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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5화 (5/432)

5화 - 제1장. 공녀, 호위 (4)

* * * *

한 달이라는 시간은 잡으려 하면 어느 사이에 멀찍이 달아나 버리는 바람처럼 훌쩍 지나가 버렸다.

천무전 뒤쪽에 솟은 절벽을 덮고 있던 수풀과 나무들은 초록으로 울창했던 지난달과 다르게 많은 부분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바람이 차게 부는 날이면 힘을 잃은 낙엽들이 바람 살에 못 이겨 떨어져서 그것을 두세 시진 내버려 두면 땅바닥이 폭신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그래서 하인들에겐 가을은 겨울만큼이나 청소로 가장 바쁠 때였다.

천무전은 경사진 지대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그 지형을 이용하여 굴을 파 만든 밀실이 있었다. 둥글게 파고 화강암으로 다시 정밀하게 벽을 둘러 보호하여 웬만한 충격에도 무너지지 않도록 설계된 곳으로 무화동(武化洞)이라 불렀다.

그곳은 보통 천무경의 홀로 수련에 매진할 때 사용하곤 했는데 실질적으로 그곳을 드나들 수 있는 인원은 장로 외엔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이 무화동에 어느 때보다 꽤 많은 인원이 들어와 있었다.

장내 한가운데선 천무경이 천서은과 합을 주고받고 있었고 입구 근처엔 열 명 정도 남자들이 서 있는데 그들의 면면은 말 그대로 천무방의 핵심 전력이었다.

총관 서일헌이 그의 조금 뒤에 있던 거인(巨人)을 올려다보았다.

“백 장로님, 어떻습니까? 천 공녀의 실력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하지 않았습니까?”

“으음! 많이 상승하였군.”

천무방의 이인자이자 장로전 서열 첫 번째, 대호거궐 백두기.

그의 무용은 세 명의 장로들 가운데서도 그 강함이 특별하다 알려져 있다.

그의 좌우로 이장로 일월쌍인(日月雙刃) 장태환(張颱還)과 삼장로 태원도왕 노지신.

세 장로는 하나같이 무공 광(狂)들이라 큰일을 계획하거나 하는 자리가 아니면 모두 모이는 경우가 드물다. 그런 이들이 천서은의 공식적인 무림출도 전 그 성장을 점검하기 위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누구 핏줄인데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서 총관.”

“허허허! 그렇지요!”

이장로 장태환의 말에 서 총관이 동조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천무방 내에서 천무경과 노지신은 키가 크고 두꺼운 근육질의 신체를 자랑했는데 백두기는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와 그에 비례해 더 두꺼운 몸통을 갖고 있어서 가까이 서 보면 마치 거대한 산 하나가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에 비해 장태환은 키는 큰 편이긴 했으나 노지신보다 조금 작고 호리호리한 체형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두 장로와 같이 서 있으면 더욱 왜소해 보이는 착각이 들 때가 있었다.

진도건은 무리의 끝에서 세 장로와 총관이 대화하는 모습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들의 풍채는 위압감이 있었는데 특히 거인 같은 일장로나 냉기가 절로 흐르는 듯한 분위기의 이장로는 일반 무사들 사이에서는 가장 말을 붙여 보기 어려운 사람들로 통했다.

방주인 천무경보다 더.

노지신은 그에 비해 인자한 인상이 있어서 좀 나은 편이었다.

“아가씨께서 저리 성장하셨으니 자네도 분발해야겠군.”

“되레 폐가 될까 소인도 걱정스럽습니다.”

진도건이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대답했다. 그의 공식적인 상관인 천혼당주 남궁평(南宮評)의 말이었다.

정파의 대표적인 세도가였던 남궁가(南宮家)의 후손이면서 지금은 고인인 그의 부친부터 2대째 천무경을 모시고 있는 인물. 정파의 핏줄이라는 게 있는지 매사에 공정하고 의협심도 대단한 인물이었는데 그 탓에 반정협객(反正俠客)이라는 비아냥이 다소 섞인 별호로 불리는 자였다.

하지만 그 실력과 신임이 확실하여 천무방 천급무사를 지휘하는 천혼당의 당주를 맡고 있었다.

“아가씨와 자주 대련했으니 물론 자네 실력도 크게 늘었겠지. 아마 혁성이도 자네와 다시 대련해 보고 싶을 것 같은데. 아닌가?”

인혼당주 이혁성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고 그 아래로 드리운 음영 속에서 퀭한 눈으로 진도건을 한 번 흘겨볼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이혁성을 슬쩍 본 지혼당주 천준(天駿)이 입을 열었다.

“진 위사 실력이 빼어나긴 하지만 이 당주 같은 검귀(劍鬼)에 비할 수 있겠나? 이 당주는 아마 남궁평 자네와 더 붙어 보고 싶어 할걸?”

“하하하! 이 당주, 정말 그런가?”

남궁평과 그는 동년배였다. 그리고 천준은 천무경의 사촌 동생으로 천무경 부녀와는 달리 다소 보수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정파의 인물들에겐 꽤 잔혹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다. 그래서 남궁평과는 어릴 적부터 자주 다투던 사이였는데 그것으로 미운 정이 쌓인 것인지 지금은 서로를 스스럼없이 대하는 관계로 보였다.

“둘 다 관심 없소.”

이혁성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큭큭! 아닌 척하기는.”

그 대답에 천준이 실소를 머금었다.

이혁성은 본래 천무방 인급무사로 가입하였는데 3당의 정기적인 화합비무회(化合比武會)에서 남궁평의 시범을 관전하던 중에 느닷없이 난입하여 대결을 벌인 것은 방 내에서도 떠들썩했던 일화였다. 보통 같았으면 태형에 처했거나 쫓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혁성의 검술이 워낙 뛰어나서 그가 패했음에도 남궁평은 천무경에게 그를 천거하였고, 그는 결국 인혼당의 부당주가 되었다.

이후, 그의 무공이 더욱 급성장하자 당시 인혼당주였던 양정(羊丁)이 스스로 지위를 부당주로 낮추고 이혁성을 인혼당주로 추대하였다. 물론 그 이후로도 실질적인 업무는 양정이 대부분 처리하였다. 이혁성은 오로지 자신의 검술 연마에만 몰두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당주의 검술은 이제 경지에 올랐습니다. 아마 남궁 당주님도 무시할 수 없으실 겁니다.”

부당주 양정은 이혁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랑스럽다는 듯 얘기했다.

그는 인혼당의 당주를 맡을 정도로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갖췄지만, 스스로는 재능의 한계를 크게 느끼고 있었다. 남궁평과 천준 두 사람과 비교한다면 큰 벽을 느낄 정도였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대인배의 풍모를 갖고 있어서 자신보다 열 살이나 어린 이혁성을 기꺼이 상관으로 모시면서도 그를 통해 자신의 재능에 대한 굶주림을 대리만족으로 채우고 있었다. 물론 그는 교관으로도 재능이 있어서 인혼당 소속 무사들을 성장시켜 지혼당으로 편입시키는 역할을 잘 수행하는 천무방의 중요한 인재였다.

“하하하! 양정, 자네가 그리 말할 정도라면. 내 이 당주와 겨뤄보기 전에 필히 진 위사랑 둘을 붙여 봐야겠군.

“네?”

“그래야 두 사람의 약점을 파악해서 대비할 수 있지 않은가?”

“소인이 어찌 감히 두 분께 견주겠습니까?”

진도건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러나 이것은 진도건이 그의 방 내 지위와는 다르게 위상이 꽤 높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전심전력을 다 하는 싸움에서 남궁평의 검술과 무공은 당연히 삼장로 아래 최고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오로지 검술 하나만 놓고 봤을 때, 이혁성이 그보다 못하다는 얘기는 하지 않는다. 그만큼 그의 광기에 가까운 검술에 대한 집착과 재능은 천부적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이야기 사이에 진도건의 이름이 거론된다는 것은 그가 보여 준 검술적인 능력이 모두의 인상에 깊게 각인될 만큼 특별했기 때문이었다.

“흥!”

기분이 나쁘다는 듯 이혁성이 코웃음을 친다. 그렇다고 그가 진도건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반응은 순수한 호승심에서 비롯된 것.

“대회 끝나면 나랑 붙어 보자. 그동안 실력 하나 늘지 않았다면 그 벌로 어깨에 구멍 하나 내주겠다.”

“허어, 그럼 두 사람이 붙기 전에 꼭 우리에게 알려 주게. 그 좋은 구경을 놓칠 수야 없지.”

“알아서들 하십시오.”

천준이 지레 호들갑을 떨어도 이혁성은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할 뿐이었다. 그 모습에 남궁평이나 양정도 실소를 머금었다.

탕! 타앙!

장내에 목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탄력적으로 울려 퍼졌다.

천서은이 펼치는 북천검법의 초식을 천무경이 야천유운검의 검식으로 받아 내고 있었는데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흘려 냈을 초식들이 지금은 아주 빠르고 강하게 맥점(脈占)을 노리고 있었다.

천서은이 한 달 동안 거의 두문불출하며 진도건과 대련을 해 온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사이 검술의 경지가 크게 늘었음을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천무경은 검세를 크게 펼쳐 내어 압박하기 시작했다. 공력을 담아내지 않았어도 그의 강력한 신체적인 능력으로부터 연달아 발현되는 검형(劍形)들은 하나같이 태산 같은 압박감을 주는 것이 있었다. 목검이라도 가격이 된다면 크게 다칠 수 있음에도 천무경의 검격은 일주일 뒤 사패련으로 떠나야 하는 상황을 고려하면 무척 위협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천서은의 방어와 반격은 대단했다.

말 그대로 일취월장.

두 사람의 무공은 모두 같은 결로써 상대가 어떤 무공의 어떤 초식을 펼쳐 내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천무경의 초식은 그를 상대하는 천서은도, 장내에서 지켜보는 고수들의 눈에도 처 무척이나 변칙적이어서 머릿속으로 맞상대한다고 상상해 본다면 누구 하나 쉬이여기는 이가 없었다.

천서은의 대응은 아주 침착했다. 출수 직전의 반응부터 시작하여 직선과 곡선을 변칙적으로 풀어내는 궤적들 그리고 회수까지 분명하게 보고 대응했다.

‘호오, 이렇게까지?’

교차하는 목검의 그림자들과 유연하게 움직이는 딸의 어깨너머로 진도건의 모습이 보인다.

지난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진도건과 천서은은 잠에서 깨어 있는 시간의 절반 이상은 함께 하여 대련과 토론을 지속하였다. 그 결과 진도건만의 그 특별한 시야와 감각을 조금은 공유할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의 눈빛과 대응으로부터 느껴진다.

이 정도의 성취라면 천무방의 이름에 먹칠하지는 않을 터.

흡족한 마음을 지금은 저편에 잠시 감춰 두고, 검세를 확장해 천서은을 압박한다. 줄곧 어울렸던 합이 어지러워지면서 천서은은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강한 압박감 안에서 천무경은 아주 작은 빈틈을 드러낸다.

하수라면 눈치조차 챌 수 없는, 그러나 고수라면 상황의 반전을 모색해 볼 만한.

천서은의 눈에 기광이 번뜩인다. 허실을 담은 횡보와 함께 틈을 파고드는 검격이 흉부를 노리고 짓쳐 든다.

하지만 만들어 낸 빈틈이었기에 천무경은 이미 그 대비가 되어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겨드랑이 사이로 찌르기를 흘려내며 반보 파고든다. 좌수는 금나수법(禽羅手法)으로 천서은의 검을 쥔 손을 낚아채며 허초로 찔러 냈던 검세를 당겨 목에 겨눈다.

‘분명 그렇게 될 것이었는데…….’

예측이었을까, 임기응변이었을까? 망설임 없이 수직으로 올려 찬 그녀의 왼발에 맞은 천무경의 오른손이 위로 떴다. 동시에 왼손이 당겨지는 느낌이 들던가 싶더니 어느새 그의 힘을 이용한 천서은이 몸을 공중에 띄우며 회축(回蹴)을 시도한다.

휘릭!

천무경은 그녀의 손을 놓아주고 뒤로 크게 물러났다.

그의 수준에서 그것은 그에게 위협이 될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자웅을 겨뤄 볼 비무제의 젊은 고수들의 수준과 순수한 초식의 겨루기만을 다루는 규칙을 고려할 때는 충분히 위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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