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황후의 발아래2021.10.22.
황제 부부는 느지막이 일어나 오찬을 즐겼다. 전날의 일정이야 모두가 아는 것이었기에, 다소 지친 표정의 황후는 이해가 되었는데 어째서 황제의 얼굴에선 빛이 나는 걸까?
“……폐하, 실베르카라도 한 단지 드신 겁니까?”
모두의 궁금함은 키릭슨의 입을 통해 터졌다.
“그대가 약속한 실베르카는 아직 구경도 못 하지 않았나?”
“얼굴에서 빛이 나기에요.”
서류를 건네받은 레이얼은 키릭슨 답지 않은 아첨이라 생각해 코웃음을 쳤다. 키릭슨이 아첨이라니!
“저질스러워졌어.”
“흥. 저질이 누군데.”
가볍게 타박하는 황제의 말에, 황후가 핀잔을 줄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나. 찻잔을 내려놓는 그녀는 무척이나 고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자리에 있던 이들은 모두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 생각했다.
“미안하다니까, 로이.”
황제가 나서서 빌기 전까진. 그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의 발치 아래 무릎을 꿇기까지 했다.
“헉!”
역사상 단 한 번도, 야사로도 전해지지 않던 이 믿기지 않는 모습에 사방에서 경악이 터졌다. 입을 크게 벌린 시종장이며, 턱을 떨군 시녀들은 지금 자신이 뭘 본 건지,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를 만큼 한껏 당황한 상태였다.
“미안하다니까 로이.”
“…….”
어지간히 화가 난 듯 황후는 황제를 본체만체하며 고개를 돌리기까지 했다.
“제발.”
그런데 황제는 그 모습에 언짢아하기는커녕, 오히려 간절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황후의 손을 붙들고 빌기까지 했다. 맙소사. 어디에서 터진 건진 모르겠는데, 몹시 적절한 탄성임이 분명했다. 제아무리 황후를 사랑했어도, 그 누구보다 존경받는 황후였더라도. 무릎을 꿇고 매달리던 황제는 없었단 말이다.
“하지만, 너무 예뻐서 참을 수가 없었단 말이야.”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다니!”
“내 평생 우는 그대를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봤지.”
황제는 황후의 손등에 가볍게 입맞춤을 남기며, 마냥 좋다는 듯 웃었다. 시녀들은 감히 자신이 황제를 내려다보기라도 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라도 할까 봐 고개를 돌리고 눈을 꾹 감았다. 하지만, 고막을 녹이는 것 같은 진득한 미성이며 잔뜩 애달은 말투는 그가 누구이며,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뻔히 알면서도 정신을 산란하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릿해지는 달콤한 목소리. 시녀들은 가슴이 쿵쿵거리며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아 얼굴이 하나둘 차례로 붉어지기 시작했다.
“나쁜 남자 같으니라고.”
“그러니, 아르네가 지켜줘야지.”
쪽. 시야가 차단되니, 청각이 조금 더 예민해져 가벼운 입맞춤 소리까지 생생해졌다.
“늘 생각하지만, 폐하는 말을 정말 잘한단 말이야. 이게 수도식 화법인가?”
“뭐라도 좋아. 그대 마음에만 들 수 있다면.”
쪽.
“봐줘. 로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언제나 단 하나뿐인 내 편이라 해줘. 내가 그대가 아니면 어디에 가서 이럴 수 있겠어?”
심금을 울리는 다정하고도 절절한 애원은 듣는 이를 홀리고도 남을 만큼 강력했다. 사람들은 이제 ‘감히’ 황제를 무릎 꿇린 오만한 황후라는 생각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황후에게 매달리는 황제가 불과 얼마 전까지 어떻게 살아왔던지를 떠올렸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선 황제의 묵인 아래 계비에게 학대 아닌 학대를 평생에 받았었다. 그뿐이었나. 그를 괴롭힌 건 캐서린 전 황후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황태자의 정신을 갉아먹고,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면 길롯은 황태자를 고립시켰다. 한 개인의 삶과 황태자라는 사회적 지위까지 살뜰하게 박살 냈다. 어느 하나 실수로라도 남겨주는 것 없이. 죄다. 그때 황태자를 지지하던 이들은 정말로 ‘죄다’ 길롯에게 찍혀 매장당했다. 짝을 내어준 이들은 목숨으로 값을 치렀고, 대회의장에서 그의 편을 들었던 이들은 파직을 면치 못했다. 그러던 차, 황태자의 ‘레이디’로 움직여 일방적인 흐름을 바꾼 게 바로 황후였다. ……매달릴 만 하지. 대체 뭘 잘못한 건진 모르겠으나, 수렁에 빠져 희망이라곤 한 톨도 보이지 않던 황태자의 편에 서주었던 황후가 이럴 정도면……. 황제 폐하께서 잘못해도 보통 잘못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흥. 수도 남자란.”
이것 봐. 사람들은 누그러진 황후의 목소리에 그녀가 레이얼 황제를 얼마나 아꼈는지를 또 한 번 되새겼다.
“용서해줘서 고마워.”
황제의 감사는 어느 결엔가 무척 당연하게 들렸다. 그리고 그건 키릭슨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한 헌신을 한 아르네. 레이얼의 즉위 후 상처를 치료받으며 쉬는 사이, 키릭슨은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중 가장 놀라웠던 것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모든 걸 숨기고 있던 ‘아르네’였다. 아르네답다고 해야 할까, 무모하다고 해야 할까. 제국을 위해 길롯과 맞서 시오도르를 살리려 하다니. 보통은 그럴 때,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하지 않나. 어쨌거나 그 옛날 등을 맞댄 전우라 이건가. 끝까지 시오도르를 놓치지 않은 것이 새삼 감동적이다.
“……하나?”
“…….”
“키릭슨 고어.”
“아, 죄송합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오늘 오후 대회의를 소집할 수 있겠나, 라고 물었네.”
“이번 주까지는…… 일정을 비워두었습니다.”
상념에 잠긴 키릭슨을 현실로 끌어들인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황후, 클로이였다. 여전히 황제인 레이얼은 황후에게 무릎을 굽히고 있는 채였다.
“전후와 비슷한 상황일 텐데, 그렇게 오래 쉬어서야 되겠나.”
“아닙니다. 폐하. 두 분 폐하께서 회복하시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날 전란보다 더한 일을 겪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언제 이야기인가. 회복은 끝났고, 피로도 풀렸지. 황제 폐하를 보면 모르겠나?”
부디 데려가서 넘치는 힘을 맘껏 써주게. 황제의 머리칼을 쓰는 척, 황후가 입술만 달싹이며 키릭슨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어?
“황제 폐하께서는 개인이기 앞서, 이 제국을 책임져야 할 막중한 임무가 있지. 부디.”
키릭슨은 부디라고 발음할 때 황후가 몹시 비장한 표정을 지었던 것을 놓치지 않았다.
“로이, 그런 식으로 날 밀어내는 거야? 용서해준다더니.”
무릎에 엎드린 황제를 밀어내듯 해서 일으킨 황후는 어딘지 엉거주춤해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쓸데없이 꼭 이럴 때만 눈치가.”
나직이 중얼거린 황후는 한숨을 한번 내쉰 뒤 황제에게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말하자면, 살고자 하는 본능이랄까요. 마침 폐하께서 건설적인 방향으로 힘써주실 곳도 있으니 천만다행 아니겠어요?”
어어……. 분명 별 이야기 없었는데……? 키릭슨은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눈을 질끈 감은 이곳의 모든 이들이 죄다 벌게져 있었다. 이들 역시 몰라도 좋을 두 분 폐하의 밤의 사정을 자신처럼 깨달아버린 모양이었다. 하나둘 눈을 떠 고개를 돌리긴 하나, 찰나에 황제를 스친 시녀들의 시선이 몹시 매서웠다. 아이고……. 키릭슨은 속으로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짚었다. 여섯을 잃고 맞은 일곱 번째 피앙세였으니, 그 집착이며 애틋함이 시작부터 남달랐다. 거기에 남모르는 뒷사정으로 끈끈한 유대감도 나누었고, 백일 전 그날 밤 생사고락도 함께하였으니 마음이 얼마나 깊어졌을까…….
“…….”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질! 어느샌가 레이얼을 바라보는 키릭슨의 시선이 시녀들처럼 싸늘해졌다.
“황후 폐하. 어진 말씀 감사합니다. 그럼 주신 기회 사양치 않고 기쁘게 받겠습니다. 황제 폐하는 제가 곧장 모시겠습니다.”
키릭슨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클로이의 양옆으로 시녀들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폐하. 마침 좋은 향유가 들어왔답니다. 근육통을 푸는 데 퍽 좋다지요.”
“아아……. 그래?”
“따끈한 욕조에 계시다 보면 한결 수월해지실 거랍니다.”
그들은 도통 허리에 힘을 주지 못하는 황후를 요령 있게 부축해서 걸음을 옮겼다. 물론 이 모든 일엔, 레이얼의 허락 따윈 필요하지 않았다.
그날 해가 저물기도 전, 온 수도에 황제가 황후 폐하께 절절맨다는 소식이 파다하게 퍼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황제가 권위나 체면 따위는 생각지 않고 공공연하게 무릎을 꿇고 황후에게 매달린 게 아니었나. ‘너만 알고 있어’라는 말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나만’ 아는 이 굉장한 것을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게 만드는 것이다. 심지어 그 비밀이 누구나가 경악할만한 것이라면 더더욱 떠벌리고 싶어진다.
“오오…… 맙소사.”
오랑그리 후작 부인은 제게 눈을 빛내는 바르벨 후작 부인을 보며 침음을 삼켰다. 빈말로라도 사이가 가깝다고도 할 수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뜻밖에, 자신을 찾아왔다는 이야기에 냉큼 나온 게 큰 실수였던 모양이었다. 황후의 축객령이 아니었나. 대놓고 자신을 사교계에서 쫓아내겠다 선언한 터에, 그럴 사이가 아닌데도 찾아온 건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인데. 이 기가 막힌 처지에 그만 정신이 나가 앞뒤 생각지도 않고 이 몹쓸 것을 방문객이랍시고 받아들였으니……. 전부 다 자신의 죄였다.
“정말, 맙소사였지요. 설마하니, 황제 폐하께서 그렇게까지 황후 폐하께 휘둘릴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하긴, 인장도 황후 폐하께서 가져다주셨다지요?”
‘그대가 내게 내린 황좌.’
황제가 된 레이얼 시오도르가 한 첫마디라고 했던가. 오랑그리 후작 부인은 눈을 반짝이는 바르벨 후작 부인 앞에서 신음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살랑살랑 부채를 흔들 때마다, 자신이 싫어하는 향이 독하게도 풍긴다. 분명, 저 향은 자신이 금지한 것인데도. 보란 듯이 건방을 부리는 것을 보고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속이 뒤집히는 것 같은 향을 참아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가엽고 딱해 울컥 뜨거운 것이 눈꼬리까지 차올랐다.
“아무튼 사정이 그렇다고 해요. 혼자 모르고 계시면 서운하실까 봐 잠시 짬을 내어 왔답니다.”
“……고마운 일이에요.”
입을 열자, 토기가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다. 그러나 자신의 바닥을 보고 싶어 눈을 번뜩이는 바르벨의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순 없었다. 오랑그리 후작 부인은 끝까지 필사적으로 참아내었다. 그리고 만면 가득 웃음을 물고 있던 바르벨 후작 부인이 돌아가자마자, 침대에 얼굴을 묻고 크게 울어버렸다. 이미 너무 비참했는데, 자신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바르벨이 득의양양한 꼴을 보자니 더는 버틸 힘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두 눈이 퉁퉁 부은 오랑그리 후작 부인은 몸을 일으키자마자, 자신이 가진 가장 수수한 드레스로 차려입고 황실로 향했다. 이렇게는 살 수 없으니 죽더라도 매달려볼 참이었다. 황후는 연회를 금지했지 접견까지 막은 게 아니었다. 비겁하긴 했으나, 지금 자신은 체면을 차릴 상황이 아니었다. 물론, 제가 구걸했다는 소문은 금방 퍼질 것이고 하루 이틀 만에 황후의 용서를 받아내긴 어렵겠으나. 황후가 나고 자란 아르네를 믿기에 빌어볼 참이었다. 구걸이든 애원이든 뭐라 불려도 좋았다. 단 한 번만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면.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오랑그리 후작 부인의 표정이 자못 비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