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제1장. 공녀, 호위 (2)
* * * *
그녀는 무공에 타고난 재능이 뛰어나 검법, 도법, 권각술, 암기술 등 가리지 않고 쉽게 익혔다. 천무경의 딸답게 타고난 재능과 더불어 귀한 영약과 파천신공(破天神功)이라는 절세 무공으로 얻은,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깊은 공력은 쉬이 경지에 오를 수 있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그것이 자만심으로 이어졌을까.
어느 날 그녀는 옛 정파무림의 성지 화산(華山)에 가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어 몰래 천무방을 나와 섬서(陝西) 지역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자신의 무공에 큰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 화산으로 가는 길의 어느 사찰에서 지금은 멸문한 화산파(華山派)의 재부흥을 꿈꾸던 잔당을 마주쳤을 때도 그녀는 자신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섯 명의 남루한 도복을 입은 화산파의 도당들.
세 사람은 30대 전후, 한 사람은 40대 정도의 나이로 보였고 나머지 한 사람은 흰 수염을 길게 기른, 그러나 외모는 어딘가 그 수염의 색보다 십 년은 젊어 보이는 인상을 준 노인이 있었다.
그들은 정파라는, 화산파라는 이름의 자부심을 강하게 느끼고 있는 듯 당당하게 그 사파의 거두 천무방 방주의 딸이라 밝힌 그녀를 협공하지 않았다.
그녀의 자신감을 칭찬하며 실력을 시험해 본다며 일대일로 승부를 걸어왔는데 대부분은 그녀의 상대가 아니었다. 40대의 흰 수염 몇 가닥이 섞여 있고 이마에 흉터가 있는 중년 도인만이 꽤 적수가 되었지만, 그 역시 천무방 세 명의 당주보다 실력이 아래였다. 그가 버거워하자 초로의 노도사가 그를 물렸다.
[아이의 솜씨와 그 재능이 빛나는구나. 이 노도(老道)가 한 수 가르쳐주마.]
노도사의 목소리가 걸걸하고 거친 느낌에 그녀는 그에게서 불안감을 느꼈다. 불안한 예상이 그대로 현실이 된 듯 그 노도사는 너무나 강했다. 그 실력은 거의 삼장로 수준에 필적할 만했다.
노도사는 그녀를 요리하듯 쉽게 물리쳤는데 그녀에겐 불행하게도 다른 도사들에게 없었던 작은 살기가 그 탁한 눈빛에 서려 있었다.
[어린아이를 괴롭히는 취미는 없으나 천무방 마두(魔頭)의 핏줄이라 하니 멀쩡한 모습으로 보내기엔 이 노도의 오래 묵은 화(火)가 크구나. 무림인답게 작은 상처 몇 개만 가져가거라.]
그녀는 등골에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자신이 너무나 자만했고 현실을 너무 몰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은 정파의 성지이자 옛 화산파가 있었던 화산.
그 잔당의 존재가 있을 가능성은 당연했다. 이야기로만 들었던 기나긴 크고 작은 정사전쟁과 그 사이에 있었던 혈마지란(血魔之亂). 그로 인해 정파의 세력이 크게 약해지고 그 틈을 노린 사파무림의 일방적인 공격들.
노도사는 그 당시 시대의 끝자락 암울한 시기를 견뎌야만 했던 어린 화산파의 도사였으며 그때의 증오를 그대로 물려받은 자였다. 그 또한 힘든 시기에 자신의 천재적인 재능으로 경지를 이룬 자였으니 이제 그녀는 새장에 갇힌 격이었다.
젊은 도인들은 어떻게 그렇게까지 하냐는 눈빛과 만류가 있었으나 노도사의 표정은 일말의 미동조차 없는 철면(鐵面).
노도사의 말처럼 결코 작은 상처만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두려운 확신이 이어지는 그때.
장내엔 두 사람이 난입했다.
천무방 장로전 서열 첫 번째, 대호거궐(大虎巨獗) 백두기(白頭氣).
그의 구척거신(九尺巨身)이 그 넓은 적포(赤袍)를 펄럭이며 그녀를 가로막아 든든한 방패가 된다.
채채챙!
고막이 찢어질 듯 울부짖는 검과 검의 충돌. 그 자극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백두기의 두꺼운 팔뚝과 그 아래 펄럭이는 적포 사이로 보이는 익숙한 뒷모습이 그녀에게 두려움을 안긴 노도사와 거세게 부딪쳤다.
지켜야 할 그녀보다 약한 그녀의 호위무사 진도건이 거기에 있었다.
[저 노도사는 위험해요, 할아버지!]
그녀가 깜짝 놀라 백두기의 앞섬을 붙들며 외쳤다.
[괜찮다. 녀석은 좀 특별해. 지켜보거라.]
안심시키려는 말에도 도저히 안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자신의 불안감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열세였으나 열세가 아니었다.
물론 백두기의 존재로 인해 그를 경계한 탓도 있겠지만 노도사의 날카롭고 파괴적인 검법에도 진도건은 능히 상대하고 있었다. 노도사의 경지는 범상치 않은 것이어서 진도건의 몸에도 상처가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었지만, 결코 깊은 상처는 없었다. 그마저도 스무여 합 이상 버티기 시작하자 더는 그의 몸에 닿는 검은 없었다.
마흔 합이 오고 가자 백두기는 마침내 둘 사이에 개입하여 싸움을 멈추었다. 백두기가 사파 연합 사패련(邪覇聯)이 무림맹(武林盟)을 무너뜨리고 항복을 받아 내면서 선포한 자비령(慈悲領)을 언급하자 노도사는 분한 기색을 드러내면서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한다. 그리고 노도사는 자신을 묵허자(默虛子)라 어쩔 수 없이 밝혔다.
둘 사이에 사무적인 대화가 오고 가는 사이에 그녀는 떨리는 가슴으로 진도건을 보았다.
그의 회색 무복은 곳곳의 상처로 인한 피로 인해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씨를 보필하지 못한 소인을 용서하십시오.]
흔들림 없는 듯한 담담한 표정. 하지만, 굳게 문 입술과 깊은 눈빛 속에서 느껴지는 걱정이 그녀의 눈빛을 통해 가슴으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한쪽 무릎을 꿇고 검을 내려놓은 채 머리부터 깊게 숙여 사과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그녀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흘러나온다.
[흐흑……,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와 줘서 고마워요…….]
천서은은 그 앞에서 털썩 무릎 꿇고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가득했던 두려움과 긴장감이 한꺼번에 풀리며 동시에 서러움과 미안한 감정이 동시에 폭발한다.
진도건은 고개를 들고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천 한 장을 꺼내어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초록의 수풀, 하얀 꽃들과 그 위로 노란 새가 날고 있는 자수가 새겨진 천이었다. 그것은 이젠 이 세상에 없는 진도건의 어머니가 아끼던 손수건이었다.
그 손수건이 천서은의 눈물로 젖어 들었다.
* * * *
그를 잠깐 힐끗 보고는 몸을 휙 돌렸다. 그리고 사뿐사뿐 걸음을 옮겨 연무단 한쪽에 떨어진 그의 검을 주웠다.
그녀는 품에서 천 하나를 꺼내어 검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려 했다. 그러나 이내 손에 든 천이 먼지를 털 만한 물건이 아님을 깨닫고는 다시 곱게 접어 품에 넣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소매를 이용해 검의 손잡이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었다.
그 천은 3년 전에 자신의 눈물을 닦았던 진도건의 손수건이었다.
그때 그날 이후로 그녀는 그것을 돌려주지 않고 있었다. 그때 흘렸던 눈물의 기억과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호위무사에 대해 달리 생각하게 만든 강렬한 기억이, 알게 모르게 그녀에게 작용하여 그 감정의 대용품으로써 손수건을 붙들고 있게 하고 있었다.
“더러워집니다, 아씨.”
“저도 무인인데 이 정도는 괜찮아요. 다시 새 옷을 입으면 되죠.”
그녀는 소매를 두텁게 접어 검날까지 닦아 내고는 진도건에게 돌려주기 위해 두 손으로 검을 받쳐 들고 내밀었다.
그때 그녀의 눈에 낯선 것이 들어왔다.
그녀는 돌려주길 멈추고 검을 들어 검신을 바라보니 마침내 그 낯선 것의 정체가 검신에 음각된 두 글자임을 깨달았다.
“탈명? 원래 검에 이름이 없었잖아요?”
“그랬었죠. 오늘 복귀하고 나서 방주님께서 새기셨습니다.”
천서은의 표정에 심통이 올라왔다.
“아이참! 아버님은 작명감도 없으셔! 뭐에요, 이게? 안 어울리게 어두침침하게.”
“그렇죠? 동감합니다.”
“네? 호호호!”
그녀가 놀란 눈으로 진도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꺄륵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천서은은 맞장구를 원하는 듯 두 손을 번쩍 내밀었다. 진도건이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펼쳐 보이자 바로 손뼉을 마주 연달아 치고 웃으며 좋아한다.
이미 햇볕이 쨍하고 푸른 하늘이었음에도 그 미소가 주변을 더욱 환하게 비추는 것 같았다.
그러자 절로 지어지는 미소를 경계하며 가까스로 다스려 보았다.
거울을 볼 수 없기에 표정에 드러났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보던 천서은은 알 수 없는 얄궂은 미소를 지으며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 찌른다. 내원으로 돌아가자며 손짓하고 걸음을 옮기는 그녀를 따라간다.
“아무튼, 진 위사는 능력 있는 남자예요. 자신감을 가져요.”
“하하, 제가 무슨…….”
“정말이에요! 제가 인정한다니까요? 앞으로도 분명 큰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아씨를 지키는 이 자리로도 만족합니다. 제 주제를 넘는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천서은은 걸음을 멈추었다. 진도건도 따라 섰다. 그녀는 고개만 돌려 진도건을 잠깐 빤히 보는데 날카로운 눈매 때문인지 이상하게 노려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흥!”
그녀는 고개를 휙 돌리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걸음이 빨라진 것 같은데?’
진도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쫓아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방까지 들어가지 않고 방문 앞에 지키고 섰다. 곧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열린 문을 닫았다.
* * * *
천무전의 드높은 전각의 지붕 위.
별채 방향 근처로 기와가 만나는 부분의 용두(龍頭) 장식 기와의 좌우에 건장한 중장년 두 사람이 별채의 연무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천서은의 별채를 누군가 훔쳐보고 있었다면 그자는 반드시 천무경의 손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천무방의 전각들이 세워진 지역 대부분은 모두 화경의 경지에 이른 그의 감각 아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훔쳐보고 있는 사람이 천무경 본인 당사자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리고 유일하게 그와 같이 훔쳐볼 수 있는 사람들은 천서은의 할아비격인 세 장로뿐이었고, 지금 그 훔쳐보기 가장 좋은 자리엔 천무경과 노지신 두 사람이 지붕에 걸터앉아 호리병을 각자 들고 낮술 한 모금씩 들이키고 있었다.
아무리 높은 곳에서 훔쳐본다고 해도 사실상 하늘이 드러난 부분은 별채 내연무장뿐이었다. 그 때문에 세 장로도 어쩌다 가끔 방주의 멱살잡이에 끌려 억지로 올라와 훔쳐보게 된다고 할지라도, 크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것이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천무경은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한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기엔 어느새 별채에 도착한 진도건이 마침 천서은과 검을 어울리기 시작했다.
천서은이 북천검법과 야천유운검의 각 일 초씩을 펼쳐 보일 때마다 천무경의 어깨가 들썩거리자 노지신은 옆에서 피식 웃으며 그 광경을 함께 보았다. 그리고 이어진 천뢰삼검식의 일섬뢰에 오! 하는 작은 감탄이, 그리고 마침내 천서은이 마침내 진도건을 제압하자 천무경이 허황한 몸짓과 함께 조용히 손뼉 쳤다.
“봤습니까? 크하하! 역시 내 딸입니다. 낭아도를 제압한 탈명검을 제압하다! 제 여식도 이젠 무림백강입니다.”
“허허허! 서은이의 재능이 저렇게 꽃피우고 있으니 모두 방주의 덕입니다.”
“크하핫!”
두 사람이 웃음을 터뜨리며 호리병을 마주쳤다. 텅! 하는 소리에 이어 일제히 술 한 모금 벌컥 들이킨다. 입가에 맺혔다 떨어지는 술방울을 옷소매로 쓰윽 닦는 와중에도 여전히 흐뭇한 미소와 함께 내연무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득 그의 얼굴에 애틋함이 서렸다.
‘……여보.’
그의 아내는 주약화(周藥華)라는 이름으로, 두 사람 사이의 딸 천서은의 미모는 그녀를 그대로 빼닮았었다.
볼 때마다 젊었을 적에 열렬히 사랑했던 아내 본인을 마주한 것만 같은 착각에 종종 빠져들 때가 있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더욱 강한 책임감을 요구해 낸다.
“그런데 방금 일섬뢰는 조금 다르군요. 천뢰삼검식은 인혼당주의 특기라 기억하고 있는데요.”
“지난주 언제였더라……. 저 녀석이 도건에게 출검, 발검에 대한 운신법을 배운 것 같았습니다. 확실히 일반적인 상식과는 좀 특이한 면이 있죠. 제 몸에 익혀 보겠다고 삐걱대는 걸 보고 제 아비가 얼마나 배꼽 빠지게 웃었는지 쟨 모를 겁니다. 크크크!”
노지신이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 그렇습니까?”
인혼당주 이혁성(李赫星)은 천무방 내에서 검술에 가장 일가견이 있었는데 검에 대한 집착은 광기마저 있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방 내에서는 그가 천무방보다는 검림에 더 어울린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그런 그는 묘하게 진도건에게 맞수의식이 있었다. 내공 수준은 오히려 지급무사 수준에 불과한 진도건이 자신과 대등한 쾌검을 선보인 것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천서은이 진도건에게 한 수 배우려고 한 것은 그런 것을 특별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진 위사의 움직임은 미세한 부분에서 궤가 달라 완숙한 무인이 새롭게 배우긴 어려운 것인데, 이게 모두 방주님의 홍복(洪福)인 것 같습니다.”
“하아……”
“왜 그러십니까?”
천무경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고 수심이 드리워지자 노지신이 궁금하여 물었다.
“저 아이의 승부욕이나 야심이 사내의 그것보다 커서 조금 걱정입니다. 저 부분은 저를 쏙 빼닮았으니. 무공에 재능이 있고 욕심도 있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이것저것 모두 다 제 것으로 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저 스스로가 딸 아이에게 좋은 본이 되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고 염려됩니다.”
“으흠.”
노지신의 시선이 내연무장으로 향했다. 천서은이 진도건에게 검을 건네주다가 웃는 모습이 보이었다.
천무경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천무방은 무림 최고의 거두였고 천무경은 그곳의 수장이었다. 게다가 그 등에는 당대 천하오절과 파천무봉이라는 그에겐 전혀 허황하지 않은 위명이 거대한 그림자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것을 쫓아가고 싶은 천서은의 욕심은 분명 과하고 부담스럽게 여겨질 만한 것이었다.
사내로 태어났어도 제 아비의 그림자에 짓눌려 좌절할 만할 텐데 하물며 여자의 몸으로서 그 한계를 일찍 맞이할지도 모른다면 그 내적 갈등으로 인해 안 좋은 길을 걸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서은이는 현명한 아이이니 난관에 부딪혀도 잘 타개해 나갈 것입니다.”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천무경은 잠시 생각했다. 그러다 내연무장에서 곧 진도건과 딸의 모습이 사라졌을 때 입을 다시 열었다.
“진도건을 제 제자로 들일까 합니다.”
“네?”
노지신은 화들짝 놀란 눈으로 천무경을 바라보았다.
천무경은 그의 나이 마흔, 주약화가 서른아홉이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서 딸 천서은을 얻었다. 주약화는 딸을 낳은 이후 몸이 쉽게 회복되지 못했고 3년이란 긴 시간 동안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이승과 작별하였다. 그 이후 크게 상심한 천무경은 제자들을 들여 방의 미래를 준비하자는 세 장로의 권유를 오랜 시간 듣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히도 천서은도 일찍 철이 들면서 무공수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고 그 재능이 몹시 뛰어나 큰 우울감에 시달리던 천무경도 조심스럽게 딸을 가르치는 것을 시작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다. 천서은의 나이가 열다섯이 되었을 때 즈음부터는 제자를 추가로 들이는 대신에 세 장로와 당주들에 보다 주의를 기울이고 조언하면서 그들의 경지 모두 크게 상승하였다.
잠시 성장력에 정체기에 빠질 뻔했던 천무방이 여전히 위세를 떨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간부진의 힘에 깊이를 더한 까닭이었다.
그러므로 사실 3년 전에 데려온 진도건의 존재가 세 장로에게도 꽤 특별한 부분이 있었다. 아쉽게 제자로 들인 것이 아니라 재능을 썩히기 아깝다는 이유로 천서은의 호위무사에 앉히는 선에서 끝났지만. 진도건은 지금까지 그에게 아주 작은 어떤 것도 사사하지 않았다.
“물론 대외적으로 공표까지 할 생각은 없습니다. 전 녀석의 검술 근간이 어떤 것인지 지금까지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저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 하하하!”
“허허……”
천무경은 모든 종류의 무학에 대해서 완벽에 가까운 이해를 하고 있다 하여 천의무봉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는 천재 중의 천재였다.
그런 그가 이해하지 못한 검술의 근간이라……!
“일단 파천신공의 호흡법 정도만 가르쳐 볼 생각입니다.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어요. 되려 녀석의 운신법을 방해하면 안 되니까 스스로 연구하게 해 볼 생각입니다. 이미 주태소를 잡으러 파견 보내기 전날에 알려 준 상태입니다.”
“이미 준비에 들어가셨군요.”
“녀석이 얼마나 그 호흡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느냐에 따라 달린 것입니다.”
노지신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오……!’
순간 살짝 닭살이 돋았다.
그가 알기로 진도건은 강호에 일반적으로 퍼져 있는 태을심공(太乙心空)이라고 하는 아주 기본적인 토납과 운기조식법을 익히고 있었다. 차라리 유년기 때부터라도 수련했다면 재능과 환경 상태에 따라 좋은 질의 진기를 축기할 수 있었을 텐데 진도건은 그것을 20대가 되었을 때부터 수련했다고 하니 그 깊이가 얕은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도 그의 검술이 가진 예리함은 절정고수들의 그것에 비견될 만하다. 넓은 일대를 파괴하는 공력 같은 것을 발휘할 수는 없지만 모든 무림인의 전투가 그런 식으로 이뤄지진 않고 그렇게 행할 수 있는 사람도 아주 손에 꼽는 강자들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진도건이 파천신공의 오성(五成) 수준만 달성해도 아마 세 장로와 충분히 손속을 겨뤄 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리 늦은 나이에 시작했다 할지라도 천무경이 그를 충분히 지원해 준다면 아마 막힌 기맥을 뚫어내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때 문득 노지신의 머릿속에 조금 전 천서은과 진도건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물론 진도건은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추는 모습이었지만, 그들의 표정이나 대화, 몸짓들, 대련의 내용은 어딘가 모르게 다정한 느낌 같은 것들이 섞여 있었다.
“방주, 혹시 진 위사를……?”
“눈치채셨군요. 전 딸 아이가 괜찮다 하면 내 사위로 맞을 생각도 있소이다.”
천무경도 딸과 호위무사 사이에 흐르는 묘한 교감을 일찍이 눈치채고 있었다.
노지신은 그의 대답에 혀를 끌끌 찼다.
“허허……! 고놈 참 복에 겨워할 녀석일세.”
물론 비꼬는 말이 아니었다. 그도 저 호위무사를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 천무방 방주의 사위라, 이것은 곧 천무방을 물려받는 후계자가 되는 길이기도 했다.
가진 실력이나 재능은 비범한 구석이 있지만, 불과 3년 전만 해도 한낱 촌부에 불과한 청년이었다.
물론 그도 천무경이 신분 고저에 대한 선입견을 품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만약 그렇다면 당내에 생길 경쟁자도 고려해야만 한다.
천혼당주(天魂堂主) 남궁평(南宮枰)과 지혼당주(地魂堂主) 천준(天駿)이 바로 그들.
그 점을 천무경은 과연 생각하고 있을까? 그의 위치를 고려하면 그들의 성정 같은 것은 크게 고민 대상이 아닐 터.
그 문제에 대해 잠깐 고민하던 노지신의 귀로 천무경의 이야기가 이어 들려온다.
“흐음. 다만, 딸 아이의 야망이 더욱 독립적인 성향을 만들고 있어서 이 아비의 생각이나 진도건을 진심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아비라 할지라도 여자의 속은 알다 가도 모를 일 아닙니까?”
“허허허! 그건 또 그렇지요.”
천무경은 고민이 많은 듯 한동안 그곳에서 별채를 내려다보았다. 물론 화주를 입에 물고서.
그림자 기울기가 한 뼘 정도 더 길어졌다는 느낌이 들어섰을 때가 되어서야 마침내 일어난 두 사람은 전각 뒤 음지를 통해 자신의 자리들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