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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활짝 열고 기다려줘 (109/121)

109. 활짝 열고 기다려줘2021.09.17.

‘손!!’

고함을 따라 과녁판처럼 하얀 손이 올라온다. 인장이 빼앗기지 않길, 무사히 도착하길 바라며 시위를 놓는 순간 덩치를 불린 불이 그녀에게까지 덮쳤다. 해일같이 쏟아지는 불길에 찰나에 그만 시위를 스치던 손가락 끝이 움찔 떨려버렸다. 미세한 흔들림이었으나, 대가가 너무 가혹했다. 뻑! 갑옷을 꿰뚫고 살을 가르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린다. 시위를 떠난 화살촉이 손이 아닌 레이얼의 가슴에 박혔다. 안 돼! 가슴이 박힌 화살을 바라보던 레이얼이 천천히 무릎 꿇었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숨도 못 쉬고 있던 클로이는 레이얼이 바닥에 쓰러지며 내는 쿵, 하는 진동에 입을 떼었다.

“전하!”

“로이?”

“전하, 전하.”

잘 자던 클로이가 갑자기 눈물을 줄줄 흘리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레이얼은 적잖이 놀랐다.

“로이? 클로이?”

허공을 향해 뻗은 손이 허우적거리며 뭔가를 잡으려 허우적거렸다. 발발 떨리는 손이며, 쉬지 않고 떨구는 눈물. 악몽이 분명했으나 클로이는 좀처럼 눈을 뜨지 못하고 파랗게 질려 ‘전하’라고 애통하게 자신만 부르고 있었다.

“로이. 쉬, 다 끝났어.”

레이얼은 가슴이 미어지는 기분이었다. 바들바들 떨며 우는 여자를 품에 안아 하염없이 다독이며 다정하게 불러주었다.

“꿈이야. 로이. 응? 눈떠봐. 꿈이야.”

간밤 자신은 어땠었나. 씻는 그 잠깐사이도 불안해 어린아이처럼 클로이에게 떼를 써 문밖에 있어 달라 조르고 나와서도 한숨 자지 못하지 않았나. 그 끔찍한 것이 끝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 겁이 나서. 그런데 그 밤을 같이 보낸 클로이가 멀쩡한 게 말이 되나.

‘이리 와.’

그에게 손을 내밀며 씩씩하게 웃어준 얼굴 뒤로 감춘 불안감을 왜 몰랐을까. 레이얼은 작게 흐느끼는 클로이의 젖은 뺨을 쓸며 아프게 속삭였다.

“꿈이야.”

“전하.”

“클로이, 그대가 나를 황제로 만들었잖아.”

로이. 로이. 젖은 눈가를 다정한 입맞춤으로 쓸어내며, 쉬지 않고 레이얼은 클로이를 불렀다. 로이. 악몽에 붙들린 클로이를 얼마나 불렀을까. 절대 뜨이지 않을 것 같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채도 높은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클로이.”

“전하?”

아직, 정신이 맑지 않은 건지 클로이는 그를 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구겨진 미간과 가늘게 늘어진 눈매에 가득 들어찬 건 슬픔이었다.

“정말, 전하야?”

“아니, 이제 폐하라고 부르라니까. 간밤 그대가 내게 쥐여준 걸 잊었어?”

레이얼은 다정히 속삭이며 클로이를 품에서 떼어내 붕대로 감아둔 제 손을 보여주었다. 다분히 고의적이었다. 자신 역시, 이 손 덕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지 않았던가. 클로이는 붕대로 감아둔 그의 손을 살짝 쓸었다.

“진짜…….”

“진짜야. 풀어서 보여줄까?”

아직, 그대가 뚫어둔 구멍은 그대로일 텐데. 녹을 것 같은 목소리로 속삭여주는 내용은 난폭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소리에 클로이의 얼굴에 드리웠던 불안과 공포가 차츰 걷혔다.

“내가, 손을 뚫었다고?”

“그대가 뚫어두었지. 아주 깔끔하게. 덕분에 이 오른손은 며칠만 지나면 말끔해질 작정이야.”

“정말로?”

“정말로.”

레이얼은 마치 건반을 누르듯 손가락을 하나하나 움직여 보였다.

“붕대 때문에 주먹을 쥐는 건 무리지만.”

“내가.”

“응. 그대가 뚫어놓았어. 간밤.”

“손을.”

그의 말에 간신히 펴지는 것 같던 표정이 갑자기 다시 와락 일그러졌다. 황급히 손을 들어 올려 클로이는 제 얼굴을 가렸지만, 관자놀이로 흘러내리는 눈물은 가리지 못했다.

“다행이다.”

“그렇지?”

“응. 다행이야. 손이라서, 너무, 너무 다행이야.”

파르르 떨며 우는 목소리에 레이얼은 그제야 클로이가 어떤 악몽에 시달렸는지 깨달았다. 비통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와 쉬지 않고 떨구던 눈물. 간밤 클로이가 화살을 날렸던 곳은 빈말로라도 가깝다고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레이얼은 그녀가 절대 빗맞힐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클로이가 아르네여서도 위명이 쟁쟁한 도적 ‘레이디’여서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로이였으니까. 설령 그녀의 화살이 제 목을 꿰뚫어도 괜찮다고 생각했기에, 클로이에게 그것이 얼마나 큰 부담이 되었을지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 레이얼은 얼굴을 가리고 소리도 없이 우는 클로이를 조심스럽게 끌어당겼다.

“미안해. 고마워.”

“손이, 손이라서 정말 다행……다행이다.”

헐떡이는 숨이 그의 가슴을 뜨끈하게 달구었다.

“그대와 새날을 맞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쪽. 레이얼은 제 가슴에 박힌 듯 들어와 있는 클로이의 머리칼에 입술을 내리며 속삭였다.

“클로이.”

“응.”

“입 맞춰주지 않을래?”

“…….”

클로이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삐죽 돋아난 귀 끝이 잔뜩 새빨갰다. 귀엽게도. 울음은 어느샌가 말끔히 멎어있었다.

“해주지 않을래?”

그것은 황금빛 햇살을 두른 채 조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마치 꿀인 양 다디달아서였는지도 모른다.

  정오, 황실의 봉문이 풀렸다. 새로운 황제가 탄생했다는 의미였다.

“입궁 준비를 하겠습니다.”

“잠깐.”

“……각하. 길롯이라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황성의 문이 봉쇄된 이후 한숨도 자지 못하고 내내 창밖만 바라보던 이베트 후작이 보좌관의 말에 천천히 몸을 돌렸다.

“설마하니 길롯이 봉문을 할 줄 누가 알았고?”

“…….”

“가서 확인하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야. 다만, 내 발걸음이 혹시나 그 아이에게 해가 될까 봐 염려되는 것이지.”

만약에, 정말 만약에. 레이얼이 길롯에게 지고 말았다면 ‘적통 황태자’를 처형하기 위해 눈이 뒤집힌 길롯은 그 어떤 사소한 것도 전부 꼬투리를 잡아 이유를 만들 것이다. 이베트 후작은 피로감에 움푹 팬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하지만 등 뒤에서 울리는 보좌관의 말엔 그만 그 손이 딱 멎고 말았습니다.

“다 글렀다면. 조심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내 마음 졸이던 이베트 후작은 보좌관의 냉정하다 못해 따가운 말에 정신이 번쩍 났다.

“그렇군.”

그 길롯이 레이얼에게 자비를 베풀어 대공으로 내보내 줄 리도 없다. 아니, 대공자리는 가당치 않다. 적통 후계자인 황태자가 아니었던가. 아무런 결격 사유가 없던 그가 황제가 되지 못한다면, 이유는 죽음뿐. 길롯이 승기를 잡았다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뭐든 해야 할 때였다.

“입궁 준비를 하지.”

밤새 단 한 번도 앉지 않았기에, 그가 입은 옷엔 희미한 주름 한 줄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베트 후작은 프록코트를 걸치는 것으로 모든 준비를 끝냈다. 마차를 준비시키러 저만치 앞에 달려가는 보좌관은 전과 달리 천천히 오시란 말 따윈 해주지 않았다. 지금 그 누구보다 애가 탈 테니까. * * *

“폐하. 폐하. 폐하.”

이젠 몇 번째 방문객인지 기억이 나지도 않았다. 찻잔을 집어 들던 레이얼이 피곤함을 감추지 못하고 미간을 꾹꾹 누르며 짜증을 삼켰다. 역시, 이베트 후작을 만나는 게 아니었나. 이제와 살짝 후회된다. 한참 달게 자던 중 시종장이 찾아와 이베트 후작의 입궁 소식을 알려왔다. 문이 열리고 제일 처음 찾은 이베트 후작이 아니었겠나. 시종장은 이베트 후작이 황제의 연락을 받고 왔다고 생각했고, 레이얼은 잠든 자신을 깨울 정도였으면 급한 일이겠거니 믿었다. 이건 서로의 착각이 성사히킨 접견이었다. 실상은 오해라는 것을 알게 되어 후작의 접견은 곧, 마무리 되었으나 사람들에겐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의욕 넘치는 폐하께서, 벌써 일을 처리하시는구나! 사람들은 신이나서 일감을 들고 찾아왔다. 캐서린 전 황후가 키릭슨을 끌고 가며, 레이얼 역시 국정에서 손을 떼게 하지 않았나. 그동안 아무도 일을 하지 못했으니 쌓인 일감이 산더미였다.

“난, 이만 가볼게.”

“어딜.”

문밖에서 목놓아 부르는 목소리에 클로이가 불편했던지 마시던 찻잔을 내려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가긴 어딜 가겠어?”

“로이, 조금만 더…….”

“듣자 하니 봉문도 풀렸다지? 폐하. 힘들었을 아르네의 기사들을 데리고 이만 돌아가고 싶습니다.”

“아…….”

클로이의 말에 레이얼은 작게 신음했다. 해는 어느새 중천에 떠 있었다. 그 말은 밤사이 잔뜩 지친 기사들 역시 지금껏 이곳에서 머물러야 했다는 소리였다.

“이런, 배은망덕한 짓을 했어.”

“뭐 그렇게까지야. 어련히 챙겨줬으려고.”

강직하고 융통성이라곤 없던 근위대장을 보아하건대, 그는 은인인 그림자 기사단을 제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융숭하게 보살폈으리라.

“하지만, 집만큼 편한 곳이 없을 테니까 돌아가겠다는 거야. 딱 그뿐이니까 자책은 그만하시지요. 폐하. 이만 귀택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한 손을 뒷짐을 지고 허리를 굽혀 멋들어지게 인사를 건네는 클로이의 모습은 처음 만났던 날처럼 우아하고 장난스러웠으며 더없이 진솔했다. 그 사실을 이렇게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 가슴이 쿵쿵거리며 울린다. 레이얼은 그들이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리며 눈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그날, 네가 침실을 잘못 찾지 않았더라면. 그날, 네가 눈이 돌아버릴 만큼 화가 나지 않았더라면. 그날, 내가 이런 너를 몰라봤더라면. 그날, 내가 억지를 부려 널 옭아매지 않았더라면. 오늘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 이 행복은, 감격은 정말 없었을지도 모른다. 레이얼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길롯’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롯 때문에 죽도록 힘들고 괴로웠으나, 모순되게도 바로 그 길롯 덕에 세상 가장 소중한 클로이를, 그의 일곱 번째 피앙세를 만날 수 있었다.

“돌아가면…….”

“응?”

“돌아가면 아르네의 문도 열어주겠어?”

“아. 맞다.”

클로이는 레이얼의 말에 자신 역시 아르네의 문을 닫아걸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새삼, 그간 참 많은 일이 있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와 오빠를 잃을 뻔하고, 도둑이 되어 귀족가를 헤집고. 레이얼의 일곱 번째 피앙세가 되어 사교계를 누볐으며, 또한 아르네의 소명을 해내야 했던 지난 시간이 숨 가쁘게 떠올랐다 사라진다. 쏟아지는 기억에 눈만 깜빡이던 그때 레이얼의 길쭉한 손가락이 턱을 받쳐 들었다. 공손하게 숙였던 고개가 그의 손에 받쳐져 들리며 시선이 마주쳤다. 레이얼은 어느새 일어나 클로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열어줘. 클로이.”

“응.”

“활짝 열고, 기다려줘. 내가 찾아갈 수 있게.”

“찾아올 거야?”

“응. 갈게.”

황제의 죽음과 캐서린 황후와 내쉬가 일으킨 일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그 일을 수습하려면 하루 이틀로는 어렵다. 하지만, 이제 더는 다음날을 기약하지 못하던 과거가 아니었다. 그래서 다음을 약속하는 두 사람은 그 어떤 때보다 환한 표정이었다.

“기다릴게.”

“기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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