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하루살이와 엉큼한 황제2021.10.26.
“……들어오라 하셨다고요?”
오랑그리 후작부인은 시녀장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고, 믿을 것은 언제나 치우침 없던 아르네의 위명뿐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일 년은 빌어야 겨우 접견이 허락되지 않겠나 했다. 지난 시간 자신은 바보처럼 울기만 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얼마나 바보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시오도르에게도 무릎 꿇지 않던 아르네를 캐서린 길롯에게 하던 대로 오만방자하게 대한 제 죄. 그런데, 단 한 번 만에 접견을 허락해 주었다고?
“폐하께서…… 아니 신청이, 내가 오랑그리인 것을 제대로 고한 게 맞습니까?”
“물론입니다. 후작 부인. 폐하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으니 이만 움직여주겠습니까?”
넋 놓은 듯했던 오랑그리 후작 부인은 시녀장의 말에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긴장과 흥분에 속이 메스꺼웠으나, 지금은 어리광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가시지요.”
기회는 두 번 주어지지 않을 것이니 오늘 반드시 용서를 구하고 말 것이다. 접견실로 향하는 그녀의 표정이 전에 없이 단단했다. * * * 오랑그리 후작 부인은 접견실에 들어서자마자 납작 엎드렸다. 시선 한 번 마주치지 않은 채, 공손하다 못해 비굴하기 짝이 없는 어조로 제 죄를 낱낱이 빌며 선처를 구했다. 황후는 그녀의 고해가 끝날 때까지 단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다. 길고 긴 읍소가 끝난 후, 황후가 속삭였다.
“아예 머리가 없는 건 아닌가 보오.”
여운이 남는 의미심장한 말에, 오랑그리 후작 부인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맞은편에 앉은 황후는 웃고 있었다. 청명한 빛을 머금은 푸른 눈은 그날과 달리 부드럽게 접혀 사랑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살짝 얼떨떨한 기분이 되어 뭐라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바라만 보는 그녀를 향해 황후가 다시 입을 뗐다.
“……그래서, 내게 변함없는 충성을 보이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제국민으로 당연한 것을요.”
“후작도 그렇게 생각하실까요?”
“물론입니다. 폐하. 오랑그리 후작가는 언제나 ‘황제’ 폐하의 부름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후작부인은 자신의 낼 수 있는 가장 공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대해보지요.”
황후의 미소는 여전히 따뜻했고 말투엔 웃음기가 배여 상냥하게 들렸다. 그러나 오랑그리 후작부인은 황후에게 이미 호된 맛을 본 후였다. 북부의 어린 계집이라고 얕잡아 보았다가 어떤 일을 당했던가. 방심은 안 될 소리였다. 오늘 후작을 만나면 그에게도 단단히 경고해둘 참이었다. 말도 안 되는 허세 따윈 두 번 다시 입에 올리지도 말라고. 그의 허세에 놀아났다가 무너진 자신의 처지를 좀 보라고. 그 이후로 황후와 한담은 조금 더 이어졌으나, 오랑그리 후작 부인은 시종일관 공손하고 깍듯하게 행동했다. 대답은 두 번쯤 생각하고 말을 고른 후에야 했으며, 눈매는 함부로 치켜뜨지 않도록 몹시 신경 썼기에 그녀가 후작저로 돌아왔을 땐 기진맥진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그 누구보다도 황후에 대해 열렬하고도 완벽한 복종을 자처했다. 오랑그리 후작 부인의 이야기는 금방 사교계로 퍼졌다. 무참히 끌려 나갈 때만 해도 그녀의 미래는 박살 난 것 같아 보였다. 도무지 재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돌아올 수 있다니? 한때 그녀의 실추를 바랐던 이들에겐 뼈아픈 소식이었다. 이대로 침몰하나 싶었던 사교계의 여왕이 상황을 역전해, 황후라는 거대한 세력을 등에 업은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물론 후작부인은 ‘황후’와의 관계에 단 한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았으며, 황후 역시 마찬가지였는데도 말이다.
“어떻게 또, 또 이럴 수가 있지! 대체 우리 바르벨이 뭘 어쨌기에! 분명 오랑그리 것들이 천박한 수를 써서, 황후를 꼬여낸 게 분명하겠지만!”
바르벨 후작 부인은 입술을 짓씹으며 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누구보다 오랑그리의 실각을 기뻐했던 그녀였다. 캐서린 황후시절, 사교계의 여왕 자리에 오른 오랑그리 후작 부인덕에 같은 등작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사교계 입지는 좁고도 좁았다. 셋밖에 없는 후작가였다. 이베트가는 황후를 내어준 후 성년을 치른 여아가 아직 나오지 않았고, 남은 건 오랑그리와 바르벨이었는데 한번 승세를 잡은 오랑그리는 바르벨이 발을 붙일 틈을 주지 않았다. 설마하니 캐서린 황후를 겁박하듯 움켜쥐어버릴 줄 누가 알았겠나. 대응이 늦었던 바르벨은 선발을 놓친 후 그 처지가 몹시 옹색해져, 나중엔 길롯에게라도 줄을 대볼까 했으나 그나마도 ‘레이디’의 일로 무산되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황후는 예나 지금이나 자신과 무슨 악연인지 모를 일이다. 분한 마음에 숨소리가 절로 시큰거리며 거칠게 울렸다.
“……정말이지……. 어떻게 매번.”
말끝에 분함이 코끝을 울려 시큰해졌다. 아닌게 아니라 억울했다. 나서서 설친 것은 겨우 며칠 만에 다시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며 활개를 치는데, 지은 죄도 없는 자신은 다시 뒷방 신세가 될 예정이 아닌가? 진짜, 나도 접견 신청이나 넣어볼까.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다소 황당한 생각을 이어가던 그때, 시종장이 찾아왔다.
“부인.”
“무슨 일이지?”
바르벨 후작 부인은 재빨리 축축한 눈꼬리를 훔치고, 시종장을 들였다. 눈치도 없이. 소리 없이 투덜거리던 것도 잠깐 후작부인은 시종장의 말에 그만 입이 찢어지라 웃고 말았다.
“황후 폐하께서 오후에 차를 한 잔 하고 싶으시다며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무어라고 답을 전할까요.”
“가야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는 잔뜩 흥분해서 당장 황궁으로 달려가려 했다. 놀란 시종장이 이제 조찬을 마쳤으며 황후 폐하가 말한 시각이 아직 5시간 남짓 남았음을 수차례 말하고 나서야 다시 자리에 앉힐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바르벨 후작 부인이 입궐하는 것과 동시에 사교계는 다시 한번 거세게 출렁였다.
“요즘, 바쁘시다고요?”
늦은 밤, 잔뜩 지친 얼굴로 침대에 들어온 레이얼이 클로이를 안으며 속삭였다. 온종일 활자와 씨름했더니 눈이 쓰리다 못해 빠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클로이를 보지 못하는 건 더 괴로웠다. 지척에 두고도 하루 두 번 보는 게 전부가 아니던가? 성혼후 함께 사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더 보기가 힘들다. 이렇게 매일 밤 침대에서 뵙는 분의 소식을 남을 통해 전해 듣는 기분이란……. 작게 한숨을 쉰 레이얼이 클로이의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깊게 숨을 들이켰다. 상쾌한 체향을 들이켜자, 비로소 함께 있다는 실감이 든다. 옅은 불만감과 안달 난 마음이 한풀 꺾이자 저도 모르게 졸음이 쏟아졌으나 레이얼은 눈을 부릅뜨며 참았다. 오늘은 물어볼 게 있었다.
“로이.”
“응.”
클로이 역시, 졸렸던 모양인지 대답하는 목소리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뭘 하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
물론, 사교계 일은 그대의 영역인 걸 알아. 그저 궁금해서야. 덧붙이는 뒷말이 속삭임보다 희미하고 사랑스러워 클로이는 어깨를 떨며 키득거렸다.
“대체 뭐가 그렇게 조심스러운 거야. 응?”
클로이는 레이얼의 허리에 손을 두르며 바짝 몸을 붙였다.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 종일 온 몸에 힘을 줘 곧게 세우고 있기에, 밤이면 클로이는 기운이 빠져 침대 안에서 파이 반죽처럼 늘어져 있길 잘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귀찮아하는 것을 레이얼이 모를 리 있나. 요컨대, 클로이가 그를 안아준 건 정말 다정한 행동이었다는 뜻이었다.
“아르네이며, 폐하의 하나뿐인 비인 내가 하는 일이란 건 전부 폐하를 위한 거 아니겠어?”
“두 후작 부인을 양손에 쥐는 게?”
“하나만 쥐어야 할 이유는?”
“굉장한 논리야.”
“바르벨이라 걱정되는 거야? 아님 오랑그리에게 휘둘릴까 봐?”
클로이는 레이얼의 가슴에 이마를 붙이며 물었다. 쿵쿵. 일정하게 울리는 심박은 여전히 씩씩하고 우렁찼다.
“그런 게 아니야. 바르벨 그가 길롯에 연을 대려고 한 거야, 모두가 알고 있는 바지. 스스로 몸을 사리고 있으니 당분간은 걱정할 필요도 없고.”
“알아, 그러니까 지금이야. 몸을 사리고 있을 때 손아귀에 틀어쥐고 버릇을 들여야지.”
“뭐하러?”
“버릴 순 없잖아. 셋밖에 없는 후작이야. 이베트 후작 하나만으로는 부족해.”
“공작가 하나와 후작가 하나로 부족해서 남은 후작가를 전부 손에 넣겠다고?”
“몰랐구나! 전하. 북부인들은 말이야, 기회가 되면 뭐든지 확보해두는 습관이 있어.”
지척에서 마주친 새파란 눈동자가 예쁘게도 반짝인다.
“뭐든지?”
“그럼. 말했잖아 내일을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고. 내일까지 남아 있을 거라는 보장이 어디 있어?”
“아아. 그렇군. 그래. 뭐든 오늘. 기회가 되면, 모두를. 그런 거지?”
“응? 응.”
“……맞아. 북부식.”
“어?”
소곤거리던 클로이의 목소리가 문득 바짝 솟았다. 허리에 얌전히 감겨 있던 레이얼의 손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등골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손끝이 우묵한 자리를 따라 긁듯이 스치는 느낌에 절로 머리끝까지 오싹해지는 감각이 일었다.
“폐하?”
쿵쿵 울리는 심박이 내 것인지 그의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마른침을 꼴딱 삼키며 불러보지만 레이얼은 대답 대신 클로이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저기, 나 좀…….”
피곤한데. 뒷말은 목선을 따라 올라온 남자의 입술에 막혀 입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겨우 입맞춤 한 번에 이성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요 며칠 잘 피했다 싶었는데, 괜히 북부 이야기를 꺼내는 통에. 이제 능숙하게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는 레이얼을 느끼며 클로이가 옅은 신음을 목 아래로 흘렸다. 볼 안쪽 점막이 쓸리는 느낌은 겪어도 겪어도 아찔하기만 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하는 생각은 숨이 얽히는 순간 하얗게 날아가고 말았다.
“잠깐……!”
숨을 쉬려 거리를 벌리는 틈을 타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 했으나, 성혼후 상대에 대해 익숙해진 건 클로이뿐만이 아니었다. 레이얼은 클로이의 말을 못 들은 체하며 다시 입술을 붙여왔다. 달콤한 숨이 질척해지는 건 순간이었다. 밀어내듯 레이얼의 어깨를 두드리던 클로이의 손이, 오래지 않아 그를 반기기라도 하듯 감아 당겼다. 실금같이 벌어졌던 사이가 단박에 뭉개지듯 좁혀졌다. 그리고 버겁도록 짙은 감각의 밤이 시작되었다. 물론 이 밤을 끝내는 건 언제나 그랬듯이 클로이 쪽이었다. 창밖이 희붐하게 밝아오는 것을 보며, 클로이는 집요하게 파고드는 레이얼을 밀어냈다.
“그만.”
“조금만 더. 응?”
“북부인이……,”
말을 하는 사이 그가 바짝 붙어왔다. 절로 숨이 턱, 받치는 느낌이었다. 호흡을 고른 클로이는 그가 물러나는 느낌에 진저리를 치며, 재빨리 말을 이었다.
“북부인이 무슨 하루살이인 줄 알아!”
찰싹! 툭하면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무자비하게 ‘오늘만’ 살 것 같이 구는 남자는 기어이 첫 햇살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차지게 얻어맞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