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그는 모르고 있어2021.09.21.
똑. 똑. 내쉬는 아침 해를 따라, 고드름이 녹으며 떨어지는 물을 미동도 없이 바라보았다. 똑. 똑. 창같이 서슬 퍼렇던 것이 햇살 아래 녹아내리는 모습은 퍽 무력해 보였다. 똑. 고작 몇 시간 위세를 떨던 모습이 꼭 간밤의 자신을 닮았다 싶다. 똑. 떨어지는 물방울로 뭔가 어룽하게 비쳤다.
“……이게 누구야.”
생각지 못한 방문객에 내쉬가 입꼬리를 비틀어 한껏 조소했다.
“레이디 아르네께서 나를 만나러 와주는 날이 올 줄이…….”
나직이 중얼거리던 내쉬는 문득 클로이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작게 신음했다.
“아…….”
채도 높은 새파란 눈동자를 보자, 그 언젠가 ‘레이디’를 보고 느낀 기시감을 깨달았다. 이제야. ‘레이디’가 제 손으로 정체를 밝힌 후에야 보였다. 저렇게 새파란 눈동자는 흔한 게 아니었는데. 이런 멍청한 놈이 있나. 가지고 싶어 안달복달하면서도, 정작 코앞에 두고 알아보지도 못한 자신이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잠깐사이 자신이 ‘레이디’에게 쏟아냈던 악의 서린 말들이 숱하게 떠오른다. 살면서 죽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내쉬는 바로 이 순간 그 생각이 들었다. 아주 강렬하게. 이건 뭐라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온갖 복잡한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 수치와 분노, 모멸과 자괴 그리고 슬픔이었다.
“내쉬 황자님.”
클로이가 부르는 목소리에, 내쉬는 상념을 따라 흩어지던 정신이 반짝 돌아옴을 느꼈다.
“……황자? 지금 조롱하는 건가?”
“그럴 리가 있나.”
어깨를 으쓱해 보인 클로이는 그가 뭐라고 하기도 전, 바닥에 털퍽 주저앉았다. 제아무리 황족 전용의 감옥이라지만, 감옥은 감옥이었다. 절대 바닥에 앉을 만한 환경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클로이 아르네는 그런 곳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저 앉지 않았겠나. 그 모습을 보던 내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격의 없는 말투와 차마 레이디라고는 부르기 어려울 만큼 방만한 태도. 아르네 공녀만을 봐왔던 그에게는 하나같이 낯설기만 한데, 이상하게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역시, 이쪽이 본래 모습인가?”
“아마도.”
“이제 알겠다.”
“뭘?”
당신이 절대 쓰러질 리 없었다는 생각이 어째서 들었는지. 어째서 그렇게까지 확인하고 싶었던 건지.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알아봤던 거다. 아르네 공녀가 절대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래서 별것 아닌 이야기를 그렇게나 확인하고 싶었던 거다. 자신처럼 숨죽여 있는, 동류의 소식이 궁금해서. 하지만 이제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내쉬는 가슴에 구멍이 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뭘?”
창살을 흔들며 다시 묻는 소리가 들렸지만, 내쉬는 입을 꾹 다물곤 고개까지 돌려버렸다. 덕분에 옥사는 다시 적막해졌다. 똑똑. 고드름이 녹아 떨어지는 소리만 유일한 가운데, 클로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내쉬 황자.”
“가라.”
“……왜?”
“이만하면 충분히 보지 않았나? 가.”
“갈 거야.”
매정한 답에 내쉬의 어깨가 찰나에 작게 떨렸다. 그 모습을 보며 클로이는 무심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도 바쁘거든. 아르네의 봉문도 풀어야 하고, 간밤 고생한 기사들도 돌보아 적절한 보상을…….”
“기사? 아르네의 기사도…… 있었다고?”
관심 없다는 듯하던 내쉬에게서 다시 반응이 나왔다.
“폐하를 끝까지 모시던 기사 스물이, 바로 아르네의 정예야.”
“아르네가…….”
“아르네가 이럴 줄 몰랐다고 말하고 싶어?”
“…….”
“나도 황후 폐하가 그러실 줄 몰랐지.”
“왜 몰라. 늘 허덕이지 않았나. 돈, 돈, 돈, 길롯, 길롯, 길롯. 입에 달고 살았는데. 그 권력이 쉽게 놓이겠나?”
“이렇게 무모해질 만큼?”
“황제가 위독하다는 말은 못 들어봤나 보지?”
코웃음을 치던 것도 잠시, 내쉬는 길게 한숨을 뿜었다.
“……아차. 깜빡했군. 그대는 나 몰래 북부로 내뺐었지?”
빈정거리는 건지, 자조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목소리였으나 클로이는 상관없었다. 필요한 답은 이미 얻었다.
“내뺐다기보다는……. 내뺀 건가?”
장난스레 뺨을 긁적이던 클로이는 응차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쩔 수 없었어. 내쉬 황자님. 아버지와 오빠를 지키며, 토벌도 다녀와야 했거든.”
“참, 공작도 위중하다고 했었지.”
작게 중얼거리던 것도 잠시, 내쉬는 이전과 다르게 버럭 목청을 돋우었다.
“토벌?”
“토벌.”
“그, 마물 토벌? 그걸 다녀왔다고? 그대가 직접?”
어느새 창살 문 앞까지 단번에 다가온 그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걱정 마, 잘 다녀왔으니까. 이래 봬도 아르네 아니겠어?”
그리고 마물 아니고 괴수야. 작게 키득거린 클로이는 지척에서 반짝이는 녹안을 보며 한 걸음 다가섰다. 언젠가 내쉬가 그랬던 것처럼 철컹, 소리가 나며 신발코에 철창문이 요란한 소리를 낸다.
“황자님. 궁상떨지 말고, 먹고, 씻고 좀 쉬어.”
“…….”
“조롱하는 거 아니고 동정하는 것도 아니야. 걱정하는 거니까.”
“네가 왜.”
그게 무슨 의미이냐고 되묻는 내쉬를 향해 클로이는 ‘비밀’이라고 입 모양으로만 벙긋거리곤 뒤돌아서 감옥을 나섰다.
“무슨 뜻이야!”
등 뒤에서 내쉬의 목소리가 쩌렁하게 울렸지만, 클로이는 대답 대신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올려 홰홰 저어 안녕을 고했다.
“클로이 아르네!”
그의 고함이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귀택한 클로이는 그야말로 극진한 보살핌 아래 흐물흐물 녹아버렸다. 준비할 게 많다며 먼저 돌아간 로지는 정말로 많은 것을 준비하고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으음. 맛있다.”
뜨끈한 욕조에서 나오자마자 뭉친 곳마다 기가 막히게 찾아내 주물러주는 손길을 받았다. 그뿐인가. 간편하고 보드라운 실내복을 걸치고 나자, 머리를 말리는 사이 입으로 쉴 새 없이 찐득한 초코 케이크가 들어온다.
“천국이다. 천국.”
“사람을 우쭐하게 만드는 법을 잘 알고 계시네요.”
로지는 클로이의 앓는 소리가 퍽 마음에 들었던지, 내내 웃는 얼굴이었다.
“곧, 식사 시간이니까 요것만 드시고 잠깐 계세요.”
“아, 그전에 전서조 좀 챙겨다 줄래?”
“일은 천천히 돌보셔도 돼요. 오늘은 정말 쉬셔야 해요. 잊고 계시는 것 같은데 어제 수도에 도착하셨어요.”
“누가 뭐래? 나도 한 며칠 늘어지게 쉴 거야. 전서조 하나만 날리고.”
“뭔데요.”
끝까지 고집부리는 모습에 로지 역시 보 통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건지, 목소리가 훌쩍 낮아졌다.
“봉문을 풀려고.”
“……아.”
“황실 일도 마무리가 됐는데, 계속 문을 닫아 걸고 있을 이유가 없잖아. 적당한 시기를 아버지와 의논해서 여는 게 맞지 않겠어.”
“가져다드릴게요.”
간밤 황태자를 도와 분전한 건 바로 아르네의 기사들이며, 황태자가 ‘황제’의 자리를 가져다 준 것이 바로 ‘클로이 아르네’라고 선언했다고 하지 않았나. 이 상황에 봉문 하는 것도 웃기다. 차라리 황실이 움직일 때 같이 봉문을 푸는 편이 낫다. 그래야……. 잠깐 엉큼한 표정을 지은 로지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고 클로이를 훑기 시작했다.
“로지, 왜, 왜 이래.”
“……아무래도 피부가 거칠어진 것 같네요.”
갑작스러운 접근에 기겁하는 목소리를 냈으나 로지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늘여 클로이를 구석구석 살폈다.
“거칠어지긴. 아주 매끌매끌한데?”
클로이는 말랑하고 보드라운 제 뺨을 쓸며 꽤 만족해하는 소리를 냈으나, 로지의 눈에는 아직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다.
“고작 이정도가 매끌매끌하다고요? 손질을 잘해둔 가죽 광택을 모르셔서 하는 소리예요.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는 윤기는 이보다도 은근하고 훨씬 빛을 많이 머금고 있어요.”
“아이, 이정도면 아주 괜찮대도 그러네.”
“부족하다니까요. 곧 성혼하실 텐데.”
“아무리 그래도……. 뭐?”
로지의 구박을 여상하게 넘기던 클로이가 멈칫했다.
“성혼이요. 이제 즉위하시고 나면 아무래도 곧 성혼도 하지 않으시겠어요?”
“뭐, 뭐,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아, 아, 안 할 이유는 뭐고요?”
로지는 피부 검사가 끝나자 눈을 머리칼로 돌렸다. 몇 가닥인가를 들어 손끝으로 비비고, 끊어보는 모습이 아주 심각했다.
“머리결도 조금 관리를 해야겠네요.”
“일단 황실이 안정되고 나서 생각할 문제지. 이거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니야?”
클로이는 잔뜩 당황했지만, 로지는 아니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원래 이럴 때일수록 빨리 결혼부터 하는 거랍니다. 게다가 황후 자리를 비워둬서야 될 일이에요?”
“그야 그렇지만…….”
“하루아침에 길롯의 머리가 사라졌으니, 한차례 크게 흔들릴 거예요. 그럴 때 아르네가 중심을 잡아주면 빠르죠.”
길롯의 빈자리를 채우는 아르네. 이보다 든든한 게 어디 있겠나. 논리적으로야 그렇다. 클로이는 바보가 아니었다. 황위 찬탈 후, 즉위하는 황제들은 하나같이 황후부터 채웠다. 안정적으로 세를 불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었던가. 심지어 그 황후가 아르네라면야. 하지만 그건 이론이고. 이게 내 일이 되면 좀 부끄럽다. 빨개진 두 볼을 손으로 감싸 쥐고 클로이는 어떻게든 로지를 말리려 했지만, 사실 여기서 로지를 말리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래서 몇 번쯤 입만 달싹이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단, 전서조부터.”
“그래그래.”
로지도 가혹하게 굴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일 당장 성혼하는 것도 아니고, 아르네가 봉문을 풀어야 성혼 이야기도 본격적이 될 것이다.
‘최대한 빨리 풀어달라고 에반 님께 따로 새를 보내야겠다.’
클로이가 알면 기겁했을 로지의 속내란 그러했다. 로지가 나가고 벌게진 얼굴로 눈을 껌뻑이던 클로이의 시선에 문득, 방 한구석에 있던 전서구에 닿았다.
“아!”
레이얼이 내어준 새였다. 클로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도 새는 관리를 잘 받아 깃털에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네게 부탁할 일이 있었어.”
책상으로 간 클로이는 새에게 매달 편지를 빠르게 쓰기 시작했다. -그는 모르고 있어. 다소 불친절한 편지였으나, 담아야 할 핵심은 다 담았다. 새의 다리에 편지를 묶던 클로이는 새를 날리기 직전 애써 묶은 편지를 풀어서 다시 조금 더 적었다. -그는 모르고 있어. 추신, 보고 싶으니까 만나러 와. 본문보다 추신이 더 길어 편지 모양새가 좀 이상해 보이긴 했지만, 클로이의 눈엔 이제야 완벽해 보였다.
“좋아. 자, 이제 그럼 다녀오렴.”
빠르게 편지를 묶어 새를 날린 클로이는 로지가 오기 전, 창문을 닫고 새 편지지를 꺼냈다. -수도의 일은 잘 마무리되었어요. 봉문은 언제 풀까요? 추신. 채굴 상황은 어떤가요? 막 펜을 놓는 것과 동시에 로지가 아르네가의 전서조를 들고 방에 들어왔다. 레이얼에게 날린 것보다 훨씬 크고 우람한 녀석이었다. 황금빛 눈을 깜빡거리는 녀석의 머리를 슬슬 손가락으로 긁어준 클로이가 편지를 매달아 날렸다. 그것으로 클로이가 할 오늘 일이 모두 끝났다. 로지는 쉴 것을 명령했고, 클로이는 기쁘게 따랐다. 침대에 누워 쉬다 때가 되면 식사를 하는 것으로 하루가 저물었다. 그리고 달이 떠오르자, 똑똑. 점잖은 노크 소리와 함께 창문이 열리고 해를 등진 미남자가 침실로 발을 들였다. 클로이는 밤바람 냄새를 풍기는 수려한 미남자에게 두 팔 벌려 웃어주었다.
“어서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