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일 년 후, 어느 행복한 날2021.10.29.
정신없는 듯 평온한 날이 쉬지 않고 흘렀다. 그날은 황제 자리에 오른지 딱, 일 년째 되는 날이었다. 겨우 일 년이라고 말할 수도, 일 년 밖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그 날들 동안 레이얼과 클로이는 단 하루도 허투루 쓰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길롯 일파의 빈자리를 채운 레이얼의 사람들은 이제 자리를 잡아 어엿하게 한 몫을 당당히 해내고 있었고, 클로이는 작게는 사교계를 크게는 제국의 어머니로 제대로 자리매김했다. 물론 그들이 그동안 해내야 했던 일에 비하면 드러난 건 별로 없었다. 사람들은 평화로울 때, 나라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게 되니까. 그저 모두의 관심에서 황실이, 귀족가가 멀어졌을 뿐이었다. 제국민들은 이제 그들의 삶에 대해 온전한 신경을 기울였다. 무자비한 세금에 시달리거나, 기근에 자식을 굶겨 죽이게 되진 않을지 발밑이 꺼져 드는 가혹한 생각 대신 오늘 저녁엔 뭘 먹으면 좋을지에 관해 이야기할 여유를 되찾았다는 뜻이었다.
“어이, 룻거! 일 끝났으면 한잔하러 가는 거 어때?”
굵은 땀을 닦던 룻거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뻐근한 어깨를 돌리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밭 끝에서 손나팔을 해서 부르는 건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아니다. 조금은 변했나. 지난 일 년 사이, 저들의 얼굴에선 절박함이라거나 절망 같은 것은 죄다 쭉 빠져 사라졌다. 마른 땅을 되살리느라 고생한 탓에 살은 그때보다 빠지고, 오히려 행색은 더 나빠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를 부르는 이들은 그때와 달리 웃으며 당연한 일상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
흙투성이가 된 괭이를 툭툭 털어 정리하며, 룻거가 슬쩍 웃었다.
“웃지 말고 대답을 해야지! 간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어?”
“오늘 새 오크통을 딴댔는데, 두고 우리끼리만 가버릴까?”
“나쁘지 않지!”
룻거는 이것이 누구 덕인지 잘 알고 있었다. 괭이나 휘두르고 장작이나 패던 손놀림이 아니겠나. 그런 엉성한 몸뚱이가 이렇게 성한 꼴을 하고 내일을 경작할 수 있는 건, 지난 해 싸늘한 바람이 몰아치던 평야에서 자신을 무자비하게 내친 아르네 덕이었다.
‘가라 룻거! 우릴 돕고 싶다면 사람들을 챙겨 떠나!’
오십 명의 기사들 틈에서 단둘만으로 버티던 아르네. 심지어 기사들이 민란군이던 자신들을 기를 쓰고 죽이려 하자, 온몸을 내던져 막아주기까지 했었다. 제국의 검이라던 위명은 헛소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도 사람이었다. 오십 가닥으로 쏘아져 들어오는 검을 단 두 자루의 검으로 죄다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더러 쳐내고, 더러 맞으면서도 공작은 그들을 악착같이 지켜냈다. 물론 모두 막아주진 못했기에, 지금 룻거를 부르는 밀런은 근위대의 검에 맞고 왼 다리를 절뚝인다. 그러나 밀런은 그것을 원망하지 않았다. 아르네 공작이 아니었더라면, 그를 대신해 검을 맞은 아르네 소공작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오늘 포도주를 외치는 대신, 차디찬 땅 아래 묻혀 모두에게 안타까운 이름으로 기억되었을 터다.
“왜, 일이 남았어?”
잠깐이라고 생각했는데, 상념이 길어졌던 모양이다. 밀런이 다리를 절면서 도와주려는 듯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 모종만 심는다며? 아니, 눈이 왜 그래?”
“괭이 털다가 눈에 뭐가 들어갔어.”
룻거는 휘몰아치는 기억에 벌겋게 달아오른 눈두덩을 손등으로 거칠게 비비며 손을 내저었다.
“괭이질 처음 해보나. 쯧쯧.”
덕분에 밀런에게 모자란 놈 취급을 당했으나, 룻거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빨리 움직여! 원래 오크통 처음 여는 날이 젤 맛 좋은 거 몰라? 우리 말고도 올 사람 많아! 서둘지 않으면 놓친다고.”
“알았어. 간다, 간다.”
“내가 먼저가? 그래도 첫모금은 아르네 공작님 몫으로 빼두어야지?”
“간다고. 같이 가자 좀.”
이미 그들은 달라진 오늘을, 그리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누구 덕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매일 매 순간 그들만의 방식으로 감사함을 담아 ‘함께’ 하기에, 굳이 보탤 필요는 없었다. 룻거는 벌게진 눈을 해서 괭이를 어깨에 메곤 빠르게 움직였다. 해가 지고 있었다. 새로 딴 포도주를 받아들고, 올해 농사의 풍작을 빌기에 딱 좋은 시간이었다.
바뀐 듯 달라진 일상을 사는 건 민란군 뿐만이 아니었다. 아르네가는 요즘, 때아닌 핑크빛 기류에 공작저가 온통 들썩이는 중이었다. 엘리오 소공작의 일이었다면 아르네 공작저가 이토록 소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소공작의 일이니 쉽게 입에 올리기 쉽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소문의 주인공은 엘리오 소공작만큼 지고하지는 않으나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었다.
“라이언, 혹시나 해서 묻는데, 미친개가 연애한다는 소식 들었나?”
“……미쳤어?”
“어허, 이렇게 소식이 어두워서야. 요즘 북부령에 미친개 소식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은근히 소식을 전하던 기사, 주드가 경악하는 라이언의 옆구리를 은근히 팔꿈치로 찌르며 웃었다.
“농담 아니야. 혼자만 바보 되지 말고. 요새 미친개 한결 온화해진 게 다 그 탓이라니까?”
주드의 진지한 목소리에, 라이언이 농담이 아님을 눈치채곤 얼굴을 굳혔다.
“……저런. 대체 누가 그 미친개 목줄을 잡은 거야? 고맙긴 하지만, 영애 사정이 딱하군. 그래.”
일명 미친개. 대외적으로는 아르네의 젊고 유능한 집사장이며, 비밀리에 아르네 공작의 그림자 기사단의 단장. 그가 어떻게 아르네에 의탁하게 된 건지는 아직까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다. 하지만, 이 젊은 집사장의 성질머리만큼은 모르는 이가 없다. 적군 아군의 구분도 없고 오로지 머릿속에 ‘아르네’만 넣고 사는 미친 자. 멀쩡한 낯짝을 해선 생글거리고 잘 웃는 이 남자는 겉으로 봐선 펜이나 간신히 쥘 만큼 호리호리하고 가는 체형이다. 그러나 그와 대치하게 되는 순간 깨닫게 된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주먹이 얼마나 단단한지, 늘어뜨리듯 성의 없이 쥔 검날이 얼마나 무겁게 떨어지는지. 검 끝에 자비와 상식 같은 건 결여되어 있기에 같은 편마저도 그를 ‘미친개’라고 부르게 만드는 잔혹한 남자. 그 남자가 부리는 그림자 기사단이 얼마나 독하게 구를지는 상상도 버거운 참이었다. 그런데…… 지금 누가 뭘? 라이언은 미친개에게 위협당한 작고 귀엽고 여린 미지의 영애를 떠올리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어 버렸다.
“세상에……그 영애는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렇게 그가 얼굴도 모르는 영애를 동정할 때였다.
“우리 에반이 어디가 어때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초소를 울렸다.
“……로지 클라크?”
함박눈을 고스란히 얻어맞은 로지가 자신을 보며 경악하는 기사를 향해, 빙긋 웃었다.
“로지 클라크 경이라고 부르세요. 작년에 폐하에게 서임 받았는 걸요.”
“아, 아니. 아무튼 로지 경이 그…… 그……?”
“삿대질은 나쁜 건데!”
라이언도, 그리고 소식을 전한 주드도 미처 몰랐던 게 있었다. 사랑에 빠지면 서로 닮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전에 로지는 실력 넘치고 화통한 성격이었다. 뒤끝도 없을뿐더러 잔정도 많고 언제나 올곧기만 한 사냥꾼이었다 이 말이다. 그런데 그랬던 그녀가, 에반 드로이에넬을 만나 변했다. 정확히는 못돼먹은 말투라던가. 혹은 무자비한 손놀림이라던가.
“으억!”
라이언은 삽시간에 팔이 꺾인 채 신음했다.
“손, 손, 손, 손!! 경! 경!!”
얼굴이 새빨개져 뒤로 꺾인 손을 풀어 달라 라이언이 외쳤으나, 로지는 에반과 똑 닮은 미소만 지을 뿐 손을 풀어주지 않았다.
“미친개 아니에요.”
“그래. 그래. 손, 손, 손.”
“엄살은. 이 정도로는 부러지지도 않는데.”
나만 나쁜 사람을 만든다니까? 기도 안 차는 불평을 툭, 내뱉으며 라이언을 풀어준 로지가 손을 탁탁 털며 턱짓했다.
“그래서, 경들 어때요?”
“아, 뭐가 어때요.”
라이언이 꺾인 팔목을 쓸며 부어터진 목소리를 내자, 눈치를 보던 주드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괜찮아, 괜찮아. 저쪽도 어차피 이제 돌아갈 곳이 없으니까 이젠 여기서 적응해보려는 눈치이고.”
“머저리들. 되지도 않는 희망 같은 걸 일 년이나 품고 있다니.”
“길롯 천하에서 그래도 한가락씩 하던 집안들이니까.”
“두 가닥씩 했어도 어림없죠. 그렇게 떠받들던 길롯 무너지는 꼴 못 봤나? 웃기네 정말.”
“아, 그래서 왜 왔어요?”
뻐근한 팔을 돌리며 라이언이 툴툴거리자, 로지가 그제야 초소에 들른 이유가 생각난 듯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로지가 품에서 빼든 것은 눈처럼 하얀 봉투였다. 그위에 선명히 찍힌 것은 황금 밀랍으로, 새겨진 무늬가 몹시 화려했다.
“……황궁에서 온 서신?”
주드와 라이언은 곧장, 문장의 주인을 깨닫곤 멍하니 물었다. 도대체 일개 기사에게 황성에서 편지를 보낼 이유가…….
“아가씨……아니, 우리 황후 폐하께서 부르세요.”
기사들은 깜빡하고 있었던 ‘로지 클라크’의 원래 신분을 떠올렸다. 제1 사냥꾼이기도 하며, 작년 서임 받은 기사이기도 했으나 로지 클라크는 대내외적으로 클로이 시오도르의 전담 시녀였다. 토벌이 시작되기 전 근심하는 황후를 위해, 자청해 영지에 내려와 있어서 그만 깜빡했지만 말이다.
“그런데……요?”
툴툴거리려던 라이언이 어째 의기양양하기 짝이 없는 로지의 표정에 괜히 불안해 말끝을 공손히 올렸다.
“날 총애하시는 우리 황후 폐하께서 이렇게 덧붙이시지 않았겠어요? 로지, 오는 길이 험하니 부디 호위 기사와 함께 오겠어?”
“뭐!”
“호위!”
누가 로지 클라크를 해를 입힐까보냐 싶었으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눈이 허리까지 푹푹 쌓이는 아르네 북부령은 수도에 늦봄이 지나갈 무렵이 되어서야 이 하얗고 지겨운 것들이 녹았다. 그 말은, 잘만 보이면 이 하얀 늪지대를 벗어날 수도 있다는 것! 라이언과 주드의 눈빛이 삽시간에 무척 공손해지더니 열의로 반짝반짝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크흠. 경. 괜찮으시다면 호위는 제가 해드리고 싶습니다.”
“수도까지는 꽤 멀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로지 경. 황후 폐하께서 경을 얼마나 총애하십니까. 눈길에 미끄러져 발목이라도 삐면 크게 근심하실 겁니다.”
기껏 생각해낸 위협이 넘어져서 발목을 삐는 정도였다. 로지는 자신이 듣기에도 가당찮은 아부에 웃음을 터트리지 않으려 무척 애를 쓰며, 눈을 굴렸다.
“주드 경, 그러고 보니 경은 아이가 있었지요?”
“열 다섯이 되어 아카데미에 보냈지요. 라이온 경도.”
“적적하시겠네요?”
“그렇지. 뭐. 하지만 북부령에는 아카데미가 없으니까. 원체 아이들이 적으니 어쩔순 없지만.”
“수도에 간 김에 아이들을 보는 것도 좋겠군요?”
“허!”
“자주 볼 수 있으면 어떨까요?”
“뭐?”
로지의 말에 두 중년 기사의 얼굴에 환하게 불이 켜졌다.
“종종, 볼 수 있다면 말이에요. 그럼 부인들께서도 기뻐하시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죠?”
“업고 갈까, 로지 경?”
“아니야, 주드. 들것을 만들자구!”
영문도 모르고 호들갑을 떠는 두 기사를 보며 로지가 들고 있던 편지를 품에 넣으며 웃었다. -로지, 돌아와. 올 때 우리 아기를 위한 호위 기사도 함께 와주면 더 좋을 것 같아. 편지의 내용은 원래 이러했다. 다만, 제 입으로 발설할 수 없기에 각색하였을 뿐. 자신보다 나이가 있는 그림자 기사들에게 다가와 툭툭거리며 말을 하고 팔을 꺾으며 못된 도발을 해본 건 그래서였다. 아기님의 곁에 두어도 좋을 성품도 성격도 좋은 기사를 찾기 위한 로지의 시험이랄까. 물론, 믿지 못할 행운에 놀랄 기사들의 나중 사정이야 알 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