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그 복면도 벗어버려.2021.09.07.
캉!! 레이얼에게 쏟아지는 수십 개의 검을 그림자 기사단이 받아냈다. 그러나 앞선 공격이 막히자 이들은 아쉬워하는 대신, 기다렸다는 듯 두 번째 공격을 그림자 기사단을 향해 쏟아냈다. 처음부터 목표는 그림자 기사단이었던 듯 공격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이런 개자식들!”
훤히 드러난 허리를 노리고 쏟아지는 검을 본 클로이는 주저 없이 단검을 날렸다. 가지고 온 열다섯 자루의 검이 바닥나는 건 순식간이었고 내쉬의 기사들은 재차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림자 기사단이 방어 대형을 갖추는 데는 찰나의 틈이면 충분했다. 눈앞에서 한 발짝 승리가 멀어지는 것을 본, 내쉬가 이를 갈 듯이 짓씹었다.
“또, 방해군.”
“넌 또 행패고.”
레이디의 말은 가뜩이나 언짢은 내쉬의 속을 뒤집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당장, 저것부터 잡아 와!”
내쉬는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나 작위에 눈이 먼 기사들은 내쉬의 말을 듣지 않았다. 레이디를 추격하는 사이, 다른 녀석이 황태자를 처리하면 어떻게 하지? 이기심이 부른 불복종은 꽤 굳건했다. 덕분에 내쉬는 어이없게도 레이디를 지척에 두고도 잡을 수가 없었다. 담 위에 선 그녀를 잡으려면 활이 필요했는데, 그가 부리는 기사들이 전부 레이얼을 노리고 있었기에 아무도 움직여주지 않았던 것이다.
“활! 활을 가져오라고!”
챙, 챙! 연신 병장기가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울린다. 클로이의 난입으로 잠깐 흐름이 바뀌었지만, 그림자 기사단과 레이얼은 한계였다. 주춤거리며 한걸음, 한걸음 뒤로 몰리는 그들을 기다리는 건 막다른 벽뿐이다. 이 상황을 끝내야 하는데 인장을 던져주기엔 너무 멀어 제대로 닿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처음 던진 단검은 닿지도 못하고 떨어졌다. 생각보다 거리가 상당했던 거다. 그래서 나머지 열네 자루의 단검을 던질 때, 클로이는 어깨가 뻐근하도록 휘둘러야 했다. 그런데 그 거리보다 더 멀어진 지금, 어깨가 빠지도록 던진들 레이얼이 받을 수 있나? 내쉬의 손에 쥐여주는 것과 다를 바가 뭔가. 자신이 저 난전에 끼어든들 상황이 바뀌지도 않으리라. 오히려 재수 없게 붙들려 인질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머릿속이 꽉 막힌 것처럼 헝클어지던 그때였다.
“활! 활 가져오라고!”
내쉬가 지른 고함에 문득 정신이 번뜩 들었다.
“활.”
죽은 것 같이 침잠했던 청명한 눈동자에 일순 생기가 돌며 반짝였다. 그래 활. 클로이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머리끈을 잡아당겼다. 캉캉! 귀가 에이도록 울리는 병장기 소리가 그녀의 등을 팍팍 떠미는 기분이었다. 빨리, 빨리. 조급한 마음과 달리 잔뜩 긴장한 손은 연신 실수였다. 머리끈을 두 번쯤 놓치고 나서야 클로이는 화살대에, 인장을 묶을 수 있었다. 저 멀리서 활을 들고 달려오는 기사를 향해 내쉬가 잔뜩 조바심 난 얼굴로 채근하는 것과 잠깐사이 훌쩍 멀어진 레이얼과 그림자 기사단이 고군분투하는 것이 보인다. 캉! 힘껏 내리친 검과, 필사적으로 막아낸 검 사이서 불똥이 튀고, 캉! 또 한 번 두 검이 맞부딪히며 고막이 깨질 것 같이 울린다. 찰나에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이던 순간. 클로이는 묵직해진 화살을 걸어 시위를 당겼다. 찌이이익. 팽팽해진 시위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소리를 울부짖던 그때 레이얼과 눈이 마주쳤다. 클로이는 자신에게 박히는 연푸른 시선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손!!”
레이얼은 자신을 향해 시위가 겨누어져 있음을 알면서도 일말의 주저 없이 한 손을 높이 쳐들어 주었다. 그의 손바닥이 희게 빛나는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시위를 놓는 순간, 클로이의 손을 떠난 화살이 그의 손바닥에 명중했다. 화살이 손바닥을 관통하며 피보라가 터지는 모습에 사위가 고요해졌다. 레이얼을 몰아세우던 기사들마저도 넋 빠진 표정으로 클로이를 돌아봤을 정도였다.
“이, 무슨…….”
누군가의 망연한 소리에, 클로이는 가슴이 부풀도록 크게 숨을 들이켠 후 있는 힘껏 외쳤다.
“근위대!! 폐하가 공격당하고 있다! 어서 폐하를 보호하라!!”
사방은 여전히 무섭도록 적막했다. 그 순간을 깨뜨린 것은 내쉬의 웃음소리였다.
“하하하하.”
정말 웃긴 소리를 들었다는 듯, 그는 어깨를 떨어가며 웃고 있었다.
“왜 웃지?”
“레이디, 네 주인이 다 죽어가게 생겼으니 발악하는 건 알겠다만 너무 딱해서 말이야.”
“딱하다니?”
클로이는 내쉬 옆에 선 기사가 챙겨온 활에 시위를 먹이는 것을 고요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물었다. 내리깐 눈매는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을 만큼 여유로웠고, 담을 딛고 선 두 다리는 당당해 레이디를 올려다보던 내쉬는 문득 기분이 확 상해버렸다.
“마지막 발악이라고 곱게 봐주려고 해도, 넌 끝까지 거슬린단 말이야.”
“그 말 그대로 돌려줄까?”
“끝까지 허세는.”
내쉬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화살이 날아왔다. 클로이는 기사가 날린 화살을 몸을 비트는 정도로 가뿐하게 피했다. 이정도야 우습지도 않았다.
“과연 허세일까?”
빙글거리며 되묻는 클로이는 조금 전 내쉬보다 훨씬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무도 느긋하고 아름다워 참을 수 없이 얄미운 웃음이었다.
“이, 이……!”
내쉬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지며 막, 다시 발사 명령을 내리려 할 때 레이얼이 움직였다.
“멈추어라. 내쉬.”
저벅. 그 순간 들릴 리 없는 묵직한 발소리가 울렸던 것도 같았다.
“……그게 무슨 소…….”
명령을 내리는 것 같은 엄숙한 레이얼의 말에,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고개를 돌린 내쉬가 그대로 굳었다. 내쉬의 시선이 닿은 곳은 높이 쳐든 레이얼의 손이었다. 피범벅이 된 손에 움켜쥐고 있는 황금빛의 빛나는 것을 본 순간 내쉬의 눈이 크게 홉뜨였다.
“인장……?”
“맞아.”
“어, 어떻게 그걸, 대체 어디서!”
멍한 듯 중얼거리던 내쉬의 고개가 바람이 일만큼 빠르게 꺾이며 향한 곳은 담 위의 레이디였다.
“너였구나. 이 빌어먹을 도둑 녀석!”
제 주인을 향해 화살을 갈길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렇게 찾아 헤매도 없었던 것을 이렇게 쉽게! 이를 악문 내쉬의 속삭임이 잔뜩 독이 오른 짐승의 소리처럼 음산하게 울렸다. 시선만으로 사람을 찢어 죽일 수 있다면, 그는 지금 클로이를 수천만 번도 넘게 죽였으리라. 클로이는 저를 어쩌지 못해 이를 갈아대는 내쉬를 향해 한 손을 뒷짐 진 채 천천히 허리를 굽혀 보였다.
“칭찬 고맙게 받겠소.”
우아하게 인사를 건넨 클로이가 허리를 드는 순간, 쩌렁쩌렁한 외침이 울렸다.
“폐하를 보호하라!”
“무기를 버려라!”
근위대였다. 갑옷끼리 부딪치며 내는 철그럭거리는 소리가 반갑게도 울렸다. * * *
‘폐하는 살아 계신 거지?’
클로이의 질문에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절대로 이렇게 소리소문없이 그가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패트릭 시오도르. 그는 황제이지 않나. 이 엘피도르에서 가장 존귀한 자. 그래서 당혹감도 잠시 레이얼은 아마도 황제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거라고 생각을 정리했다. 인장을 찾던 순간, 그 찰나에 떠올렸던 황제의 죽음은 머릿속에서 깡그리 지웠단 말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캐서린 길롯은 멍청하긴 해도, 악랄한 인간은 아니었으니까. 교활하긴 해도 패트릭 시오도르를 바라보는 두 눈엔 언제나 애정이 짙게 물려 있었으니까. 사랑한 남자를, 그녀의 황제인 패트릭 시오도르의 끝을 이렇게 초라하게 둘리 없다고 믿었으니까. 제아무리 권력에 눈멀었어도 말이다. 그랬는데. 인장을 본 내쉬의 중얼거림에 레이얼은 전신의 피가 쭉 빠져버리는 기분이었다.
‘어, 어떻게 그걸, 대체 어디서!’
인장으로 ‘황위’를 결정지을 수 있는 건, 황제가 서거한 후에야 가능한 일이다. 무자비하게 확인하게 된 아비의 죽음이 너무도 허망하고 씁쓸했다. 뻥 뚫린 손바닥에서 쉬지 않고 흘러내리는 건 피가 아니라 흘리지 못한 눈물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허탈함이었을까. 레이얼은 제 것이 아닌 듯 굳어가는 손을 들어 보인 채 입을 열었다.
“투항하라. 끝까지 반항하는 자는 반역죄를 물어 엄히 다스리겠다.”
그의 말에 근위대가 내쉬와 그의 기사들을 촘촘히 에워싸고 검을 겨누었다. 황궁 근위대가 걸친 망토에 수 놓인 황금색 문양이 불길을 따라 광포하게 흐르는 열풍을 타고 아름답게도 펄럭였다. 황금빛 문양을 겹겹이 두른 내쉬는 이 순간 더없이 화려하면서도 더없이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후욱-. 뺨을 후려치는 것 같은 뜨거운 바람과 함께, 등 뒤에서 기어이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울렸다. 발끝을 타고 울리는 희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폐하. 불이 번지고 있습니다. 자리를 옮기셔야 합니다.”
“한 놈도 놓치지 않고 죄다 압송하겠습니다. 어서 자리를 피하십시오.”
근위대들이 레이얼과 기사들을 재촉했다. 내쉬와 기사들은 이미 승세가 기울었음을 깨닫고는 반항도 하지 않았기에, 근위대의 말처럼 뒷일을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레이얼은 발걸음을 재촉하는 대신, 천천히 손을 들었다. 마치 레이디에게 에스코트를 청하는 것 같은 정중한 모습이었다. 그의 모습은 빈말로라도 괜찮다고 해줄 만한 것이 아니었다. 평소 고혹적이고 아름다운 모습관 달리, 크고 작은 생채기에서 흘러나온 피와 흩날리는 재를 뒤집어쓴 그는 엉망이었다. 하지만, 당당한 눈빛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이런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다디단 미소 덕분일까. 볼품없는 모습인데도 터무니없이 근사하다. 기사들의 시선이, 레이얼의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그곳에는 황태자 궁 담을 딛고 선 ‘레이디’가 있었다. 궁지에 몰린 황태자를 위해 인장을 가져다 바치고 이 난전을 끝낸 가장 큰 공로자. 하지만, 황제가 첫 에스코트를 청할 만한가? 레이얼을 지켜보던 근위대의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이 모습을 당연하다는 듯 지켜보는 건 황제만큼이나 넝마가 된 이름 모를 기사 스무 명이 전부였다. 아마도 동질감을 느껴서이리라. 하지만, 이건 감정에 휩쓸릴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상황을 보았을 때, 레이디는 황제가 부리던 게 분명했다. 제아무리 큰 공을 세웠다 한들 기사에게 황제가 에스코트를 청하지는 않는다. 모두의 생각이 과하다 쪽으로 기울던 그때. 황제가 꼼짝도 않고 서 있는 레이디를 향해 재촉이라도 하듯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이리 와. 로이.”
“……로이?”
누군가가 레이디의 ‘이름’을 새삼스럽게 중얼거렸다.
“이젠, 그 복면도 벗어버리렴.”
“벗으라고?”
“벗어.”
“괜찮겠어, 전하?”
“괜찮아. 난 더 이상 전하가 아니라, 폐하가 되었으니까.”
“와, 멋진데!”
허공으로 떨어져 내리는 가뿐한 몸놀림만큼이나 가벼운 목소리였다. 레이디는 정말로 황제의 에스코트를 받아들이려는 듯 손까지 뻗었다! 당혹감에 근위대 기사들이 막아서려 했으나, 그보다도 레이디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복면을 벗어 던지는 게 먼저였다. 후웅-. 커다란 바람이 불며 색 고운 백금발이 햇살처럼 산개했다 가라앉으며 레이디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사방으로 경악이 퍼졌다.
“레이디 아르네?”
“레이디 아르네!”
경악을 즐기듯 미소짓는 레이디 아르네를 황제의 손이 낚아채듯 쥐었다.
“이리 와. 클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