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보고 싶어서2021.07.27.
뜨끈한 물에 몸을 녹이고 나와서야 클로이는 실감이 났다.
“내가 토벌을 다녀왔구나…….”
클로이는 생채기투성이인 제 손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쉬지 않고 화살을 날린 손가락은 물집이 잡히다 못해 터져 엉망이었다. 그뿐이었나 목구멍에서 쇠 비린내가 나도록 달리고 폐가 터지도록 움직였다. 이러다 죽겠구나 싶었고, 이제 끝이다는 생각도 몇 번쯤 했다. 오늘 하루는 매 순간 매초 무섭도록 생생했다. 로지 옷으로 엮은 밧줄을 붙들어 눈이 덮인 땅을 딛는 순간 살았다는 느낌에 머리가 띵하게 울렸다. 만찬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북부 기사들의 외침을 들을 때도, 고양감에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날뛰었다. 미치도록 기뻤고 기뻤다. 그런데 사방이 고요하고 안온해진 이 순간에서야, 비로소 진짜 ‘실감’한다. 정말로 ‘아르네’의 소명에 발을 디뎠음을.
‘길롯에게 지고 싶지 않아.’
레이얼에게 다짐했던 순간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깨닫자 순간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전신에 소름이 쭉 끼쳤다. 클로이는 저릿한 느낌을 어쩌지 못하고 어깨를 작게 움츠렸다. 노력한다고 해서 모두가 성공하는 게 아니다. 성공은 죽도록 노력한 이중 극소수만이 맛볼 수 있는 것이었다. 약점을 상쇄할만한 그녀의 지혜와 그것을 실행해준 북부의 기사들. 그리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죽을 각오로 구르고 버텨 얻어낸 결과이다. 허공을 보며 눈을 깜빡이던 클로이는 ‘성공’의 이유에 하나 더 덧붙였다. 레이얼의 인내. 그는 자신을 보내고 싶지 않아 했다. 하지만, 그는 소명을 알기에 기꺼이 놓아주었다. 품에서 놓을 때 머뭇거리던 손끝을 클로이는 알고 있었다. 기다리겠다며 속삭이던 남자의 눈에 고여 있던 열망을 보았었다. 그러니까 오늘 대승에 레이얼 역시 분명한 지분이 있다.
“전하, 보고 싶다.”
떨어진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이미 충분히 혹사하고 있는데도 더 빨리, 더 많이 움직여서 어서 그에게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이성을 잠식한다.
물밀듯 쏟아지는 그리움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클로이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 떠올렸다.
“…….”
조심해야지. 이러다 로지에게 들키면 삼십 년은 놀려먹을 거라고.
“아가씨!”
클로이는 생각이 끝나기도 뻑, 소리가 나게 문을 걷어차고 들이닥친 로지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봐 진짜 위험했지.
“로지. 노크부터 하고…… 그게 뭐야?”
“뭐긴 뭐예요. 밤이죠. 이거 칼집까지 다 낸 거라고요. 으차!”
왜 문을 걷어찼나 했더니 한 손엔 밤 자루, 한 손엔 화로를 들고 있었다.
“밤은 화롯불에 구워야 제맛이죠.”
클로이가 거절할 거라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로지는 바닥에 빈 화로를 놓고 벽난로를 뒤적여 열을 잔뜩 머금은 숯을 골라내 담았다. 벌겋게 불을 품은 숯을 담고 철망을 깐 다음 밤을 올리는 것으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자, 그리고 양젖!”
“양젖까지? 손은 두 개뿐이었잖아?”
“빈 화로에 담아왔죠.”
대수롭잖게 대꾸한 로지는 바쁘게 손을 움직여 밤을 굽기 시작했다. 가파르게 솟아 일렁이던 마음이, 고소한 냄새와 따끈한 온기에 차근히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거기에 귀에 거슬리지 않는 소음이 더해지자 클로이는 정말로 흐물흐물해지고 말았다. 밤은 금세 구워졌다. 로지는 잘 구워진 밤을 집게로 까더니 클로이에게 내밀었다.
“고생하셨어요.”
“응. 로지도.”
“내일 한 번 더 다녀오고 나면, 대충 정리될 거예요.”
“그렇게 빨리?”
아버지도 열흘은 족히 걸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째서 이틀이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클로이에게 로지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차분하게 설명해주었다.
“본래, 둥지를 털면 첫날 제일 많이 나오는 법이죠.”
“으응?”
“그리고 그 무리를 정리하는 데만 정확히 엿새가 걸려요.”
“……뭐?”
생각지 못한 소리에, 클로이는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예년보다 빠르게, 그리고 전조 없이 쏟아진 눈이 아니었던가. 덕분에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기습처럼 감행한 토벌이었다. 그런데……정말 말 그대로 대승이라고? 빨리 끝낼 수 있다고? 클로이는 손끝에서 시작한 전율이 느릿하지만, 몹시 흉포하게 일어남을 느꼈다. 머리끝까지 쭈뼛한다.
“내일이면…….”
“이런 식이라면 내일이면 거의 정리될지도 몰라요. 잔무리는 늘 상대하던 것들이니까요. 굳이 북부의 기사 전령을 소집해놓을 이유도 없고요.”
“어쩌면 올해 겨울은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모르겠네?”
“이미, 훨씬 나아요.”
솜씨 좋게 또 한 알을 깐 로지가 밤을 던져주며 웃었다.
“토벌 첫날, 영주를 잃은 영지가 하나도 없잖아요.”
아르네 공작이 유언장을 남기고 나가는 마당에 가신의 가문에서 유사시를 대비하지 않을 리가 있나. 후계가 어리 건 혹은 후사가 없건 모두 예외 없다. 그래서 북부의 겨울은 몹시 치열하고도 혼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 겨울은 그러지 않을지도 모른다니…….
“혹시 말이야, 로지.”
“네.”
“나, 아직 그 숲에서 꿈을 꾸고 있나? 아니면 말레사가 구워준 스테이크 두 장을 먹고 잠든 날 아직 일어나지 못했다거나?”
“오우……. 저런.”
제 입에 뜨끈한 군밤을 하나 던져 넣은 로지가 몹시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원하신다면, 꿈이 아니란 걸 제가 확인시켜드릴 수 있는데.”
“어떻게?”
“사심과 흑심을 담아 한 방 날려드리면 어때요? 단번에 현실감이 드실 거예요.”
“……아, 다행이다 꿈이 아니구나.”
불끈 쥔 로지의 주먹을 보자 클로이는 정신이 번쩍 났다.
“아직 안 때렸어요.”
“응. 그러니까. 우리 로지가 그런 기회를 놓칠 리 없으니까, 이건 정말 현실이지.”
아직 맞지도 앉은 턱이 얼얼한듯해 클로이는 밤을 씹다 말고 제 볼을 무척 소중히 쓸었다.
“이게 현실이라면 말이야, 로지. 내일 출진 전 지령을 내려야겠어.”
“원하시는 대로.”
“해가 뜨면, 몸이 빠르고 가벼운 기사를 추려서 덫을 수습하게 해. 어제 사체는 치울 필요 없어. 치운다고 한들 이미 핏물이 배여 냄새는 그대로일 테니까. 그리고 얼어서 치울 수도 없겠고.”
“네. 몸 가벼운 기사들.”
“덮개는 성내서 만들어서 들고 가져가도록 해. 덮어두고 한두 시간이면 눈에 덮여 보이지 않을 테니, 구덩이 가운데는 반드시 깃발을 꽂아 표시해두도록 하고.”
“네, 덮개는 사전제작. 끝인가요?”
“응. 이걸 말레사에게 전해줘.”
성내 총괄은 말레사다. 그녀라면, 누굴 불러 어떻게 지시 내려야 가장 훌륭한 결과물이 나오는지 잘 알 테지. 몸이 가볍고 빠른 기사라고 했으나, 로지도 클로이도 그게 누구를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온 그림자 기사단이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 기민하고, 더없이 확실한 결과를 가져와 주리라. 무려 아르네 공작을 호위하는 이들이 아니겠나.
“……밤 다섯 개만 더 까드리고 갈게요.”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것 같던 로지가 갑자기 집게 들었다. ‘어째서?’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였다.
“배 속에 뜨끈한 게 들어오면 한결 낫거든요.”
주어도 목적어도 없었다. 그러나 클로이는 로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 밤, 갈무리되지 않은 기쁨과 흥분 그리고 내일을 향한 기대가 제가 느끼기에도 사나웠으니까.
“까주려면 열 개 해줘. 내가 까면 꼭 밤이 쪼개지더라고.”
“그러죠. 뭐.”
잘 구워진 밤을 쪼개는 소리가 경쾌했다. 빡!
“윽!”
뼈가 부러지진 않았을까 싶은 소리가 울리며 시종장이 바닥을 굴렀다. 내쉬는 쓰러진 시종장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리며 으르렁거렸다.
“다시 말해 봐.”
“레이얼 황, 아니 레이얼 님이 레이디 아르네께 서신을 보냈……으윽!”
황태자라는 단어가 심기를 거슬렸나 싶어, 호칭도 생략했는데 멱살을 죄는 힘은 더욱 강해졌다. 시종장은 제 목을 죄는 힘에 푸들푸들 떨었다.
“자, 잘못 했습니, 니다. 용서, 를 해주…….”
“네가 뭘 잘못했지?”
귓가를 스치는 목소리가 순식간에 은근해지더니 멱살을 틀어쥔 손아귀가 느슨해졌다.
“으읍.”
시종장은 감히 주인의 얼굴에 밭은기침을 터트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참으며 눈을 굴렸다.
“신경에 거슬리지 않도록, 그, 그 이름은 입에 올리지 않…… 억!”
내쉬는 쥐고 있던 시종장을 내동댕이쳤다. 쓰러진 시종장을 바라보는 내쉬의 시선엔 순도 높은 경멸이 안개처럼 깔려 있었다.
“이런 머저리 같으니라고.”
뚜벅. 큰 걸음으로 쓰러진 시종장에게 다가간 내쉬는 기침을 쉴 새 없이 터트리는 그를 지그시 발로 밟았다.
“그, 편지를 가져왔어야지.”
“죄, 죄, 죄송합니다.”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내가 네 녀석 유모도 아니고, 하나하나 끼고 다 가르쳐야 사람 될 거야?”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잘하겠습니다. 전하. 제발.”
“두 번?”
내쉬의 입매가 비틀어지며, 잔혹한 미소가 떠오른 건 그때였다.
“네게 두 번째 기회가 있을 거라고 믿는 건가? 응?”
“저, 전하.”
시종장은 가엽게도 처음 보는 내쉬의 광기 어린 모습에 겁에 질려 제정신이 아니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는 바닥에 엎드려 내쉬에게 간청했다. 하나, 솔직한 심정으로는 영 억울했다. 제가 뭐라고 황태자의 서신을 빼돌릴 수 있단 말인가? 황후가 일으킨 파란에 궁내 분위기는 살얼음판이 된 지 오래였다. 거기에 형제의 후계싸움까지 가시화되자, 온 구석구석에서 알력 싸움이 일기 시작했다. 아르네 공작만 꺾어두면 황태자는 쉬이 스러지고 말리라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건 바로 중립파 귀족의 가세였다. 황태자와 척을 졌다는 말이 나오는 이베트 후작이 합류하는 것을 시작으로 거의 대다수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은 수의 중립파 귀족이 레이얼 쪽에 줄을 대기 시작했다. 언제나 제국의 검으로 살던 아르네 공작의 선택과 ‘혈연’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던 후작의 행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도 분명했다. 제국을 위해 살길 바랐던 이들은 공작과 후작의 안목을 기꺼이 따랐다. 그랬기에 이 궁내는 ‘길롯’파에게 오히려 더 까다로워졌었다. 제 세상처럼 활개 치고 다니던 때와 달랐다. 수도에 적을 둔 중립파 귀족들은 많지는 않으나 그 세력이 대단했기에, 도처에 그들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전도 아닌데 제가 감히 황태자 서신을 빼돌릴 수 있나? 하긴 그런 머리가 있었으면 그가 내쉬 황자겠는가. 시종장은 제 목숨이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에게 닥친 것은 내쉬 황자의 비정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내쉬, 내쉬, 우리 황자님!”
때마침 이라고 할 만큼, 갑작스러운 황후의 방문이었다.
“어머니?”
“오오, 우리 내쉬 황자님. 이런 건 좀 내보내렴. 어미가 긴히 할 말이 있어요.”
황제가 앓아누운 후 황후궁 밖으로 걸음을 하지 않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내쉬 역시, 심상찮다고 생각했던 건지 황후의 말에 선선히 시종장을 내보내주었다.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시종장이 정말 날 듯이 내빼고 단둘이 되자, 내쉬가 허리를 굽혀 황후에게 눈을 맞춰왔다. 찍어 낸 듯 똑같은 얼굴. 선명한 녹안에 비친 제 얼굴을 보며 내쉬가 빙긋 웃었다.
“마침 잘되었어요. 저도 드릴 말씀이 있었거든요.”
눈을 깜빡이는 황후는 오늘 정신이 맑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