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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손아귀 안에 틀어쥔 (103/121)

103. 손아귀 안에 틀어쥔2021.08.27.

인장. 인장이 필요해. 클로이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사방이 아비규환이었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리라. 황좌를 향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터지는 한 가운데를 누비는 클로이는 울컥울컥 욕지기가 치밀었으나 단 한 순간도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황제는 죽었다. 레이얼은 ‘가능성’이라고 말했지만, 아니다. 이건 명백한 사실이리라. 무모하게 움직이는 황후가 바로 그 증거였다. 저를 더 없이 고귀하게 만들어준 황제가 아니겠는가. 그가 어느 날 덧없이 스러진다면, 제 신세가 어떻게 될까. 놓치고 싶지 않겠지. 천하를 호령하며 제국을 주물럭거리던 그 다디단 날이 놓일까. 타닥타닥. 숨이 차 쇠비린내가 진하게 코끝까지 올랐다. 그러나 클로이는 두 다리에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인장, 인장이 어디에 있을까. 달리는 와중에도 클로이는 정신없이 생각을 더듬었다. 황제의 침실일까. 지금 그녀가 향하는 곳은 주인을 잃고 텅 빈 본궁. 바로 황제가 쓰던 궁이었다. 병에 걸려 쓰러진 황제는 내내 황후궁에 있었다. 그런데도 황후가 인장을 손에 넣지 못했다면, 인장은 필시 본궁이나 다른 곳에 있는 게 분명했다. 어디 있을까. 이대로 폐가 터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던 그때야 클로이는 본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황제의 진짜 침실에. 다행히 주인 없는 빈 침실은 경계가 그리 삼엄하지 않았기에 잠입이 비교적 쉬웠다. 클로이는 헐떡이는 숨을 고르려 애쓰며 바쁘게 뒤졌다.

“어디에 뒀을까.”

챙! 아무도 없는 조용한 방인데 귓가에 아직도 칼날이 맞붙던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클로이는 잘 알고 있었다. 바로 레이얼을 두고 왔기 때문이었다. 레이얼의 기사들은 무너졌다. 아직 전부는 아니었지만, 벌써 한 명의 침입자를 허락한 게 아니겠는가. 수적 열세가 확연했다. 이대로라면 레이얼은 반드시, 반드시……. 클로이는 부예지는 시야를 신경질적으로 닦아냈다. 손등이 아주 축축했다.

“대체 얻다 뒀어!”

인장만 찾으면 되는데. 도대체 그걸 어디에 뒀을까. 침대며 옷장 그리고 책상과 바닥. 하다못해 촛대도 다 비틀어봤다. 숨겨 놓을 법한 곳을 다 뒤지고 있는데 아무것도 나오는 게 없자 클로이는 심장이 까맣게 타버리는 기분이었다. 챙! 두근거리는 심박사이로 다시 한번 이명이 울렸다. 마음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듯 바르르 떨리고 말았다. 평소 그녀가 아는 황제는 무능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줄리아나 황후 서거 이후, 영판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는 하나 이제 와 생각해보건대 다른 사람이 된 게 아니라 원래 그랬을지도 모른다. 줄리아나 황후가 생전 가려줬던 건 아닐까? 자애롭고 현명한 군주는 황후의 작품이 아니었을까. 그럼, 황후의 서거 이후 오만하고 교만해진 황제의 품성이 죄다 이해된다.

“…….”

클로이는 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생각에 집중하려 애썼다. 창밖으로 보이는 황태자 궁은 곳곳이 불타오르고, 연신 비명이 울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기껏 차분해졌던 머릿속이 엉망으로 헝클어지는 것이 느껴져 클로이는 억지로 시선을 뜯듯이 돌려야 해야 했다. 레이얼을 진짜로 걱정한다면 한가롭게 동요할 때가 아니었다. 빨리 상황을 마무리 지어야 로지도 구해낼 게 아닌가. 클로이는 다시 황제에게로 집중했다. 연회장에서 만난 그가 떠오른다. 5일 연속 연회를 열겠다는 말에 흠칫 놀라자 즐겁게 웃던 그를. 그가 내보이는 것에 감동했다고 착각해서 자애로워지던 그의 말투를. 하나둘 떠오르자 조금 더 황제가 어떤 이인지 또렷해지는 것 같다. 그는 좋은 군주도, 자애로운 아버지도, 훌륭한 남편도 아니었다. 그는 어쩌면 줄리아나 황후를 질투했던 걸까? 저완 다르게 의연하고 고아했던 군주가 아니었던가. 황후에게 눌리지 않으려 노력했던 탓에 간신히 가려졌던 본성이 아니었을까. 분명하다. 클로이는 눈을 반짝였다. 사람들이 ‘자신만을’ 우러르면 좋겠고, 제가 가진 이 지위가 한없이 자랑스럽고, 그 누구도 그 권위를 넘보지 못하는 것을 바란 이. 그렇다면 어린 황태자를 방치한 것도, 유독 레이얼에게만 날을 세웠던 것도 제게 아첨하던 길롯을 봐주었던 것도 다 이해가 된다. 자, 그럼 그런 이는 인장을 어디에 두었을까. 클로이는 최대한 황제의 시선으로 생각하려 애를 썼다. 모두가 저를 우러르고. 제가 가진 것을 뽐내고 싶은 황제가 인장을 보관하는 곳은……. 클로이는 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항상 ‘황제’로 군림하고 싶어했다. 모두의 머리 위에서 호령하고, 자신을 우러러보길 바랐다. 텅 빈 복도를 내달리는 클로이의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타닥타닥. 아무도 없는 적막한 본궁을 뛰는 발걸음 소리가 굉음처럼 울리지만, 클로이는 속도를 늦출 수가 없었다. 떠오르는 생각을 놓쳐선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헉. 허억.”

그렇게 기를 쓰고 달려간 곳은 다름 아닌 대 회의장이었다. 매일 아침이면 조례를 열었던 바로 그곳. 황제가 단 하루도 거르는 법 없던 장소. 보위를 위협하는 황태자가 자신에게 아첨하는 길롯에게 번번이 능욕을 당하던 바로 그곳. 이곳에서 황제는 그 모든 것을 내려다보았겠지. 불도 켜지지 않아 어둑한 그곳을 밝히는 건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옅은 달빛이 전부였다. 클로이는 그곳을 빠르게 지나쳐 황제의 자리로 다가섰다. 기나긴 회의 탁자 끝, 3개의 단을 오르면 화려하게 투각 된 황제의 자리가 있다. 클로이는 곧장 그 자리에 앉았다.

“이 자리에서 인장을 찍어주었겠지.”

보란 듯이. 엉덩이를 슬쩍 걸친 클로이는 허리에 힘을 빼고 느슨하게 앉았다. 팔걸이에 손을 뻗어 늘어뜨리고 가만히 정면을 응시했다. 아래에서 우러르는 시선을 느끼며, 인장을 받기 위해 머리를 조아리는 이들을 보며 기쁘게 인장을 어루만졌겠지. 클로이는 황제가 했듯 손을 굴렸다. 그 순간 손 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팔걸이에 새겨진 조각이었다. 하나, 왼쪽과 오른쪽의 높이가 달랐다. 손 끝에 감기는 느낌이 조각된 팔걸이와 달리 무척 차고 매끄럽다. 그리고, 동그랗고 길쭉하다. 쿵쿵쿵. 심장이 터질 것 같았으나 클로이는 소리 지르지 않으려 무척 애를 쓰며 시선을 돌렸다. 손에 걸린 건 인장이었다. 이 오만하고 교만한 작자가 대체 인장을 어디에 두었나 했더니 이런 곳에 뒀을 줄이야. 딴엔 제 대범함을 과시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제게 내려진 이 황제의 징표를 가지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게 너무도 좋았을까. 그 마음은 도무지 짐작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옆을 지키던 길롯 백작도 모르는 것을 보니, 어쩌면 황제만의 은밀한 즐거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알게 뭐람.”

정말 성격 이상한 영감이라니까. 클로이는 흥분에 벌벌 떨리는 손으로 인장을 뽑아냈다. 팔걸이에서 쑥 뽑혀 올라온 것은 분명 인장이었다. 레이얼이 말해준 문양이 무척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위조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복잡한 문양. 바로 이것이 레이얼을 살릴 것이다. 클로이는 손에 든 인장을 꽉 움켜쥐고는 벌떡 일어섰다. 제때 도착해야 한다. 긴장감에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지만, 주저앉을 때가 아님을 상기하며 흐무러지려는 두 다리에 힘을 바짝 주었다.

  저지선이 한번 무너지자, 두 번은 더 쉬웠고 세 번째는 더 빨랐다. 왈칵왈칵 쏟아지듯 들어오는 내쉬의 기사를 상대하며 레이얼은 바쁘게 시선을 돌렸다. 클로이가 나간 지 시간이 꽤 되었다. 문이 열리며, 갑자기 뛰쳐들어온 황후의 기사를 상대하다 클로이를 놓치고 말았다. 그녀에게 인장을 가져오길 바라 한 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

이런 머저리. 그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하지만, 자신도 놀라서 외쳤다고 하면 변명이 될까? 레이얼은 손아귀에 힘을 줘 저를 압박하듯 찔러오는 기사의 검을 날려버렸다. 캉! 매서운 소리와 함께 기사의 검이 날아갔고, 레이얼은 그대로 검을 돌려 쥐고 검면으로 기사를 후려졌다. 힘껏 휘두른 검면에 제대로 얻어맞은 기사는 한방에 나가떨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후…….”

기사를 죽이지 않아 다행이나, 체력 소모가 만만찮다. 레이얼은 뻐근한 어깨를 돌려 놀란 근육을 풀어주곤 곧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기사들이 밀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그는 독 안에 든 쥐처럼 쏟아지는 기사들을 상대해야 했다. 퇴로 없이 갇혀 상대하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바깥에서 난전을 치르던 기사들도 그 생각을 했던 모양인지, 처음과 다르게 그에게 들어가 있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가물거리던 내쉬가 부쩍 선명하게 보인다. 그는 칼을 휘두르지 않았다. 마치 유람이라도 나온 듯 팔짱을 끼고 교전을 지켜볼 뿐이었다. 오히려 날뛰는 건 길롯 백작 쪽이었다. 그는 피를 잔뜩 뒤집어쓰고는 미치광이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다. 주제 모르고 날뛰는 모습이 퍽 그다워 보인다고 말해도 될까. 레이얼은 픽, 웃음을 터트리곤 그대로 검을 느슨하게 늘어뜨렸다. 검을 내내 들어 올린 상태로 있는 건 체력이 쉽게 고갈된다. 그는 오늘 밤 기어이 살아남을 작정이었다. 그러니 허술해 보이는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

“으아아앗!”

마침 저를 향해 달려드는 이를 향해, 레이얼은 가볍게 검을 들어 휘둘렀다. 더미 베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바짝 치켜든 두 팔과 머리 뒤로 넘어간 검. 딴에는 회심의 일격이었을 테지만, 바보 같은 짓이었다. 기습을 할 거면 기합을 넣지 말았어야지. ……몸통이 비었잖아. 레이얼은 자비 없이 검을 휘둘렀다. 뻑! 사람의 몸통에서 났다고는 믿을 수 없는 소리가 울리며 그에게 달려들던 기사가 나동그라졌다. 이번에도 검면이었다. 기사는 바닥에 흉하게 널브러졌다. 워낙 요란했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죄 쏠렸다. 수백 개의 시선이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그의 깨끗한 검날과 쓰러진 기사를 훑었다.

“당장 베어버려!”

그 순간 발작하듯 길롯 백작이 외치는 말에 레이얼이 맞받아치듯 외쳤다.

“불필요한 살상은 하지 마라!”

길롯과 확연히 대조되는 말에 찰나였으나 미묘한 동요가 일었다. 레이얼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앞으로 나서 검을 휘둘렀다. 뻑! 이번에도 기사 하나가 날아갔다. 어깨가 빠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이 밤 황좌를 두고 싸우는 것은 길롯과 시오도르였다. 다른 이의 피는 필요치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다른’ 이들도 알아주길 원했다.

“……상냥하시긴.”

나가떨어진 기사를 보며 내쉬가 코웃음을 쳤다.

“건방 부리다간, 후회하게 될 텐데.”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그 허세는 언제쯤 잦아드나요? 형님.”

이죽거리는 말투와 함께 내쉬도 움직였다. 레이얼을 향해 곧게 겨눠진 검이 핏물을 뒤집어쓰고 검붉게 빛났다.

“글쎄. 허세인지 아닌지 너도 맞아보면 알겠지.”

“뭐?”

“도통 말을 해도 못 알아들으니 하는 말이다. 말이 안 통하니 달리 방법이 없지 않겠니.”

검을 틀어쥔 레이얼이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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