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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황제와 정부 그리고 사생자 (112/121)

112. 황제와 정부 그리고 사생자2021.09.28.

희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황궁 담벼락을 따라 판결문을 붙이는 것이 아스라하게 보인다. 붙이고 또 붙이고, 담벼락을 감싸는 종이는 끊이지 않고 새로이 나왔다. 대체 뭐라고 적혀 있을까. 캐서린은 그 내용이 몹시 궁금했다. 분명 자신에 관한 것일 텐데, 뭐가 저렇게 많은지 알 수 없었다. 간수들이 떠드는 것을 듣기로 황제는 병사 처리되었고, 그날의 일은 묻었다고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예 벌을 안 받는 건 아닐 테지만, 대외적으로 죄 없는 황후를 핍박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해봐야 요양을 빙자한 영지감금령 정도 생각하고 있던 캐서린의 얼굴 위로 의아함이 서렸다. 판결문이 어째서 그렇게 긴 거지? 그녀는 레이얼 시오도르를 제법 잘 알고 있었다. 황태자로 자랐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천진하고 순한 아이였다. 겨우 몇 마디에, 정말 제가 어미를 잡아먹은 죄인이고 외조부에 짐이 된다고 생각할 만큼. 자신을 철석같이 믿었다. 어머니라 부르며. 그녀가 제게 악의를 가질 이유가 없다고. 짜증 나게 착해빠진 아이는 그대로 선량하게 자라났다. 그 선량함이 누구보다 강직했기에 성인이 되고 나선 자신과 대척점에 서길 주저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지만 타고나길 순하고 다정한 아이가 아니었나. 제국민의 동요를 막으려 그 밤의 일까지 덮을 정도니, 절대 자신에게 가혹하게 굴 리 없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이 불안은 뭘까. 쿵쿵쿵. 무섭게 뛰는 심장 소리에 불안이 더해진다. 가슴에 손을 올려 옅은 숨을 내쉬던 캐서린은 문득 레이얼과의 독대가 떠올랐다. * * *

“왜 그렇게까지 하셨습니까?”

“몰라서 묻니?”

캐서린은 레이얼의 질문에 사납게 쏘아붙였다. 당연한 승리를 점치던 중에 끌려왔으니, 약이 바짝 오르고 눈이 뒤집힐 만하지 않겠나.

“왜, 내 꼴이 이렇게 되니 꼴같잖은 훈계라도 하고 싶어졌다는 거야?”

“내쉬까지 속여가며 이러는 이유가 뭐였습니까?”

“네가 그걸, 그걸…… 어떻게 알았어?”

한없이 사납던 캐서린의 기세가 단번에 훌쩍 꺾였다. 절대 들키지 않을 줄 알았다. 황의도 정확한 이유를 찾아내지 못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알았지? 당연한 궁금증과 함께 초조함이 불쑥 솟아났다.

“설마 내쉬에게도 말한 거야?”

“아직. 하지만…… 결국 알게 되지 않을까요?”

“네가 입단속만 시키면 될 일 아니겠니. 꼭 그 애까지 끌어들여야겠어?”

“이미…… 폐하께서 전부 끌어들이지 않으셨습니까?”

머뭇거리긴 했으나 레이얼은 캐서린을 향해 ‘폐하’라는 존칭을 써주었다. 여전한 다정하고 반듯한 레이얼의 모습에 캐서린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아니야. 아니지. 이 일은 너와 나만 아는 거란다, 레이얼.”

캐서린은 걸음을 옮겨 그녀와 레이얼을 가로지른 창살을 힘껏 움켜쥐었다.

“내쉬는 아무것도 몰라. 네가 말하지만 않으면. 이제 넌 충분히 그럴 힘도 있잖니?”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가련하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캐서린은 매달렸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레이얼의 색이 옅은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게 빛나기만 할 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레이얼 시오도르.”

속이 바짝 타는 기분에 캐서린은 다시 한번 그를 불렀으나, 레이얼은 역시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무감한 표정과 그보다도 시린 눈빛. 천진한 레이얼, 상처받은 레이얼, 분노하는 레이얼, 그리고 슬퍼하며 자책하던 레이얼은 아는데 이런 그는 처음이었다. 순간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소름이 확 끼쳤다. 저 눈. 캐서린은 저런 눈빛을 본 기억이 있었다.

‘주제 파악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그 언젠가 패트릭 시오도르가 자신을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멍청이 보듯 하며 속삭이던 그날 밤 보여주었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자비를 거두어드리는 신 같은 시선. 지금 눈앞에 있는 건 그녀가 아는 레이얼이 아니다! 저건 황제였다. 캐서린은 주저 없이 무릎을 꿇었다.

“레이얼. 제발, 제발 내쉬에겐, 아니 내쉬만은 봐주렴. 응? 넌 이미 다 가졌잖니? 우리 황자님은 이제 남은 게 없는데 어미가 살인자라는 죄목까지 더해지면 어떻게 살아가겠니?”

“……뭐?”

뚝, 떨어지는 목소리가 소스라치듯 떨렸다.

“황제를 죽였다고?”

생각지 못한 레이얼의 반응에 캐서린 역시 놀라버렸다. 그걸 말하는 게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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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서린은 뒤늦게서야 제 실수를 깨닫곤 입을 틀어막았으나, 레이얼의 표정은 이미 차게 굳어버린 후였다.

“어떻게 그런 짓을? 황제를 사랑하지 않았나?”

황제를 살해했다는 말에 레이얼은 마지막 예우도 싹 거두고 그녀에게 노골적인 경멸을 퍼부었다.

“죽음을 은폐한 게 아니라 살인을 감추었을 줄이야……. 이렇게까지 생각 없이 굴 거라곤 생각 못 해봤는데.”

한나라의 황제를 시해한 일에 레이얼의 반응은 당연하다 못해 유례없이 온건하다 할법했다. 하지만, 캐서린은 ‘어떻게 네가?’라는 함의가 담긴 레이얼의 말에 모욕을 당한 기분이었다. 어떻게 내가? 그가 내게 어떻게 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말하지 마!”

“…….”

“그는 그러면 안 됐어! 어떻게 내게, 내게…….”

“그만. 둘 사이는 관심 없어. 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건 간에 황족 시해, 그중 황제를 시해한 것은 중죄야. 황제를 죽이고 황위를 찬탈하려 했으니, 죄목은 반역이겠군?”

“……바, 바, 반역이라니! 이건 후계 다툼이야!”

“캐서린…… 그대도 알고 있잖나. 이건 아무리 우겨도 반역이라는 것을.”

“제발 레이얼. 제발, 제발. 내쉬를 살려줘.”

“…….”

캐서린은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레이얼을 붙잡으려고 했다.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힘껏 어깨를 내밀어 팔을 휘저어 본들 훌쩍 떨어진 그가 손에 잡힐 리 있나.

“너도 알고 있다면서! 내쉬가 아무것도 모르는 거 안다며! 그 애는 무고해!”

“……도통 제정신이 아니야.”

뉘우치긴커녕 발악하는 그녀의 모습에 경멸하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하지만 캐서린은 뭐라 해도 좋았다. 이왕 일은 그르치고 만 것. 그렇다면 내쉬라도 살려볼 생각이었다.

“살려줘! 살려줘! 내쉬는 살려줘!! 너도 알잖아. 단 한 번도 그 아이는 길롯을 휘두르지 않았어. 이번에도 내가 등을 떠밀었어.”

“등 떠밀었건 협박을 당했건, 결국 움직였잖나.”

“원래 아르네 공녀는 내쉬의 짝이었단 말이야!”

새된 목소리가 쩡, 하고 감옥을 울렸다.

“황제가 변덕을 부리지만 않았어도, 아르네 공녀와 내쉬는 문제 없이 짝이 됐을 거라고. 이게 왜 죄가 되는 거야! 넌 다 가졌잖아! 내 아이가 원한 건 아르네 공녀뿐이었다고.”

알고 있었다. 내쉬가 무얼 원해서 제게 동조해주었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 감정이 사랑인지, 호감인지, 그도 아니면 미련인지 그건 모를 일이었으나 아르네 공녀를 원하는 것만은 확실했다.

“겨우 그것 하나 욕심냈을 뿐이잖아! 그런데 그 아이를 기어이 잡아 죽여야 속이 후련하겠느냐고 레이얼 시오도르!!”

맥락도 없고 말도 안 되는 억지임은 알고 있다. 하지만 캐서린은 상관없었다. 뭐가 됐건 레이얼만 움직일 수 있다면, 밤새 떠들 수 있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내지른 고함에도 레이얼은 아무런 대꾸도 해주지 않고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정오가 되어 캐서린은 간수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사실을 밝혔다가는 제국민을 불안하게 할 것이라 봉문한 황실 내의 사정은 이대로 묻기로 했다고 말이다. 심지어 황제의 사인은 겨울 감기가 아니겠는가? 황위 찬탈에 대한 말도 없었다. 그러니, 황궁 담벼락에 빼곡하게 나붙는 판결문이 의아할 수밖에. 캐서린은 입술을 질겅거리며 목을 쭉 빼서, 밖을 바라보았다. 일이 돌아가는 모습이 제게 유리한 게 분명한데도 이상하게 불안했다. 후웅, 짐승 우는 소리를 내며 탑을 휘어 감고 올라오는 바람이 그녀를 후려치듯 몰아쳤다. 빗지 못해 늘어뜨린 머리칼이 잔뜩 엉망이 되었다. * * * 캐서린의 불안은 당장 그날 밤부터 현실이 되어 돌아왔다. 황제가 ‘길롯’의 수탈에 죄를 묻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길롯 백작이 급사하였기에 죄는 ‘길롯가’에 떨어졌다. 앞장서서 엘피디오 제국을 좀먹은 길롯은 귀족의 지위를 잃고, 귀족 계보에서 삭제됐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복권될 수 없도록 황명이 떨어졌다고 한다. 황제는 ‘길롯’ 백작가의 영애와 혼인하였기에 캐서린과의 결혼은 무효화 되었고 내쉬는 사생자로 기록되었다.

“뭐? 사생자?”

수군거리는 간수들의 말을 듣고 있던 캐서린이 철장 문을 잡고 마구 흔들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우리 황자님더러 사생자라니! 사생자라니! 정당하게 결혼해서 태어난 귀한 분이 어째서 사생자야!!!”

감옥을 찢어발길 것 같은 캐서린의 절규는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했다.

“아이 시끄럽구먼.”

쿵. 두꺼운 철갑문이 한 겹 더 둘렸고, 혼자 남겨진 캐서린은 그 안에서 처절하게 홀로 절망했다. 평생 ‘인정’을 바랐던 그녀에게 더할 나위 없이 가혹한 형벌이었다.

  젊은 황제는 수도에 내걸린 검은 근조기가 걷히기도 전 ‘길롯’의 일을 죄다 정리해버렸다. 수도의 타운하우스 중 열에 넷이 주인을 잃고 비었고, 신흥 상단 중 절반이 파산했다. 제국이 휘청일만한 큰일이었으나 황제는 그렇게 두고 보지 않았다. 하나를 거두면, 반드시 하나를 내주었다. 길롯이 사들인 작위는 부당하게 해임되었던 이에게 돌려주었고 신흥상단주의 빈자리는 상인 연합회를 두어 일을 나누게 했다. 그 모든 것을 처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석 달 남짓. 황제의 애도 기간인 백일이 끝나기 딱, 열흘 전에 제국은 짧은 시간에 이 큰일을 치러냈다. 사람들이 주목한 건 이 젊은 황제가 ‘전 황후’를 처리한 방법이었다. 죄를 책임질 길롯 백작이 없었기에 죄를 길롯가에 묻는 것까진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길롯을 귀족가에서 제명하면서부터 일이 무섭도록 커졌다. 하루아침에 황후는 정부만도 못한 처지가 되었으며, 내쉬 황자는 사생자가 되어 입지가 애매해졌다. 선황제가 살아 있을 적 길롯과 황후가 황태자인 그를 얼마나 무도하게 대했는지는 모두가 익히 아는 바였다. 황제에게 너무 무르게 군다며 토로하던 이들마저도 놀라버렸다. 겉으로 보기엔 온화했으나, 더없이 잔혹한 처벌이었다. 귀족들을 놀라게 한 건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황제는 선황의 애도 기간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국혼을 진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즉위식도 스스로 황제의 관을 쓰는 것으로 대신하지 않았나! 귀족들은 젊은 황제의 연이은 파격 행보에 따라가기 너무 벅찼으나 결과적으론 아무도 황제를 말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유는?”

“국혼은 두 분만의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제국의 큰일 아니겠습니까.”

“신기하지. 이렇게나 제국을 생각하는 이들이 그동안은 다 어디 있었던 걸까?”

황제가 저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었으니까.

“저처럼 감옥에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폐하. 살살하세요.”

창백한 안색의 보좌관의 말이 반박할 수 없어 더욱 얄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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