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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 초대받지 못한 손님 (98/121)

98. 초대받지 못한 손님2021.08.10.

사흘은 금방이었다. 충분히 휴식한 기사들은 출진 날 아침 하나같이 상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될 수 있으면 밖에서 해결해주세요. 아시겠죠? 내부 청소까지 해가며 채굴은 힘들단 말이에요.”

아니다. 이건 전에 없이 사근사근해진 말레사의 배웅을 받아서일까? 말레사는 동굴을 치우고 나면 제국에 단 두 점밖에 없는 핑크 다이아몬드를 채굴해낼 수 있다는 소리에 거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상냥해졌다.

“내부에 틀이 박혀 있는 것은 어쩌지 못해도 최선을 다해보지.”

“아유, 세상에. 우리 아가씨. 응? 최선은 무슨. 피부 상하니까 선봉은 다른 분들께 맡기시고 로지랑 뒤에서 요것 두르고 계세요. 응?”

말레사의 콧소리라니. 오……. 세상에. 클로이의 새파란 눈동자가 경악에 질려 가늘게 떨렸다.

“어차피 덫도 파두었잖아요? 유인조가 잘만하면 손도 안 대고 해결할 수 있을 텐데요 뭘.”

“……걱정해줘서 고마워. 말레사.”

“혹시, 채굴은 언제부터 가능할까요?”

“말레사 님, 저희 이제 출진하거든요? ‘살아 돌아오너라’까지는 안 바란다지만, 그래도 ‘다치지 말아요’ 정도는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기사 하나가 질린 목소리를 감추지 않았다.

“이번 토벌에서 죽은 사람 있어?”

덫과 핑크 다이아몬드는 강력했다. 그랬기에 기사는 본전도 찾지 못하고 꼬리를 말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출발하는 길, 모두의 표정은 미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비장해질 이유가 없어 기쁘다고 해야 할까, 재촉받아 이상하다고 해야 할까. 실로 낯선 기분이었다.

“나 원 참. 이런 토벌은 처음입니다.”

“이런 토벌이 싫은 건 아니지?”

“싫긴요. 그걸 말씀이라고.”

농담하듯 한마디 덧붙인 말에 백작이 정색하며 얼굴을 굳혔다.

“분명, 북부에 큰 변화를 일으킬 겁니다. 이건 정말 큰 이득입니다.”

“호들갑은.”

백작은 클로이의 핀잔에 문득 심술 맞은 표정으로 속삭였다.

“늘 괴수에 매여있던 북부의 강력한 병력이 자유를 얻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

클로이는 그제야 백작이 흥분한 이유를 깨달았다. 북부출신 기사의 기량이야 다들 한 수 위라고 쳐주지 않던가. 만약 그들이 괴수에 발목 잡히지만 않는다면 여러모로 굉장한 일이 되리라.

“좋네! 그거.”

생각지도 못한 낭보다. 작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클로이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뭐가 됐건, 북부에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다 싶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레이얼이 생각났다. 아르네 공작의 일로 ‘저주’에 방점을 찍게 되었던 가련한 자신의 피앙세가 말이다.

‘지지 마. 나도 지지 않을 테니.’

문득 그의 속삭임이 떠오른다. 가련하리만치 몰려서도 절대 꺾이지 않는 그녀의 시오도르가 이 순간 사무치게 그립다.

“서두르지. 오늘 어지간하면 끝내자고.”

“저번에 얼마나 정리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척 보기에도 적은 수는 아니었으니 잘만하면 될 것도 같습니다.”

“아니, 오늘 해야 해.”

클로이는 갑작스러운 채근에 의아해하는 백작을 보며 웃었다.

“니칸 백작, 말레사가 내일이라도 삽을 들고 뛰어올 것 같더군.”

“……아.”

그는 그길로 부관을 불러 오늘 동굴이며 동시에 광산인 이곳의 토벌을 오늘 내로 끝마칠 것을 명령했다. 물론, 이유를 묻는 부관에게 설명은 해주었다.

“말레사가 당장, 채굴하길 원한다더군.”

“……네.”

이번에도 모두 순순히 이해했으며, 이날의 토벌은 다른 날보다 절박하고 더없이 공격적이었다.

“왜, 벌써 끝냅니까?”

말을 하는 중간 정신이 끊어질 뻔했지만, 키릭슨은 끝까지 태평한 어조로 말을 맺을 수 있었다. 그가 끌려온 곳은 중범죄가 들이 구류되는 지하 감옥 3층이었다. 결코 조사차 들를 만한 곳은 아니었다. 따로 고문은 하지 않았지만, 잠을 재우지 않았다. 하나, 키릭슨은 꿋꿋하게 버텼다. 처음엔 신경이 예민하게 솟더니 둘째 날엔 무기력증과 두통, 구역감에 시달렸고 셋째 날이 되자 의지와 상관없이 정신이 몽롱해졌다. 입을 열면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아 아무리 힘을 주어도 술에 취한 듯 몸이 자꾸 통제를 벗어나려 했다. 조금 전도 그랬다. 현실과 꿈의 경계가 무너져, 제 앞에서 떠드는 길롯 얼굴 위로 그의 주인이 덧씌워졌었다. 찰나였지만 제가 저지른 일에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 죽어가는 꼴을 해서도 허세가 제법인데?”

“칭찬이시라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내일도 올 테니 그때 보자고.”

“무슨 조사가 이렇게 길어집니까? 제 행적쯤은 금방 나올 텐데요? 거리낄 것 없으니 전부 열람해보시죠.”

“아니지 아니지, 키릭슨 고어. 겉으로 드러난 행적은 누구든 문제가 없지 않겠나. 상황이 이렇다 보니 철저하게 해야 하는 걸 그대도 잘 알잖나?”

절대 풀어주지 않겠다는 거군. 키릭슨은 길롯 백작을 보며 느릿하게 눈을 끔뻑였다.

“이해하겠습니다. 길롯 백작님. 그럼 멀리 배웅하지 않을 테니 살펴 가시지요.”

“혀 씹지 않게 조심하게. 말소리가 늘어지는군? 혹시라도 말할 게 생각나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길롯은 제 입가를 두드리며 자못 비열하게 웃었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오기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곧 무너지고 말리라는 것을.

“…….”

길롯 백작이 나가고 난 후 혼자가 된 키릭슨이 붉게 충혈된 눈을 느릿하게 굴렸다. 누가 눈알에 모래를 한 줌 뿌려놓은 듯 쓰리고 까끌거린다.

“물 좀 주겠나?”

“거기 있지 않습니까?”

“얼음이 가득 든 찬물이 마시고 싶어서.”

“……예예. 그러지요.”

문을 지키는 간수가 이 겨울에 ‘얼음’이 든 물을 주문하는 심산을 알 만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나갔다. 그 역시 길롯가의 개. 아마 이런 행적은 그가 나가는 순간 길롯 백작에게 고스란히 전달될 것이다.

“빨리 좀, 가져다주게.”

“예예. 그러지요. 얼음은 아무래도 본궁에 가야 있을 텐데요. 기다리실 수 있으십니까?”

“그러니 부탁하는 게 아닌가.”

“……아직 조사중이니 주무시면 깨우실 수밖에 없습니다. 아시죠?”

간수는 철창 밖의 물 양동이를 가리키며 웃었다.

“알고 있지.”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간수가 자리를 비우고, 혼자가 되자 키릭슨은 벽에 기대 눈을 감았다. 저 바보는 모른다. 얼음물을 청한 건, 잠을 깨기 위해서가 아니다. 잠을 일 분이라도 더 잘 시간을 벌기 위해서다. 체력은 진작에 바닥났다. 어차피 이건 시간 싸움이었다. 길롯은 어떻게든 자신을 엮어 넣을 것이다. 자신이 죽어버리면 말을 지어내기는 더 쉬우니 가능한 멀쩡하게 오래오래 버텨야 한다. 제 주인의 즉위식을, 그 통쾌한 순간을 너무도 보고 싶으니까. 버티고 말리라. 키릭슨은 눈을 감자마자 사지에 힘을 풀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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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 후. 짧게 끊어지는 뜨끈한 숨이 쉴 새 없이 터졌다.

“……폐가 터지는 줄 알았네.”

“진짜 아슬아슬했죠?”

길게 숨을 뿜으며 클로이가 투덜거리는 소리에 로지가 웃었다. 조금 전 그들은 마지막 괴수를 정리하고 동굴을 확보했다. ‘오늘 내로 정리하자!’라고 했지만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내고야 말았다. 승세를 탄 흐름과 평년에 비교해 완벽하리만치 보존된 병력 덕이었다. 이번에도 죽은 이는 없었다.

“덫이 하나만 더 있었어도 조금 더 쉽게 끝났을지도 몰라요.”

“아니야. 이게 최선이었어. 다들 수고했다.”

아쉬워하는 로지의 말에 클로이는 담백하게 기사들에게 공을 돌렸다.

“언 땅은 바위보다 단단하지. 거기에 선잠을 자던 괴수 몰래 준비하자니 얼마나 힘들었겠어. 다들 정말 수고했어.”

그녀의 말에 허덕거리던 숨소리가 삽시간에 뚝 끊겼다.

“의지하던 아르네 공작도 아니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아르네 소공작도 아닌 ‘아르네 공녀’인 나를 믿고 힘써줘서 고마웠어. 모두들.”

“……아가씨.”

“못 미더웠을 텐데도, 최선을 다해준 걸 알아.”

모두가 입을 꽉 다물고 클로이를 향해 바라보던 그때. 잔뜩 비장한 표정을 한 클로이가 엄숙한 목소리를 내었다.

“덕분에 말레사의 무서운 애교를 내일은 안 봐도 되지 않나. 정말 고맙다!”

클로이의 말에 기사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미묘하게 가라앉을 뻔한 분위기가 대번에 살아났다.

“기뻐?”

주어는 없었다. 하지만 대답할 사람은 많았다.

“기쁘다마다요.”

멀지 않은 곳에 바닥에 널브러지듯 누운 백작이 중얼거리는 것을 시작으로, 하나둘 소회를 덧붙였다.

“오늘 아침에 정말 무서웠단 말입니다.”

“와……. 말레사님의 그런 목소리라니.”

“말도 마. 두 번 볼까 무서웠지.”

시시덕거리는 소리가 한참 이어졌다. 동틀 무렵부터 시작했지만, 시간이 꽤 걸렸다. 먹을 것도 없고 하니 해가 지기 전에 귀성해야 했는데 지금 이러고 있는 건 어쩔 수 없어서였다. 그들은 지금 손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구덩이 여섯 개를 가진 첫날 해치운 것만큼, 혹은 그 이상을 오늘 처리했다. 파둔 덫은 고작 셋. 나머지는 기사들의 육탄전과 화살로 퍼부어 마무리했다. 지치지 않을 리가 있나.

“……육포도 안 가지고 왔지?”

클로이의 질문에 로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육포는 무슨, 품에 든 건 표창이니 단검이니 하는 것뿐이다. 눈 오는 겨울날 사냥도 말이 안 되는 소리고…….

“아아…….”

진짜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든데, 언제 돌아가나 싶어서 때아닌 한숨을 터트리던 그때였다. 저벅. 묵직한 걸음이 울렸다. 그것을 뒤따르는 가벼운 소리 하나, 그 뒤를 잇는 무게감 있는 소리. 동굴 안의 이들은 번개같이 일어나 검을 바투 잡았다. 소리로 보아 사람이지만, 세크레스에 토벌을 하러 와 있는 걸 모르는 북부인은 없다. 그리고, 토벌 전엔 그 누구도 와선 안 된다. 그런데 기척을 죽이지도 않고 함부로 토벌지에 난입한다고?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군.”

느릿하게 몸을 세운 클로이가 활을 집어 들어 곧장 시위를 겨누었다. 상대가 누가 됐건, 단단히 경고해줄 참이었다. 핑계는 아주 많았다. 당장, 저들이 걸어오는 길목에만 해도 괴수 사체가 줄줄이 늘어져 있지 않나. 찌이이익. 힘껏 잡아당긴 시위에선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다리 사이로 한발 박아줄까?’

황실 전령이건, 내쉬이건 혹은 그 누구건 찔끔할 테지. 클로이의 새파란 눈동자가 차갑게 빛나던 순간. 저벅. 질척한 동굴 바닥을 딛는 소리를 내며 침입자의 얼굴이 횃불 아래 드러나는 것과 동시에 사방에서 경악이 터졌다.

“아가.”

어둠을 가르고 그들 앞에 나타난 건 다름 아닌, 아르네 공작이었다.

“안녕, 귀염둥이야.”

“오빠?”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엘리오에 이어 에반까지. 생각지 못한 반가운 얼굴에 굳어있던 것도 잠시였다. 클로이는 들고 있던 활을 내팽개치고 나는 듯 달려 두 팔 벌린 아르네 공작에게 안겼다. 그녀를 받아낸 공작이 휘청일 만큼 전력으로 달려서. 이내 그들을 엘리오가 다시 한번 안아주는 모습 뒤로 가벼운 소리와 함께 횃불 아래 모노클이 번뜩이며 에반이 물었다.

“승전 연회는 아직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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