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제1장. 공녀, 호위 (3)
* * * *
천서은은 거치대에 검을 올려놓고 탁자에 앉았다. 먼지로 더러워진 겉옷을 풀었다. 가벼운 수련을 계획했지만, 진도건이랑 대련으로 이어지는 바람에 땀에 옷이 제법 젖어 있었다.
“아, 찝찝하네.”
그녀를 직접 모시며 허드렛일 하는 시녀는 열여섯 살의 어린 영란(英蘭) 한 사람이었다.
영란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그러실 줄 알고 따뜻한 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아씨.”
천서은이 미소를 지으며 영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역시 내 마음을 진정 알아주는 이는 너뿐이로구나. 저 둔탱이, 촌뜨기 호위무사랑 다르게 말이지.”
누가 들으라는 듯 꽤 큰 목소리로 얘기하자 영란이 작게 웃었다.
‘이런 내가 뭔가 실수를 했구나.’
진도건의 귀가 밝긴 했지만, 내공이 깊은 무림인들처럼 작정하고 엿듣기 위한 청음술 같은 건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대놓고 들으라는 식이라 멋쩍게 웃으면서 이마를 긁적일 따름이었다.
천서은이 욕실에 들어서서 땀에 젖은 옷가지를 하나둘 풀어낸다. 그때마다 영란이 받아 옆에 있는 걸대에 먼저 차곡차곡 쌓는다.
마침내 하얀색 얇은 속곳까지 벗어내니 그녀의 여체가 어두울 수 있는 욕실을 밝히고 있는 촛불들에 의해 하얗게 빛난다. 아직 성장기의 덜 여문 영란의 눈에는 그보다 아름다운 여성의 몸을 찾을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가슴과 둔부가 가진 굴곡이 주는 아름다움에, 무공으로 다져진 근육이 보기 싫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살결 아래로 탄력 있게 차올랐다. 미세한 근육의 결들은 그녀가 욕조를 붙잡고 다리부터 넘어가는 그 움직임에 드러나 보이는데 그마저도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영란이 욕조 가까이 다가와 조심스레 몸을 숙였다.
“왜 그러니?”
고개를 내미는 것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모양새라 천서은의 귀가 쫑긋거린다.
“오늘따라 더 아름다워요, 아씨.”
천서은의 양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머! 얘는……!”
“헤헷.”
영란이 수줍게 웃었다. 아이가 다시 고개를 들기 전에 천서은은 잽싸게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퉁겨 때렸다. 물론 아주 간지러울 정도로.
“갑자기 놀리기는. 란이한테 칭찬받는 것도 오랜만이네?”
“당연할 수 있는 것도 가끔 들어주면 언제나 새로운 느낌인 법이죠. 그렇지 않나요?”
“호호호! 란이가 작년과 다르게 점점 숙녀가 되어가는구나? 제법이야.”
영란은 꿀밤을 다시 맞을까 쪼르르 물러나 벗어 놓은 옷가지들을 품에 들고 다시 천서은을 보며 꾸벅 인사했다.
“헷. 소인은 이만 새로 입을 옷을 준비해 오겠습니다.”
“응, 고마워.”
영란의 작은 뒷모습을 보며 천서은은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그녀가 문 뒤로 사라지자 그녀는 곧 따뜻한 탕 속에 수면이 턱에 닿을 때까지 몸을 깊이 가라앉혔다.
“하아……! 좋다!”
적당한 온기가 몸 전체를 감싸며 아늑한 느낌을 안겨 준다. 가볍게 하려 했던 수련이 대련으로 이어지며 땀을 흘리게 된 것이 오히려 더 좋게 되었다.
‘진 위사…….’
평범함 속에 감춰진 비범함이 놀라운 무인이다. 남자로서의 매력도 그 정도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무엇보다 첫 만남 이후로 함께 겪어온 시간은 끈끈한 인연 혹은 운명, 그러한 것들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다만 품은 정이 제법 컸던 만큼 아쉬움도 함께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가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왔다면 마음을 더 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쩔 수 없나?’
신분의 벽. 그녀도 제 부친처럼 그것에 크게 개의치 않는 것은 아니나 직책에 따라오는 공적 의무와 같은 것들은 역시 서로 간에 어떤 선을 지키게 만드는 것이 있다. 그런 부분을 생각하다 보면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순간에도 역시나 한 걸음 물러서게 된다.
‘역시 내가 다가가야 할까?’
천서은의 볼이 살짝 빨갛게 달아오른다.
따뜻한 욕조 물의 온기 때문인지 혹은 조금은 빨라진 맥박 때문이었는지.
“아씨, 들어가겠습니다.”
끼익, 문이 열리며 영란이 들어온다. 손에 천서은이 갈아입을 옷들과 수건을 들고 있다.
촤악!
천서은이 욕조에서 일어나자 그녀를 감싸고 있던 물이 함께 올라왔다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진다. 곧 영란이 건네준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았다. 영란은 다른 수건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일 닦으며 정리해 준다.
물기를 닦아 내고 새로 옷을 입기 시작했다.
들어오기 전에는 움직이기 편한 무복 바지 차림에서 하늘하늘하게 늘어진 하얀 치맛자락에 연분홍 진달래가 수놓은 아름다운 예복이 그녀의 미모를 한껏 더 빛내 준다.
“위사님, 아씨께서 찾으셔요.”
영란이 문을 열고 부르는 소리에 진도건은 경계를 풀고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방 안에 들어가 보니 천서은은 탁자에 앉은 채 손에 턱을 괴고 들어오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젖은 머리카락이 예복 위로 흐트러져 있었다.
영란은 먼저 쪼르르 나아가 천서은의 옆자리에 앉아 빗을 들고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향유(香油)를 조금씩 묻혀가며 조심스럽게 빗어 내렸다. 그녀의 어깨너머 활짝 열린 창문에서부터 솔솔 불어 든 바람에 그녀의 싱그러운 향취가 콧속을 자극한다.
천서은은 손을 내밀어 탁자를 통통 두드렸다.
“여기 앉아 보세요.”
“네.”
진도건은 허리춤에 검을 풀어 벽 한쪽에 있는 거치대에 검을 걸어 두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앉아 마주 보았다.
“한 달 뒤 대회가 있는 것 아시죠?”
“네, 사패소룡비무제(邪覇小龍比武祭). 아씨께선 잘 해내실 겁니다.”
사패련의 주최로 4년마다 열리는 비무제. 문파마다 젊은 재능들을 초대하고 그들을 통해 서로 간의 위상을 확인하고 또한 사패련에 가입한 문파들의 연합력을 공고히 다지는 것을 목표로 두고 있었다.
천무방은 최근 두 차례의 대회에선 출전하지 않았다. 천무경에게 제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 천서은의 나이도 25세가 되어 참가를 위한 적당한 나이가 되었고 그녀도 그의 부친에게 참가 의지를 밝혔다.
천무경의 존재로 인하여 천무방의 위상이 퇴색될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천무방과 관계가 좋지 않은 자들의 입에선 여러 말들이 오르내리기 마련이었다.
이번 비무제에서 우승하여 그 명예를 차지하고 천무방의 위상을 다시금 만천하에 알리는 것이 천서은의 목표였다.
“진 위사는 참가할 생각 없어요?”
“제 주제에 어찌……”
“진 위사는 본 방의 천혼당 천급 무사에요. 얼마든지 출전할 수 있는 자격이 있어요.”
“하하…….”
“어때요? 굳이 제 호위에 얽매이지 말아요. 잠깐 다른 사람이 맡으면 되죠.”
진도건의 나이 26세. 3당 내에 그 또래의 나이는 세 사람 정도밖에 없었지만, 아직 그 가운데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낼 만한 사람은 진도건 외에는 없다고 봐도 되었다. 특히 진도건의 실력은 그 동료들이라면 인정하는 부분이었기에 3당의 무인들은 그가 대회에 출전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소인은 아씨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그의 대답에 천서은의 의지를 불태우던 눈빛은 처음보다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에겐 그녀와 같은 야심이 없었다. 그에게서 느끼는 가장 큰 아쉬움이 이것이었다.
“후후! 알겠어요. 저도 굳이 더 권유는 하지 않을게요.”
천서은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아쉬운 속내와는 반대로 진도건은 자신을 배려해주는 그녀의 이야기와 미소에 설렘 비슷한 느낌이 든다.
“대신 제 수련을 도와줘야 해요. 호위보다 더!”
“물론입니다.”
앞으로 주먹을 쑥 내미는 천서은. 진도건도 마주 주먹을 내밀어 가볍게 부딪친다.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가볍게 미소지었다.
“오늘은 이만 가서 쉬세요. 먼 길 다녀오기까지 했는데.”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진도건은 검을 수거하고 그녀를 향해 다시 한번 목례한 후에 방을 빠져나왔다.
그의 방은 천무전 내의 무사들이 교대로 머무는 휴게실의 바로 옆 작은 독방을 주로 사용했다. 처음 왔을 때는 천급무사로서 천혼당에서 기거하던 때가 있었지만 그것도 기껏해야 3개월도 안 되는 시간이었을 뿐이었다. 처음엔 천혼당에 머물면서 그곳에서의 수련과 천서은 호위 임무를 병행하였는데 어느 시점 이후로는 천서은 호위 강화를 위하여 아예 내전으로 처소를 옮기게 되었다.
사실 천무방은 그 자체만으로 난공불락의 철옹성과 같은 곳이었으니 굳이 호위를 철저히 하지 않아도 되었음에도 진도건과 천서은은 언제나 함께 붙어 있고는 했다.
그것에 대해 진도건은 깊이 고민한 적은 없지만, 사실 그렇게 된 것은 그를 더욱 곁에 두고자 한 천서은의 의지와 그것을 동조하는 천무경에 의해 비롯된 것이었다.
“후우! 이제 좀 살 것 같네.”
따뜻한 물에 목욕을 재개하고 나오니 지난 3일간의 여독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도적의 소탕 의뢰, 주태소와의 대결과 현장 정리 그리고 복귀 이후 대면까지. 이제야 비로소 긴장감이 해소되면서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침상에 드러누워 잠을 청하고 싶었지만, 그전에 할 것이 있었다.
진도건은 침상 위에서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두 손은 가볍게 모아 단전에 대고 천천히 호흡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분히 가라앉은 고요 속에 정신의 긴장을 풀어내며 명상의 단계로 나아간다. 그리고 도적 소탕을 위해 떠나기 전날 저녁, 천무경이 그의 방을 찾았던 것이 기억 속에서 천천히 수면 위로 떠 오른다.
[하늘과 땅이 나뉘지 않고 무엇이 하늘인지 무엇이 땅인지 모른다면 그것은 허무(虛無)이고, 혼돈(混沌)이니 그것이 태을(太乙)이라.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아우르는 일기(一氣)가 허무, 혼돈, 태을에서 비롯되니 그것은 바로 태허(太虛)이다. 태을과 태허는 우주요 자연이니 그것은 하나이기도, 둘이기도 또 무한(無限)이기도 하니, 개벽(開闢)의 종이 태양(太陽)에서 울려 파천(破天) 아래 하늘과 땅과 그 중심에 인간이 서리라.]
깊은 호흡.
태을신공의 발전된 구결.
천무경이 직접 인도해 준 운기조식법.
그것이 진도건의 단전에 한데 모여 작은 혼돈을 형성한다. 그때의 느낌과 기억을 따라 기운이 순환하니 소주천(小周天)을 이루고 대주천(大周天)에 이른다.
평소보다 더욱 뜨거운 기운이 기해(氣海)에서 회음(會陰)으로 다시 백회(百會)에서 천문을 두들겨 기해로 돌아온다.
작은 혼돈이 단전에 응축된다.
“후우!
한시진에 가까운 시간 동안의 명상이 폐부 깊숙한 곳으로부터 토해내는 숨결과 함께 마침내 진도건의 눈이 떠진다.
어깨를 짓누르던 피로감은 어느새 해소되고 두 눈에선 더욱 분명한 안광이 스쳐 지나간다. 평소와는 무언가 다른,
아주 미묘한 차이였으나 더욱 또렷하게 손에 잡힐 듯한 느낌이 마음을 충만케 한다.
벌써 세상을 다 손에 쥔 듯 설레발을 칠 수는 없었으나 자신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그려 볼 수 있게끔 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