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영광을 아르네에게2021.07.23.
클로이는 저들의 위계질서를 존중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바람처럼 소리소문없이 사라질 생각이었다. 군율은 중요하니까. 힘내게. 백작. 보이지 않는 응원을 담아 클로이가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고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이제, 나오셔도 됩니다.”
갑자기 고개를 돌린 백작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기분 탓인지, 꼭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어어…….”
설마 하는 생각에 뒷걸음질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다 끝났으니 나오세요. 클로이 공녀님.”
백작이 아예 그녀를 콕 찍어 지목했다. 이거 엄청, 곤란한데.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른다. * * * 털썩. 분명 푹신했을 텐데도, 무릎 꿇리는 소리가 생생했다. 그건 사방이 고요해서일까. 그도 아니면 상대가 너무도 비장해서였을까.
“충성을 맹세합니다.”
두 무릎을 바닥에 꿇은 백작이 더없이 공손하게 충성을 맹세해 왔다. 다소 굴욕적이기까지 했으나, 백작의 그 어떤 모습에서도 그런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레이얼은 꼬았던 다리를 풀고는 천천히 상체를 숙여 백작을 들여다보았다. 알현 신청을 했다기에 무얼까라고 생각했다. 이베트 후작에게서 선물이 갈 거라고 이미 전서조를 받았으니 백작이 뭔가를 가지고 왔으리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일 줄이야. 생각보다 선물이 크다. 레이얼은 웃는 목소리를 감추지 않았다.
“루드비히 백작. 난 충성이 굴종이 되길 바라진 않습니다.”
기다란 손가락이 까딱하며 일어나라는 신호를 보내자, 백작이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시선에 백작의 동공이 작게 수축했다.
“…….”
그의 충성맹세를 받는 황태자의 모습엔 천박한 기쁨도 요란한 설렘도 없었다. 당연한 제 몫을 받는 것처럼 너무도 고아했을 뿐이었다. 루드비히 백작은 그런 레이얼을 보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황제와 길롯에게 짓눌리지 않은 온전한 황태자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레이얼 시오도르는 원래도 그 기개가 남다르긴 했었다. 그 어디 하나 의탁할만한 변변한 세력도 없으면서도, 단 한 번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가 거느린 가신이라고 해봐야 명을 달리한 피앙세의 여섯 가문. 전부 백작위 이상의 고매한 가문이었으나 하나같이 수도와는 인연이 없는, 그야말로 명예밖에 없는 곳들이었다. 돈도 무력도 하다못해 재력도 쳐주기 뭣한 곳들이니 그리 큰 힘이 될 순 없었다. 하지만, 고작 그것만으로 황태자는 여태 버텨왔다. 그 길롯을 상대로 말이다. 백작은 이제야 아르네 공작을, 그리고 이베트 후작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꺾이지 않는 기개와 그보다 드높은 긍지. 그는 절로 사람의 복종을 끌어내는 타고난 푸른 피였다. 그래서 백작은 이 순간 그 어떤 때보다 아르네 공작의 부재가 뼈아팠다.
“본래의 관을 무탈히 쓰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의 다짐에 아마도 황태자는 살짝 웃어주었던 것 같다. 기억은 확실치 않았다. 모양 좋은 입매가 뚜렷한 곡선을 그리는 순간 현기증이 나도록 아름다워 어떻게 알현을 마쳤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았으니까.
“굴종이라…….”
황태자가 했던 말을 곱씹는 백작은 근래에 처음으로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
“오늘 알현 신청은 이로써 끝인가?”
레이얼의 말에 키릭슨이 네, 라고 짧게 대답했다. 황실 분위기가 몹시 안 좋았기에 이런 시기의 알현은 그의 신경을 꽤 곤두서게 했다. 덕분에 키릭슨의 얼굴은 평소보다 창백해 그게 그를 조금 더 예민하고 병약하게 보이게 했다.
“전 그럼 재경부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서류 시한이 며칠 더 남았을 텐데?”
“굉장한 얼굴이 되었는데 낭비하면 안 되죠.”
키릭슨은 주저함이 없이 제 얼굴을 가리켰다. 그는 제 얼굴이 어떤 상태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잔뜩 지치고 몹시 신경이 곤두선 그야말로 터지기 일보 직전의 얼굴.
“이런 얼굴을 낭비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럴 때, 얼른 재경부에 가서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내야지요. 저들도 양심이 있으면 오늘 같은 날은 제게 매몰차게 못 하겠지요.”
“아?”
“자고로 기회는 있을 때 낚아채야죠. 가만히 있는다고 누가 챙겨주지 않아요. 전하.”
“그런 건가.”
“몹시 그렇습니다.”
“그래?”
키릭슨은 다소 비장한 얼굴로 바쁘게 서류를 챙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레이얼이 문득, 뭔가 생각난 듯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잠깐 기다려.”
“무슨 일이세요?”
“가는 길에 서신을 보내.”
“북부로요?”
“기회가 있을 때 낚아채라며?”
“……이게 무슨 기회라고요? 서신이야 늘 보낼 수 있는데.”
다분히 김샌 목소리였으나, 레이얼은 빙긋 웃어주었다.
“오늘쯤 보내면, 아마도 레이디 아르네가 북부령에 도착할 때쯤 같이 닿지 않겠어?”
“어후, 징그러워라. 그런 걸 계산하신 거예요? 전하, 너무 그렇게 치밀하게 따져도 레이디들이 싫어해요. 너무 집착하는 것 같잖아요.”
“뭐 어때, 시오도르인데? 그리고 오늘부터 매일 보낼 테니까 더더욱 괜찮아.”
키릭슨은 너무도 능글맞은 레이얼의 대답에 잠시 정신이 혼미했다. 자신의 주인이 그렇게 수줍음을 타거나, 뾰족한 인사는 아니었으나 적어도 이렇게 순진한 영애를 꾀는 바람둥이 같은 소리를 하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전하, 왜 이러십니까.”
어쩐지 눈이 캄캄해지는 기분이라 키릭슨은 저도 모르게 볼멘소리를 하고 말았다. 일곱 번째 피앙세에, 아르네 공작의 일까지 겹쳐 레이얼이 아르네 공녀를 무척 애지중지하는 것이야 자신도 잘 알고 있다. 거기에 내쉬 황자까지 가세했으니, 레이얼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공녀를 끼고도는 심정도 백번 천번 이해한다. 그런데, 저건 좀 너무하지 않나. 깃펜을 부드럽게 놀려 서신을 완성시킨 그가 가볍게 바람을 불어 편지를 말리며 속삭였다.
“미친놈 같나?”
되묻는 레이얼의 목소리가 너무도 달콤해 키릭슨은 그만 소름이 잔뜩 돋고 말았다.
“그런 목소리를 내시다니요!”
고막을 핥는 것 같은 끈적한 소리에 키릭슨은 제 팔뚝을 힘껏 문질렀다.
“어떤 목소린데?”
“레이디에 눈이 뒤집힌 얼뜨기가 내는 소리요.”
키릭슨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말을 거르지 않고 쏟아냈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저런 소리를 하시나 정말! 하지만 그는 이어지는 레이얼의 말엔 턱을 떨구고 망연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후우. 길게 숨을 뿜어 말끔하게 잉크를 말린 그가 편지를 착착 접어 봉투에 넣으며 하는 소리가 믿기지 않았다.
“미친놈을 자극하기에 이보다 더 자극적인 게 어디 있겠어.”
“……네?”
“레이디에게 목매는 얼뜨기가 나 하나가 아니잖나. 오늘 방문자보다 이 편지가 더 신경을 긁을 테지.”
아, 그런 거였나. 키릭슨은 이제야 레이얼의 이 기괴한 행동을 이해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키릭슨 이대로 나가서 지금 그대로 투덜거려주겠나?”
녹인 왁스 위로 반지를 꾹 눌려 인장을 찍은 레이얼은 무섭도록 사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저한테까지 안 보여주셔도 되는, 됩니다!”
저 얼굴 정말 유해하다! 저를 뼛골까지 발라먹는 악독한 주인인데, 지금도 뼈마디가 삭는 기분인데 잠깐이나마 정신이 멍해졌다. 키릭슨은 레이얼의 얼굴에 휘둘렸다는 사실에 큰 수치심을 느꼈다.
“내가 어떤 표정이길래?”
“정말 야한 얼굴이요!”
“아아, 종종 지어 보여야겠군?”
끄악! 키릭슨은 이제 한계였다. 그는 감히, 무례하게도 레이얼의 손에서 편지를 낚아채듯 집어 들고는 달렸다.
“가요, 가요, 가요! 가서 편지 부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 표정은 레이디 아르네에게만 지어주시라고요!”
문을 닫기 전 짜증스럽게 목청을 돋운 건, 당연히 도처에 깔렸을 눈과 귀를 위함이었다. 쾅 소리가 나게 닫힌 문을 바라보던 레이얼의 얼굴에서 차츰 표정이 빠져나갔다. 이윽고 눈빛까지 무감하게 가라앉은 그는 옅은 숨을 내쉬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장난스럽게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의 속은 까맣게 타버린 지 오래였다. 아직 클로이는 북부령에 닿지 못했을 거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데, 벌써부터 그녀가 보고 싶어서 하루에도 수천 번씩 엉덩이가 들썩였다. 이대로 말을 집어 타고 북부로 가버리고 싶었다. 클로이가 인사를 건네며 돌아서던 그때부터 시작된 초조함이었다. 자리를 마련해 놓겠다던 호기로운 말은 그의 이성을 살뜰히 쥐어짜 한 소리였다.
“하아…….”
레이얼은 집무실 한 켠에 매달린 새장을 보며 한숨을 길게 뿜었다. 새를 날리고 싶다. 어서 오시라고, 빨리 돌아와 달라고. 오롯한 유대감과 온기. 그 달콤한 것을 허락한 클로이를 향한 본능적 집착은 그의 생각보다 꽤 빠르고 강하게 자라났다. 이젠 통제가 되지 않을 만큼. 키릭슨은 절대 모를 테다. 아까 그 모든 건 죄 진심이었다는 것을.
“…….”
레이얼은 새를 바라보던 그대로 눈을 감았다. 어서 와주었으면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과 이 위험한 상황이 끝나기 전까진 그녀가 절대 와서는 안 된다는 상식이 치열하게 들끓는다. 그리고 저열하게도, 이런 고통을 자신만이 겪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기쁘고. 자신과는 달리 그녀를 향한 마음을 다른 이에게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못할 내쉬의 모습에 희열이 들기도 한다. 오늘도 흩날리는 눈을 보고 있자니, 눈처럼 하얀 얼굴을 하고서 그보다 눈부시게 미소 짓던 그녀가 떠오른다. 사방 무엇을 봐도 그녀가 떠오르니 이건 병이 분명했으나, 레이얼은 영원히 낫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토벌대가 본성으로 귀환한 건 해가 지고 나서도 한참 후였다. 토벌대는 언제나 예외 없이 석양이 질 무렵이면 모두 귀환했기에 본성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초상집이었다. 그러던 차에 전수의 인원이 돌아왔기에, 지금 이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이 좋은 날 그냥 넘길 수야 있나요! 승전 연회를 열어야지요!”
“말레사 님! 연회!”
공작성의 사람들은 잔뜩 흥분해 마구 소리를 질렀다.
“그럴까?”
“뭐?”
말레사가 어림없는 소리라며 소리를 꽥 지를 줄 알았는데……? 클로이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북부에는 이런 말이 있다. 괴수 배 속에 들어간 건 꺼내와도 말레사 주머니에 들어간 금화는 절대로 꺼내오지 못한다고.
“혹시, 말레사 님 겨울 감기일까요?”
“뭐?”
“열이 많이 나면 가끔 헛소리하기도 하니까요.”
로지는 말레사의 이마를 짚으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도 그녀를 비난하지 않았다. 모두 같은 생각이었던 거다. 결국, 연회는 없던 일이 되긴 했으나, 그날 밤은 평소보다 푸짐하고 재료를 아끼지 않은 만찬이었다. 말레사답지 않게.
“말레사가 돈을 아끼지 않는다니. 진짜 이상하긴 해.”
클로이가 고기를 입에 욱여넣으며 로지에게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이상한 게 아니라 당연한 것 아닙니까. 오늘은 부상 마흔으로 끝났으니까요. 당연히 축배를 들어야 하지요.”
누군가 클로이의 말에 역성을 들었다. 다름 아닌 사랑의 매로 갱생한 발킨 남작이었다. 이야기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원래 토벌은 첫날에 제일 사상자가 많은 법이니까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백작이 부드럽게 말을 보탰다.
“성에 남겨진 정예도 꽤 되었고요. 공녀님이 만들어낸 대승이지요.”
그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잔이 들렸다. 추위에 얼고 지친 토벌대에게 주어진 포도주였다.
“영광을 아르네에게.”
하늘로 높이 솟은 잔만큼이나 한껏 솟은 목소리가 울렸다. 등골까지 저릿해지는 함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