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나도 양손잡이라서2021.08.06.
“왜 그러세요?”
말을 몰아 달리던 클로이는 쭈뼛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던 중 시선을 떼는 건 꽤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 나쁜 느낌이 들었다. 괴수의 험한 아가리가 금방이라도 등줄기에 꽂힐 것 같은 본능적인 거부감이랄까.
“아냐.”
클로이의 등 뒤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바로 옆엔 로지가 그 뒤엔 니칸 백작 이하의 무장 기사가 달려오고 있는데.
“무슨 일이십니까?”
자꾸만 뒤를 힐끔거리는 클로이를 향해 백작이 말을 가까이 몰아 다가왔다.
“으응…….”
눈으로도 확인했고, 머리로도 이해했다.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유 모를 불안에 속이 메스껍고 울렁이기 시작했다. 얼굴을 바짝 굳힌 클로이의 모습에 로지가 연신 그녀를 불렀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소란 피우지 마.”
클로이는 상체를 숙여 말 목에 몸을 붙이며 간신히 중얼거렸다.
“말레사가 아침을 조금만 줘서 현기증 났나 봐.”
“…….”
아가씬 아침 안 드시잖아요.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으나, 듣는 귀가 많았기에 로지는 입을 꾹 다물었다.
“힘드시면 속도를 좀 떨어뜨리시는 건 어떠십니까.”
“아니야. 후미의 기사들 역시 안전거리를 확보해야 하니, 조금 더 이대로 달리지.”
얼굴이 핼쑥해져선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에 백작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리하는 게 아니야. 당연한 거지.”
“…….”
“그대가 후미의 기사라면, 고작 현기증 정도로 자신을 내팽개치는 지휘관을 신뢰할 수 있나?”
“그렇게 급박하지 않습니다.”
“그럼, 질문을 바꾸지. 백작은 내가 아버지였어도 이렇게 권했을 건가?”
클로이의 질문에 인자하던 백작의 얼굴에 금이 갔다.
“남작은 나를 애송이라 생각해 낮잡아 보았고, 그대는 나를 보호해야 할 영애로 생각해 기특하게 보았지.”
이번에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으나, 클로이는 전방을 주시한 그대로 한마디 덧붙였다.
“이만큼 했으면, 그대도 그만할 때도 되었지.”
클로이가 끄는 토벌단은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고 빠르게 귀성했다. * * * 쉬지 않고 연이은 출정에 피로도가 상당했다. 영지를 위한 토벌로만 놓고 본다면 첫 이틀만으로도 충분했기에 이제 멈추어도 무방했다. 하나 사기가 바짝 오른 기사들은 이번 기회에 이십 년 전의 일을 설욕하길 바랐다.
“끌어내서 정리하자면 일이 커지지.”
“하지만, 흥분한 괴수가 잠들지도 않았는데 덫을 파는 것도 무리고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할 때라는 건데?”
찰박거리는 물소리 사이로 클로이가 웃었다. 이제 막 귀성한 터라, 추가 토벌에 관한 본회의는 아직이었다. 그런데 목욕시중을 들겠다며 따라 들어온 로지가 이럴 줄 몰랐지. 로지는 올해 토벌 첫 퇴각이 몹시 서운했던 듯 쉬지 않고 재출정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가씨. 잊으셨어요? 거긴 언제고 반드시 정리해야 할 곳이에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요. 방책사업을 재개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데 핑크 다이아몬드를 캐내면 정말 수월해지겠죠.”
“로지. 언제부터 방책사업에 관심이 이렇게 많았다고 그래. 차라리 흥이 오른 김에 휘저어버리고 싶다고 하지.”
“그럼, 그럴게요.”
단박에 수긍하는 로지의 모습에 클로이는 웃지 않으려고 몹시 애를 썼다. 언제나 제게 ‘스승’의 얼굴로 조언하던 로지가 오히려 저를 부추기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아가씨도 아까 아쉬우셨잖아요.”
뒤돌아보는 시늉을 하는 로지의 모습에 클로이는 가까스로 떨친 찝찝함이 떠올랐다.
“……아쉬워서였나? 갑자기 등골이 서늘했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촤학.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수리로 물이 퍼부어졌다. 선뜩하게 식어가던 등골이 삽시간에 따끈해질 만큼 뜨거운 물이었다.
“아쉽기도 하셨을 것이고. 등 뒤에 괴수를 두고 달려본 적도 처음이잖아요. 그럴 만도 하죠.”
“하긴.”
푹 젖어 흘러내린 머리를 걷어내며 클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실 거죠?”
도톰한 수건을 들어 클로이를 착착, 싸매듯 닦아내는 로지의 말은 집요했다.
“……무리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
“누가 당장 내일 가재요?”
화살을 하나도 수거하지 못하고 왔으니 전부 새로 제작해야 하니까 적어도 사흘은 걸리는데. 중얼거리는 말은 흡사 애원이었다.
“좀 쉬시고요. 피곤하실 테니까.”
“…….”
“혹시 또 알아요? 얘들도 피곤해서 잠이 들지.”
“……로지.”
“그리고 우리가 또 언제부터 덫으로만 괴수를 토벌했다고. 마무리라 생각하고 전면전을 치러도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요?”
클로이는 집요한 로지의 부탁에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백작을 불러.”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세요.”
다들 아주 작정을 했구나. 이쯤 되면 져주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고개를 저으며 웃던 것도 잠시, 온탕에서 나오자 급격히 몸이 식어 오싹한 기분이 들어 클로이는 저도 모르게 바르르 떨고 말았다.
황후로 이십 년을 살더니 그래도 처음보다는 나아지고 있었다.
“흐응.”
레이얼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길롯 백작의 노림수는 ‘길롯’의 머리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영악했다. 레이얼의 집무실에 쳐들어와 길롯 백작이 지목한 것은 그가 아닌 키릭슨이었다. 날짜는 확실치 않으나, 궁내에 거주지가 주어진 보좌관이 사사로이 외부 출입을 한 것이 수상하다며 연행했다. 궁내부 인원은 기본적으로 모두 궁에서 살게 되어 있다. 황궁에 적을 둔 이들은 한 달에 두 번, 사전 신청을 통해 외출할 수 있었는데 실베르카를 건네던 날 키릭슨이 사전 신청 없이 외출한 게 수상하다며 연행했다. 이제 와서. 본격적으로 이를 드러내기 전, 수족부터 잘라놓겠다는 심산이 훤해 절로 헛웃음이 터졌다. 키릭슨의 행적이야 확인하면 곧장 나올 텐데 조사를 핑계로 기어이 끌고 가지 않았겠나. 키릭슨은 쉽사리 돌아오지 못하리라.
“흠.”
레이얼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키릭슨도 그도 예상했던 일중 하나다. 키릭슨은 이런 일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 자신을 대신할 인물을 진작에 추려두었다. 인수인계도 틈틈이 해두었기에 일에 차질이 생길 일도 없다. 그런데도 마음이 무겁다.
“차, 차, 차를 드, 드릴까, 요?”
어느 결엔가 다가온 시종 하나가 슬그머니 레이얼의 시중을 들었다. 눈치를 심하게 살피고 말을 더듬으며 앙상히 마른 인상이 흐린 남자였다. 금방 내쳐져도 괜찮고, 그 누가 대신해도 기억조차 나지 않을 흔한 인력으로 보였다. 하지만 흔한 갈색머리칼 아래 숨은 영롱한 벽안을 본다면 생각이 달라지리라. 그는 리히트, 키릭슨이 후임으로 삼은 인물이었다. 누가 따로 언질을 주지 않았음에도 그는 자연스럽게 키릭슨을 대신해 그의 집무실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소리소문없이 흐릿한 인상을 십분 활용할 정도로 영리한 이다. 리히트의 발이 빠른 대처는 과연 키릭슨의 후임이라 할만했으나 레이얼은 아는 체는커녕, 얼굴을 바짝 굳힌 채였다.
“제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바로 길롯이 ‘조사’가 끝날 때까지 대신이라며 남기고 간 기사 때문이었다. 이곳은 이제 온전히 그의 공간이 아니게 되었다.
“……그대는 기사가 아닌가?”
“그러니 제가 낫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찻잔이 무거워 떨어뜨릴 염려는 없으니까요.”
기사가 벌벌거리는 리히트를 가리키며 옅게 한숨 쉬었다. 행동이 반듯하고 재빠르지만, 그는 황궁근위대 출신이었다. 바로 길롯의 끄나풀이라는 소리였다. 레이얼은 기사의 올리브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난 차는 까다로운 편이라.”
“염려되신다면 보시는 앞에서 우려드리겠습니다.”
“당연한 것 아니겠나?”
반쯤의 허락이 떨어지자 기사는 대뜸 시종에게 찻잔과 찻주전자를 받아와 그가 보는 앞에서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찻주전자를 데우고, 찻잎을 골라 담는 손길이 투박한 손 모양새와는 달리 섬세하다. 레이얼은 그를 주시하던 그대로 입을 열었다.
“왼손잡이인가?”
보통은 왼손잡이라고 하더라도, 일상생활에선 오른손을 쓰도록 교육받는 것이 귀족가의 법도였다. 남들과 다른 것은 분명 흠이 되고 마는 곳이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기사는 시종일관 왼손을 사용하였다.
“오른손이 아직 말끔하지 못해서…… 혹시 불쾌하셨다면 다시 하겠습니다.”
기사는 길롯의 끄나풀이라기엔 너무 담백하게 굴었다. 이것이 그를 모욕하기 위한 길롯의 수작이라면 아주 훌륭했고, 그렇지 않다고 하면 의외였다.
“오른손은 어쩌다가?”
“부상을 입었습니다. 어깨뼈가 빠져 아직 완벽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어딘지 늘어진 것 같던 모습은 그래서였나. 레이얼은 막힘없는 그의 대답에 오히려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길롯이 저렇게 흠있는 것을 제 감시자로 붙여놨을 리가 없는데, 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의문이었다.
“……근위대 기사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 완치도 되기 전에 근무라니?”
“검을 쓰지 않아도 되는 근무이니까요.”
“…….”
“그리고 전 양손잡이라 사실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걸 지금 밝히는 건가? 내게?”
“비밀이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밝힐 이유가 없기도 하지. 비장의 한 수가 되지 않겠나.”
레이얼은 어느새 그가 길롯의 개라는 것도 잊고 솔직하게 지적했다. 그가 끝까지 양손잡이라는 것을 숨겼더라면 자신은 더 방심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기사는 그의 말에 미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건 웃는 듯, 찌푸린 듯 종잡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걸 전하께 쓸 이유가 없으니까요.”
한참 만에 그가 한 대답은 표정만큼이나 미묘한 것이었다. 해석하기에 따라 그는 길롯을 속였다는 말 같았다. 레이얼은 자신을 바라보는 올리브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런가?”
“괜찮으시다면 차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좋지.”
레이얼의 허락에 찰나였지만 허공에서 치열하게 시선이 얽혔다. 리히트는 바짝 경계한 표정이었고, 기사는 의외라는 얼굴이었다.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네. 차에 장난질을 쳤으면 제일 먼저 의심받을 건 길롯 백작일 테니까. 그가 의심을 사면 그 뒤에 계시는 고귀한 분들께서도 곤란해지시겠지.”
“가끔은 그런 명분조차 족쇄가 못되지 않습니까?”
“아직은 괜찮아.”
황제가 살아 있고 아르네를 포섭하지 못했으니 아직은 나를 죽일 수 없겠지. 기사는 솔직한 레이얼의 말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양손잡이이거든.”
레이얼이 말한 양손잡이는 그런 게 아닐 테지만, 기사는 그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다행입니다.”
“그래서 경의 이름은?”
잠깐의 침묵도 없이 기사가 입을 열었다.
“킬리언 헤논입니다. 레이얼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