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 제3장. 비무제 전 (1)
천무방의 행렬의 시작은 50여 명으로 시작해서 그들을 쫓아 뒤따르는 강호인들의 규모는 기백을 훌쩍 넘어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특히 그들이 황하를 넘어 하남의 성도 정주(鄭州)를 지날 때는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비무제가 열릴 때면 천무방은 그저 인사치레 성격으로 소수 인사만 파견해 오고 했기 때문에 사실상 그들의 명성을 눈으로 확인할 길이 없었으니 오늘을 기회로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이었다. 또 사패련에 들어서면 그 이후로는 비무제가 끝날 때 외엔 그 행렬을 보기 어려우니 마침 여건이 맞는 사람들은 지금에 미리 봐 두고자 하는 의욕도 크게 작용했다.
행렬의 규모가 이렇게 증가한 데는 천무방 나름의 포석도 있었다.
그동안 여러 민관의 어려움과 의뢰를 도우며 지역의 신뢰를 쌓긴 했지만, 그 근간이 사파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므로 분명 신용에 대한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총관 서일헌은 이 기회를 활용하고자 했다.
규모는 소규모로 꾸려 모든 사람이 한눈에 볼 수 있게 하되 천무방주를 직접 전면에 서게 하여 그 주목도를 한 번에 끌어모았다. 또 이동 속도를 충분히 시간을 두고 천천히 가져가면서 군중들의 심리가 모이도록 하는 효과를 얻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패련에 도착했을 때는 직접 많은 인력을 동원하는 등의 수고를 할 필요 없이 천무방의 위세를 그곳에 모인 다른 문파들이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허창의 북쪽엔 관청(官廳)이 있었고 조금 북동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그보다 더 큰 규모의 성곽과 건축물들이 세워져 있었으니 그 정문엔 ‘사패련’ 간판이 붙어 있었다. 그 내부에 그 권위를 상징하듯 높이 건축된 전각의 꼭대기 창가에선 두 노인이 창 너머를 통해 사패련으로 들어 오는 천무방 행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별 행사들은 불참하며 쥐 죽은 듯이 지내더니 이번엔 요란하게 등장하는군.”
“큭큭! 이건 서일헌이 그 녀석 작품인가?”
“그렇겠지.”
한 사람은 청의(靑衣)의 백발과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 인상적인 노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붉은 무늬가 있는 흑의(黑衣)에 당당한 체구, 사자 갈기처럼 뻗친 반백의 머리카락과 수염을 가진 노인이었다.
앞서 얘기한 사람은 바로 검림의 총수(總帥) 백령신검(白靈神劍) 강정학(姜靜鶴)이었으며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는 자가 현재 사패련의 련주이자 구룡문주이기도 한 흑사왕(黑邪王) 금태하(金太河)이었다.
사패련은 8년에 한 번씩 새로운 련주를 선출하는데 그 임기에 맞게 4년에 한 번씩 치러지는 비무제의 성적을 반영하여, 임기 중 두 번째 치르는 비무제 우승자를 배출한 문파가 련주직을 맡는 것이 관례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올해가 금태하가 사패련주를 맡은 지 8년 차였기 때문에 올해 우승자를 배출한 문파에서 다음 사패련주를 맡을 예정이기도 했다.
“천무경이가 제자를 들이지 않아 그동안 비무제에 출전시킬 사람이 없었는데 올해 누가 출전할 예정인지 알고 있는가?”
강정학이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고 금태하를 보며 물었다.
“천가 딸년이 올해 나이가 됐을 것이오.”
“그렇군. 여자의 몸으로 어디까지 보여 줄지 기대가 되는군.”
“킬킬! 난 딸년 얼굴이 더 궁금한데? 듣기론 제법 미모가 뛰어나다고 하던데.”
“끌! 그 나이 처먹고 욕심부리다가 천가에게 맞아 죽는다.”
“크크크크! 그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던 바지!”
생각만 해도 흥분된다는 듯 몸서리까지 치면서 웃음을 터뜨리는 금태하의 모습에 강정학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두 사람도 천무경과 같이 당대 천하오절로 거론되는 사람들이었기에 결코 그 무공이 천무경에 뒤지지 않았다. 특히 강정학은 천하제일을 논할 때 천무경과 함께 제일 먼저 이름이 오르내리는 자였다.
“그래도 오랜만에 온 거물급 손님인데 맞이해 줘야지.”
“그럽시다, 크크!”
두 사람은 동시에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층층마다 조금씩 넓어지는 지붕을 타고 어느 정도 내려가더니 앞으로 쏘아지듯 두 사람의 신형이 허공을 갈랐다. 마을 건물들의 지붕이나 중간중간 깃대들을 한 걸음씩만으로도 넘어가는데 마치 허공을 거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일부 사람들이 하늘에서 두 사람이 지나가는 모습을 포착하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퍼져 나갔다. 천무방의 행렬을 11자로 모여 지켜보던 사람들도 그 소란을 듣고 시선을 돌리는데 두 사람은 바람처럼 그 시선들도 지나쳐 나아갔다.
천무방 행렬의 소문은 일찍이 허창까지 이어졌었기에 이미 사패련에서 무사들이 나와 도시 안으로 들어선 행렬을 맞아 주고 있었다.
천무경은 이미 그들을 마주하여 대화를 나누고 있다가 멀리서부터 날아오는 강정학과 금태하를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유현아, 저 노괴들이 아주 요란을 떨며 등장하는구나.”
주유현(天流玄)은 천무경의 아내 주약화의 동생으로 천무방에서 사패련에 파견된 인물이었다. 그는 누이인 주약화의 10살이나 어린 동생이었는데, 주약화가 죽고 천무경이 주유현을 볼 때마다 슬픔에 잠기자 스스로 천무방을 대표해 사패련에서 일을 하겠다고 자진해서 파견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그 때문에 천무경은 그를 매우 아꼈고, 때때로 그가 천무방에 돌아올 때면 다시 떠날 때까지 매일 잔치를 열어 그를 극진히 대접해 주었다.
“매형께서 직접 행차하신 것을 의식하신 모양입니다.”
주유현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의 태도는 매우 정중하고 예절이 몸에 배어 있어서 흡사 정파의 협객을 보는 듯했는데 제 누이인 주약화의 품성과 매우 닮아 있었다. 천무방이 예전부터 사파의 거두로 악명이 높았지만, 꽤 상식이 통하는 문파로 분류되는 이유는 천무경이 주약화를 비롯한 주씨 가문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었다.
천무경은 말에서 내려왔다. 그는 내려온 김에 주유현을 한 번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마중 온 무사들을 지나쳐 두 노인을 맞았다.
“모두 오랜만이외다.”
“크크! 천무방 구석에 숨어 지내는 줄 알았는데 이리 요란하게 등장하나 그래?”
“하하하! 련주께선 여전히 입이 험하시구려.”
천무경과 금태하가 서로를 보는 눈빛은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했다. 일부러 과장되게 웃어넘기면서 살기를 죽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강정학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험상궂었던 분위기가 착 누그러들었다.
강정학이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먼 길 잘 오셨네.”
“오랜만입니다, 총수.”
강정학은 멋을 아는 사람이었다. 걸음걸이나 손짓에도 옷자락이 어떻게 펄럭일지 신경을 쓰는 듯 무언가 품위가 있는 듯했다. 푸른 비단의 의복이 짐짓 화려해 보이긴 했지만, 그 외모에서 흘러나오는 분위기가 조화롭게 잘 어울렸다. 만약 그런 화려한 복식 대신 도복을 입혔다면 충분히 노도사로 착각할 만했다.
천무경과 강정학은 호사가들이 천하오절 가운데 천하제일은 누구냐? 라고 했을 때 제일 먼저 거론되는 이름들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서로에게 경쟁의식이 매우 강했는데 특히 강정학은 자신보다 열 살이나 어린 천무경이 자신과 같은 경지라는 것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일정 수준 이상의 경지에 오르면 나이라는 것은 무색해지기 마련이지만, 그 경쟁의 위치가 하늘 아래 단 하나뿐인 자리였고, 지금 자리에 이르기까지 항상 독보적인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서로에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생각은 금태하라고 다르지 않았는데, 그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위에 누군가 있다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본래 구룡문은 서로 다른 성격과 무공의 대표성을 띠는 9인이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거대 방파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연합체였다. 따라서 구룡문의 문주는 이들 아홉 계파의 수장들이 1년마다 한 번씩 문주를 맡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금태하의 대에 이르러서 그의 압도적인 무력과 폭력적인 성향이 다른 여덟 계파를 힘으로 강제하는 형태가 되었는데 그 누구도 그에게 반항하지 못하고 복종하게 되었다.
그 경쟁적인 구도 안에서도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게 된 데다가 사패련주까지 오르게 되다 보니 이번 비무제에서도 자신의 제자가 우승하길 강력히 바라고 있었다.
“듣자니 자네 여식이 비무제에 출전할 거라고 하던데. 어디 얼굴이나 한번 보자.”
금태하가 천무경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은 진도건은 먼저 말에서 내려 천서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의 도움을 받아 말에서 내려가 천무경 옆으로 걸어갔다. 진도건은 그녀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화려한 예복이 아닌 단조로운 무복의 차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걸음걸이를 옮길 때마다 좌우 도열했던 사패련 무사들은 그녀의 미모로부터 쉬이 눈을 떼지 못했다.
“소녀 천서은이 사패련주님과 검림 총수 선배님께 인사드립니다.”
“열 살배기일 때 봤던 그 어린 꼬맹이가 이렇게 아름답고 훌륭하게 컸구나. 네 아비가 자랑스럽게 생각할 만하구나.”
두 손을 모아 고개 숙여 인사하는 천서은을 강정학이 인자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천서은은 내심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인자한 눈빛 뒤에 숨겨진 그녀의 몸속까지 훑어 내는 사파무림 거두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 느낌은 비단 그에게서만 느껴진 것이 아니다.
“키야! 고 쪼끄마한 게 이리 컸누? 그렇게 칙칙하게 입어서야 어디 시집이나 가겠나? 갈 데가 없으면 이 할애비가 며늘아기 삼아야겠구나.”
“호호! 고맙습니다.”
천서은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그녀는 노골적으로 위아래를 훑어보는 금태하의 시선에 내심 치를 떨었다.
‘더러워!’
강정학의 시선이 그녀의 무공 수준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라면 금태하는 마치 기루의 기녀들에게 보이는 탐욕의 그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수련한 성과가 보이는구나. 과연 천무경의 핏줄이야. 내 제자가 심심하지 않겠어.”
“자신감이 느껴지시니 저도 한번 보고 싶군요.”
천무경이 흥미롭다는 듯 대답했다. 오래전에 하오문을 통해 강정학이 대단한 재능의 제자를 얻었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기 때문이었다.
“나의 첫째와 둘째도 뛰어나지만, 셋째 양자성(陽紫星)은 단연 최고라네. 기대해도 좋아. 이번 비무제의 주인공은 자성이가 될 것이라네. 껄껄껄!”
“크크크! 그런 말 하면 황사열(黃沙列)이 섭섭해하겠구먼.”
양자성과 황사열은 이들 두 사람의 제자로 비무제에 출전할 사람들이었다. 양자성은 강정학의 삼제자였으며 황사열은 구룡문 백호계파(白虎系派)의 제자였으나 그 재능을 인정받아 금태하가 직접 대스승이 되어 사사하였다. 금태하는 흑사계파(黑邪系派)의 영수(領首)였다.
“검림과 구룡문의 명성이 사해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소녀의 경험이 부족하니 이번 기회로 한 수 배우고 간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거 천무경 자네가 딸아이한테 겸손이란 걸 좀 배워 보는 게 어때?”
“련주부터 체통을 좀 지켜 주면 좋을 것 같소만.”
“크하하하!”
천무경의 차가운 말에 금태하가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이 참 값싸구나.’
평소에도 천무경은 금태하에 대해 악평을 하곤 했는데 천서은은 그 말이 이해가 갔다.
두 사람이 서로 성질을 드러내고 가식 섞인 웃음을 주고받을 때, 그녀는 강정학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당황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그의 시선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어깨너머 바로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있었다.
“희한한 놈이로군. 이 자는 뭔가?”
“응?”
강정학의 뜬금없는 말에 천무경이 반응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곧 그가 진도건을 가리키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 딸아이의 호위무사입니다.”
“호위?”
천무경이 피식 웃으며 대답하자 강정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눈은 천무경과 같다. 입신에 가까운 경지라 일컬어지는 화경의 고수. 당대에 그들의 눈에 간파되지 않을 무림인이란 서른 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가운데 두 사람의 눈으로 자신의 정보를 감출 수 있는 자는 금태하뿐. 노지신, 남궁평, 이혁성 정도의 수준이 되어서도 완전히 감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천서은이 느꼈던 것처럼 진도건도 그의 눈에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런 보잘것없는 놈을 호위라고 붙여 놓나?”
그의 눈에 진도건의 단전에서 느껴지는 기운의 양은 별 볼 일 없는 수준이었다. 호위의 대상인 천서은과 비교해도 어른과 어린아이 같은 수준 차이가 느껴질 정도였다.
하인이란 말에 기분이 나쁘지도 않은지 진도건은 그저 조용한 몸짓으로 두 손을 모으고 인사로 대답한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강정학의 시각에서도 감정의 흔들림에 따른 기의 파동도 느껴지지 않는다.
강정학이나 천무경의 기운이 수평선이 보이지 않는 바다와 같다면 그 앞에서 진도건의 단전은 작은 연못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수면은 외부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고여 있어 거울과 같은 느낌마저 든다.
느껴지는 분위기도 묘하다. 흔들림이 없는 것이 마치 고고하게 서 있는 대나무와도 같았다.
그의 눈으로 모든 속을 들여다보아도 그저 길거리에 흔히 발에 채는 돌멩이나 다름없는데, 묘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강 영감은 거 쓸데없는데 신경 쓰지 마시고. 천무방에서 먼 길 왔는데 빨리 짐도 풀고 밥도 먹고 해야지? 들어갑시다!”
금태하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는 자기중심적이어서 다른 이들은 공통으로 자신의 발아래 벌레처럼 보고 있었으니.
“흐음.”
강정학도 시선을 거두고 금태하의 뒤를 따랐다. 묘하게 시선이 가는 건 맞지만, 더 이상 볼 것도 없었다.
뭐 평소 태도나 이런 게 좋아서 저런 기도가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유현아, 안내를 부탁하마.”
“예, 방주님.”
주유현과 무사들이 금태하와 강정석의 뒤를 따르고 천무방을 앞장서자 천무경과 천서은 진도건도 다시 말에 올라 그 뒤를 천천히 따라 들어갔다.
천하오절 중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인 보기 드문 광경에 잠시 숨죽여 지켜보던 군중들도 다시금 저마다 이야깃거리들을 만들어 내며 웅성웅성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