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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9화 (9/432)

9화 - 제2장. 사패련으로 (3)

슈슈슉!

살의(殺意)라 할 만한 의지가 담겨 있는 참격들이 날아든다. 서둘러 회피하는 진도건의 신형을 도광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주태소의 모욕적인 언사는 분명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러나 그것은 이 대결을 제대로 마무리 짓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목검을 상대로 철도(鐵刀)를 드는 것은 반칙이라는 생각 따윈 그저 머릿속에 잠깐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승부의 매듭을 그의 승리로 마무리 짓는 것만이 그의 욕심으로써 머릿속에 가득 찼다.

콰콰콰콰!

흑승참결(黑僧斬結).

그렇게 이어진 십여 개의 도광이 소용돌이처럼 몰아칠 때, 곽유소는 눈앞의 미래에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아닌 참혹한 결말을 그려 냈다.

짧은 시간.

“훕!”

먼저 한 호흡 단전에 담아냈다.

파팟!

두 번째, 재빠르게 보폭을 조절하고 자세를 낮춘다.

명료하게 빛나는 두 눈으로 몰아치는 도광들을 쳐다보며 그 속에 과감히 목검을 휘두른다.

타타타탕!

곽유소의 돌진하는 그 흐름에 몸을 맡기며 도광을 따라 목검이 움직인다. 마치 모든 움직임을 예측이라도 한 듯 진도건의 목검이 짓쳐 드는 도광의 배면을 때리며 밀쳐 냈다. 순식간에 진도건을 덮쳐 난도질할 것만 같았던 도광은 그의 몸에 닿지 못하고 흘려져 버렸다.

곽유소의 표정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경악이 떠올랐다.

도광의 방향은 모두 달랐기에 같은 철검이 아닌 목검으로 도신을 때려 그 궤적을 바꿔 낸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의문은 접어 둔다.

흑승참결의 공격이 막힌 것도 아니고 흘려진 이상, 곽유소의 신체는 무방비나 다름없다.

슈슛! 푹!

“윽!”

곽유소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그의 왼쪽 어깨 부근에 진도건의 목검이 꽂혀 있었다. 첫수는 피해 냈지만, 두 번째에 결국 당한 것이었다.

진도건이 목검을 거두었다. 당연히 출혈은 없었다. 진검이었다면 꿰뚫려도 이상하지 않았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근육과 인대가 상했음은 분명했다. 하지만 곽유소의 머릿속엔 그런 사실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이 쓰러지지 않았고 아직 오른손엔 도가 쥐어져 있다는 것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의 신형은 물러서는 진도건을 쫓았다.

흑사월도(黑死月刀).

도기를 담은 강력한 도격이 진도건을 종횡으로 덮친다.

왼손은 옷의 가슴팍을 움켜쥐고 팔을 겨드랑이에 바짝 붙여 흔들림을 줄인 상태.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자세가 완벽히 안정되었다 할 수 없었다.

도기는 무엇이라도 벨 것만 같았지만, 그 동작에 예리함이 부족하다.

거의 동시에 펼쳐 내는 종횡연격이라도 그 사이에 간극은 존재하는 법.

횡보로 내려치는 도격을 회피하고 다시 횡격이 날아올 때, 진도건은 이미 일보 전진한다. 왼손을 몸에 붙인 채 펼쳐 곽유소의 도를 쥔 손을 직접 막아 내고, 곽유소가 밀어붙이는 힘을 이용해 공중에서 회선 하며 목검을 휘둘렀다.

뻑!

목검은 그대로 곽유소의 머리를 강타하며 반 토막으로 부러졌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나무 파편 아래에서 곽유소의 신형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는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그의 오른손에서 벗어난 낭아도는 그대로 땅에 떨어져 쓰러졌고, 눈은 까뒤집혀 흰자위만 드러낸 상태였다. 약간의 출혈도 있어서 옆으로 뉜 얼굴 아래로 약간의 피가 고이기도 했다.

그의 기세는 대단했지만, 결국 진도건이 완벽하게 승리하였다. 그러나 딱히 기뻐하는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 그저 조심스럽게 곽유소의 목덜미 맥문을 짚어 보며 그의 상태를 점검할 뿐이었다.

“후우!”

깊은 한숨이 진도건의 입에서 토해져 나왔다.

초고도로 집중력을 발휘한 탓에 직면한 상황을 머릿속으로 정리할 만한 여유가 없어서 미처 자각하지 못했었지만, 이 시점에서 그는 목검으로 진도를 상대로 이긴 것이었다. 곽유소의 변화무쌍한 초식들을 막아 내고 필요한 몇 개의 반격을 가했던 순간들을 떠올려 보니 이게 요행이 아닌가 스스로 되묻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이 원류검결이 가진 요체였다.

모든 공수는 흐름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을 순간순간 이해하고 반응하여 흐름이 약한 지점이나 흐름 사이의 간극을 찾아내어 간섭하고 제어하는 것.

초식의 틀은 시전자를 중심으로 흐름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초식들을 연계할 수 있다면 승기는 그 시전자가 주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사이의 흐름에 간섭하여 수비하고 반격할 수 있다면 그 주도적인 흐름을 파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흐름을 온전히 역전시키기 위해선 일격에 급소를 찌를 수 있는 쾌검이야말로 진도건에게 있어서 가장 효율적인 공격수단인 것이다.

짝짝짝!

박수 소리에 진도건의 시선이 그 소리를 찾아 향했다. 그 소리가 제법 크고 과장됐기에 연무장의 사람들도 일제히 그를 찾았다.

서일헌의 옆에 있던 주태소는 어느새 무사들 사이를 비집고 나와 연무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연무대 위 진도건과 두 눈을 마주치며 당당한 발걸음을 내디딘다.

근처에 다다랐을 땐 훌쩍 뛰어 위로 올라선다.

좌중은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녹림칠악, 낭아도 주태소. 그리고 진도건이 직접 제압하고 포박해서 끌고 왔던 사내.

명백하게 그는 그리 쉽게 제압당할 사내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세 당주들과도 능히 실력을 겨뤄 볼 수 있을 만한 실력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방심이라는 치명적인 실수는 언제든지 커다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법이다.

그는 왜 이 자리에 올라온 것일까?

진도건과 다시 승부를 겨뤄 보기 위해서일까?

그가 발걸음을 옮겨 곽유소가 놓친 도를 집어 회수하였을 때, 사람들은 그 도를 던진 사람이 바로 그라는 것을 깨달았다.

목도검의 대결에서 어느 한 사람에게 날이 선 무기를 쥐여 준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문제를 안겨 주는 행위. 상식적으로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기에 그 순간에 분노한 사람이 있기도 했다. 장학을 비롯한 조원들이 그랬고 지켜보던 천서은도 그러했다. 그녀는 자신의 검도 던져 줄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완벽한 대응을 해내는 진도건을 보면서 스스로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주태소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진도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오른쪽 가슴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너에겐 갚아 줘야 할 것이 있지만……”

다시 자신의 낭아도 칼자루를 툭툭 건드린다.

“이걸로 대신한 것으로 하지.”

“이상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제 목이 떨어질 뻔했습니다.”

“애초에 시시한 싸움일 수 있었던 것을 재밌게 만들어 주지 않았나? 이 정도도 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아리따우신 천무방 공녀를 호위할 수 있겠나?”

그는 천서은에게 시선을 던지며 한쪽 눈을 장난스럽게 찡긋거렸다.

“우웩!”

그와 눈이 마주친 천서은이 짐짓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보인다. 그러다 진도건과도 눈이 마주치자 급히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주태소를 다시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

“진 위사에게 패배한 자가 신경질 부리는 거로밖에 안 보이는데. 너무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니 황당하네요.”

“으하하하! 뭐 틀린 말이 아니니 인정할 수밖에 없군.”

주태소는 진도건의 어깨를 툭 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건 내가 사과하지. 미안하게 됐네.”

“됐소이다.”

“하지만 우린 나중에 다시 한번 붙어 봐야 할 거야. 내가 지난 한 달간 요양하면서 결심한 게 있는데 말이야. 내 꼭 널 부하로 삼아야겠거든. 하하하하!”

주태소가 웃음을 터뜨리자 진도건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주태소는 웃음과 작별의 손짓을 남기며 연무대를 내려갔다. 그리고 이내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일헌과 함께 천혼당을 빠져나갔다.

“곽유소를 의원에게 데려가거라.”

장학이 외치자 천급 무사 몇이 연무대 위로 올라가 곽유소를 부축하여 데려갔다. 당주들은 제각각 흥미로운 표정을 하며 역시 천혼당을 떠났고 일부는 장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지러워진 연무대에서 내려와 그 옆의 연무대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 진도건의 옆으로 천서은이 다가와 앉았다.

“진 위사의 검술은 정말 놀랍네요.”

“별것도 아닌데 과찬입니다, 아가씨.”

“그렇게 겸손할 필요 없어요. 주태소가 저렇게 크게 웃었지만, 속으로는 아픈 기억이 떠올랐을 거예요. 명색이 녹림칠악인데 진 위사한테 포박당한 채로 끌려온 기억이 생생하게 났을걸요?”

“다시 맞붙는다면 그는 방심하지 않을 겁니다.”

겸손을 멈추지 않는 진도건의 모습에 살짝 심통이 오른다.

“흥! 장담하건대 다시 겨뤄도 진 위사가 이길 거에요. 지면 날 지킬 수 없는데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요?”

“후후! 알겠습니다. 다시 겨뤄도 꼭 이기도록 하겠습니다.”

천서은은 진도건의 손을 잡고 주먹을 꼭 쥐게 하며 흔들었다.

“바로 그 자세에요. 지금 그 자세를 잊지 말아요.”

툭!

천서은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가볍게 툭 쳤다. 그리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갔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늘도 대결까지 했으니 푹 쉬고 내일 내전으로 와요.”

“알겠습니다.”

인사하는 진도건을 뒤로하고 천서은은 곧장 천혼당을 빠져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도건은 그녀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조금 긴장되었던 탓에 참았던 숨을 토해 낸다.

“후!”

툭!

“억!”

갑자기 어깨를 치는 손길에 진도건이 억 소리를 내며 휘청거렸다. 뒤를 돌아보니 나지룡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는데 그 뒤에 선 장학 이하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진.도.건! 산서제일미녀 천서은의 호위무사 직을 사수하다!”

피식!

나지룡의 과장된 몸짓과 목소리에 진도건은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재밌습니까?”

“재밌다 뿐이오? 역시 진 조장 검술은 눈을 호강시켜 주는 게 있다니까.”

“훨씬 날카로워진 게 느껴져.”

나지룡의 말에 관무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관무영은 장학 이하 조원들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갖춘 자였다. 평소에 과묵한 것을 생각해 보면 그가 대뜸 그렇게 평가한 것은 그 대결이 그에게도 놀란 부분이 있다는 얘기였다.

“확실히 진 조장의 검은 검술을 바라보는 지평을 넓혀 주는 무언가가 있어.”

관무영의 말에 장학도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진도건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공녀님과의 대련들 이후로 뭐 제대로 쉬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돼서 내가 괜히 미안하군.”

“아닙니다, 부당주님. 저 곽유소란 사람은 혹시 처벌하실 겁니까?”

“그럴 것까지 있겠나? 그래도 나름대로 차기 조장직을 이을 만한 녀석이긴 하지만, 실력과 비교하면 자중할 줄 모르니 아직 멀었어. 뭐 처벌해 봐야 회복할 동안 근신하는 정도겠지. 녀석은 천혼당에서 더 오래 굴러 봐야 해. 조장은 무슨? 어림도 없지. 안 그래?”

“하하, 그렇습니까?”

“이만 다들 돌아가시죠. 곧 중식(中食) 때입니다. 진 조장도 정비를 좀 해야죠.”

“그러지. 다들 해산! 있다 보세.”

하소정이 상황을 정리하는 말을 하자 모두 각자 처소로 돌아가고 곧 연무장엔 청소하는 하인들만이 남게 되었다.

처소로 돌아가던 중에 진도건은 문득 곽유소의 상태가 궁금해졌다. 대결을 끝내기 위해 목검으로 머리를 가격하는 데 있어서 단호했기 때문에 혹시 잘못된다면 천혼당에 큰 전력 손실을 가져오는 셈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같은 방향으로 걷던 장학도 마찬가지였는데 두 사람은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고 곧장 의방(醫方)으로 향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마를 붕대로 꽁꽁 싸맨 채 정신을 차리고 탕약을 마시고 있는 곽유소를 볼 수 있었다.

곽유소는 진도건을 보자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자신이 부끄러운 짓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침상에서 내려와 진도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사과의 예를 표시했다.

“내 두말하지 않고 복종하겠소이다.”

“서로 해야 할 의무를 하면 됩니다. 정신을 차리셔서 다행입니다. 몸조리 잘하십시오.”

진도건은 그 말을 끝으로 가볍게 목례 후, 의방을 나왔다. 장학은 그 모습을 보며 가볍게 혀를 차곤 뒤따라 나갔다. 곽유소는 자신의 지난 태도가 치졸했다는 생각에 낯이 절로 붉어졌다. 그저 한숨을 푹푹 쉬며 다시 침상에 올라 베개에 머리를 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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