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시오도르의 짐승과 눈물2021.10.19.
굉장한 하루였다. 누가 봐도, 대단히 힘들고 고단한 하루였기에 피로한 건 당연했다. 시종이 물러가자마자 클로이는 대번에 허물어졌다.
“으어어어어.”
조금 전까지 허리를 곧게 세우고 더없이 우아하게 말하던 아르네 황후는 온데간데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상한 소리를 입으로 내며 침대로 기어가듯 하는 클로이를 보자 그녀답다 싶기도 하고, 또한 자유분방한 분이 오늘 얼마나 애썼는지 알 것 같아 한편으로는 마음이 울컥하기도 했다.
“클로이.”
“이제 그으으만. 아으 죽겠어.”
손을 바짝 들어 올릴 힘도 없는지 클로이는 성의 없이 손끝만 털었다.
“옷 벗겨줄까?”
레이얼의 말에, 침대에 기어오르던 움직임이 뚝 멎었다.
“……뭐?”
한 박자 늦은 대답이 아니더라도, 창백한 여자의 얼굴에 끼친 홍조가 그의 말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다시 시중을 받을 거면 일이 번거로울 테니 도와주겠다는 지극히 합리적인 제안이었건만, 클로이의 달아오른 두 볼을 보자 괜히 레이얼도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그건……!”
오해를 풀려 막, 입을 떼던 순간 클로이의 고개가 희미하게 끄덕여졌다.
“피곤해서 깜빡했지 뭐야. 오늘 첫날밤이지.”
침대 위에 올려둔 두 손이 떨어지고, 흐물거리던 몸이 곧게 세워졌다. 순식간에 변한 분위기는 놀라웠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건 우아한 황후도, 피로에 전 그의 로이도 아니었다. 슬쩍 고개를 비틀어 시선을 내리까는 것만으로 충분히 농염해진 표정을 그려낸 그녀는, 그의 신부였다.
“…….”
절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맹세코. 그런데, 저 표정에 눈꼬리를 물들인 옅은 홍조에 그만 있는 줄도 몰랐던 마음이 동요해버렸다. 들이켜는 숨에 새빨간 불씨가 단숨에 덩치를 키워 그의 가슴에 불을 지른다. 피로감에 젖어 나른하던 몸에 가볍게 긴장감이 돌며 목덜미까지 뻣뻣해지는 기분이었다. 레이얼은 손을 들어 소름이 인 목덜미를 쓸었다. 쿵쿵쿵. 제 것이 아닌 것 같이 울어대는 심장 소리가 광포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아직 실낱같은 이성이 남아 있었다. 레이얼은 지쳐 있던 클로이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로이, 오늘은.”
“그럼……벗겨줄래?”
기억력은 하찮았다. 속삭임보다 옅은 한마디에 레이얼은 그만 머릿속이 하얗게 세버렸다. 무리하지 말라고 예의 바르게 말을 해주어야 하는 것까지 죄 잊어버렸다.
“응?”
작게 채근하는 소리에 시선이 클로이의 드레스에 꽂혔다.
“아…….”
연회가 끝나고 아르네가와 이베트가를 따로 불러 ‘가족’끼리 조촐한 티타임을 즐길 때, 클로이는 이미 화려했던 예복도 벗고 화장도 지웠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그녀는 이제 더는 아르네 클로이가 아니라 클로이 시오도르, 이 엘피디오의 황후가 되어버린 후다. 예복보다는 편안하다지만 홈드레스보다는 격식 있는 차림에, 연회 때보다는 덜하다고는 하나 아예 민낯일 수는 없어 가벼운 화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풀러 줘.”
그 말은 뒷면에 진주 단추가 빼곡하게 박힌 드레스는 혼자 못 벗는다는 뜻이었다. 평소라면 시녀를 불러 시중들게 하겠으나, 오늘은 첫날밤이었다. 옷을 갈아입겠다고 불렀다간, 잠자리 단장을 단단히 해줄 게 분명했다. 모르긴 몰라도 향유를 듬뿍 넣은 향기로운 목욕물에 몇 시간이고 넣어놓고 온몸에 향이 밸 때까지 문지를지도. 이미, 레이얼도 클로이도 한번 당해보지 않았나! 풀어줘야 한다. 레이얼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단추를 쥐었다. 톡. 매끄럽고 차가운 작은 단추가 여밈을 빠져나오는 소리가 선명했다. 톡톡. 그런데, 이 작은 소리가 뭐라고 긴장이 되나. 여밈이 벌어질 때마다 드러나는 하얀 살결이 뭐라고. 작은 단추 하나가 풀릴 때마다 이성이 희미해진다. 벌어진 여밈 사이로 보이는 흰 살결이 몹시 보드라워 보인다. 우묵한 등골을 따라 희미하게 드린 음영이며, 한쪽으로 모아둔 머리칼 중 한 가닥이 흘러내린 것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자극적이지 않은 게 없다.
“아아…….”
작은 신음과 함께 레이얼은 자신의 얼굴을 세게 문질러 버렸다. 하나하나 눈에 담아가며 긴장하는 모습이 너무 파렴치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람. 정신 차려!
“잘 안 되면 뜯어도 돼.”
가까스로 돌아온 정신은 클로이의 한마디에 갈가리 뜯겨 나갔다. 후. 손안에서 내뱉는 숨이 길고 뜨끈했다.
“제발……로이. 그런 말은.”
잇새로 터지는 그의 애원이 조각조각 나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 가지 못했다.
“나도 부끄러워.”
한숨보다 작은 클로이의 속삭임에 굳은 듯 서 있던 레이얼이 움직였다. 조금 전과 달리 레이얼은 얼굴에서 주저함을 지운 채였다. 손을 뻗어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등을 끄는 것을 시작으로, 그는 침실 구석구석을 밝힌 모든 불을 꺼뜨렸다. 침실 안에 남은 유일한 불빛은 벽난로뿐, 이중으로 커튼을 쳤기에 이 밤 달빛도 깨끗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사방을 따끈한 어둠에 담근 남자가 돌아와 그때까지 가만히 서 있는 여자의 드레스에 손을 올렸다. 따끈한 손끝이 흰 살결을 스치나 싶더니 이내 드레스 안자락으로 파고들어 단단히 움켜쥐고는 그대로 찢듯이 벌리자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투두두둑. 발아래로 떨어진 진주들이 빗방울인 양 고여든다. 레이얼은 천천히 손을 뻗어 긴장에 굳은 클로이를 품에 안아주었다.
“굳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
“그래도.”
이야기하며 레이얼은 손으로 드러난 하얀 등을 쓸어주었다. 난로도 피워두었고, 계절도 봄에 가까워지긴 했지만 밤공기는 맨살로 버티기엔 여전히 차가웠다. 손바닥을 타고 느껴지는 소름이 이토록 선명한데, 고집부리듯 첫 밤을 요구하는 클로이가 그녀답다 싶기도 하고 한 번쯤 저 억지 같은 의연함을 꺾어보고 싶다는 충동도 든다. 어쩔까. 레이얼은 우묵한 등골을 쓸어내리며 느릿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목이 뻐근할 만큼 꺾어내려 서늘한 마른 어깨에 입을 맞추자 경련하듯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
하지만, 밀어내진 않는다. 망설이던 마음이 조금 짓궂게 비틀리는 것을 느끼며 레이얼은 작게 웃었다.
“그럼, 사양하지 않을까 봐. 알다시피 나야, 언제나 그대가 아쉬웠으니까.”
말끝에 반듯한 이로 어깨를 질근질근 깨문 것은 경고였다. 지금이라도 솔직히 굴어보라는 마지막 경고이자 안달과 욕망 그 어디쯤을 헤매는 남자의 심정이었다. 레이얼은 굳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절박의 끝에서 클로이를 집어 삼켜버리고 싶던 순간에도 참아내지 않았던가. 이제 영원을 허락받기까지 했다. 그러니, 하루의 유예쯤은 기쁘게 내어줄 수 있었다. 클로이가 솔직하게 말해주기만 한다면야 점잖은 신사처럼, 물러날 용의가 충분하다 이 말이었다. 그런데 클로이는 가만히 숨죽일 뿐,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등허리를 쓰는 그의 손바닥으로 소름뿐만이 아니라 한층 격렬해진 심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데도 말이다. 그 순간 누군가가 레이얼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 고집쟁이에게서 항복을 받아내자.’
‘괜찮다는 소리 대신, 버겁다는 소리를 들어보는 건 어때?’
갈급하게 클로이를 탐하고 싶어 내내 군침을 흘리던 그의 짐승의 목소리였다. 다가설 때처럼 만큼이나 느릿하게 떨어진 레이얼이 입꼬리를 들어 올려 빙긋 웃었다.
“로이, 난 한번 시작하면 무를 생각이 없는데, 괜찮겠어?”
“물론이야.”
“괜찮다고?”
“응.”
“안 멈춰줄 건데.”
“누가 멈춰도 좋댔어?”
“아아, 정말 다행이네. 그거?”
짐승에게 먹혀버린 남자의 시선이 새파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 * * 타인의 온기가 이렇게나 감각적인 건지 처음 알게 되었다. 목덜미를 스치는 손끝. 맞닿은 가슴. 스치는 숨소리. 그 어느 것 하나 버겁지 않은 감각이란 없었다.
“으응…….”
클로이는 작게 신음하며 고개를 외로 꺾었다. 전신이 따끈하고 저릿해 생각을 이어나가긴 어려웠다. 곧잘 숨이 차 허덕이면서도 레이얼을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아득하게 쏠리는 쾌감에 발끝까지 아득해져 번번이 그를 아프도록 붙들게 된다. 옆구리를 따라 움직이는 손끝이 갈비뼈를 지나 밭은 숨을 토해내는 입술을 뭉개고 들어왔다.
“로이, 로이.”
쉬지 않고 입을 맞추는 레이얼이 잔뜩 안달이 난 목소리로 클로이를 불렀다.
“이제 그만 나를 허락해 주겠어?”
대답하지도 못하게 손가락으로 입안을 헤집으면서 그는 클로이에게 ‘응’이라고 되물으며 재촉하기까지 했다.
“물어도 돼.”
그의 손끝이 슬그머니 어금니 사이로 파고들었다. 클로이는 그의 손을 끌어내 어금니 사이에서 빼내곤 입을 맞춰주었다. 눈꼬리까지 발갛게 달아올라 쌕쌕거리던 클로이가, 그의 목덜미에 팔을 감곤 살며시 끌어당겼다. 그 어떤 대답보다 확실한 확언이었다. 레이얼은 클로이가 끄는 대로 조심스럽게 몸을 묻었다.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무척 노력했건만, 마지막 순간 기어이 클로이에게선 옅은 신음이 터지고 말았다. 머리끝까지 절로 쭈뼛해지는 가녀린 비음. 그가 가둬둔 짐승이, 여린 신음에 흥분이 차올라 덜덜 떨어대며 그를 재촉했다. 이 밤 원 없이 탐하고 싶다. 온몸 구석구석을 흡족할 때까지 안고 만지고 쓸고, 핥아 제 것이라는 흔적을 깊게 남기고 싶다. 이 세상에 제게 남겨진 단 하나의 가족이며 신부가 아닌가. 모든 것을 빼앗길 뻔하던 순간 제게 주어진 짝. 안간힘을 다해 지켜내, 드디어 맞이한 결실이 너무도 달아 안심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불안이 차올랐다. 레이얼의 짐승은 그 사실을 그에게 속살거렸다. 확인받아줘. 확신을 줘. 그녀도 너와 같은 마음이라는 걸. 내가 알 수 있게 해줘. 그리고 이 밤, 레이얼은 자신 안의 짐승이 속살거리는 그 소리가 싫지 않았다. 눈꼬리를 타고 길게 흘러내린 눈물을 기꺼이 받아마시며 레이얼이 클로이에게 속삭였다.
“로이. 사랑해.”
“나도 나도.”
감긴 눈꺼풀 아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며, 레이얼은 느릿하게 몸을 부딪쳤다. 클로이는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그를 기꺼이 품어주었다. 품고 또 품고. 그 밤, 절정에 오른 행복에 불안을 느낀 남자가 기꺼이 항복할 때까지. 더는 불안에 절어 그들이 함께하는 이 순간을 의심하지 않을 때까지. 클로이는 기꺼이 두 팔을 내어 그를 끌어 당겨주었다. 밤사이 열이 잔뜩 올라 동그란 이마는 식은땀에 젖어 있었으나, 레이얼의 눈에는 화려하게 예장을 한 황후의 모습보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아직 부족해요?”
“지쳐 보여.”
벽난로의 불은 진작에 꺼졌지만, 커튼 사이로 새들어오는 햇빛이 선명해 침실 안은 전혀 어둡지 않았다.
“난 괜찮…….”
“무리하지 마. 로이. 하루로 끝날 사이도 아닌걸. 좀 자둬. 밤은 앞으로도 무궁무진하니까.”
다정하고 상냥한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진 건 바로 그때였다.
“……뭐?”
“아, 첫날만 이럴 거라 생각한 거야 혹시?”
그럴 리 있나. 레이얼은 부러 심술 맞게 웃으며 몸을 바짝 붙였다.
“읏!”
방심하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침입에 클로이가 혀를 깨문 표정으로 눈을 찌푸렸다.
“오늘 밤, 내일 밤. 난 앞으로의 매일 밤을 기대하고 있는 걸.”
“너무하잖아!”
글썽. 밤 내내 그가 보고 싶어 하던 눈물이, 아침햇살 아래 터져 나왔다. 원망을 가득 담은 채. 아아. 귀여워라. 지친 게 너무도 여실히 보여 이만 풀어주려 했던 것도 잊고 레이얼은 부드럽게 클로이를 끌어당겼다.
“그, 그만 좀! 이 빌어먹을 시오도르!”
알수 없는 소리를 욕처럼 하는 클로이를 품으며 레이얼이 짧게 입을 맞추었다. 쪽. 정말이지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