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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 그냥, 죽여 버릴까? (99/121)

99. 그냥, 죽여 버릴까?2021.08.13.

에반은 노련한 집사였다. 그는 진 빠진 기사와 괴수의 사체가 뒤엉킨 동굴을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쓸만하게 정리했다. 심지어 늘어진 기사들은 거치적거린다며 한쪽으로 밀어두고 말이다.

“와…….”

“마음에 드세요?”

클로이는 에반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마음에 들다 뿐인가. 정말 굉장했다. 산맥을 가로질러 넘어왔으니 그도 적잖이 기진했을 텐데, 에반은 마치 아침에 잘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가뿐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움직이는 건 에반뿐만이 아니었다.

“이쪽으로 두지.”

공동을 울리는 맑은 미성에 클로이는 홀린 듯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예전보다는 수척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찬 표정을 한 엘리오가 있었다. 엘리오를 향한 클로이의 지긋한 시선이 염려라고 생각한 듯 에반이 다가와 다정하게 속삭여주었다.

“금방 회복하실 겁니다. 누가 저 모습을 한 달이나 넘게 누워 계시던 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금방 좋아질 거야.”

클로이는 에반에 말에 당연하다는 듯 힘줘 긍정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예고도 없이 무릎이 꺾이며 휘청했다. 다행히 곁에 있던 에반이 허물어지기 전 붙잡아주어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어?”

통제가 벗어난 듯 무기력한 느낌에 클로이가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에반을 바라보았다. 몸이 떨리고 있었다. 에반은 클로이를 내려다보며 생긋 웃었다.

“긴장이 풀리셨나 봅니다.”

“이제 와서?”

이가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에반은 그런 클로이를 가볍게 추슬러 제게 기대게 하곤 걸음을 옮겼다.

“이제야말로 응석 부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말투는 장난스러웠으나, 클로이를 바라보는 에반의 시선은 다정하기 짝이 없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무릎 뒤로 탄탄한 팔이 들어오더니 시야가 훅 높아졌다.

“그럼, 그럼. 이제 안심해. 오빠가 왔으니까.”

“오빠.”

클로이는 자신을 안아 든 엘리오를 보며 웃었다. 자신과 똑 닮은 새파란 눈동자는 청명한 한여름 하늘을 닮아 있었다. 강렬하기 짝이 없는 청량함. 클로이는 저것이 북부를 지켜낸 아르네의 긍지가 뿜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국을 위해 가장 척박한 곳을 당연하게 지켜낸 아르네의 긍지. 너무도 당연하다 생각했지만, 잠깐 맛본 아르네의 소명은 두 번 다시 감당하고 싶지 않을 만큼 무거웠다. 그런 것을 대대로, 이렇게나 상냥한 표정으로 짊어지다니. 새삼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 클로이는 그대로 엘리오의 목에 팔을 감아 얼굴을 묻었다.

“고생했어. 오빠가 너무 늦었지?”

“늦긴.”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목소리 끝이 파르르 떨렸다.

“귀염둥이야. 대신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화려한 승전 연회를 열어줄게.”

“오빠와 아빠가 와준 것만으로도 세상 다시없이 훌륭한 연회야.”

“세상에. 우리 귀염둥이.”

엘리오는 이것이 클로이의 애교라 생각한 모양이었지만, 클로이는 진심이었다. 쿵쿵. 북을 두드리는 것 같은 힘찬 맥박이 얼마나 달콤하게 들리는지 엘리오는 알까? 해야 할 일도, 나누어야 할 이야기도 있지만 뺨에 닿은 온기가 마냥 따스했기에 지금은 하고 싶지 않았다. 클로이는 입을 열어 속삭였다.

“고생했어. 오빠.”

“응.”

  * * * 연회는 훌륭했다. 불을 피워 즉석에서 구워낸 고기는 고소했고, 따끈한 양젖과 달콤한 포도주까지 모든 것은 완벽했다. 사람들은 예년보다 빨리 끝난 토벌전을 마음껏 축하했다. 가슴에 묻어야 할 이가 없어서 연회는 정말이지 한껏 흥겹기만 했다. 클로이가 불쾌해진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을 바라보던 그때 공작이 다가와 옆자리를 채웠다.

“좀 더 먹지?”

“아뇨. 실컷 먹었어요.”

“먼 길 가려면 든든히 먹어두어야지.”

나른하게 풀려 있던 클로이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공작은 너무 당연하게 클로이의 귀성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들켰나? 절로 손이 차게 식고 가슴이 철렁한다. 그런 클로이를 향해 공작은 옅게 웃어주었다.

“넌 수도로 돌아가렴, 클로이. 아르네가 할 법한 판단을 내리자꾸나.”

“지금 그게 무슨…….”

‘레이디’가 들켰던 건가 싶어 바짝 긴장했던 클로이는 이어지는 공작의 말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계싸움이 시작되었다지? 길롯이 마지막 시오도르의 숨구멍까지 틀어쥐게 놓아둘 순 없지 않겠니?”

공작의 이야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공작과 엘리오는 이대로 북부에 남아 ‘아르네’의 약점을 지우겠다고 했다. 그 소리에 클로이는 자신도 모르게 턱을 떨구고 말았다. 스스로를 약점이라 말할 줄이야. 공작은 손을 들어 클로이의 입을 다물려 주며 산뜻하게 웃었다.

“처지를 비관하면 상처가 되겠지만, 나도 엘리오도 나빠질 게 없어 아무렇지도 않아. 우린 곧 회복할 거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기 마련이니까.”

말 끝에 공작이 클로이의 어깨를 가만히 짚으며 바라보았다.

“가서, 봄을 불러오렴.”

바라마지 않은 소리였다. 클로이는 활짝 웃는 얼굴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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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성에 돌아온 클로이는 제 방에 전서조가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황실에서 보낸 서신 역시. 새가 물어온 것에 비하면 덤덤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으나, 클로이를 웃게 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클로이는 레이얼이 보낸 편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리 길지 않은 편지는 이내 머릿속에 새겨져 버렸는데도 쉽게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뜨거운 물에 들어 앉아 있을 때나 겨우 손에서 놓았을 정도였다.

“암호예요?”

보다 못한 로지가 핀잔했지만, 클로이는 부끄럽지 않았다.

“아니, 답장을 어떻게 쓰면 좋을지 알 수 없어서.”

“그럼, 말로 하시면 되죠.”

“……응?”

“공작님께서 말씀해주셨어요.”

“오늘 밤 아빠에게 여러 번 선수를 빼앗기네.”

싫지 않은 투정을 붙이자 로지가 그런가요 라고 다소 건성으로 대꾸하며 웃었다.

“자, 그럼 짐을 좀 꾸려볼까요?”

“꾸릴 게 뭐 있담? 겨우 사흘인데?”

“그때와 달리 눈이 내렸잖아요. 이번에도 사흘이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죠.”

로지의 덤덤한 설명을 들은 후에야 클로이는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올 때의 기억밖에 없었기에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흘이 더 걸릴 수도 있을까?”

‘사흘 뒤 새 편지가 도착하지 않으면 영지 밖으로 나오지 말아요.’

“가능하면 빨리 가고 싶어.”

덤덤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떨리고 말았다. 최대한 서두른다고 서둘렀고, 예년과 비교해서 정말 말도 안 되게 빨리 마무리된 일정이었다. 그런데도 의미심장한 편지에 그만, 마음이 조급해진다.

“…….”

아니, 사실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 달을 이야기 했을 때, 눈에 띄게 실망하던 레이얼의 얼굴이 떠올랐다. 색이 옅은 그의 푸른 눈동자가 실망으로 얼룩이 졌었더랬다. 그러니 이번엔 그가 셈하는 날보다 더 빨리 움직여보고 싶다. 그래서 그가 편지를 쓰지 못하게 될 사흘이 되기 전, 먼저 가서 힘이 되어주고 싶다. 가슴속에서 피오른 열망이 따갑게 자라난다.

“……응?”

“그렇게 될 거예요.”

로지는 핀잔하지 않았다.

“일단, 혹시 모르니까 일주일 치의 건량을 챙기도록 할게요.”

“응.”

“만일을 대비한 거예요.”

“응.”

“이번엔 앓는 소리 해도 안 봐줄 거니까. 얼른 주무세요.”

표정은 여전히 새침한데 로지의 움직임이 비교할 수 없이 빨라졌다. 그 모습에 웃기게도 클로이는 달아올랐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해가 뜨면 바로 출발할 거예요. 피곤하다고 하지 마시고, 얼른 주무세요.”

“아아 응. 그럴게.”

거의 몰이 당하듯 로지에게 떠밀려 침대에 들어선 클로이는 이불을 목 끝까지 올려 덮으며, 속삭였다.

“아빠와 오빠에게 인사하고 올까?”

“내일 아침에요.”

“내일 아침에?”

“만나자마자 이별이라고 엘리오 님이……. 좀.”

난동을 부렸구나. 클로이는 로지가 삭인 뒷말을 어렵지 않게 유추하곤 쓰게 웃었다. 동굴에서 저를 보고 좋아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팔을 벌리던 엘리오를 떠올리자, 가슴 한구석이 꾹 눌린 것처럼 욱신거렸다.

‘귀염둥이야!’

클로이는 잘 알고 있었다. 일이 생기면 아르네 공작은 아버지이기보다는 아르네이길 선택하는 편이지만, 엘리오는 항시 주저 없이 클로이의 오빠를 자처했다. 이번 일은 공작에겐 아르네다운 일이라 엘리오는 서운했을 터다. 어쩌면 클로이의 선택이 불만족스러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엘리오가 잘 몰라서 하는 생각이다. 이건 아르네의 희생이나 소명 같은 어떤 숭고한 게 아니다. 그저 사랑에 빠진 얼뜨기가, 어떻게든 제 사랑을 지키고 싶어 발버둥 치는 것에 불과하다. 레이디 아르네가 아니라 클로이 아르네가 원하는 일이다. 눈을 깜빡이던 클로이는 그래서, 잠이 들기 직전 따끈한 침대를 뿌리치고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오빠를 만나야 했다. 클로이를 맞은 엘리오는 아니나 다를까, 그녀에게 ‘아르네’를 위해 무리할 것 없다는 지극히 그다운 조언을 건넸다.

“가지 마라 귀염둥이야. 오빠가 어떻게든 하마.”

“아니야. 가야 해.”

“너까지 아르네일 필요는 없어.”

“당연하지. 이건 클로이의 일이야.”

“뭐?”

“내 피앙세를 위해서 가는 거라고.”

아르네 공작과 엘리오 아르네는 잠들어 있는 동안 클로이와 레이얼의 사이에 어떤 진전이 있었는지를 모른다. 그래서, 엘리오는 내 피앙세라는 지극히 집착 어린 클로이의 말과 볼을 예쁘게 물들이던 표정에 두 번 놀라고 말았다.

“귀염둥이야?”

“그렇게 되었어. 그러니까…… 다녀올게.”

“맙소사.”

엘리오는 살짝 넋이 빠진 얼굴이었다. 황망하고 어이없고, 서운하고 그러면서도 웃겼던 걸까. 그는 굉장히 이상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리고 볼을 씰룩이며 중얼거렸다.

“붙잡아선 안 되는 거잖아.”

툭. 어깨를 두드린 그가 조심히 가렴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끝까지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약간 서운해하긴 했으나 클로이를 사랑하는 오빠답게 그녀의 결정을 반대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동이 트자마자 공작성에선 말 두 마리가 하얀 설원을 짓치며 무섭게 달려 나갔다. 이번에도 은밀하고 고요한 안녕이었다.

“북부라고?”

편지를 보냈다는 것만으로도 열이 뻗쳤건만, 그 편지가 수도의 타운 하우스가 아니라 북부령으로 향했다는 소리에 내쉬는 미친 것처럼 굴었다.

“왜 아르네 공녀에게 보낸 편지가 북부로 향했지?”

질문하고 있으나 답이 필요하진 않았다. 레이얼 시오도르가 제 피앙세에게 서신을 잘못 보낼 이유 같은 건 없을 테니까. 아마도 저 깜찍한 레이디가 자신도 모르게 또 내뺀 모양이었다. 제겐 말도 없이.

“번번이. 그러지 말라니까.”

집착 돋게 구는 게 일부러 이러는 건가 싶어진다. 이미 경고해주지 않았나? 자신을 이렇게 모는 게 바로 그녀 자신이라는 것을. 입꼬리를 무섭게 비튼 내쉬가 매끄럽게 빠진 턱을 쓸며 시선을 들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황태자 궁. 훗날 대공이 되어 이 황실을 나가야 하는 저완 달리 황금색 지붕으로 치장된 그곳을 바라보고 잇자니, 속이 새카맣게 뒤틀린다.

“백작. 준비는?”

“며칠만 더 주십시오.”

“아직도 그, 부관이 항복하지 않은 모양이지?”

“……네.”

“그냥, 죽여 버리면 안 되나?”

빙긋 웃는 내쉬는 예전처럼 농담이라는 소리를 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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