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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7화 (7/432)

7화 - 제2장. 사패련으로 (1)

밤사이 미동도 하지 않았던 눈꺼풀이 조금씩 떨리더니 천천히 그 문을 열었다. 하인들이 반쯤 열어 놓은 창문 틈과 창호지로 스며드는 햇빛을 받아들이며 동공이 조그맣게 모였다.

운기를 마치고 일찍 깊은 잠에 빠졌었지만, 아침이 되면 습관처럼 어김없이 반응하며 잠들었던 몸이 깨어난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침구를 간단히 정리하곤 가볍게 세안을 마치고 준비된 깔끔한 무복으로 갈아입는다.

그렇게 방을 나서면 숙소의 반대편 식당에선 음식 냄새가 솔솔 풍겨 오며 허기를 자극한다. 비슷한 시기에 하나둘 방 안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개운한 얼굴로, 어떤 이는 아직 씻지도 않은 피곤한 얼굴로. 서로를 보며 가볍게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진도건!”

등 뒤에서 들려온 반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제 훈련이 제법 고되었는지 조금 피곤한 기색이었지만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이마의 작은 흉터와 짧게 기른 턱수염이 인상이 깊은 중년의 호남아였다. 그의 이름은 장학(張鶴)으로 10대 초반부터 인혼당, 지혼당을 모두 거쳐 천혼당의 조장까지 오른 가히 천무방의 성골이라 할 만한 인물이었다.

“장 조장님.”

“아니, 이 친구 왜 이렇게 얼굴 보기 힘드나 그래?”

“어쩌다 보니 계속 내전에만 있었습니다. 그동안 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괜찮아, 괜찮아! 어서 식사하러 가지.”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가며 배급소로 향했다. 복도엔 금방 천급무사들이 가득 찼는데 진도건과 장학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며 합류하는 사람들도 다섯 명이나 더 늘었다.

관무영(關無永), 나지룡(羅智龍), 박정(朴正), 장우태(張牛態), 하소정(河少情). 이 다섯 사람은 모두 장학의 조원으로 천혼당 안에서도 특히 진도건과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천무방 공녀의 호위무사라는 중직을 맡은 이유로 진도건은 별도의 조원을 거느리지 않는 대신에 유사시에 천혼당원을 대표할 수 있는 것과 지혼당, 인혼당의 무사들을 인솔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주로 천혼당 밖을 자주 돌게 되다 보니 동료들과 깊이 친해질 기회가 없었지만, 이 여섯 명은 예외로 꽤 정을 붙이게 되었는데 모두 장학과 하소정의 공이 컸다.

장학은 천혼당 내에서의 진도건에 대한 지지를 뒷받침해 주는 사람 중의 한 명이었고, 하소정은 천혼당의 몇 안 되는 여류 무사로서 진도건에게 누이나 다름없는 태도로 대하는 인물이었다.

“오! 우리 젊은 조장님 덕분에 우리도 하남으로 바람 쐬러 가게 생겼어.”

박정이 말꼬리를 올리며 얘기하는데 장난기가 느껴졌다.

“같이 가십니까?”

“자네 형편에 그나마 우리와 어울리는 편이니 당주님께서 신경을 써 주시더군.”

“견문 넓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데 박정 자네는 싫은가 보지?”

“에이, 설마요?”

대신 대답해 주는 장학과 함께 이들 가운데서도 연장자인 장우태의 물음에 박정이 손사래를 쳤다.

나이는 장학과 장우태가 각각 45세, 44세로 이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였다. 관무영은 39세로 내년이면 그들 나이대에 합류할 예정이었고 나지룡과 하소정은 33세, 29세로 천혼당 안에서도 꽤 젊은 축에 속했다.

찬청(餐廳)에 다다르자 더 많은 당원무사들과 마주치며 인사를 받는 일이 늘었다. 안에 들어서자 오른쪽에 있는 주방에서 숙수들이 찰그락 요리용 기자재들이 부딪치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고 있었다. 푹 곤 양탕(羊湯)의 구수한 냄새가 찬청 안을 맴돌고 있었는데, 그 사이로 채소볶음의 불향이나 만두 찜통부터 새어 나오는 증기를 보고 있으니 식욕이 싹 돌았다.

탁자 대부분에는 이미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어서 몇 사람은 일찍 나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도 여기 앉지.”

양학을 따라서 다섯 사람 모두 같은 탁자에 앉아 앞에 놓은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찬청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져 곧 탁자 대부분을 가득 채울 정도로 들어섰다. 부당주 문중도 인사를 건네며 그들 옆자리에 앉았다.

“맛있게 드십시오!”

“편히들 들게.”

당원무인들이 문중을 발견하고 외치자 그가 손짓과 함께 화답하며 젓가락을 들었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진도건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여기저기 서로 다른 방향에서 오는 인사들을 받던 진도건은 가장 멀찍이 떨어진 탁자에서 처음 보는 면면이 자신을 흘깃거리는 것을 깨달았다.

“쟤들이야. 요새 임무들이 없으니 다들 몸이 근질근질해서 바로 들이댈지도 몰라.”

진도건의 눈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눈치챈 문중이 피식 웃으며 얘기해 주었다.

진도건이 다시 음식들로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움직이는데 불편할 수 있으니 적당히 먹어야겠어요.”

두 사람의 대화에 양학 등 몇몇이 잠시 고개를 돌려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그들은 곧 대화의 의미를 이해했다.

나지룡이 진도건에게 눈을 빛냈다.

“오! 오랜만에 진 조장의 검을 구경할 수 있겠네?”

“그간 실력 좀 많이 늘었어?

“늘긴요.”

“안 늘 수야 있나요? 한 달 내내 천 공녀님과 대련을 해 왔는데. 공녀님 실력은 삼당주님들 다음이라고요.”

“여자 편은 여자가 드는 법이지.”

“편드는 게 아니라 사실적시입니다?”

나지룡과 하소정이 툴툴거리자 지켜보던 사람들이 웃음을 흘렸다. 하소정이 천서은에게 별다른 감정은 없다는 것은 그녀를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만 한 일이다. 하소정의 무공에 대한 욕심은 결코 천서은에 못지않았기 때문에 천무방주의 딸과 천혼당 천급무사라는 지위, 신분의 차이로 인한 자격지심을 크게 갖지 않는 것이 다행일 정도이다.

“아가씨의 무공은 놀랍습니다. 일취월장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고요.”

“이젠 자네도 못 이기는 것 아냐?”

“이젠 무리입니다.”

진도건이 목을 긁으며 멋쩍게 웃었다.

사람들은 꽤 놀란 눈으로 진도건을 바라보았다.

비무제는 일반적으로 공력 대결을 제외한 초식으로 합을 겨뤄 우열을 가리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그리고 이런 류의 대련, 대결에서 진도건의 능력은 아주 놀랍다는 것을 여기 있는 천급 무사들 대부분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내 것이 파훼 당한다는 느낌이다.]

진도건과 겨뤄 본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심지어 그가 치러온 실전들을 돌이켜 보면 어지간한 수준의 공력을 이용한 공격조차도 뚫어내어 왔다.

아마 검을 맞대건 장심(掌心)을 맞댄 상태 건 내력 대결을 한다면 진도건은 여기 있는 여섯 사람 그 누구에게도 이길 수 없었다. 그는 그런 명확한 약점을 자신의 장점으로 극복하는 자였다.

진도건과 천서은의 대련도 그런 비무의 연장선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진도건이 그런 조건에서 천서은을 이길 수가 없다?

반대로 얘기하면 파천신공을 이미 오성 이상 성취하였다는 천서은의 무위는 가히 당주급에 필적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진도건이 누군가? 과거 그 인혼당주 이혁성과의 비무에서 패했지만 놀라운 실력을 선보여 모두의 인정을 받았던 사내가 아닌가?

모두가 반신반의하면서 기대감과 놀라움을 보여 줄 때, 문중은 별다른 감정을 내비치지 않은 채 진도건을 힐끔 쳐다보았다.

멋쩍게 웃어넘기며 겸손을 보이는 모습.

무인이라면, 검사라면 최소한 비슷한 수준에서는 쉽게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제아무리 성격이 좋다 한들 자존심, 자긍심, 승부욕 등으로 얘기할 수 있는 보편적 감성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법이다.

[공력의 깊이가 부족하여 한계가 있다라……. 반대로 얘기하면 그것을 갖출 수만 있다면 과연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나이가 늦었다라고들 얘기하지만,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는 법이라네.]

문득 남궁평이 진도건에 대해 평가했던 말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식사를 마칠 때쯤이었다.

‘음?’

문중은 눈앞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들과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세 사람이 그들 근처로 다가왔는데 문중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제 진도건을 만나고 예상했던 일이 지금 바로 벌어질 것이라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진 조장.”

“예, 성 무사님.”

성표일(性彪一). 올 초여름에 진도건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가 깨진 사내로 여전히 떨떠름한 태도로 그를 대하는 관계였다.

“이분이 자네에게 인사하고 싶다고 소개를 부탁하여 왔네.”

진도건은 성표일의 손짓을 따라 그의 옆에 선 사내에게 눈길을 주었다.

짧게 올려 친 머리에 짙은 구레나룻부터 이어진 짧은 턱수염. 왼쪽 이마부터 눈 주변까지 그려진 기하학적인 문신이 인상적인 중년의 사내. 대놓고 투기를 드러내고 있는데 적대적인 관계였다면 당장에 칼을 뽑아도 이상하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진도건입니다.”

진도건은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살며시 포갠 양손을 내밀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문신의 사내는 요지부동한 채로 물끄러미 진도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자가 천혼당 천급무사들의 조장급이라고? 이 자가 당주들에 필적한 검술을 가졌다고? 고작 이 정도로?’

그의 눈에 보이는 진도건이란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아주 평범했다. 잘 쳐줘도 지혼당의 무사들 수준에 불과했다. 천혼당은 천무방의 집단전 주력이며 개개인으로도 강호 어디에 내놔도 결코 한 명성 날릴 수 있는 무인들의 집단이다.

“내 이름은 곽유소(郭油燒). 난 천무방의 위명을 존경하기 때문에 가입하였지만, 나보다 약한 자의 명령을 들을 생각은 없다. 나와 붙어 보자.”

당장의 서로 간의 직위가 분명함에도 어투에 존대란 찾아볼 수 없다.

진도건은 어제 문중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굳이 불필요하게 다투고 싶지는 않았기에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탁탁!

문중이 들고 있던 젓가락으로 강하게 탁자를 두드리자 모두가 그를 주목했다. 그는 부당주이자 이 자리에 있는 무사 중 가장 높은 직위를 가진 자였다.

“곽유소. 호기로운 것은 좋지만, 일단 예의를 지켰으면 좋겠군.”

그 옆에서 숨죽이고 얘기를 듣던 나지룡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는데 꿀꺽!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위압감이 순식간에 좌중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곽유소는 순간 움찔하면서도 단호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만약 진다면 지금, 이 순간 이후로 불평 하나 없이 이자에게 복종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긴다면 절 조장으로 승급시켜 주십시오.”

“내가 분명 자네에게 얘기하긴 했지. 다음 조장을 맡을 만한 실력이라고. 하지만, 조장직을 잡기 위해선 실력만큼이나 자질도 중요하네.”

“공녀의 호위를 한다고 당원들과 함께하지 않는 자가 조장직을 맡는 것 또한 논리에 맞지 않습니다.”

“진 조장의 실력에 관한 얘기를 들었을 텐데?”

“지금 보고 저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뜬 소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곽유소는 마지막 말을 할 때만큼은 진도건을 뚫어지라 노려보며 말했다.

진도건은 그저 담담하게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올려다보던 문중은 피식 웃으면서도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강자의 권리를 인정해 주는 것이야 본 방의 관례이니 판을 깔아 주는 것은 어렵지 않지. 그런데 진 조장은 괜찮겠나? 다음 주면 비무제를 위해 사패련까지 아가씨를 모시고 가야 하는데 다치면 안 되잖은가?”

“저야 뭐……”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강한 자가 호위직을 수행하면 될 일입니다.”

문중에게 시선을 돌려 얘기하려던 진도건의 말을 끊고 곽유소가 단호하게 말했다.

진도건이 다시 곽유소를 보았다. 노골적으로 투기를 드러내는 그를 바라보는 진도건의 눈빛이 분명한 빛을 냈다.

“겨뤄 보겠습니다.”

오오!

그의 한 마디로 순식간에 좌중에 흥분이 들끓어 오르며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탕!

탁자를 손바닥을 때리며 벌떡 일어난 부당주 문중.

“그럼 지금부터 반 시진 후에 본당의 중앙 연무장에서 두 사람의 대련을 시작하겠다!”

이곳은 외전의 고수들이 모여 있는 천혼당.

싸움 구경만큼 재밌는 구경은 없는 법.

천무방 공녀 천서은의 호위무사이자 그 실력에 대한 소문이 뜨거운 감자일 수밖에 없는 진도건과 천무방 천혼당의 신입이지만, 강호에서 흑명도객(黑冥刀客)이란 무명을 떨쳤던 곽소유의 대결.

그 소문이 천무방 내외전에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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