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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무자비하고 잔혹한 판결 (111/121)

111. 무자비하고 잔혹한 판결2021.09.24.

“일이 바빴나봐.”

클로이는 반나절 사이 해쓱해진 레이얼의 뺨을 안타깝게 쓸어주었다. 밤길을 달려온 남자의 얼굴은 차게 얼어 있었다.

“그댄, 좀 쉬었고?”

레이얼은 뺨을 쓰는 클로이의 손을 끌어당겨 입술로 꾹 눌렀다. 되묻는 그의 표정이 다정해 클로이는 어쩐지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슬쩍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그에게 잡혀 다시 돌아갔다.

“아, 미안.”

볼을 붉힌 클로이를 본, 그는 짧은 사과와 함께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숨죽여도 가슴팍이 잘게 떨리는 것까진 감추지 못해 기어이 클로이에게 들키고 말았다.

“왜 웃는 거야.”

“귀여워서.”

잔뜩 수줍어하는 클로이의 모습을 보자 오늘 내내 그를 골치 아프게 하던 일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마음도 몸도 한껏 풀려 녹작지근해지는 기분에 레이얼은 저도 모르게 옅은 한숨을 쉬었다.

“피곤했지?”

“조금.”

“그래도 와준 거야?”

“그럼. 안 그래도 보고 싶었으니까. 마침 새가 날아오기에 잘되었다 싶었지. 난 기회를 놓치는 남자가 아니잖아.”

능글맞은 말투였으나, 목소리는 기운 없이 푹 깔려 있었다. 클로이는 레이얼의 등을 가만가만 두드려주었다. 아닌 척하고 있지만 편지를 받고 한껏 심란했던 모양이었다. 그래. 심란할 법하다. 제게 칼을 겨눈 이복 동생이 아니었나.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모르고 그저 제 어미에게 등 떠밀렸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이 다정한 남자가 혼란스러워할 만했다.

“차 한 잔 줄까?”

“그대가 주는 건 뭐든 좋아.”

평소와 다르게 능글맞은 말투는 심란함을 가리려는 노력인 모양이다. 하지만, 이분은 모르나? 거짓말에 소질 없는 건 마찬가지인 거. 작게 웃은 클로이는 레이얼의 품을 벗어나 그를 탁자로 끌어당겨 앉힌 후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음. 그럼. 잠시만 기다려.”

“무슨…….”

짤막한 한마디와 함께, 자리를 비운 클로이는 이내 양손 무겁게 돌아왔다. 단내가 진동하는 초콜릿 두 잔에 보기에도 찐득해 보이는 초콜릿 케이크에 그거로 부족했는지 시럽과 마시멜로까지. 코가 찡하게 울리는 단내에 설마 하는 심정으로 바라보자, 클로이가 산뜻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먹어. 원래 이럴 땐 단 거 먹는 거야.”

“이럴 때가 언젠데?”

클로이는 굳이 답을 읊어주는 대신 레이얼의 손에 포크를 쥐여주었다.

“먹어. 다 먹고 말해.”

그 태도가 어찌나 단호한지 레이얼은 거부도 못 하고 얕은 한숨과 함께 진득한 초콜릿 케이크를 크게 떴다. 클로이는 그가 케이크 한 조각과 초콜릿을 다 마실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몫을 죄 비우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내가 보낸 편지 때문이지?”

“맞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응.”

역시. 클로이는 마시멜로를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대로였어. 내쉬는……. 황제의 죽음을 전혀 모르고 있더라고.”

“응.”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쉬가 내게 검을 겨눈 것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살려주고 싶어?”

“……모르겠어.”

레이얼은 한숨을 내쉬며 눈두덩이에 손을 올렸다. 이제 보니 그의 안색이 파리하다. 편지를 받고 내내 시름을 한 모양이었다. 상냥한 사람. 클로이는 제 몫의 초콜릿을 홀짝이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가 이렇게 치열하게 고민할 줄 알았다. 하지만, 클로이는 죄는 지은 만큼 벌을 받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권력에 눈멀어 일을 벌인 것은 황후였다. 분명 그녀의 독백에는 내쉬가 없었다.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으나, 클로이는 내쉬가 꽤 요령 없는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진작에 파악하고 있었다. 밉살스러운 말만 골라서 하고, 못돼 처먹은 행동을 하긴 했지만 가만히 보면 내쉬는 길롯과 행보가 달랐다. 첫 무도회에서 클로이는 분명히 보았다. 내쉬에게 달라붙어 있다가 손등을 얻어맞고 밀려나던 길롯 백작을. 길롯의 위세를 업고 설칠 것 같았으면 진작부터 그랬을 텐데, 내쉬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황후와도 길롯과도 그 궤를 달리했다. 자신을 향해 다가설 때도 그는 길롯이 아니라 내쉬였다. 봉문한 아르네를 찾아와 내쉬가 했던 말을 클로이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황태자가 되려 했다. 황제가 아니었다. 그가 욕심낸 것은 ‘클로이 아르네’ 바로 자신을 넘볼 수 있는 명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반쯤의 오기와 반쯤의 호감이 그를 미치게 했을 때도 겨우 그랬단 말이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눈이 돌아 황제를 죽이면서까지 황권을 탐냈다고? 그럴 리가 있나. 아무도 몰래 감옥에 들른 건 그래서였다.

‘왜 몰라. 늘 허덕이지 않았나. 돈, 돈, 돈, 길롯, 길롯, 길롯. 입에 달고 살았는데. 그 권력이 쉽게 놓이겠나?’

‘이렇게 무모해질 만큼?’

‘황제가 위독하다는 말은 못 들어봤나 보지?’

모친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내쉬는 마치 남 일인 양 말했다. 작정해서 주도했다면 그런 말투를 썼을 리가 없다. 내쉬와 길롯은 거리감은 그렇게나 까마득했다. 결코 내쉬가 잘했다는 건 아니다. 전후 사정을 알았건 아니건 간에 그는 분명히 황위 찬탈에 가담했다. 그것에 관한 벌은 받아야 한다. 딱 그것에 대해서만. 클로이 아르네와 레이얼 시오도르는 있지도 않은 죄에 신음해보았기에 그것이 얼마나 잔혹한 낙인인지 잘 안다. 겪어보았기에. 레이얼의 치열한 고민도 그래서이리라.

“폐하.”

“응.”

“난 그저 폐하답게 결정하길 바라.”

“나다운 게 뭐지?”

선량한 성품은 변하는 게 아니니까. 그는 불합리한 결정을, 과한 치죄를 하지 않으리라. 적당히, 그리고 무척 인도적인 결정을 내릴 것이니, 클로이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저 응원이면 충분했다. 톡톡. 레이얼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린 클로이가 남은 케이크를 슬쩍 밀어주며 웃었다.

“한 조각 더 먹어.”

그날 레이얼은 클로이가 산더미 같이 가져왔던 달콤한 것을 죄다 먹은 후에야 돌아갔다. 그래서일까. 황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남긴 그의 입맞춤은 몹시 달았다.

“문 열어줘. 기다릴게.”

그의 재촉 아닌 재촉을 들으며 클로이는 살짝 웃었던 것도 같았다.

  그다음 날 황실은 황제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레이얼의 즉위를 공표했다. 봉문을 푼 지 정확히 만 하루 이후의 일이었다. 간밤, 레이얼은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황제의 사인은 겨울 감기로 마무리 지었다. 이미 길롯 때문에 제국은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제국민은 수탈을 당했고, 국정은 한동안 마비 상태였다. 클로이가 보내준 편지의 내용으로 황후를 심문해본 결과, 심지어 그녀는 황제를 살해하기까지 했었다. 황후가 황위 찬탈뿐만이 아니라 황제를 살해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혼란을 걷잡을 수 없으리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그래서 레이얼은 대외적으로 드러난 사실로만 일을 풀기로 했다. 그의 결정에 황실 내부에선 파란이 일었다.

“안 됩니다! 그럼 저 죄인들을 놓아주자는 말씀입니까?”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지른 건, 이베트 후작이었다. 그를 시작으로 하나둘 사람들이 말을 보탰지만 레이얼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죄인을 놓아주겠다는 건 아니야. 이미 넝마가 되지 않았겠나. 거기에 제국민의 동요까지 더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지.”

“하면 저들을 어떻게 하시려고요! 황제의 사인도 숨기고, 황위 찬탈도 숨기면 남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황위 찬탈은 밖으로 새나가지 않겠지만, 저들의 수탈은 모두가 아는 바가 아니겠나?”

“하지만 폐하!”

“이베트 후작. 그대가 날 폐하라고 부르겠다면, 그대의 황제가 이 제국을 대하는 방식도 존중해주시게.”

이베트 후작은 옅게 미소를 짓는 레이얼의 모습에 앓는 소리를 하며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다들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간 길롯에 쌓인 게 한둘이 아니었다. 길롯에 연루된 이들을 죄다 잡아 감옥에 넣었더니 이 회의장을 채 삼 분의 일도 채우지 못했다. 어마어마한 인원이 연루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가장 큰 죄를 다 감춰버리면 어떻게 이들을 몰아내겠다는 건가? 제국민의 동요를 살 필요가 없다며 황후의 일까지 덮자고 하니 다들 반발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바보같이 맘씨만 좋은 황제 같으니라고. 하나같이 터트리지 못한 울분을 그렇게 얼굴에 진하게 써두던 그때. 레이얼이 입을 열었다.

“길롯 백작이 죽었으니 길롯가를 법정에 올리게. 사사로이 관직을 매매하고, 세율을 높여 부당하게 제국민을 착취하였으니 이 죄가 얼마나 큰가. 게다가 황후는 제국의 어머니로 제국민을 수탈하는 길롯을 말리는 것이 아니라 이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으니, 그녀 역시 죄인이지.”

“그렇게 해봤자 폐후밖에 더 되겠습니까! 죽어 마땅한 죄인을 살려두시다니요!”

이베트 후작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캐서린 황후에게 시달렸던 세월이 얼만데 고작 폐후라니! 어지간히 분통이 터진다는 표정이었다.

“후작 진정하게.”

“…….”

“짐의 판결은 아직 남았으니 이의제기는 후에 하시게.”

레이얼의 경고가 있었기에 후작은 더는 말하지 않았으나 그의 씩씩거리는 숨만은 감춰지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레이얼이 마저 그의 판결을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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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제국을 수탈한 길롯은 멸문. 오늘부로 귀족 명부에서 영원히 삭제하고. 그와 일을 도모했던 자들, 관직을 매수했던 자들 역시 귀족 명부에서 삭제하세요.”

“…….”

“이렇게 되면, 캐서린 전 황후는 황후 지위를 잃게 되겠군.”

생각지 못한 소리에 다들 눈이 동그래졌다. 폐후로 남기지 않는다고?

“애초에, 황실에서 혼인서를 보낸 것은 ‘길롯가’의 영애이니, 멸문가의 영애가 황후로 남아있는 건 말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여전히 황제의 목소리는 나긋하고, 단정했다. 그런데 옴짝달싹 못 하게 옥죄는 기분이 든다.

“이렇게 되면, 정부가 되려나? 어미가 지위를 잃었으니 ‘황자’ 역시 태어난 적이 없는 것이 되겠군.”

황제의 판결은 끝이 아니었다.

“귀족 명부를 사려 시도했던 자들 역시 처벌받아 마땅합니다. 그들은 전 재산을 몰수하도록 하세요.”

너무 무르게 군다고 불평했던 이들의 입은 어느새 꽉 다물렸다. 그 누구 하나 숨소리 한번 크게 내지 못했다. 레이얼의 판결은 끝도 없이 이어졌고, 회의장은 황제의 말을 받아적는 서기관의 펜이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들의 새 황제는 화를 내거나 소리 지르지 않았지만 웃는 얼굴과 온화한 음성으로 얼마나 무자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무단으로 세율을 올린 이는 영주직에서 박탈하고, 귀족 명부에 두 번 다시 이름을 올릴 수 없게 하세요.”

그날 해가 떨어지기 전, 판결문이 나붙었다. 황궁 담벼락을 빙 둘러 따라붙은 판결문은 궁궐 담을 다 감쌀 만큼 길고 자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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