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序. 칼(劍)
진도건(進刀乾)의 팔에 그어진 상처에서 핏방울이 팔을 타고 흘러내렸다.
예상치 못한 고수의 등장, 갑작스러운 출수에 긴장감이 머리 꼭대기까지 솟구친다. 덩달아 체온이 상승하며 흥분감이 올라왔었다. 그러나 피가 흘러내리며 느껴지는 차가운 팔의 감촉은 정신을 번뜩 일깨웠다.
“방진을 펼쳐라!”
그의 한 마디에 세 명의 지(地)급 무사들이 즉시 서로 등을 맞대며 방어태세를 취한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에는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주변을 포위한 도적 떼.
숫자는 십여 명 남짓 하나, 실력으로 충분히 맞설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대장은 보고서와는 다르게 녹림채(綠林寨) 출신의 고수로 지급무사인 그들에겐 버거운 상대였다.
대장을 혼자 상대해도 함께 온 동료 셋이서 남은 적들로부터 버틸 수 있을지 걱정도 되었다.
“진 위사……!”
팔의 상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잠깐 신경을 딴 데 두는 틈을 노리고 상대의 공격이 날카롭게 노려질 것이 틀림없었다.
“넌 제법이구나. 진가야, 이름이 뭐냐?”
“진도건이다.”
“평범한 놈인 줄 알았는데 젊은 놈이 제법 움직임이 쓸 만해. 어때? 내 부하가 되면 네 목숨은 살려 주마.”
현시대에서 녹림은 무림의 중추 중 하나로, 그곳의 고수들은 분명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으며 눈앞의 이 남자도 그 명성에 걸맞은 위압감이 있었다. 그런 남자가 이런 조그마한 도적 떼의 산채에 있는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천(天)급 무사이자 호위(護衛) 임무를 더 중요하게 맡고 있었던 자신을 굳이 함께 파견을 보낼 때는 의아했었는데, 이 남자를 보니 어쩐지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당신의 이름은?”
“난 주태소(周太燒)다!”
“…… 낭아도(狼牙刀)로군.”
“크하하하! 역시 내 이름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지!”
주태소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자신감도 당연한 것이 그 유명한 녹림칠악(綠林七惡) 중 한 사람인 데다가 공식적인 서열상으론 칠악 중 막내였지만 실력으론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무공이 뛰어난 자였다.
진도건이 속한 천무방(天武幇)은 현 무림 삼강(三强)으로 분류되는 최고의 문파지만, 스스로 일개 소속 무사 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진도건에겐 녹림칠악은 충분히 꺼려질 명성이었다.
주태소의 자신감은 능히 이해할 만했고, 지급 무사들이 위축될 만했다.
‘쳇! 능구렁이 같은 영감탱이들. 이런 식으로 나를 한 번씩 시험해보는구나.’
진도건은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주태소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검에 손을 가져간 채로.
주태소가 키득 웃었다.
“꼴에 천무방의 천급무사라서 존심 한번 부려 보겠다는 거냐?”
“글쎄. 난 수염 덥수룩한 남자는 취향이 아니라서.”
낭아도라는 명성을 고려해본다면 주태소의 시선에서 눈앞의 사내는 무명(無名)의 검객. 그런데도 침착한 대꾸가 어째 신경에 거슬린다.
“하! 이 건방진 놈이?”
찌릿!
달라진 패기에 진도건도, 지급무사들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에 긴장했다.
그 명성에 걸맞은 기세.
“그럼 어디 한번 받아 봐라!”
지면을 박차고 거구가 튀어 오른다. 그리고 그 중후한 기세를 담은 채 주태소의 도격이 쏟아졌다.
쐐액!
주태소는 진도건에게 부하로 들어오라 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손속에 사정을 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천무방의 천급무사라는 지위는 소속된 무사들 가운데선 가장 높았지만, 천무방의 실질적인 힘은 천무방주 천무경(天武鏡)과 그 아래 세 명의 장로들, 천무방주의 천지인급의 당을 이끄는 세 당주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천혼당(天魂堂), 지혼당(地魂堂), 인혼당(人魂堂) 소속의 무사들은 흔한 장기판의 위의 졸(卒)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가 진도건에게 흥미를 느낀 건 그저그런 졸의 움직임이 아니었기 때문이나 지금은 그러한 관심을 뒷전에 둔 지 오래였다.
‘맞서면 검이 부러지겠군!’
찰나의 순간에 진도건은 칼날을 주시한다.
본능적으로 오른발로 지면을 밀어내니 그의 몸이 어느새 도격의 중심에서 좌로 벗어난다.
주태소의 눈빛이 빛났다.
‘어딜!’
그의 도광(刀光)이 진도건의 잔상을 반으로 갈라냈다. 주태소는 그 도세를 멈추지 않고 진상(眞像)을 쫓아 수직으로 방향을 틀었다. 진도건의 실력이 예상보다 뛰어나다면 또 한 번 벗어날 수도 있겠지만 결국 그의 도세에 갇혀 난도질을 당하리라.
스릉!
그 생각이, 그 확신이 잘못되었음을 주태소는 바로 깨달았다.
그의 칼이 방향을 트는 그 순간에 진도건의 몸이 빙글 돌았다. 마치 펼쳐진 실을 타고 도는 팽이처럼 진도건의 몸은 주태소의 칼날과 두꺼운 팔뚝에 닿을 듯 말듯한 상태로 그에게 한 걸음 파고들었다.
이것은 결코 도검(刀劍)의 간격이 아니었다.
한 바퀴 빙글 돌아 다시 두 눈이 마주쳤을 때 진도건의 검집을 쥔 왼손을 내밀고 있었다. 더 가까운 검의 위치와 이해할 수 없는 간격.
그 순간 왼손 엄지가 검의 호수(護手)를 튕겨 낸다.
절반의 발검(拔劍).
찰나의 순간에 검날은 반쯤 모습을 드러낸 채로 주태소의 목을 탐하고 있었다.
“윽!”
황급히 모든 태세를 거두고 뒤로 튀어 나가는 주태소.
절반만 뽑힌 검 채로 검집을 쥐고 휘둘러 목을 취하려 했던 진도건이 주태소의 그림자를 쫓아 이어 완전히 발검한다.
슈슈슉!
검광이 순식간에 급소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연달아 이어지는 검격이 하나같이 급소를 노리고 들어오는데 주태소도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피해냈다.
하지만 그로서도 근자에 보지 못했던 그야말로 진정한 쾌검(快劍)!
충분히 피했다고 생각했으나 어느새 그의 목과 겨드랑이, 무릎에 긴 자상이 드러났다.
주태소는 진도건이 자신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녹림의 주축인 칠악 중 일인이었으며 전 무림을 통틀어서도 100강 안에 든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만큼 상대의 기운을 읽어 낼 수 있는 눈과 감각이 있었는데, 진도건에겐 그런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잘 잡힌 자세와 균형은 봐줄 만했으나 갈무리된 기운은 그저 저 뒤의 지급무사들보다 조금 나은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건……!’
까득!
소리가 들릴 정도로 이빨을 꽉 깨물었다.
자존심에 상처가 새겨졌다.
순간적으로 거리가 좁혀졌었지만, 진도건의 전진은 주태소의 후진보다 결과적으로 느렸다. 다시 간격을 확보한 주태소가 도법을 펼치며 반격했다.
채채챙!
순식간에 도검이 얽히며 불꽃이 튀었다.
‘음!’
진도건은 고도의 집중을 유지하며 주태소의 눈빛과 그의 도를 좇았다. 부딪칠 때마다 검신을 타고 들어오는 상대의 강한 내력이 느껴진다.
정면으로 부딪치면 필패(必敗)!
그의 검광이 더욱 정교하게 몸을 틀어내며 상대의 궤적을 비켜 낸다.
마치 검막(劍幕)을 펼쳐 낸 것만 같은 착각.
주태소의 이마에 핏발이 불거졌다. 자신이 고수라고 생각했던 인식이 밀린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단전에서 내력을 분출시켰다.
쿵!
진각의 땅 울림.
모든 접근을 불허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횡격과 이어지는 풍압.
진도건의 기세가 살짝 죽으며 거리가 벌어지는 순간.
칠랑구유도(七狼九幽刀) 견랑격세(犬狼擊世).
열 개의 도광이 튀어 오르며 사방에서 날아든다. 마치 열 마리의 늑대들이 그 날카로운 발톱과 송곳니를 드러내며 먹잇감을 향해 덮치는 것처럼.
‘칫……! 이건 반칙이지.’
아주 잠깐 일말의 푸념이 머릿속을 스친다.
그에겐 저런 절기를 펼쳐 낼 내기는 없었다. 아무리 쾌검이라도 열 개의 검격을 동시에 쏟아 낼 수는 없었다. 강한 내력을 지닌 자만이 실제 연격 이상의, 환영으로 치부할 수 없는 날카로운 도기(刀氣)를 뿜어낼 수 있는 것이다.
눈앞의 시야를 모두 감싸 버리는, 마치 절대적인 도세(刀世).
그것을 마주한 진도건의 집중력이 그의 검과 같이 날카롭게 벼려진다.
“모든 공수는 하나의 흐름이고 결(結)이며 거기에는 반드시 매듭을 풀어낼 수 있는 허맥(虛脈)이 존재한다.”
성난 늑대의 송곳니를 마주하여 한껏 낮아진 자세, 검극을 상대에 겨눈 채로 단전 가까이 붙인다.
주태소의 도광이 지척에 이른 순간에 마침내 출검(出劍).
카앙!
주태소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찰나의 순간 검광이 기묘한 호를 그리더니 그의 도법과 공력이 허공에 무너지고 그 반발력에 그의 낭아도가 하늘로 튀어 올랐다. 검광은 그의 손을 뚫고 팔을 빙글 파고들더니 어느새 그의 오른쪽 가슴에 파고든다.
푸욱!
“끄륵!”
가슴에 박힌 검이 빠져나가자 솟구치는 출혈을 막기 위해서인 것처럼 오른쪽 가슴의 상처를 꽉 움켜쥔다.
주태소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패배의 충격 때문인지 눈알의 흰자위도 본래 색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핏발이 섰었다.
“커헉! 헉…….! 너 도대체 뭐 하는…… 쿨럭, 쿨럭!”
“후우……!”
진도건은 깊은숨을 토해냈다.
자신보다 강한 적과의 대결은 그가 수차례 마주해 본 것이었음에도 이 초월적인 긴장 상태는 역시나 낯선 느낌이었다.
진도건은 잠시 주태소를 힐끗 보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호가호위(狐假虎威)의 입장에서 의기양양하던 도적무리들은 어느새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놈들을 제압해라!”
진도건의 승리를 목도하자 지급무사들이 일제히 기세를 올리며 도적 떼들을 덮쳤다.
무림에서의 도적 떼들이란 녹림채나 장강수채 수준의 집단이어도 그 두령급들을 제외하면 아래는 오합지졸의 성격이 강하다. 하물며 이런 산골의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도적 떼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십여 명의 도적 떼들은 일거에 제압당했으며 세 명이 주제를 모르고 반항했다가 칼을 맞고 사망하였다.
진도건은 주태소를 포박하고 그의 가슴에 응급조치를 취했다. 그의 주 임무가 호위였기에 비상시에 대비하여 배운 약간의 의술이 위급한 상황을 넘길 수 있게 도와주었다.
주태소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진도건을 쳐다보았다.
“왜 날 살려 주지?”
“녹림과 천무방이 그래도 사파 무림의 우방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당신을 죽인다면 불필요한 분쟁을 조장하게 되니 피해야 할 일이오.”
“크큭! 나 같은 놈을 녹림이 신경이나 쓸까?”
녹림칠악이 허명은 아니기에 당연히 주태소의 이 말은 허풍이었다. 그러나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진도건의 모습에 주태소는 그것을 끝으로 천무방으로 호송될 때까지 더는 말하지 않았다.
* * * *
“노 장로, 어때? 역시 쓸만하지 않나?”
“방주님의 칭찬에 반신반의했는데 도대체 저런 녀석을 어떻게 찾으셨습니까?”
노지신(勞志信)의 물음에 천무경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휘잉!
절벽 위의 탁 트인 공간에서 부는 바람이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제대로 된 젊은 재능을 발견하고 관찰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꿀꺽!
한 손에 든 호리병에 담긴 술을 들고 벌컥! 입안을 가득 채운다. 목구멍을 꽉 채운 채 식도를 타고 위장까지 불태울 것만 같은 화주의 높은 도수도 밋밋하게 느껴진다.
그는 저 아래 멀리서 장내를 정리하고 있는 진도건 등을 내려다보면서 흐뭇한 미소와 함께 수염을 쓰윽 쓸어내렸다.
“저 녀석을 발견한 건 정말 우연이었지. 4년 전에 위악사장(僞惡蛇杖) 가주악(家朱惡)이 민간인들을 제멋대로 죽인다는 보고에 내가 뛰쳐나갔던 걸 기억하나?”
“아, 그 미친놈 기억합니다. 듣기로는 현장에 도착했을 때 다른 자가 그를 처리했다고……. 아 그자가 설마 진도건입니까?”
“맞네. 현장 근처에 도착했을 때 웬 녀석이 분노에 가득 차 고함을 지르며 가주악에게 달려드는 걸 발견했었지. 난 당장 녀석을 구하려고 했었는데 그때 보았다네. 가주악의 악사장법이 그저 평범한 무부의 몸에 닿지도 못하고 결국 패배하는 광경을.”
위악사장 가주악은 산서성에서 민간 마을에서 연쇄적인 살인을 저지른 자로 광기에 가득 찬 정신상태를 가졌음에도 무공과 경공이 뛰어나서 살문(殺門)에 요청한 추살령에도 살아남은 자였다. 그가 마침 천무방의 근거지인 산서성에서 사단을 벌이자 그를 다시 놓칠까 하여 천무경이 직접 그를 처단하기 위해 출도한 것이었다.
그 현장에서 그는 진도건이라는 인재를 발견하였다.
그는 아주 평범했다.
무공을 배웠는지 자세에서 태가 나고 약간의 내력도 느껴졌지만 그뿐이었다.
그의 눈에는 그저 터질 듯한 분노로 상대의 위력을 가늠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덤벼드는 평범한 무부(武夫)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치 불 속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그때를 회상하면서 천무경은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며 입을 다시 떼었다.
가주악과 진도건이 막 부딪치기 직전에서 천무경과의 거리는 한달음에 좁히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 때문에 그의 손에는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방주패(幇主牌)을 던지려고 했다. 막 출수하려는 찰나 선제적으로 달려드는 진도건의 검광을 본 순간 그는 작게 전율했다.
그는 경공을 쓰는 것도 멈추고 어느새 자리에 서서 두 사람의 합을 보고 있었다.
가주악의 사장술은 소문대로 꽤 대단하고 노림수가 잔악하여 자신과 삼장로가 아닌 당주급을 파견했다면 위험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평범한 무부가 보이는 검술은 가주악의 사장술을 말 그대로 유린했다.
스무 합도 넘기지 못하고 가주악의 목은 공중에 날아가 버렸다.
“가주악이라면 저 낭아도 주태소와 견주어도 손색없을 겁니다.”
“그렇지. 아마 저놈이 어릴 때부터 제대로 된 호흡법으로 수련해서 깊은 내공을 갖추었다면 아마 지금 당주들보다 더 뛰어났을 걸세. 충분히 강호에 명성을 날렸겠지.
“하긴 그의 내력은 확실히 실력에 비해 얕은 수준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뛰어넘는 검술! 그의 스승을 한번 만나 보고 싶구먼.”
진도건은 스승의 이름도 몰랐다.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천무경으로서는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최소한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다. 진도건의 인간 됨됨이는 오히려 정파에 어울릴 정도로 협심(俠心)이 좋고 결단력이 있어 신뢰감이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꿀꺽!
천무경은 다시 술 한 모금을 들이켰다.
“바람은 그만 쐬고 이만 돌아가지.”
“그러시죠.”
두 사람은 나란히 경공을 펼치며 산속 숲길을 달렸다.
그러던 중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던 노지신이 천무경에게 물었다.
“그럼 곧 열리는 비무제(比武祭)에 저 친구를 내보내실 것인지…”
“껄껄!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만. 내 여식이 자기를 내보내 달라고 어찌나 떼를 쓰던지!”
천무경이 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지만, 노지신의 얘기는 흥미로운 구석이 있었다.
‘확실히…… 재미는 있겠구먼.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