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제1장. 공녀, 호위 (1)
현 무림은 사파 무림의 세상이었다. 백 년 전에 무림은 정파의 세상에서 사파의 세상으로 바뀌었으며 과거 소림사(小林寺), 무당파(武當派), 개방(丐幇)이 무림의 중축을 담당했었다면 지금은 천무방, 구룡문(九龍門), 검림(劍林)이 그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삼강의 일익으로써 민중 사이에 존재하기 위해선 사파의 좋지 않은 인식을 고려하더라도 권역의 치안을 유지하는 데 힘을 보태야 살아남을 수 있는 법이었다. 힘으로 군림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며 질서가 없는 세상은 혼돈만 가득할 뿐이었다.
검림은 폐쇄적인 집단이라 그런 부분에 기여하는 바는 전혀 없었지만, 천무방과 구룡문은 각각 산서와 호북 지역에서 광대한 권역의 치안에 기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따라서 치안을 어지럽히는 난적들에 대해 그들이 무림인들이라면 주로 천무방과 같은 무림인 집단들에게 그 요청들이 들어오며 사파 무림이 과거 정파 무림의 자리를 대체하여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훨씬 더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기 때문에 과거에 없었던 수고 비용 같은 것들을 어느 정도 지급해야 했다.
“골치 아픈 놈들이었는데 정말 고맙소.”
“아닙니다. 또 찾아주십시오.”
관병이 건네주는 은화를 세어 본 진도건은 관병이 돌아가자 은화 하나씩 꺼내 지급무사들에게 돌렸다.
“고생하셨습니다.”
“허, 이런 걸 챙겨도 되나?”
같이 임무를 수행한 도벽(道霹)은 꽤 기쁜 기색을 보이며 은화를 받아 주머니에 챙겼다. 말과는 다른 행동이지만, 그들은 엄연히 사파인들로서 자신의 이익을 꽤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뭐 어떻습니까? 저도 당한 게 있으니 요 정도 횡령으로 갚아 줘야죠.”
“허, 천무방이 질서가 없구먼.”
가만히 포승줄에 묶인 채로 수레의 난간에 걸쳐 누운 채 그 광경을 지켜보던 주태소가 궁시렁거렸다.
그 말을 들었지만, 진도건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는 피식 웃어넘겼다.
그들은 이내 말을 달려 천무방으로 돌아갔다. 도벽을 비롯한 지급무사들은 곧바로 지혼당(地魂堂)에 돌아갔고 진도건은 총관 서일헌(西日軒)이 있는 집정당(執政堂)으로 향했다.
“서 총관님.”
“오! 진 위사, 왔는가?”
총관 서일헌은 무공 실력은 당주들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그는 서책에 더 가까운 인물이었기에 천무방의 대외적으로의 정치적인 관계나 천무방 내의 대소사를 방주 천무경을 대신하여 처리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방 내 인물들과 두루 관계가 좋은 편이었다.
“거기에 녹림칠악 주태소가 있다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진도건이 보상으로 받은 은화를 서일헌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내가 어디 모르는 게 있던가?”
“그게 그렇게 쉽게 말씀하실 일입니까? 저 죽을 뻔했습니다.”
서일헌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하지만 이렇게 사지 멀쩡하게 돌아왔지 않는가?”
“이번엔 누구입니까? 서 총관님 생각입니까? 아니면 방주님입니까?”
“하핫! 어디 주태소 얼굴이나 구경하러 가세.”
서일헌은 대답하지 않고 웃음을 대신하며 집무실을 나섰다. 그의 등 뒤를 따르며 진도건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3년 전 천무방에 오면서 그는 곧바로 천혼당(天魂堂) 소속이 되었고 방주의 특별 지시로 그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인 천서은(天瑞恩)의 호위직이 배정되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본직과 어울리지 않게 종종 이런 식으로 파견 임무를 년에 두세 차례는 나가곤 했는데 특히 작년부터 간혹 현장에 주태소와 같은 부담스러운 고수들이 있었다.
이는 알면서 일부러 얘기해 주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이렇듯 무사히 다녀오면 언제나 바로 마주치게 되어 있었다.
“왔구만! 진 호위!”
집무실을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반대편에서 이런 상황에서 익숙한 인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천무방주 천무경 그리고 삼장로 태원도왕(太元刀王) 노지신.
“하하하! 주태소까지 잡아들인 걸 보니 자네 실력이 갈수록 좋아지는군”
“방주님을 뵙습니다.”
진도건이 포권을 취하며 두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천무겸이 한 손에 든 술 호리병을 슬쩍 들어 보였다.
축배를 건넨다는 의미의 익숙한 몸짓이었다.
언제 봐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현 무림 시대의 천하오절(天下五絶).
파천무봉(破天武奉).
도검이든, 적수공권(赤手空拳)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완벽한 강함으로 적을 찍어 누르는 초인(超人).
순수한 무력으로만 따지면 가히 오절 가운데서도 수위를 다툰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거인이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이다.
다른 고수를 마주하면, 이를테면 삼장로 노지신만 보더라도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투기와 같은 것들은 감각이 예민한 무인이라면 느낄 수 있는 것이며 그저 적대하는 것만으로도 그 투기가 날카롭게 쏘아져 들어온다.
그러나 천무경을 마주하면 그에게서 그런 투기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완벽하게 기운을 갈무리하는 것.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음에도 그 눈빛을 마주하면 모든 것이 발가벗겨지는 것만 같은 기분.
그래서인지 결코 눈을 오래 마주칠 수 없을 정도였다.
“자네 솜씨를 삼장로와 멀리서 구경했는데, 그새 실력이 또 올랐더군. 쉬운 상대가 아니었을 텐데.”
“지켜보고 계셨습니까?”
“방해 안 되게 멀리서 지켜봤네. 아, 물론 그곳에 주태소가 있었다는 것은 총관이 알려 줘서 알았던 게야.”
천무경은 슬며시 책임을 서 총관에게 던지자 그는 멋쩍게 웃었다.
“아무래도 방주님께서 자네에게 관심을 두고 있어서 일러드렸네.”
네 사람은 집정당을 나왔다. 문 앞에는 포승줄에 묶인 채로 양옆의 천혼당 천급무사의 감시 아래 주태소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천무경이 조금 높은 단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녹림칠악 낭아도의 명성을 익히 들었지만, 우리가 실제로 본 건 처음인 것 같은데. 맞는가?”
“이 몸도 이런 식으로 올려다보게 될 줄은 몰랐소.”
“하하하하! 거 거침없는 녀석이로군”
감히 천무방주 앞에서 저런 거만함이라니.
그러나 누구도 그런 점을 신경 쓰지 않았다. 천무경이라는 위인은 결코 허례허식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림인이라면 자고로 자신의 힘에 자부심이 있어야 하며 그런 것이 없는 자는 존중할 가치도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일 정도로.
그런 부분에서 녹림칠악의 명성은 충분히 존중받을 만한 위치라 할 수 있었다.
마음에 들었는지 씨익 웃었다.
“꽤 패기가 있는 놈이구나. 어때 한잔할 테냐?”
천무경이 주태소의 앞에 술 호리병을 슬쩍 들이밀었다. 냄새만으로도 정신을 취하게 할 것만 같아 주태소는 내심 놀라면서도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천무경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술이나 마실 기분 같소? 차라리 소독이나 하게 이 구멍 뚫린 가슴팍에나 뿌려 주시구려.”
주태소의 대답을 들은 천무경은 그가 꽤 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래! 녹림채주 오경방(吳經方)과 내가 썩 편한 사이는 아니더라도 그들은 우리의 우방. 이곳에서 한 달 정도 요양하고 돌아가거라.”
“날 죽이지 않소?”
“우린 관으로부터 도적의 토벌을 의뢰받은 것이었소. 당신의 존재는 상정 외였소이다.”
서 총관이 대신 나서서 대답해 주었다.
‘도적의 토벌? 고작 그런 일에 저런 녀석이 와? 하… 이거 좀 찝찝한데?’
주태소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뭔가 자신이 도구로써 쓰인 느낌 같은 느낌이 이상하게 맴도는 것이다.
기분 탓인가.
“저자는 누구요?”
천무경이 씩 웃으며 답한다.
“진도건. 내 여식의 호위무사일세.”
“천무방에 저런 자가 있다는 소문은 들어 본 적이 없소.”
“아 그는 이 무림에선 무명(無名)이네. 어때 솜씨가 괜찮았지 않았나?”
“쳇!”
패배한 자에게 그런 걸 물어보다니 천무방주는 꽤 악취미라는 생각이 든다.
천무경이 옆에 서 있던 진도건을 힐끗 보았다.
“이참에 자네 별호 하나를 지어 보지. 언젠가 기회가 되면 명성을 날려 보고 싶지 않은가? 그럼 그럴듯한 별호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허허허! 보통은 그런 건 호사가들이 지어주지 않습니까?”
“누가 지은들 아무렴 어떤가! 아, 맞상대해 본 주태소 자네가 한 번 지어주겠는가?”
“하! 당신은 정말 악취미로군.”
주태소의 입에서 본심이 튀어나왔다.
“푸하하하! 내 배려가 부족했군. 미안하네.”
천무경은 진도건을 가만히 보았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자신도 모르게 그를 쳐다본 순간.
스릉!
어느새 그의 검집에서 검이 빠져나와 천무경의 손에 들렸다. 그는 자신의 품에 있던 소도를 꺼내 들었는데 어느새 소도엔 어스름한 빛이 맺혔는데 보기만 해도 섬뜩할 정도의 예기(銳氣)가 느껴졌다.
‘강기(罡氣)!’
주태소가 그것의 정체를 느끼고 속으로 탄식을 삼켰다.
그 빛이 도신을 감싸고 도는데 만약 저것이 심장을 노리고 날아든다면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으리란 생각에 처음 마주했을 땐 없었던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천무경은 소도는 그의 도강(刀罡)에 의해 강철도 파괴할 수 있는 강도와 예기를 갖게 되었다. 그는 그것으로 진도건의 검신(劍身)에서 호수와 가까운 부분에 글자를 새겼다.
카각!…… 카각!…… 칵!
탈명(奪命).
천무경은 검을 돌려주며 그 이름을 진도건에게 보였다.
“탈명검. 어때? 별호가 마음에 드나.”
“하하…… 그렇게 말씀하셔도…….”
무림에서의 명성은 딱히 관심이 없었던 그였기에 이런 제안은 어색하기만 해서 진도건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멋쩍게 웃었다.
그걸 보던 주태소가 답답한 기분에 툭 답을 던진다.
“뭐 나쁘지 않네.”
천무경이 주태소에게 엄지를 세워 주며 웃었다. 한 모금 넘기는 화주가 달콤하기 그지없다.
“캬아! 좋구만!”
* * * *
천무방은 무림에서 떨치는 위세에 걸맞게 깎아지른 절벽을 등에 지고 넓은 토지 위에 내전과 외전을 나누어 벽을 세우고 필요한 건축을 쌓아 올렸다. 외전은 3당과 집정당이, 내전은 장로전과 천무방주의 처소 그리고 소속 무인들을 훈련할 수 있도록 각 곳에 그러한 훈련장이 세워져 있었다.
보통 3당의 무인들은 당주급 인물들을 제외하면 내전에 출입하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진도건은 호위무사 자격으로 예외였다.
내전 출입을 제한하는 위사들은 문 앞에선 진도건을 슬쩍 보고는 시선을 거뒀다.
그것이 익숙한 듯 진도건도 스스럼없이 내전 안으로 들어섰다.
외전이 내전을 지키기 위한 구조로 각 집단의 배치가 이뤄졌다면 내전은 장로전들이 방주가 기거하는 천무전을 둘러싸고 있었다.
내전에 들어서서 좌우의 이장로와 삼장로의 장로전을 지나쳐 다시 한번 천무전으로 들어서면 바로 마주하는 것은 형형색색을 이루는 화단과 그것을 관리하는 시녀들과 거대한 천무전, 좌측의 별채처럼 세워진 좀 더 작은 전각이 있었다.
진도건은 그 작은 전각으로 향했다.
그곳은 바로 천무방주의 금지옥엽인 천서은의 처소였다. 처소 안으로 들어서서 그녀가 있을 내실로 향했지만, 거기엔 없음을 확인한 진도건이 근처에 있던 시녀에게 물었다.
“아씨는 어디 계신가?”
“아씨께선 내연무장에서 수련 중이십니다.
진도건은 곧장 내연무장으로 향했다.
내연무장은 별채의 중앙에 있었는데 시녀의 말처럼 그녀는 거기서 검술을 수련하고 있었다.
천서은은 정말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는 강호의 호사가들 사이에서도 무척 유명했는데 특히 살짝 서늘한 느낌을 주는 매력적인 눈매에 묘하게 어울리는 화사한 이목구비가 조화를 이루어 그녀를 처음 보는 남자라면 감히 쉽게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동시에 그녀는 천무방주의 딸로서 무공 또한 나름의 경지에 올라있었을 정도로 재능이 매우 뛰어났는데 만약 사내로 태어났다면 3당의 당주와 능히 견주었으리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그런 말을 듣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다르게 그녀는 사내들의 그것과 같은 야심이 있는 여걸이었다.
내연무장의 넓은 단상 위에서 펼쳐 내는 검술의 과정은 흡사 아름다운 검무(劍舞)를 보는 듯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진도건의 눈빛 또한 무척 따뜻했다.
연모하는 감정.
분명 그의 감정도 분명 다른 남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줄곧 진도건을 뒤에 두었던 천서은이 초식을 전환하며 신형을 돌렸다. 그녀는 그를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진 위사. 도와줘요!”
하던 독무를 멈추고 올라오라는 손짓을 한다.
진도건은 검을 뽑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눈빛을 한 번 주고받은 두 사람은 이윽고 검을 섞는다.
채챙!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련을 진검으로 하는 법은 없으나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는 폭이 매우 깊었다. 아무리 천서은이 좀 더 진심을 담아 찌르고 베려고 해도 진도건의 몸에 닿는 법은 없었다. 진도건의 검술은 그만큼 경지에 올라 있었다.
“이번에도 아버님이 파견지에 대한 정보를 숨겼나요? 거기엔 누가 있었죠?”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진도건을 시험해 보는 걸 즐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도 그의 재능이 특별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최정점을 찍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으나 특별한 만큼 그는 생각보다 강한 사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녹림칠악 주태소가 있었습니다.”
“그는 무림백강(武林百强)에도 드는 강자에요. 알고 있어요?”
“예.”
“든든하네요! 이젠 진 위사도 무림백강 중 한 사람이에요.”
천서은이 미소를 지으며 진도건의 오른쪽 어깨를 노리고 찔러 들어갔다. 그것을 진도건은 가볍게 몸을 틀어 피해 낸다. 이어 몸을 낮추고 다리를 쓸어내자 이를 진도건이 몸을 띄워 피해 낸다. 그것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쫓아 들어가 강검세(强劍勢)를 펼쳐 낸다.
천서은은 최대한 다양한 방식을 익히기 위해 서로 다른 검법을 익혔다.
첫 번째, 강검(强劍) 북천검법(北天劍法).
승천교아(昇天鮫牙)
공중에 뜬 적을 꿰뚫어 버리는 일초. 지면의 반발력을 최대한 이용하여 내력검으로 적의 방어를 부수고 심장을 꿰뚫어 버리기 위한 찌르기.
진도건은 오히려 그 검세를 받아 낸다. 그리고 들어오는 충격을 흔들어 상쇄시키고 반발력으로 더 멀리 뛰어 물러선다.
먼저 지면에 발이 닿은 천서은은 낮게 신형을 깔아 갈지(之)자를 그리며 전진한다.
동시에 이뤄지는 전진과 회전을 동시에 보법에 담는다. 그 중심으로부터 검광들이 연달아 뻗치는데 제각각 다른 경로로 휘어지며 공중에서 떨어지는 진도건을 위협한다.
이것이 두 번째, 유검(柔劍) 야천유운검(夜天流雲劍)의 섭풍발엽(涉風發葉).
하단을 노리고 들어오는 것은 빗겨 걷어 내고 이어 상단으로 파고드는 것을 강하게 올려쳐 낸다. 그 힘을 이용하여 더 빠르게 지면에 착지, 안정감을 얻은 하체로 지면을 비틀어 밟으면서 다른 검광을 흘려 내고 퉁겨내며 오히려 한보 반 더 가까이 접근한다.
검이 아닌 맨손의 거리.
두 사람의 상체는 모두 앞으로 기울어져 있으니 서로의 얼굴과 표정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온다. 끌어 올려진 집중력은 호흡마저 느껴질 정도.
그 순간에 천서은 이마에 미열이 살짝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진도건이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데 그것이 이상하게 느리게 다가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높은 집중력과 이 이상한 미열감은 조금은 괴리감을 느꼈다.
텁!
진도건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짚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도 그를 낚아채기 위해 왼손으로 금나수(禽羅手)를 펼쳐 냈지만, 반응이 늦었다. 진도건은 그녀의 어깨를 짚은 채로 머리 위로 가볍게 넘어가 버렸다. 뒤늦게 몸을 돌려 야천유운검의 반전식을 펼쳐 쫓았지만, 여유 있게 받아 낼 따름이었다.
‘칫! 날 놀리다니……’
그녀를 타고 넘어가기 직전 진도건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간 것을 보았다. 물론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았다.
그녀도 그에게 분명 호감이 있었다.
호감을 느낀 사내에 대한 떨림.
천무방의 귀공녀와 시골 출신의 호위무사 사이의 경계.
그녀는 그런 작은 내적 갈등이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직접 마음을 밝힌 적은 없었지만, 그런데도 두 사람은 서로에게 품은 마음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천서은은 그에게 심술을 좀 부려 보기로 한다.
흐읍!
단전의 내력이 체내를 휘돈다.
그녀의 눈에 스치는 번뜩이는 안광과 잠깐 사이에 커진 기운이 진도건을 경계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의 경계심보다 그녀의 검이 더욱 빨랐다.
카앙!
쾌검. 천뢰삼검식(天雷三劍式)의 일섬뢰(一閃雷).
그녀의 검 끝이 진도건의 검신, 호수 가까운 부분을 때리자 그 충격에 그의 손에서 검이 빠져나간다. 어느새 그녀의 검은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제가 이겼어요!”
“후…… 반칙입니다, 아씨.”
부르르 떨리는 오른손을 탁탁 털어 내며 진도건이 쓴웃음을 지었다.
“뭐가 반칙이죠?”
“아씨의 내력을 전 당해 낼 재간이 없으니 언제나 그 부분은 제한을 두고 해 오지 않았습니까?”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천서은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그건 자연스러운 발현 수준이었을 뿐이에요. 진 위사가 방심한 탓이 큰 것이겠죠.”
“그것도 틀린 말씀은 아니군요.”
천서은이 진도건의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제 호위무사이면서 그렇게 약한 척하지 말아요. 호호!”
진도건은 그녀가 두드린 자신의 오른쪽 가슴에 손을 올려 가만히 데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가볍게 목례하였다.
“그런데 방금 일섬뢰는 좀 다르군요.”
“진 위사의 조언을 참고했을 뿐이에요.”
검에 관하여 진도건은 천서은의 작은 스승이기도 하였다.
그의 검은 쾌검이었지만, 단순히 쾌검이라고 하기엔 오묘한 부분이 있었다. 내력검이 아닌 데도 강검의 때로는 유검의 특성을 보였다. 변초와 허초를 구사할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제삼자가 볼 때 느끼는 것이지 그를 상대하는 사람은 어떤 것이 변초이고 허초인지 구분되지 않아 모두 진초(眞招)로 느껴질 정도였다.
뚜렷한 형식 자체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검. 그러나 그 검술의 본질을 그 어떤 검술보다 잘 느끼게 해 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진도건은 자신이 익힌 것을 원류검결(原留劍結)이라 하였다.
특이한 것은 그것이 몇 개의 서로 다른 특성을 띤 초식을 묶어 집대성한 그런 것이 아니라 오로지 진도건이 직접 체득한 감각과 이성과 본능이 한데 조화롭게 귀결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지난주에 제가 찌르는 방법에 관해 물어봤던 걸 기억하나요?”
“아……!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다 했습니다.”
“이렇게…… 자세를 낮추고, 발과 무릎을 살짝 안쪽으로 비틀어서……, 앞축에 힘을 실어서, 몸도 이렇게…… 해서! 검을 먼저 찔러 넣으면서 한 번에 펼쳐-, 얍!”
천서은이 천천히 단계별로 자세를 취하면서 찌르는 시범을 보여 준다.
짝짝짝!
자신이 알려 준 방법을 체득해 낸 것이었다. 진도건으로서는 박수를 아끼지 않을 수 없었다.
“소인의 조언을 언제나 경청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인데 이렇게 쉽게 익히시는 것을 보니 천재적인 재능이 감탄스럽습니다.”
“엣헴!”
천서은이 팔짱을 낀 채로 어깨를 으쓱했다.
밖으로의 그녀는 꽤 이성적이고 차가운 느낌을 주는 여인이었지만, 그녀는 꽤 귀여운 구석이 있는 매력도 갖고 있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본 사람은 아마 제 아버지인 천무경이나 세 장로 정도일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그저 호위무사뿐인 진도건에게 그런 모습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것이 의외인 일임은 틀림없었다.
그녀가 처음부터 그에게 마음을 연 것은 아니었다.
진도건의 용모가 꽤 단정하고 선도 굵어 사내로서 봐줄 만했으나 그렇다고 어느 여인이든지 홀딱 마음을 뺏길 만큼 매력이 있다고 보긴 어려웠다.
다만 나이는 자신과 같은데 천무경이 직접 발탁하여 그녀의 호위무사를 맡겼다고 하니 흥미가 동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