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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6화 (6/432)

6화 - 제1장. 공녀, 호위 (5)

위기를 넘긴 천서은이 다시 자세를 고쳐 잡고 다음 수를 준비하고 있을 때, 천무경은 검을 거꾸로 잡아 거두었다.

“많이 성장했구나, 서은아.”

“하아……!”

긴장의 끈이 놓이며 천서은은 깊은숨을 토해냈다.

“고마워요.”

천무경의 말은 지난 한 달여 시간이 유의미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대련을 상대해 준 아버지에게 예를 갖추면서도 방긋 웃는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그 웃음은 장내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향했는데 특히 진도건과 눈을 마주치자 미소가 더욱 화사하게 번졌다.

천무경은 천서은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이며 격려해 주었다. 두 사람은 무화동 입구에 모인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서일헌이 포권을 취하고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다. 그를 따라 다른 장로들 이하 모두가 예를 따라 갖추었다.

“공녀의 성장에 축하드립니다. 필시 비무제에서 크게 활약하여 천무방의 장래가 이만큼 밝다는 것을 강호무림 전체에 각인시킬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서 총관.”

천서은도 미소와 함께 답례했다.

천무경이 좌중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동안 내게 제자가 없어 지난 두 차례 비무제에선 천무방이 출전하지 않아 일부 호사가들은 본방의 위세가 많이 꺾였다 하는 소리가 있었지. 그들은 자신이 어떤 헛소리를 늘어놓았는지 반드시 깨닫게 될 것이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서 총관, 이번 비무제 여정에 함께 갈 인사들은 정하였소?”

“예. 장로전에선 노 장로님께서 수행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3당 가운데선 남궁 당주님께서 진 위사와 20명의 천급 무사를 이끌고 뒤를 따를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당주님이 20명의 인급 무사들과 함께 역시 방주님과 공녀를 수행할 계획입니다.”

“좋소. 앞으로 한 달여 시간 동안 자리를 비울 테니 미리 인수인계들을 마치고 떠날 채비들을 잘 준비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서 총관, 세 장로분과 당주들은 모두 내밀전(內密殿)에 모입시다. 따로 회의할 내용이 있으니. 서은이는 이만 돌아가서 쉬어라.”

“예, 아버님.”

천무방의 핵심인 7명의 인원은 내밀전으로 향했다. 그곳은 천무전 본당에서 아직 논의하기 이전 주요 안건들을 결정하기 위한 회의장으로, 그곳의 출입 권한은 각 집단의 수장들에게만 있었다.

그곳으로 향한 사람들 외의 나머지.

천서은은 처소로 돌아가고 진도건과 양정은 외전으로 향했다.

어느덧 하늘 저편에 초승달이 떠오르고 있었고 그 아래로 가을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주고 있었다.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휘날리던 머리를 정돈하던 양정이 잠깐 한 손을 풀어 팔꿈치로 진도건을 툭 건드렸다.

“자네는 왜 비무제에 출전하지 않나? 아가씨와 필적하거나 더 강한 사람은 내밀전 어른들 외엔 방 내에서도 한 손에 꼽을 수 있지. 그중에서도 비무제에 참가할 만한 연령대는 자네와 아가씨뿐인데.”

“방주님께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제게 따뜻한 잠자리와 일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분 따님의 앞길에 제가 누가 될 수는 없죠. 이렇게 호위무사로 일할 수 있는 것으로도 만족합니다.”

진도건의 대답에 양정이 혀를 끌끌 찼다.

“허허…… 자네는 너무 욕심이 없어서 탈이야. 눈치도 없고.”

“예?”

“방주님이나 아가씨께서도 아마 자네의 비무제 참가를 내심 바라고 있으실걸? 한동안 천무방이 바깥에서 보기엔 조용히 지내며 내실을 관리하고 있다고 보고 있었겠지만, 본래 방주님이나 아가씨나 야심과 열정이 대단하신 분들이네. 이곳의 무인들도 마찬가지고. 자네처럼 욕심 없는 사람은 우리가 보기엔 별종이야. 자네의 재능과 능력을 윗분들이 많이 아끼시는 걸 알지만, 그렇게 그림자처럼 지내려고만 한다면 나중엔 그 아끼는 마음이 떠나갈 수 있음이야.”

“하하……. 그런가요? 제게는 어려운 문제네요.”

진도건이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런 그의 등을 양정이 손바닥으로 찰싹 때렸다.

“그리고 그렇게 명예욕도 없이 조용히 있으면 어느 여인네가 자네에게 눈길을 주겠는가? 모름지기 사내라면 대장부의 기개를 보여 줘야 연정을 품은 여인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법이라네. 하하하! 난 가 보겠네!”

양정이 호쾌하게 웃으며 인혼당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조금은 놀란 모습으로 선 채 바라보고 있던 진도건의 귀는 살짝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가 천서은의 호위무사로서 그녀의 곁을 오랫동안 지내면서 외전 3당의 동료들을 자주 보지 못해 잘 몰랐지만, 이미 외전에선 천서은과 진도건의 관계가 심상치 않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물론 그것이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질투와 비난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고 실제로 그런 시각을 가진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도건이 방주를 비롯해 각 전당의 수장들에게 총애를 받는 사실과 천서은이 그를 대하는 모습은 모두의 부러움을 사기엔 충분했다. 또한, 진도건이 그런 상황을 이용하여 호가호위하지 않고 언제나 욕심 없이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실제로 그를 부러워하는 사람은 많아도 질투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진도건은 양정이 돌담 사이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감출 때까지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 잠시 내전 쪽에 바라보곤 다시 시선을 하늘로 올렸다.

“흐음!”

호위무사로서 책임감. 여인에 관한 관심 그리고 호감에서 연정으로 이르기까지.

한때는 감히 그런 마음을 품었다는 사실에 자신을 크게 질책하였지만, 천서은이 열린 마음으로 그를 대하는 것과 그것을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오히려 무언가 그에게 더욱 힘을 실어 주는 듯한 천무경과 장로들, 삼당주들의 모습들은 어느새 이런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고 있었다.

‘제가 감히 당신을 연모한다고 이야기하여도 되겠습니까?’

“하아-!”

문득 심정이 답답해지니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는 다시 옷매무새와 허리춤의 검집을 정리하고 천혼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천혼당의 내실엔 청소하는 하인들만 있었고 동료들은 보이지 않았다. 한창 연무장에서 훈련에 매진하고 있을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천무방의 모든 전당(殿堂)은 ‘회(回)’ 형태의 건물 구조로 되어 있어서 연무장이 그 중앙에 있었다.

연무장은 제법 조용했다. 하루 계획의 마무리를 위하여 명상을 동반한 운기조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어깨에 천(天)의 글귀가 수 놓인 무복을 입은 50여 명이 네 개의 연무대 위에서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었고 그 모습을 부당주 문중(聞重)이 모두를 볼 수 있도록 세워진 연단 위에서 감독하고 있었다.

조용히 연무장으로 들어서던 진도건은 문중과 눈이 마주치자 목례로써 인사하였고 문중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며 답하였다.

진도건은 조용히 걸음을 옮기며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부당주님.”

“오랜만이구나. 지난 한 달간 내전에 틀어박혀 있겠다고, 얼굴 본 적을 한 손에 꼽아 봐도 손가락이 남는 것 같다.”

“하하하……, 빨리 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조용히 인사를 건네는 진도건에게 문중이 피식 웃곤 조용한 목소리로 핀잔을 늘어놓았다.

“됐다. 네 역할을 다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일주일 뒤에 하남으로 떠난다며?”

“그렇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에도 아가씨께선 자네와 대련할 계획이신가?”

“심신을 충분히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하셔서 오전에 개인 수련하시는 것만 지켜보고 오후에는 이곳에 머물 것 같습니다.”

“소문은 들었네. 아가씨 실력이 대단하다지?”

“네. 비록 대련해드리지만, 제가 도리어 민폐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겸손 떨기는. 아가씨 실력이 그렇게 성장했다면 자네도 발전도 볼만할 터.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수련에 참여하게.”

“알겠습니다.”

“아! 그동안 지겹게 대련해 왔는데 미안하게 됐네.”

“네?”

“자넬 벼르고 있는 놈들이 있어서 말이야. 아마 한 번쯤은 상대해 줘야 할 거야. 큭큭!”

“아하하…….”

진도건은 멋쩍게 웃으며 연무대 쪽을 바라보았다.

50여 명의 인원이 연무대 위에 있는 모습을 연단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 느낌이 묘했다. 그들 모두 하나같이 절정고수인데 그들 모두를 지휘하는 당주와 부당주가 지위와 책임이라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와는 상관없는 것이기에 금방 넘겨 버리고 무사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길다면 긴 시간인데 과연 처음 보는 얼굴이 몇 명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어쩌면 강호 제일의 미녀일 지도 모르는 여인을 보통의 호위무사보다 더 가까운 위치에서 지낸다는 것이 혈기왕성한 이들에게는 시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할 것이다. 특히 지혼당이나 천혼당은 인혼당에서부터 단계적으로 성장하여 올라온 무인들도 있었지만, 과반은 천무방의 명성에 이끌려 가입해 온 자들이었다.

기꺼이 천무방의 수족이 되면서도 여기의 상승 무공을 전수하는 것은 그들이 누리는 혜택. 그러나 그들 모두 강호에서 한가락 하던 자들이 대부분이라 개성과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미 진도건은 작년에도 이런 식의 말을 남궁평이나 문중에게 들어 본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몇 명이 시비를 걸어왔고 그들이 하는 얘기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네가 아가씨를 호위할 만한 실력이 있나 보자.’

‘호위무사 직을 걸고 한 판 붙어 보자.’

진도건은 그때마다 그런 자들과 비무를 하곤 했었는데 한 번은 생사결 수준까지 간 대결도 있었다. 물론 진도건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절대다수의 여론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일을 한 번 치르고 나면 다행히도 대부분 그를 지지해주는 쪽으로 편승했다.

“그동안 고단했을 텐데 들어가서 푹 자게.

“네. 내일 뵙겠습니다.”

진도건은 문중과 연무장을 뒤로하고 자신의 처소로 들어왔다. 천혼당은 모두 독실을 배정받아 사용하고 있는데 침상과 작은 서장(書欌)과 옷장, 탁자 등이 갖춰져 있었고 별도의 욕실도 갖추고 있었다.

연무장에서의 훈련이 종료될 때 즈음엔 하인들이 미리 따뜻한 물을 준비해 주는데 진도건도 곧바로 욕실에 들어와 욕조 안의 수온부터 확인했다.

“다행스럽군.”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 혹여 놓치지 않았을까 작은 걱정을 품었었지만, 그것이 기우에 불과했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도건은 오랫동안 피로에 찌든 몸을 뜨거운 물 속에서 한 꺼풀 덜어냈다. 가벼운 차림으로 환복을 마치고 나오자 밖에서부터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 몇몇이 진도건의 이름을 불렀는데 이내 부당주의 호령이 들려온다.

“진도건은 내가 일찍 자라고 했으니 쓸데없이 괴롭히지 말고 인사를 하려거든 내일 아침이나 하여라. 썩 들어가!”

그 말을 가만히 듣던 진도건은 피식 웃었다. 마음속으론 부당주의 배려에 고마워하였다.

지난 한 달 그의 모든 시간은 오롯이 천서은을 위해 사용하였다.

사패련이 있는 하남의 허창으로 떠나기 전 남은 일주일 시간 동안 개량된 태을심법을 공부하며 내면을 관조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그는 침상에 올라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문득 조금 전 연무대 위에서 운기조식을 하던 동료들의 모습이 잠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그 기억은 가볍게 스쳐 지나가고 이내 이어진 구결의 암송도 잠시 곧 깊이 집중하기 시작하여 무의식에 차츰 빠져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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