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포박하라!2021.08.03.
동굴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했다. 그곳은 괴수를 품고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상쾌하고, 따뜻했다. 그래서 외길 같은 초입을 지나 사방으로 갈래가 뻗은 동굴의 기묘한 공터에서 괴수를 맞닥뜨렸을 때 더욱 끔찍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구멍에서 꾸역꾸역 밀려 나오던 괴수라니.
“와! 진짜 굉장한데?”
클로이는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웃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매 순간 빠르게 성장했다. 전신의 근육이 아프도록 긴장하며 구르고 바닥에 패대기쳐지며 괴수를 익힌 첫날 이후 그녀는 조금 더 영악하고 효과적으로 움직이는 법을 깨우쳤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연회장’을 탈환하기 위해 세크레스에 와 있었다.
“웃음이 나오세요?”
화살을 다섯 대를 건 로지가 구멍마다 기어나오는 괴수를 보며 구역질 난다는 표정으로 짜증을 냈다.
“그럼 울어?”
싱글거리는 클로이의 모습에, 늘 그녀의 편을 들어주던 니칸 백작마저 한숨을 내쉬었다.
“자자, 뒤로 물러서.”
말은 그렇게 하지만, 클로이는 괴수 무리의 선두에 착실히 화살을 날리는 중이었다. 그들이 파놓은 구덩이는 전부 여섯 개. 그중 셋은 거대 공동에 그리고 나머지 셋은 외길 같은 초입에 차근히 깔아두었다. 충분히 깊고 살상력 있게 파두었다고 자신했으나, 이 순간 그 누구도 그들의 승리를 확신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쏟아져 나오는 괴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으아……. 이거 괜찮을까요?”
기사 하나가 얼빠진 소리를 내며 구역질을 했다. 함정에 빠져 죽던 것도 잠시였다. 구덩이는 괴수의 사체로 메워져 처음처럼 편평해지고 말았다. 남은 구덩이는 셋. 그나마도 외길에 파둔 것이라 이전보다 그 너비가 현저히 좁다. 그 말은 구덩이에 담을 수 있는 괴수 양이 적다는 뜻.
“백작, 후퇴할까?”
“……지금 후퇴하면 내년 겨울까지는 못 올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여태처럼 둥지 밖으로 끌어낸 게 아니라, 둥지를 헤집어 놓았다. 불안을 느낀 괴수가 잠을 자지 않을 수도 있다. 다행히 민가와의 거리는 상당했기에 습격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겠지만, 잔뜩 약이 오른 괴수를 풀어놓고 내년을 기다리기엔 역시 찝찝하다. 클로이는 백작의 말에 고민하는 척 시간을 끌다가, 호쾌하게 외쳤다.
“하는 수 없지. 화살이 떨어질 때까지만 해보지 백작.”
“뭐. 그 정도라면야. 명을 받들겠습니다.”
북부인들은 절대 토벌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불문율이었다. 괴수는 아침이면 내리쬐는 햇살과도 같이, 늘 그들의 곁에 있었다. 재수가 없어 죽는다면 모를까, 어차피 박멸이 불가능한 일에 오기를 부려 목숨을 거는 건 바보짓이다. 백작은 클로이의 말에 손을 들어 궁수를 불렀다.
“조준!”
좁은 곳에서 다닥다닥 열을 맞춰 활을 쥔 기사들이 일제히 한곳을 향해 조준했다. 활에 매인 시위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이 팽팽하던 그때, 외길로 난 구덩이로 괴수가 떨어졌다. 그것을 신호로 백작이 외쳤다.
“쏴라!”
새카맣게 이어지는 궤적이 괴수를 향했다. 단말마와 흉포한 하울링, 그리고 폭죽처럼 터지는 피비린내. 마흔 번의 발사 명령을 내리고 나서야 발사 명령이 멈추었다. 화살통 두 개가 다 빈 셈이었다. 남은 것은 여분으로 지닌 한 통. 꽤 많은 수의 괴수가 줄긴 했으나, 아직도 외길 반대편은 괴수로 가득했다. 그 사이를 헤집고 가볼 수 없으니 남은 괴수 무리를 가늠하는 건 불가능이다. 클로이는 자신의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백작에게 산뜻하게 외쳐주었다.
“후퇴하라!”
길게 뻗은 동굴을 타고 클로이의 명령이 날카롭게 울렸다. 이번 토벌 중 첫 후퇴 명령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토벌대 대장이 내릴법한 정석적인 명령인데도, 기사들의 움직임이 영 굼뜨다. 마치 불만이라도 있는 것처럼.
쉬지 않고 쏟아지는 눈은 곧, 엘피디오 전역을 집어삼켰다. 유례없는 폭설이었다. 눈은 맨 처음 해를 삼키고, 이내 땅도 삼켰다. 새카매진 하늘에서 쉬지 않고 쏟아지는 눈은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어 피아 식별을 어렵게 했다. 그러나, 눈이 먹어버린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모든 소리가 사라진 희게 물든 황궁은 무섭도록 적막했다. 시종과 시녀들 그리고 귀족들까지 모두가 눈 속에 파묻힌 작은 돌처럼 죄다 숨은 그곳에서 활개를 치는 건 길롯이었다. 사람들은 황자와 황후를 더는 ‘시오도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길롯이었다. 길롯 백작이 황후궁의 기사와 내쉬 황자 궁의 기사를 사사로이 부리고, 제 사병까지 종종 함께 거느리고 다니며 차근히 ‘취조’하는 것은 죄를 짓지 않아도 충분히 공포스러웠다. 그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병든 황제를 끌어안고 사방에 날을 세우던 황후가 무얼 바라 이러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잘못된 일이었고,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이 황후의 손에 들어가고 난 후였다. 그들은 ‘황제’라는 방패를 내건 황후에게 대적할 명분이 없었다. 자칫 황후에게 반기를 들면 황제를 음해한 세력으로 몰릴 판이었다.
“아하……. 이렇게 나오시겠다?”
레이얼은 키릭슨의 보고에 산뜻한 표정으로 웃어주었다. 어떻게 몰아가려나 했더니 이런 식일 줄이야.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캐서린 황후는 굉장했다. 그리고 항상 아쉬웠다. 길롯가에서 현 백작이 아닌 캐서린 길롯에게 기회를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다못해, 그와 동등한 교육이 아닌 반의 반만이라도 캐서린 길롯에게 허락했더라면? 소심하고 그저 가문밖에 모르던 여자는 훌륭하게 악당으로 성장했다. 처음 입궁할 당시만 하더라도 물을 흩트리는 미꾸라지도 못됐던 잔챙이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줄리아나 황후의 서거 후 황후가 되는 이변을 만들어내더니 황제를 집어삼키고 그것으로 부족해 이제 황위도 손아귀에 틀어쥐려 하고 있었다. 이것이 저 예쁘게 웃는 것밖에 모르던 여자가 이루어낸 결과라니.
“항상, 굉장하다는 생각이 들어.”
“감탄할 때가 아닙니다.”
“키릭슨. 조바심 낸다고 해서 안 될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이미 벌어진 일이 수습되는 것도 아니야.”
“하지만…….”
“작정하고 몰고 있어. 이렇게 몰릴 거라는 건 너도, 그리고 나도 알고 있었지. 시기와 방식의 문제였지 않나?”
레이얼은 길쭉한 손가락으로 리듬을 타듯 규칙적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하지만 이제 황궁 문도 닫아걸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일을 만들어 보겠다는 심산이 보이지도 않으십니까.”
“그러니까, 흥분하거나 겁을 집어먹을 게 아니라 더 바짝 정신을 차릴 때지.”
빙긋 웃는 레이얼의 모습에 키릭슨이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었다.
“정말, 담대하십니다. 예?”
“아무렴.”
키릭슨의 푸념에 온화한 표정으로 웃어주고는 있으나 레이얼 역시 이번 일에 신경이 제대로 곤두서 있었다. 자정을 기해 황궁 문이 닫혔다. 귀족가로 따지면 봉문이리라. 황제의 상태가 경각에 달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적법한 후계가 있는데 봉문이라니. 이래서야 황좌에 대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곧.’
자신도 키릭슨에게 누차 말했었다. 곧 일이 터질거라고 하지만 이렇게나 갑자기, 불시에 터트릴 줄 몰랐다. 봉문은 정말 생각지 못한 방법이다. 후작에게 새를 날려놓긴 했으나 추가 병력을 들이는 건 불가능하고, 황궁에서 누군가를 내보내는 것도 불가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베트 후작이 지난 병력 요청에 생각보다 많은 기사를 보내주었다. 덕분에, 레이얼은 남몰래 기사를 꽤 많이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천만다행이라는 건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기사들은?”
입에 ‘기사’를 올리는 순간 그의 얼굴에 물려있던 희미한 미소가 마치 휘발된 듯 깨끗하게 지워졌다. 내내 근심하던 키릭슨의 얼굴이 한층 더 엄숙해진 것도 바로 그때였다.
“대기 중입니다. 말씀만 하시면 언제든.”
어디서 누가 어떻게 들을지 몰라 키릭슨의 목소리는 속삭임보다 희미했다.
“……무구 지급은 충분한가?”
“충분하다기보다는 부족하진 않은 수준입니다.”
요컨대 예비 물품은 없다는 뜻이었다.
“살짝 아쉽군 그래.”
곧, 숨이 넘어갈 황제와 적법한 후계자가 있는 궁을 봉쇄하고 기사를 몰고 다니는 길롯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그들은 공포라는 이름으로 궁내 인원의 눈을 가리고 입을 막았으니 이제 레이얼을 처치하러 이를 드러낼 것이다.
“오늘은 황녀궁을 뒤진다고?”
황후는 영리했다. 황후궁을 시작으로, 내쉬가 머무는 황자궁을 차례로 뒤져 제 야욕을 감추고 결백을 주장하려 했다. 그뿐인가 레이얼의 황태자궁으로는 걸음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은 쓰지도 않는 황녀궁을 뒤지고 있다고 하니, 다음은 분명히 황제가 쓰는 본궁이나 혹은 레이얼의 황태자 궁을 조사할 것이다. 주인 없는 황녀궁엔 시종과 시녀가 거의 없다시피 하고 허드렛일을 하는 이들로 채워져 있다. 수색이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늦어도 사흘내에 길롯의 칼날이 레이얼에게 쇄도하리라.
“그럼, 편지를 한 통 써볼까.”
“예?”
“새를 날리려고 해. 아마 계산이 맞으면 궁정 서신원을 통해 보낸 서한과 같이 들어갈 테지.”
“……그게 무슨.”
“아직은 괜찮으니, 사흘 뒤 서신이 오지 않으면 북부령에서 나오지 말라고 전할 셈이야.”
사흘 뒤 레이얼이 편지를 날리지 못할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길롯의 손에……. 키릭슨은 레이얼의 말에 순간 눈에 새파랗게 불이 올라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미리 향유 먹인 고급 편지지를 준비해두어야겠군요.”
“응?”
“일이 끝나면, 하루빨리 오시라 재촉하실 테니까 하다못해 편지지라도 고상해야 면피해볼 것 아닙니까.”
레이얼의 건재한 미래를 확신하듯 키릭슨은 툴툴거렸다.
“아, 정말 너무 하세요. 이 분위기에 향유 먹인 편지지를 어디서 구할 수 있을 거라고.”
그의 너스레에 레이얼이 작게 웃었다.
“걱정 말아. 나의 레이디는 도통 그쪽으로는 관심이 없으실 테니. 아…….”
말을 하다 말고 레이얼이 뭔가 생각난 듯 눈을 빛내며 말을 흐렸다.
“키릭슨, 향유 먹인 편지지는 되었으니, 사흘 뒤에 편지지는 이것으로 준비해주게.”
“어떤…….예?”
어째 목소리가 장난스러워 살짝 걱정이긴 했다. 하나, 이럴 줄은 정말 몰랐다. 레이얼이 흔들고 있는 것은 서랍에서 꺼낸 그의 광산 증서였다.
“그건! 안 됩니다!”
“알아, 누가 내 것을 드리랬나? 사흘 후면 이것이 못해도 세 장은 생기지 않나.”
황후와 내쉬, 그리고 길롯 백작의 것. 그가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레이얼의 말은 키릭슨이 에둘러 전한 미래보다 더욱 확정적이며 희망차기도 했다. 그래서 순간 키릭슨은 웃고 말았다.
“아니, 정말 너무하십니…….”
그 웃음이 채 끝나기도 전, 쾅! 하는 소리가 울리며 레이얼의 집무실이 열렸다. 그리고 기사를 몰고 들어온 백작이 손가락질하며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포박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