묶은 것이 흑패단(黑覇團), 암습이나 정보수집, 기동에 특화된 자들을 백영단(白影團)으로 편성하였다.
주유현은 적도단의 부단주였다.
일반적으로 백영단은 허창과 그 주변 전체에 군중과 그림자 속에 은밀히 숨어들어 다양한 동태를 파악하고 정보를 수집하였다. 흑패단은 단원이 가장 많으면서도 실력이 다소 뒤떨어졌기 때문에 사패련 내외로 두루 배치되었고 적도단과 청검단은 주요 지점의 감시나 치안 보조, 행사 진행을 주로 담당하여 진행하였다.
사패련은 수십 개의 문파가 가입된 연합체지만, 의사결정에 직접 간섭하는 가장 핵심적인 문파는 총 5곳이었다.
현 무림의 3강이라고 할 수 있는 산서의 천무방, 안휘의 검림, 호북의 구룡문을 비롯하여 산동(山東)의 칠성파(七星派), 절강(浙江)의 서호항가(西湖杭家)가 지휘부에 속해 있었다. 이 중 칠성파 장문인(掌門人)인 구치소(丘治消)의 동생 구치상(丘治想)은 칠성도존(七星刀尊)이란 별명과 함께 천하오절 중 한 사람으로서 그 지위가 있었다. 칠성파가 3강보다 힘은 다소 약했지만, 구치상이 상징하는 바가 컸다. 그러나 종합적인 평가로는 금태하보다 아래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이 5개 문파만이 사패련 내전에 그 숙소를 마련할 수 있도록 사전에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유현은 천무방 일행을 해당 숙소로 안내해 주었다. 숙소별로 문파 내 회의를 진행할 수 있는 회의장이나 대회를 위한 수련장도 각각 준비되어 있어서 다른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는 적절한 준비가 갖춰졌다.
도착한 무사들 모두 여장을 풀고 씻을 때, 천서은과 진도건이 마지막으로 주유현을 만나 대화하고 있었다.
“우리 조카를 볼 수 있는 게 1년에 한 번 정도뿐인데, 해가 바뀔 때마다 계속 이뻐지는구나.”
“에이, 삼촌도 참. 칭찬 계속해 줘요.”
“하하하! 네 애교에 내 기분이 다 좋구나.”
주유현이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천서은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누이인 주약화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천무경과 다르게 우울함을 잘 극복한 상태였다. 그에게 이젠 해마다 커가는 조카의 모습을 보며 흐뭇하고 기특할 따름이다.
“딱 봐도 작년보다 훨씬 성장한 게 느껴진다.”
“어때요? 제가 우승할 거 같아요?”
“4강은 확신한다.”
“우승은요?”
“후후! 녀석. 이 삼촌 조카의 재능을 의심하진 않아. 하지만, 검림과 구룡문의 후인들인 양자성과 황사열 모두 만만치 않아. 특히 양자성은 내 눈으로 봐도 정말 뛰어나.”
“그 정도예요?”
“검에 관련한 천재라는 얘기가 있더구나.”
그때 문득 두 사람의 시선이 진도건에게 쏠린다. 주유현도 그와 면식이 있었고 천무방에서 어떤 기대를 받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듣기론 진 위사와 대련을 많이 했다던데?”
“네. 절 많이 도와줬죠.”
“그 경험은 도움이 꽤 될 거다.”
“그래요?”
“우연히 그의 비무를 구경한 적이 있었는데, 딱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진 위사란다. 아마 무공 수준 자체는 양자성이 훨씬 높겠지만, 검술 그 자체로만 본다면 진 위사도 뒤지지 않을 것 같아. 알다시피 사패련의 비무제는 내력 대결이 금지니까 진 위사도 충분히 해볼 만도 하지. 진 위사는 출전 안 한다며?”
“예, 그렇습니다.”
“아쉽게 됐군. 자네와 인혼당주가 대련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거늘.”
“출전 등록을 따로 해야 되죠?”
“그래.”
“어디서 해야 하는지 안내 좀 해 주세요.”
“그래, 같이 가자꾸나.”
세 사람은 숙소를 빠져나와 사패련 중심지로 향했다.
사패련 성곽의 가장 동쪽이자 허창 도시 성벽과 가까운 지점에 비무제를 위한 경기장이 세워져 있었다. 안에는 500여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객석이 중앙 비무대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세워져 있었고, 사패련 성곽과 도시 성곽에서도 경기장 안쪽을 충분히 구경할 수 있을 만큼 단계적으로 높이가 형성되어 있었다.
많은 무림인 사이를 걸으면서 주유현이 입을 열었다.
“출전 등록은 경기장 입구에서 접수하고 있단다.”
“접수만 하면 끝이에요?
“청검단주 장예찬(張銳燦)과 적도단주 우형(雨螢), 흑패단주 고응탄(孤鷹彈)이 간단한 합을 겨뤄 실력을 시험하고 있다. 그들 모두 단주직을 수행할 정도로 절정고수들이니 제시하는 수가 쉽진 않지만, 너라면 충분히 통과할 거다.”
“당연하죠. 삼촌, 전 이번 비무제에서 꼭 우승하고 싶어요. 그래서 천무방의 이름을 세상에 알려 줄 거에요.”
“기특한 소리를 다 하는구나.”
세 사람의 걸음걸이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물론 시선의 9할 이상은 모두 천서은을 향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런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녀의 미모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무복을 입고 있어도 가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파인들의 성향을 생각한다면 추파를 던지며 접근하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옆에 있는 사람이 적도단 부단주인 주유현이 있었기에 그 누구도 쉽게 접근하지 않았다. 그가 직접 인솔하고 있다는 것은 그녀의 지위나 신분이 생각보다 높을 수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꼬이는 것은 어쩔 수 없군.’
그들을 똑바로 향하여 접근해오는 걸음과 그 시선의 목적이 명확하게 느껴진다. 그것을 느낀 것은 주유현도, 천서은도 마찬가지다.
청년 남녀 두 사람과 그들 뒤의 중년인과 노파 두 사람이었는데 앞서 있는 자들의 그 차림이 눈길을 끌었다. 특히 젊은 남자는 호피무늬의 두건과 민소매 가죽옷을 입었는데 그 근육의 단단함이 고스란히 늘어났다. 잔 흉터가 눈에 띄는 거친 피부는 꽤 시원스러운 외모가 두드러지게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등 뒤로 얼핏 보이는 대도(大刀)는 거의 그의 건장한 체격으로도 모두 가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젊은 여인은 무척 고혹적인 분위기와 외모를 가졌다. 가슴 굴곡 위를 간신히 가리는 궁장을 색 끈으로 몸에 달라붙게 조여 움직임을 편하게 하였는데 신체의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어깨로는 백색의 투명하고 얇은 옷감을 걸쳤는데 그 뒤로 비치는 살결과 짙고 달콤한 사과 향취(香臭)가 지나치는 남성들의 욕정을 자극하는 부분이 있었다.
“멈추시오.”
“누구 앞을 가로막느냐?”
도발적인 기세가 꽤 노골적이었기에 진도건은 앞장서면서 양측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러자 다가오던 호의(虎衣) 남자가 앞서더니 손을 쭉 뻗었다. 멱살을 움켜쥐기 위함이었다.
툭!
호의 남자 도태무(刀太務)는 자신의 손이 막히자 내심 놀랐다. 스스로 실력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자에게 손이 막히자 뿔이 났다.
진도건이 손을 쳐 내자 도태무의 두 손이 어지러운 변화를 일으키며 아예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러나 진도건의 눈에는 그 변화의 결이 눈에 뻔히 보였다. 예측하기 어려운 순간에 손을 뻗는데 어느새 호의 남자의 두 손목을 잡아챘다.
도태무의 이마에 핏발이 섰다.
“건방지게!”
스릉!
그의 앞차기에 진도건이 손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 어느새 호의 남자가 등 뒤의 대도를 쥐기 위해 손을 가져간 순간, 그는 그대로 자리에 얼어붙었다. 등골을 타고 차가운 식은땀이 흘렀다.
도병을 쥔 순간에 언제 뽑았는지 진도건이 검을 뽑아 목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물러서거라!”
뒤에 있던 중년인이 도태무의 어깨를 잡고 뒤로 당겼다. 험상궂은 얼굴과 짙은 눈썹, 수염과 장발에 합쳐져 도태무와 마찬가지로 호피 가죽옷을 걸치고 있는데 녹림 산적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과하지. 천무방 세가 많이 죽었다고 들었는데 호위무사 솜씨가 놀랍군.”
“노여움은 거두시고 양해 부탁드립니다.”
진도건은 검을 역수로 거두고 손을 모아 인사하였다. 머리 숙인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면서 중년인도 그를 시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간신히 억눌렀다. 당하고는 못사는 성격이었지만, 호위무사 실력이 제대로 파악이 안 되고 그 뒤의 사내는 적도단 부단주였다. 주변에 있던 적도단과 청검단 무사들의 시선이 이쪽에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대붕채주(大鵬寨主)님의 자제분은 혈기왕성하군요.”
주유현이 진도건의 옆으로 와 인사를 건넸다.
도판수(刀板修)는 녹림칠악의 한 사람이자 녹림십팔채(綠林十八寨)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대붕채의 수령이었다. 녹림의 도적, 산적 기질은 여느 문파의 그것과 달랐기에 사패련에 가입한 것은 아니지만, 협력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그들 일부는 사패련의 비무제에 종종 제자들을 보내곤 했는데 대붕채는 하남 대별산(大別山)에 그 산채를 두고 있어 가까웠기 때문에 자기 아들인 도태무와 함께 온 것이다.
“천서은이 도판수 선배님께 인사 올립니다.”
그의 정체를 들었기에 천서은도 앞서 나와 예를 갖추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도판수는 뒤로 물렸던 도태무를 다시 잡아끌었다.
“반갑네. 이놈은 내 아들인 도태무라네.”
“너도 비무제에 출전하느냐?”
도태무가 대뜸 진도건을 보며 물었다.
“그는 출전하지 않아요.”
“하! 마음에 안 드는 놈이로군”
도태무가 썩은 표정을 지으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자존심에 상처가 생겼으니 비무제에서 되갚아 주려고 한 모양이었다.
그 옆의 고혹적인 미모의 여인도 천서은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난약파(蘭葯派)의 여희선(呂姬仙)이에요.”
“저도 반가워요, 천서은이에요.”
두 사람의 미모가 칙칙한 남자들 사이에서도 그 화사함을 뽐냈다. 마주 보는 눈빛은 마치 천서은마저 유혹하려는 것만 같았다. 천서은 묘한 부담을 느끼면서 여희선의 인사를 받았다.
여희선은 뒤에 있던 노파도 소개했다.
“이분은 제 스승님이신 난약파 장문인 전연(全緣)이세요.”
“대선배님께 인사드립니다.”
주유현과 천서은, 진도건이 모두 노파에게 깊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전연의 나이는 88세로 난약파의 장문인이면서 현재 사파무림에서 활동하는 인물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축에 속했기 때문에 그 문파의 위세가 강한 편이 아니어도 모두 그녀에게 존경을 표했다. 자글자글한 주름과 작은 체구는 그녀를 나약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얇은 실눈 사이로 서슬 퍼런 눈빛을 본다면 그 생각이 큰 착각이라는 것을 누구나 깨달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살아온 세월만큼 깊은 내공과 거기서 나오는 옥적단봉(玉笛短棒)을 다루는 무공은 신묘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평가였다.
전연은 가볍게 든 손짓으로 대충 인사를 받고 시선을 거두었다. 젊은이들의 기 싸움엔 별 관심이 없다는 몸짓이었다.
“혹시 나이가 어떻게 돼요?”
“전 스물다섯이에요.”
“어머! 제가 한 살 언니네. 아차! 그래도 바로 반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죠?”
“괜찮아요. 말 편하게 하셔요.”
“호호호! 근데 이분은?”
“이름은 진도건. 제 호위무사에요.”
“우리 무사님은 나이가 몇 살이실까?”
진도건과 천서은은 순간 당황스러웠다. 여희선이 진도건의 앞섬을 잡더니 마치 끌려가 곧 안길 것처럼 가까이 접근하니 그 숨소리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당연히 부담스러웠던 진도건이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여희선이 그의 앞섬을 놓지 않고 있었으니 어찌하지 못했다.
“아……, 스물 여…… 섯이오.”
“어머! 나랑 동갑이네. 우리 친구 할까요?”
“하하, 그, 전……. 글쎄……”
진도건의 얼굴에 난감하다는 표정이 그대로 늘어났다. 눈이 떨리면서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불편한 자세가 계속될 때, 천서은이 진도건의 앞섬을 잡고 있던 손을 붙잡고 그녀를 살짝 밀었다.
“친구 좋죠. 하지만 진 위사님은 쑥맥이라 이러면 곤란하니 이 손은 놓아주시겠어요?”
“어머, 미안해라. 내가 실례했네.
그녀의 차가운 미소에 여희선은 웃으며 손을 놓고 물러났다. 두 사람 사이로부터 느껴지는 묘한 기류에 여자의 촉이 발동한다.
‘호호! 두 사람 재밌네.’
천서은이 아무렇지 않은 척 웃음 짓고 있지만, 눈치가 빠른 몇 사람은 공기가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도 있었다.
주유현은 잠깐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기 위해 나섰다.
“두 사람은 출전 등록을 마쳤습니까?”
“저희도 이제 하러 가야 해요.
여희선이 그에게 미소를 날리며 대답했다. 주유현이 어색하게 그 미소를 받으며 입을 열었다.
“크흠! 그럼 같이 갑시다.”
주유현이 안내의 손길을 내밀며 앞장서자 그 뒤를 천서은과 진도건이 곧장 뒤따랐다. 대붕채와 난약파의 네 사람도 그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