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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음란해지고 싶어지는 마음 (113/121)

113. 음란해지고 싶어지는 마음2021.10.01.

“그런데, 폐하.”

키릭슨은 아직은 뻣뻣한 혀를 조심히 움직여 발음을 분명하게 하려 노력했다. 반쯤 잘렸던 혀는 궁의의 도움으로 완벽하게 붙었다. 궁의는 섬세한 살점이 완벽히 옛 모습을 찾기까지 3년쯤 걸릴 거라고 이야기했다. 무자비하게 혀를 끊어먹은 날로부터 겨우 석 달. 말은 할 수 있으나, 혀를 움직일 때마다 등허리가 절로 선뜩해질 만치 아파 키릭슨은 어지간하면 입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픈 게 문제가 아니었다.

“국혼일…… 레이디 아르네와 상의는 하신 거죠?”

“응?”

서류를 넘기던 레이얼의 손이 딱, 멎었다. 당황한 레이얼을 보자 키릭슨은 그만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쏴붙일 말이 너무 많은데, 혀가 아프다 못해 뻣뻣하게 굳어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으읍!”

키릭슨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왁왁거렸다. 말은 못 해도 괜찮았다. 레이얼이 허둥지둥 뛰어나갔으니까.

‘국혼일…… 레이디 아르네와 상의는 하신 거죠?’

레이얼은 잔뜩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집무실을 뛰쳐나왔다. 최근 귀족들을 휘어잡는 데만 골몰해서 그만, 깜빡하고 말았다면 변명이…… 될 리가 없지. 레이얼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미 해도 지고 곧 달이 뜰만큼 늦은 시간이 아니겠나. 귀택한 아르네 공작이 클로이에게 ‘국혼’에 관해 말을 해도 수천 번은 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아무리 약혼한 사이라고 해도 아무런 의논 없이 결혼 날짜를 턱 하니 공표했으니 무례한 짓이다. 레이디로 활약했던 클로이의 과거가 그들의 발목을 잡기 전 밀어붙이려 했다라는 건 더는 이유가 아니라 변명이 될 뿐이다.

“…….”

생각하니 아르네 공작에게도 미리 양해를 구하지 않았다. 회의장에서 너무 담담하게 지지하기에 정말로, 생각도 못 했다. ……이런 개자식. 지금 그걸 핑계랍시고! 레이얼은 제게 욕을 퍼부으며 침실문을 열었다. 침대맡에 둔 새장엔 전서조가 얌전히 있었다. 전서조야 많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황실’의 전서조였다. 그가 건넬 사과는 ‘레이얼’의 것, 황제의 사과가 아니었으니 ‘로이’ 전용의 새를 찾아 와야했다. 급한 마음에 새부터 꺼낸 레이얼은 전서조용 편지지와 잉크를 찾으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흠.”

어서 보내야 하는데, 깃펜을 쥐는 순간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안해. 실수였어. 뭘 쓰더라도 클로이의 마음을 달래기엔 역부족일 것 같다.

-로이, 국혼을 상의 없이 공표한 건 정말 성급했다.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몹쓸 짓이야.

-미안하다 로이. 혹시라도 ‘레이디’의 일로 발목이 잡힐까봐 그만…….

벌써 몇 번째 편지인지 모르겠다. 제대로 된 사과를 건네겠다는 다짐과 달리, 쓰다 보면 자꾸 변명이 되고 만다. 레이얼은 쓰던 편지를 다시 한번 구겨버리고는 새 종이를 집어 들었다.

-로이, 정말 미안하다.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어.

“사랑해서지!”

생각지 못한 맑은 미성에 놀라 손이 움찔 떨리며 편지지에 새카만 얼룩이 생기고 말았다.

“로이?”

“써. 사랑해서라고.”

놀란 레이얼의 시야에 생글거리는 클로이가 잡혔다.

“어떻게?”

당연히 화가 나서 찾아가도 만나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찾아와줄 줄은 몰랐다. 이 뻔한 이야기를 클로이는 생글거리는 얼굴로 슬쩍, 농담처럼 넘겼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두 번 와본 것도 아닌데?”

“만나러 와주었어?”

“이럴 것 같아서. 와봐야 했어.”

말끝에 클로이는 머쓱한 표정으로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실은 핑계 삼아 왔어.”

보고 싶어서. 속삭이듯 덧붙이는 말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달았다. 레이얼은 그대로 손을 뻗어 클로이를 품에 안았다. 미안하다든가 하는 말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보고 싶다는 한마디에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고, 그 역시 보고 싶다는 생각밖에 남지 않았다. 석 달만이었던가. 금방이라도 데리러 올 것처럼 문을 열어 달라던 남자는 활짝 열린 아르네 문을 두고도 한 걸음도 떼지 못했다. 물밀 듯이 쏟아지는 일 때문이었다.

“로이.”

“응.”

“보고 싶었어.”

“응, 나도.”

클로이는 그동안 레이얼에게 지나가는 말로도 투정 부리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바쁜지는 이미 아르네 공작을 통해 알고 있었다. 길롯은 이 거대한 제국을 거의 반절에 가까이 집어삼키고 있었다. 끝없는 탐욕가인 길롯도 세를 불리는데 이십여 년의 세월이 들었다. 그런데, 그것을 단 석 달 만에 끊어냈으니 레이얼이 얼마나 분주했을지는 차마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런 남자에게 투정이라니. 이런 남자에게 서운하다니! 이 와중에 국혼까지 강행하겠다는 그의 마음이 기쁘기만 하다. 클로이는 고개를 살짝 들어 레이얼의 뾰족한 턱 끝에 입을 맞추었다. 원래도 요철이 분명했던 얼굴은 마르면서 한층 더 또렷해져 있었다. 가뜩이나 날렵하던 턱선이 베일 듯 날 서 있다. 도드라진 턱선을 따라 가만가만 입을 맞추자, 옅은 한숨 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이러지 말고 차라리 화를 내.”

때아닌 소리에 눈이 동그래져 있던 클로이는 이어지는 레이얼의 말에 작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염치없어 손도 못 대는데 이렇게 애태우는 건 너무 하잖아. 로이.”

피가 마르는 것 같다고 속삭이는 남자는 클로이의 어깨를 으스러질 만큼 힘껏 껴안고 있었다. 어디서 엄살을 부리느냐고 한마디 하려 했지만, 클로이는 가만히 입술을 뗐다. 나긋하게 휘어든 눈매며, 달큼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기에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너무도 선명하게 도드라진 턱 근육을 보는 순간 레이얼이 얼마나 ‘정직’하게 사실을 읊는 건지 깨닫고 말았다.

“…….”

입 맞춰도 돼. 생각 없이 터질 뻔했던 허락을 재빨리 삭였다. 마주친 새파란 시선이 타오르고 있었다. 발화점을 지나친 극고온의 불꽃이 바로 저럴까. 클로이는 그의 시선만으로 차근히 녹아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가뜩이나 안달이 난 남자를 자신이 얼마나 겁 없이 들쑤셨는지도. 그저 잘못했다고 밤새 편지나 쓰게 둘 걸. 아르네 공작편에 국혼날이 정해졌다기에, 레이얼이 잊지 않고 절 생각하고 있었구나 싶어 한달음에 달려올 때가 아니었다. 꼴깍. 입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에 마른침을 삼키는 와중에, 레이얼이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바짝 솟은 콧날이 그녀를 찌르듯 콕, 코끝에 와 닿았다.

“미안해. 클로이.”

“…….”

“의논 없이 국혼을 결정했어. 저밖에 모르는 개자식이라고 뺨이라도 갈기고 가줘.”

“…….”

“로이, 제발, 정말 개자식처럼 굴기 전에 가줘.”

긴긴 말을 속삭이는 내내 클로이는 단 한 번도 눈을 깜빡이지 못했다. 꽂아 넣는 것 같은 열렬한 시선에 박제된 것처럼 매여서. 터지는 날숨도 짧게 끊어 간간이 흘린 게 최선이었다. 자신을 개자식이라 부르라며 잘게 떨던 남자의 눈동자에 정염이 가득 차올라 불티처럼 흩날렸다. 가 줘. 연거푸 쏟아지는 속삭임이 밀어처럼 진득해 머릿속이 녹아버리는 기분이었다.

“말했잖아. 난 짐승을 다루는데 일가견이…….”

분명 레이얼은 이대로 돌아가라 등을 떠미는데, 그의 애원과 정반대되는 대답이 막 입에서 쏟아지려던 찰나였다. 겹쳐진 상체를 따라 품에 넣어온 것이 클로이를 쿡, 찔러 정신이 반짝 났다.

“아!”

그제야 클로이는 제가 황궁에 와야 했었던 이유가 생각났다. 이 밤 몰래, 굳이 와야 했던 그 이유 말이다.

“짐승을 다루는데 일가견이……뭐?”

점잖게 등을 떠밀던 남자는 반쯤 쏟아진 허락에, 흥분에 전 목소리를 감추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내 속삭였다.

“약속을 지키러 왔어. 전하.”

막 고개를 기울여 탐욕스럽게 클로이를 삼키려던 남자에게 반짝, 사랑스럽게 빛나는 것이 들이밀어 졌다. 그리 밝지 않은 실내등 아래서도 뿜어내는 빛이 상당히 화려했다.

“…….”

레이얼의 시선이 클로이 손에 들린 것에서, 그녀에게로 번갈아 가며 넘어왔다.

“레이디는 자신의 예고를 단 한 번도 어긴 적 없어.”

“이건…….”

“약속한 핑크 다이아몬드야. 처음으로 캔 것을 전하의 피앙세에게 주기로 했지.”

“맙소사 로이.”

내내 흥분에 돌아버린 눈을 하고 있던 레이얼의 눈에서 불이 꺼지는가 싶더니, 그가 불현듯 소리 내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웃음소리가 무척 크고 맑아 듣는 클로이까지 기분이 상쾌해질 정도였다. 한참이나 웃던 레이얼은 손을 들어 제 눈가를 훔치고 나서야 말을 이을 수 있었다.

“맞아. 나의 레이디는 언제나 정직했고, 항상 자신의 약속을 지켰지.”

“맞아. 그런데 그게 그렇게 웃겼어?”

“아니. 내가 얼마나 멍청했는지 이제 알아서 말이야.”

레이얼은 ‘레이디’가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세크레스 광산을 받아 가던 날, 레이디는 자신에게 처음 채굴한 핑크다이아몬드를 주겠다고도 했다. 그리고 덧붙이길 자신은 제 것을 남과 나누지도 않는다고도 했다. 그때만 해도 생색내기 위한 소리인 줄 알았다. 내 것을 남에게 주지 않는 내가, 무려 네 피앙세에게 선물을 한다라는 생색이라고 생각했었단 말이다. 당연히 모르고 들으면 그렇게 들릴 수밖에 없는 말이지 않나. 하지만 알고 나니, 이토록 정직한 말이 없다. 어쩌면 이렇게 교묘한 말이 있을 수가 있을까. ‘내 것을 남과 나누지 않아’라며 대놓고 말해줘도 알아듣지 못한 자신을 보고 웃던 그날의 로이가 떠오른다. 앙큼하고 귀엽다. 그리고 딱 그만큼의 크기로 궁금해지고 안달이 난다.

“‘내 것’을 남에게 주지 않는다던 레이디. 눈앞에 피앙세를 두고도 못 알아보던 나를 볼 때 어땠어? 재미있으셨나?”

그때의 넌 날 어떻게 생각했어?

“재미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

한 걸음 다가서는 레이얼의 목덜미에 당연하게 팔을 감은 클로이가 빙긋 웃었다.

“우리는 한 번도 못 만나봤잖아. 약혼조차 명령서로 대처했고. 전하가 날 알아보지 못하는 건 당연했지.”

들리게 속삭인 클로이가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어 레이얼에게 맞추었다. 쪽. 귀여운 소리와 함께 담백하게 닿았다가 떨어진 행동은 그 어디에도 야살스러운 구석은 없었으나, 오랜 시간 마음을 달군 두 연인에게 불을 지르기엔 충분했다.

“내가 그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라…….”

그래서 날, 알아본 넌 어땠는데? 쪽. 또 한 걸음 다가서는 남자에게 웃는 얼굴로 클로이가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레이얼이 이번엔 가볍게 맞닿았다 떨어지게 두지 않았다.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을 쫓듯 따라잡아 다시 겹치고, 두 번 다시 떨어지지 못하게 목덜미를 잡아 꾹 눌렀다. 갑자기 진득해진 입맞춤에 놀랄 새도 없이 순식간에 숨이 강탈당했다. 가뜩이나 안달 난 남자가 아니었겠나.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클로이를 살뜰하게 쥐어짰다.

“로이. 대답해 봐.”

입을 떼지도 못하게 몰아세우며 레이얼이 속삭였다.

“그럼, 날 보고 뭐라고 생각했어?”

클로이는 잘잘 끓는 레이얼의 눈을 보며 한껏 다정하게 속삭였다.

“정말, 근사하다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아아, 로이 제발 그런 말은.”

“왜, 또 어디가 음란하게 들려?”

“아니, 음란해지고 싶어진단 말이야.”

레이얼의 나직한 경고와 함께 헐겁게 떨어져 있던 두 입술이 꽉 맞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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