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 제2장. 사패련으로 (4)
* * * *
“내 참. 진도건이 칼춤 한 번 보겠다고 세 당주가 모여 구경한다는 게 말이 되나?”
“왜 난 재밌었는데? 이 당주 자넨 어땠나?”
“상대가 별 볼 일 없었소.”
남궁평의 질문에 이혁성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조장이라는 자라면 조원보다 강해야 하는 건 당연한 건데 평이 자네는 저 친구 일에 관심이 지나쳐.”
“하하하! 하지만, 준이 자네도 알지 않나. 내가 관심 있어 하는 것은 단순히 상대적으로 강하고 약하고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뭘 얘기하는가?”
“진도건의 내공이란 사실 인급이나 지급 무사들 수준에 불과하네. 지급도 잘 쳐준 것이지.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체적인 능력과 완벽한 균형으로 천급 혹은 그 이상까지도 그 간극을 메워 내지. 어떻게 보면 외공(外功)이 뛰어난 것인데. 우리가 보편적으로 얘기하는 적수공권의 무투를 위한 외공의 성격이랑은 아무래도 좀 다르지. 오로지 검을 잘 다룰 수 있도록 단련되었다고 해야 하나?”
“흐음, 난 녀석에게 별 관심이 없어서. 이 당주, 이 평가가 맞는가?”
“대충 맞는 것 같소.”
“우리도 알다시피 결국 내공이 만능이 아님을 알고 있네. 막대한 공력을 분출시키는 기공은 상황에 따라 무엇이든 뚫어낼 수 있고 또 막아 낼 수도 있겠지만, 여러모로 제약이나 한계가 있으므로 방주님 정도가 아니면 자주 사용할 수 없지. 내공이 많은 것을 보조해 주고 능력을 상승시켜 주지만, 결국 그 그릇이 빈약하면 화경 정도 수준 가까이에 도달하지 않는 한 생사결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척도가 될 수 없네. 천하오절이 서로 비슷한 절대적인 경지에 도달한 자들을 묶어 부르긴 하지만, 방주님을 그들 가운데서도 독보적으로 보는 이유가 내외공이 완벽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닌가?”
“흠. 뭐 그렇다 치고,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그는 장로들이나 방주님의 지대한 관심을 받고 있네. 물론 그가 젊긴 하지만 아주 어린 나이가 아녀서 우리만큼의 내공을 쌓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지만, 최소한 그들 중 누군가는 그를 지원해 주고 있을지도 모르지.”
“…….파천신공을?”
천준이 내심 놀라며 물었다.
파천신공을 수련하고 있는 사람은 천무방 내에서도 천가(天家) 인물들밖에 없었다. 천무경, 천서은, 천준 외에도 이제 은퇴하고 장로전에 머무는 천준의 부친 천헌(天軒), 천준의 아들 천호상(天虎像)이 전부였다. 물론 제자를 거두게 된다면 천가 외의 사람도 파천신공을 잇게 되는 일이지만, 공식적으로 천무경에게 제자는 없었다.
천준은 그럴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와 파천신공을 전수하고 그의 기경팔맥(奇經八脈)을 타통시켜 준다 한들 같은 이미 지나가 버린 10여 년의 시간을 보상받을 순 없는 법이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천서은과 비교해 봐도 그녀의 파천신공 성취를 따라가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녀석을 제자로 들이는 일도 놀랍긴 하지만, 이제 와 수련한다 한들 죽기 전까지 오성을 뚫어내기 힘들 걸세. 방주님이 죽기 직전 직접 진신공력을 전수해 주거나 하지 않는 이상.”
“뭐 그렇긴 하지.”
남궁평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런 식으로 가능성을 일축하지 않았다.
‘혹시 모르지. 지금이야 위명이 유명무실해진 소림사에서 그 전설의 대환단(大丸丹) 같은 것이 등장하여 그의 손에 들어간다면…… 천준, 자네 수준은 가볍게 뛰어넘을지도.’
대환단.
그것을 복용하고 선지자의 인도를 받을 수만 있다면 일 갑자 이상의 내공을 단숨에 얻을 수 있다는 전설의 영약. 이외에도 대자연에서 비롯된 영약이나 영물의 내단(內丹) 따위도 큰 증진을 이룰 수 있는 기연이니 이 중 하나만 얻어도 상상 이상의 혜택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진도건이 파천신공을 익히고 그런 좋은 기연을 얻을 수만 있다면 현재 완성된 외공에 더해져 엄청난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설사 파천신공의 성취가 낮다 한들 그의 검술은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할 것이 분명했다.
‘아아! 생각할수록 흥미로운 일이야!’
강력한 도전자, 경쟁자가 생긴다는 이야기는 남궁평에게 있어서 심장을 무척이나 뜨겁게 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이혁성도 마찬가지였다. 지위에 대한 야심이 상대적으로 더 높은 천준과 다르게 남궁평이나 이혁성은 무인으로서의 가치를 더욱 우선했기 때문이었다.
남궁평과 천준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때, 이혁성은 진도건이 보여 준 검술을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복기하고 있었다. 특히 곽유소가 마지막 펼쳤던 초식은 목검을 들고 있는 진도건의 불리한 조건을 고려하였을 때, 도저히 맞상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도법의 변화들을 좇아 모두 흘려버린 진도건의 검술은 그로서도 어찌 상상해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의 수준이 자신보다 높다는 것은 이혁성으로서는 인정하기 싫은 부분이었다.
자신이라면 어떻게 대응하였을까?
일단 회피에 주력했을 것이다. 그리고 틈을 찾아 일섬뢰를 꽂아 넣었을 것 같았다.
변화를 일일이 대응하여 무력화시킨다? 손에 들린 것이 철검이라면 한 번쯤 시도해 볼 수 있겠지만, 모든 변화를 통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더 강한 내공을 이용하여 찍어 눌렀을 것이다.
여러모로 검술에 대해 그가 가진 상식에서 어긋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진도건은 언제나 그러한 방식으로 싸웠고 그 가치를 보여 왔다. 그렇다면 내가 잘못된 것일까? 그렇게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투기가 끓어오른다.
“허허, 이 사람. 옛날에도 그러더니만 또 의식하고 있구먼.”
“이 당주는 그를 너무 신경 쓰고 있어. 이 당주야 말로 본 방이 인정하는 검술의 천재인데, 너무 의식하지 말게나.”
“신경 쓰지 않았소.”
말을 그렇게 해도 투기를 가라앉히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이는 남궁평과 천준이 다시 한번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이혁성은 그들의 웃음소리에 개의치 않았다.
진도건과 그가 걷는 검의 길이 다를 뿐이었다. 단지 경쟁의식을 조금 갖고 있을 뿐.
‘나는 나의 길을 간다. 내 검은 검림까지 뛰어넘어 무림 최고가 될 것이니까.’
그의 진정한 성취를 아는 사람은 없다. 그것을 보이는 순간 모두가 경탄을 금치 못하리라 그 스스로 확신했다. 그는 이미 진도건이 도달하지 못한 곳을 오르고 있었다.
* * * *
스릉!
검집으로부터 제 모습을 드러내며 강철의 울음이 명료하게 울려 퍼진다. 달빛에 투명하게 빛나는 검신에 ‘탈명(奪命)’ 두 글자 글귀 뒤로 진도건의 얼굴이 비친다.
슛!
선 채로 정면을 향해 찔러본다. 잠시 한 호흡 쉬고는 한 발 뒤로 넓게 펼쳐 자세를 낮추면서 검을 당긴다. 다시 앞으로 일보 펼쳐 밟으며 크게 휘두른다. 다시 한 호흡 머금고 검을 휘두르니 수십 개 검광이 날개를 펼치듯 달빛 아래 잔상을 남긴다.
“곽유소의 마지막 초식을 상대한 기억을 떠올렸나요?”
진도건이 검을 거두며 뒤를 돌아보았다. 붉게 물든 단풍나무 그림자 아래에서 선홍색 예복을 입은 천서은이 그 아름다움을 슬며시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따뜻한 미소로 진도건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를 마주 보게 되니 절로 쑥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 그때 기억이나 느낌이 좋아서 잠깐 검을 잡아 봤습니다.”
“저도 그것을 보고 많이 놀랐어요. 아마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방 내에도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거예요.”
“가진 것이 일천하다 보니 잔재주만 늘었습니다.”
“호호호!”
천서은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총총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진도건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앗!”
“으이구! 또 겸양 떠시긴.”
“하하하!”
갑작스럽게 들어온 공격에 놀라면서도 그녀의 말투나 몸짓에 장난기가 가득한 것을 보니 진도건의 얼굴에도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전 사실 오늘 그 대결을 보면서 진 위사에 대해 내가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오해…… 말입니까?”
“……. 네.”
착각인가, 그녀의 입가에 풋웃음이 감돈다. 그녀는 진도건에게서 몸을 돌렸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양 볼엔 살짝 홍조가 돌고 있었다. 달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으나 그녀의 미소 띤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녀의 감정이 공유하는 설렘의 기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 달 전.
그녀가 진도건에 대해 생각하는 바는 가진 실력과 재능의 가치는 있지만, 야망이나 욕심이 부족한 사내였다. 그녀가 그에게 가진 호감은 별도로 차치하고서라도 남자로서의 매력이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 지난 한 달간 같이 비무를 치르면서 저만 성장한 줄 알았어요. 하지만, 진 위사도 실력과 자신감 모두 상승한 것이 보여요.”
“그렇습니까?”
“곽유소를 상대로 보여 주었던 그런 검술은 아무리 최고수라 이름 날린 사람들도 결코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것은 그런 검도(劍道)를 계속 유지해 왔기에 가능한 일이죠. 그건 진 위사의 검도에 대한 철학이죠.”
“그렇게 생각해 보진 않았습니다.”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그런 철학과 특징은 오직 진 위사만의 것이고, 가까운 미래엔 그것이 큰 자산이 되어서 경지에 오르는 데 도움이 될 거에요.”
그녀의 말을 들은 진도건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9세에 부모를 모두 잃어 고아가 되었고, 그렇게 1년을 말 그대로 빌어먹고 살았다. 10세가 됐던 해에 스승을 만나고 그의 검도를 사사하여 10대의 전부를 바쳤다. 그 시간은 실로 고통스러웠지만, 유일하게 그것만이 그가 무언가 매진하고 매달릴 수 있는 것이었기에 가능했고 살아갈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모든 것을 스스로 척척 개척하는 영웅적인 삶을 사는 자도 있겠지만, 꿈도 희망도 없이 그저 닥친 환경에 어떻게든 적응하여 이끌리는 데로 살아가는 자도 있다.
진도건은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목표, 야망 같은 것은 그에게 너무나 뜬구름 같은 얘기에 불과한 것. 검을 수련한 것은 삶의 끈을 간신히 붙잡을 수 있었던 수단이었는데 그것이 자산이고 철학이고 그만의 특징이라 얘기한다.
분명하지 않지만 작은 빛이 제 안에 드리워진 어둠을 조금씩 걷어 내고 있지 않나 하는 희망이 느껴진다.
천서은과 다시 눈을 맞추었을 때, 그의 얼굴엔 작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아……!’
그것은 그녀가 원하는 열정과 야심이 가득한 사내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가 줄곧 원해 왔던 하나의 이상이었음에도 진도건의 미소로부터 그녀는 묘한 뜨거움을 느꼈다. 그녀가 한 말이 그저 듣기 좋았기에 고맙다고 말하는 미소가 아니었다. 좀 더 본질적인 열의를 깨우친, 그로 인한 기쁨의 손짓이었다.
“……. 아가씨!”
진도건이 깜짝 놀라 말했다.
말리고자 외쳤지만, 어느새 천서은은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너무나 꼭 끌어안았기에 진도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두 손은 그녀를 떼어 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애매하게 든 채 덜덜 떨었다.
“이, 이러시면…….”
“그냥 잠깐만. 조용히 있어 줄래요?”
진도건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쩔 줄 몰라 했던 두 손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싸늘할 수 있는 저녁 바람결에 두 사람의 체온이 서로를 감싼다.
그의 조금은 거칠어진 호흡과 가슴을 뚫고 들려오는 심장 박동이.
그녀의 호흡을 따르는 어깨의 들썩임과 그 향기의 취함에.
감정 변화에 대한 기류가 두 사람의 영혼을 연결한다.
천서은은 조심스럽게 진도건의 품에서 떨어졌다.
“고마워요. 당신이 내 호위가 되어 주었던 해에 화산에서 날 구해 줬던 것.”
“아……, 그저 제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받아요. 언제고 돌려주고 싶었는데 이제야 드려요.”
천서은의 손에 들린 것은 진도건의 어머니가 남겨 준 손수건. 아주 희미하게 잔상만이 남아있는 어릴 때의 추억과 화산에서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진도건은 그녀의 손에서 손수건을 돌려받지 않고 그대로 그녀의 손을 감싸 쥐도록 하였다.
“괜찮다면 계속 갖고 있어 주십시오.”
“제가 너무 늦었나요?”
진도건이 짓궂은 표정으로 씩 웃었다.
“늦었죠. 그러니 돌려주시려면 작은 보상 정도 하나는 주셔야 합니다.”
“어머? 그런 말도 할 줄 알아요?”
“으흠!”
진도건이 목을 긁적이며 멋쩍게 시선을 피했다. 천서은은 웃으며 손수건을 품속에 다시 갈무리하였다.
“그래요, 내가 진 위사에게 선물을 줄 만한 게 뭐가 있을지 생각해 볼게요.”
“고맙습니다.”
뜻밖의 포옹에서부터 비롯된 묘한 설렘과 이어진 대화들로 인해 떨리는 가슴을 주체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밖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애써 참아 내지만 언제 이런 행복감을 느껴 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처음 겪는 일이었기에 그의 얼굴에 웃음이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오늘 잠은 외전 천혼당 처소에서 자나요?”
“네.”
“오늘도 고생했어요. 이만 들어가서 쉬어요.”
“알겠습니다. 좋은 꿈 꾸길 바랍니다.”
두 사람이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가만히 손을 흔드는 그녀를 향해 조심스럽게 예를 표하고 돌아서서 나섰다. 자리를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천서은의 표정에도 그의 행복한 감정의 웃음이 겹쳐 드러났다.
천혼당 처소에 돌아온 진도건은 몸을 깨끗이 씻고 준비된 편한 의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가만히 운기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자연의 작은 소리나 하인들의 조용한 인기척들, 촛불이 휘청거리는 광휘의 자극들이 느껴졌지만, 그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둘씩 지워져 간다. 행복했던 감정과 온갖 상념은 집중하는 정신의 인도에 따라 심연 밑으로 가라앉는다.
소주천과 대주천을 이루며 태을신공 호흡의 길을 따라갈 때.
아주 미세하게 감지한 인기척.
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작은 상념이 머릿속을 스칠 때, 그의 등을 자극하는 두꺼운 손바닥이 맞닿는 감각이 전해졌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기의 파도가 그의 온몸을 헤집어 놓기 시작했다.
“큽!”
악다문 입술 사이로 새 나오는 신음.
거대한 기의 흐름이 기경팔맥을 타고 대주천을 강행한다. 발달하지 않은 기혈(氣穴)이 강제로 개방되며 마치 벼락을 맞은 듯한 엄청난 고통이 신체와 정신을 관통하였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흐를 무렵, 거대한 파고를 동반한 밀물처럼 들어왔던 기류(氣流)는 썰물처럼 빠져나가듯 등에 맞닿았던 장심을 통하여 사라졌다. 그리고 온몸에 남아 있는 뜨거운 기운에 적응하지 못한 진도건은 그대로 혼절하듯 잠에 빠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