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제자리를 찾아가는 거예요2021.07.30.
“그러니? 그럼 차부터 준비해주렴. 짧은 이야기가 아니란다.”
“물론이죠. 저도 그리 짧진 않을 테니까요.”
내쉬는 빙긋 웃더니, 설렁줄을 당겼다. 조금 전 걷어차이고 내동댕이쳐진 시종장 대신 잔뜩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시녀가 들어왔다.
“차를 내오렴.”
“예, 전하. 폐하껜 어떤 차를 올리면 좋을까요?”
다소곳한 그녀의 질문에, 캐서린이 상냥하게 웃어주었다.
“우리 황자님께서 즐겨 드시는 거면 된단다.”
“예, 폐하.”
이윽고 그들은 ‘로열크라운’을 두고 마주 앉았다.
“이름만 근사한 게 아니라 수색도 빼어나구나.”
“향도 좋고, 제법 맛도 괜찮답니다. 드셔보세요.”
“우리 황자님께서 어련히 고르셨으려고.”
빙긋 웃으며 찻잔을 집어 든 캐서린 황후의 얼굴에선, 황후궁에서 보이던 음울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얼굴이 밝고 화사했으며 말씨는 명랑해 마치 크게 기분 좋은 일이 있는 듯도 해 보였다. 망측하게도 말이다. 내쉬는 황후의 호들갑에 이렇다 할 대답 대신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저번엔 황제가 금방이라도 어떻게 될까 봐 정신 나간 사람처럼 굴더니, 그래도 오늘은 눈빛이 한결 맑아 보인다. 언제고 한번 사병 이야기는 해야 할 것이었는데, 아마 그날이 오늘인 모양이었다.
“내쉬.”
잔을 반쯤 비웠을까, 슬슬 본론을 꺼내려는 듯 황후가 그를 불렀다.
“말씀하세요.”
“요즘 궐내 분위기가 정말 살벌하지요?”
오, 이런. 어떻게 말을 꺼내나 했는데, 알아서 판을 펴주는 황후의 말에 내쉬는 빙긋 웃고 말았다.
“왜 그런지, 어째서 그러는지, 어떻게 하실지 알고 있다면 어머니께서 말하기 더 편하실까요?”
내쉬는 찻잔 안에 고인 달큰한 향을 깊게 들이쉬었다. 매일을 마셔서인지, 마음에 들어서라고 생각해서인지 처음엔 그렇게 향기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요즘 그는 단내가 무척 좋았다.
“……알고 계셨다고요?”
“설마, 제가 바보인 줄 아신 겁니까?”
이쯤되자 내쉬는 캐서린이 저를 얼마나 멍청이로 생각하고 있었는지 눈에 훤히 보여 입맛이 잔뜩 썼다. 황제가 아파 쓰러지자마자 무리하게 덩치를 부풀린 무력. 길롯이 공격적으로 포섭하는 귀족 세력.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를 수도 있나? 짜증이 치밀다 못해, 구역질이 올라온다. 캐서린 시오도르.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너무 무식하지 않나? 이따위 것을 위장이라고 지금 했던 건가? 이렇게 하면 아무도 모를 거라고? 눈을 동그랗게 뜬 캐서린의 위로 길롯 백작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내쉬는 길롯 백작에게 한 날 선 위협을 제 어머니에게도 터트리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 했다.
“하지만, 내쉬, 우리 황자님은 이 어미를 이해할 거라 믿어요.”
건너편에서 건너온 보드라운 손이 그를 넝쿨처럼 감아쥐었다.
“…….”
내쉬는 잠깐사이 제 손가락을 단단히 틀어쥔 캐서린의 손을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나긋하게 생겨선 매번 이렇게 부지불식간에 틀어쥐어 꼼짝도 못 하게 하지. 하지만 미련하게 아무 데나 손을 뻗다가 정리될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
“그 수가 부메랑이 되어올 건 생각해보셨습니까?”
“괜찮아요. 괜찮아. 애초에 시오도르와 아르네도 반정으로 이 엘피디오를 세우지 않았습니까.”
여전히 캐서린의 목소리는 나긋하고 달콤하다. 그러나 내쉬는 순간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방금, 말이 엇나갔다. 제가 생각해본 그 어떤 방식도 아닌, 가장 파괴적인 쪽으로. 위험하게 늘린 사병과 길롯이 마구잡이로 끌어들인 귀족은 설마 겁을 먹고 털을 부풀린 작은 동물의 경계 같은 게 아니었다고? 번쩍 고개를 들어 캐서린의 표정을 확인한 내쉬의 얼굴은 하얗게 탈색되어 버렸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 어떤 때보다 아름답고 당당하게. 눈빛은 맑았고, 표정은 온화했다. 그러니까, 지금 캐서린 황후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거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표정이 무너지는 게 느껴진다.
“걱정 말아요. 아르네도 오래지 않아 꼭, 손에 들어올 거예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내쉬. 우리 황자님. 시오도르를 잃고 휘청이는 이 제국을 안정시키려면, 아르네는 길롯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어요. 알잖아요. 제국을 위해 사는 바로 그, 아르네라는 것을.”
“…….”
“그리고 이 어미는 원래, 아르네를 우리 황자님의 짝으로 점찍어두었는걸요. 따지자면 제자리를 찾아가는 거예요.”
“하지만…….”
캐서린은 내쉬의 표정이 실패를 염두에 둔 ‘염려’라고 생각한 듯 자상하게 덧붙였다.
“병력은 충분해요.”
내쉬는 손을 들어 제 얼굴을 세게 문질렀다. 확인이 필요 없을 정도로 확실한 한마디였다.
“내쉬, 우리 황자님. 염려 말아요. 어미가 이야기했잖아요. 뭐든 손에 쥐여주겠다고.”
“어머니.”
“내쉬. 이건 다 그가 자초한 거예요.”
“어머니!”
찬탈이라니. 이게 아르네로 덮어질 일인가? 가뜩이나 외탁을 한 외모가 아니었던가. 내쉬는 제 까만 머리에 깊은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다. 황족이라면 타고난다는 은발이 제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뿐인가 얼굴 그 어디서도 황제를 닮은 구석은 없었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엔 언제나 제 모친의 얼굴만이 있을 뿐이었다. 가냘프고 달콤하게 생긴 미인. 중성적인 얼굴이야 레이얼도 마찬가지이지만 황가의 특징을 고스란히 물려받았기에 그는 어딘지 모르게 엄숙한 느낌이 있다.
“…….”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태생적인 고귀함 말이다. ……고귀함? 바로 그 순간 마구잡이로 뻗어나가던 생각이 뚝 잘렸다. 이성도 함께. 조금 전까지 내쉬는 제 어미의 미련한 탐욕에 화가 났는데, 분명 그랬는데. 잘린 건 생각이 아니라 이성이었을까. ‘은발’ 같은 게 언제부터 이 엘피디오의 고귀함이자 정통성의 상징이었는지에 대해 반감이 들며 조금 전의 속삭임이 떠오른다.
‘따지자면 제자리를 찾아가는 거예요.’
제자리. 전신이 울리는 소리였다.
“내쉬. 내 황자님. 골치 아프게 생각할 것 없어요.”
여지없이 다디단 속삭임이 그의 균열 틈으로 파고들었다.
“전부, 이 어미가 해드릴 거예요.”
그의 손엔 아무것도 묻힐 필요가 없다는 듯한 말이 너무도 유혹적이다.
“그러니 그냥, 이대로 있어 주기만 하면 된답니다.”
일평생, 아니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의 그의 모든 순간을 합쳐 가장 훌륭한 제안이리라. 내쉬는 캐서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가로 젓지도 않았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지금에도 말이다. 아르네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아주 조금 설렜던 것도 같았다.
새로운 날이 밝았다. 공작성을 나서며, 클로이는 간밤과 비교해 놀라우리만치 마음이 고요해졌음을 깨달았다. 어제의 승리에 자신감이 솟아서도 겸손해져서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는 없다는 깨달음 덕분이었다.
“……밤 좀 드릴까요?”
그래서 클로이는 농담을 건네며, 긴장을 풀어주려는 로지를 향해 웃어줄 수 있었다.
“식은 밤은 됐어. 이따 다녀와서 어제처럼 구워줘.”
무사 귀환을 바라는 요란하지 않은 인사에 로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가 싶더니, 이내 클로이처럼 웃었다.
“역시, 우리 아가씨는 맛을 아신다니까. 그럼 이따 돌아와서 화로에 구워드릴게요.”
“그래.”
“구워드릴게요. 잊지 마세요.”
“로지나 잊지 말라고.”
말고삐를 움켜쥔 클로이가 가볍게 말을 출발시키며 백작을 찾았다.
“가지. 백작.”
“예, 공녀님.”
클로이가 선두로 나서고 백작이 뒤로 남작이 따르는 것과 동시에,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울렸다. 도열해 있던 기사들이 익숙한 출발음에 하나둘 대열을 이루어 뒤따르기 시작했다. 토벌 두 번째 날이었다. 그리고 속도를 본격적으로 올리기 전, 클로이의 목소리가 대기를 깨끗하게 갈랐다.
“경들, 말레사가 오늘 저녁은 어제보다 푸짐하게 차려 놓을 테니, 한 사람도 빠지지 말라더군.”
“예, 공녀님!”
클로이의 다정한 무사 귀환 명령에 기사들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우렁차게 대답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언 땅을 짓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간밤 수도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 덕분에 아르네가를 떠난 세 남자의 행적은 두껍게 쌓인 눈 아래 고요히 묻혔다.
“힘들진 않으십니까?”
앞서가며 길을 트던 에반이 묻자, 공작이 턱짓으로 응수했다. 소공작과 공작이 뒤집어쓴 복면에선 쉬지 않고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으나, 그들은 단 한 번도 신음하지 않았다. 호흡과 기척도 제대로 감추지 못할 만큼 상태가 엉망이 된 지금에서도 말이다.
“하루 이틀 만에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닙니다. 무리하지 마시고 알려주세요.”
“걱정은 이르지 않나. 내가 끝까지 걷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공작은 허덕거리는 숨을 내뿜으면서도 유쾌해 하는 목소리였다. 그들은 북부령으로 향하고 있었으나, 정작 달리는 방향은 동쪽이었다. 이목을 감추기 위해서 맨몸으로 나왔기에 말이 없었다. 두 다리에 의지해 가기엔 너무 먼 곳이라, 이들은 상단 집결지가 있는 동쪽의 홀튼을 경유해 마차를 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걱정 말아.”
에반은 공작의 말에도 눈살을 찌푸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간밤 쌓인 눈은 새벽바람에 슬슬 얼어붙기 시작했다. 평소라면야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테지만, 한 달이 넘게 쓰러져 있던 이들에겐 굉장히 유해한 환경이었다. 폐부를 얼릴 것 같은 찬바람과 그보다 극악한 눈길이라니.
“……홀튼까지는 무사히 가셔야지요.”
“언제부터 아르네가 그렇게 몸을 사려가며 움직였다고?”
에반의 말에 뒤처져 있던 엘리오가 앞으로 나섰다. 숨이 달려 그의 가슴은 쉴 새 없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복면이 축축하게 젖도록 터지는 날숨. 그러나 그의 두 눈은 에반이 기억하는 그 어떤 때보다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쯤 되면 그를 말리는 건 무리일 것이다. 에반은 저를 지나쳐 가는 엘리오를 가볍게 따라잡으며 손을 내밀었다.
“두세요. 주인의 길을 치우는 건 제 일입니다.”
늘어진 잔가지며, 눈 아래 숨은 뾰족한 돌부리를 빠르게 치우며 에반이 다시 길을 트는 것을 시작으로 세 남자의 행진이 재개되었다.
“홀튼을 경유해서 움직이면 북부까진 얼마나 걸릴까?”
에반은 엘리오의 질문에 잠깐 말이 없었다.
“6두 마차는 이목을 끌 테니 4두 마차로 이동해야 합니다. 그럴 경우…….”
부연 입김이 길게 궤적을 늘이던 그때 에반이 말을 맺었다.
“닷새. 닷새입니다.”
“닷새밖에 안 걸린다고? 홀튼에서 아르네 령까지는 열흘이지 않나?”
“산맥을 타고 질러가야죠.”
뚜둑. 눈을 찌를 것 같이 위협적으로 뻗은 나뭇가지를 힘줘 부러뜨린 에반이 능글맞게 덧붙였다.
“누가, 끝까지 마차에 누워계시게 둔다고 했습니까? 한 달 넘게 누워계셨으면 충분하잖아요.”
그의 말에 엘리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가끔 에반은 말로만 주인님이라고 부르고 아르네 가를 엄청 쥐어짜는 거 알고는 있어?”
“알아주셔서 다행입니다.”
공작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에반과 엘리오를 보며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홀튼에서 북부의 아르네 령으로 질러가는 산맥길. 산맥을 넘으면 아르네의 최 동북의 땅이 나온다. 그리고 거기엔, 이십 년 전 죽음 같은 절망을 맛보았던 그가 죽기 일보 직전까지 칼을 휘둘러야 했던 괴수 둥지를 품은 동굴이 있다. 세크레스 광산이라고도 불리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