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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 잘한다! (92/121)

92. 잘한다!2021.07.20.

엘리오를 바라보는 심상찮은 공작의 눈빛에 에반이 말리는 것보다 공작이 한발 빨랐다.

“엘리오, 그럼 네가 나를 호위하렴.”

“예?”

생각지 못한 소리였는지 엘리오에게서 멍청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하지만 공작은 여윈 손을 내밀며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북부로 가자꾸나.”

“각하!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무리라니. 이제 일어난 엘리오도 벌써 활개를 치고 다니는데. 엘리오, 저 잔소리쟁이에게서 얼른 날 빼내 주렴.”

공작의 손가락이 까딱거리며 머뭇거리는 아들을 불러들였다.

“어서. 이리 와. 에반. 저, 고집쟁이가 도통 움직이지 않으니 별수 있겠느냐.”

“안 됩니다 각하. 봉문을 풀기엔 시기가 너무 좋지 않습니다. 황위 승계 싸움이 노골적이 되었습니다. 길롯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저런?”

에반의 다급한 설명에도 공작은 눈만 끔뻑일 뿐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공작은 에반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공작은 바로 그 걱정을 역이용할 셈이었다.

“이미 길롯 측에서 중립 가문을 거세게 압박하고 있고, 황후는 황제를 핑계로 궁내부를 휘어잡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공작님의…….”

“봉문은 풀지 않는다. 에반.”

“……네?”

의외의 소리였던지 드물게도 에반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봉문은 풀지 않아, 아르네의 두 남자는 대외적으로 잠든 그대로야. 그러니 이번에 움직이는 건 나와 엘리오 그리고 너다.”

공작의 손가락이 차례로 세 남자를 가리켰다.

“하지만 공작님, 이래서야 북부로 가는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북부의 불안을 잠재우고 클로이에게 힘을 실을 순 있겠지. 클로이는 토벌이 처음이잖나. 가신들이 못 미더워 할 테다.”

“…….”

“그리고, 봉문한 사이 벌어진 후계싸움이 아닌가. 클로이는 대리일 뿐 후계자는 아니니 아르네의 거취를 논할 자격은 되지 않아.”

여전히 에반과 엘리오의 얼굴엔 미묘한 의구심이 가시지 않은 채였다. 공작은 그 모습을 보며 능글맞게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하니 바쁜 황자가 북부까지 찾아올 시간도 안 될 테고 말이야. 오히려 우리가 이곳을 비우면, 기사들의 부담도 덜하겠지. 이쯤 하면 되겠나?”

말은 그렇지만, 사실상의 명령이었다.

“혹시 부족하다면, 레이얼 황태자 전하에게 그림자 기사단을 몇 보내어 주지.”

“아!”

공작이 덧붙인 말에 에반이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공작이 하려는 일의 의미를 이제야 알법했다. 겉으로는 후계싸움에서 물러나 손을 떼는 것처럼 말하지만, 공작의 함의는 그게 아니었다. 아르네 공작은 봉문후 찾아온 내쉬 황자뿐만 아니라, 길롯의 건방을 전부 들은 후였다. 그는 ‘약점’이 될 아르네 남자들을 북부로 보내 안전하게 감추어서 가문을 공고히 하고 뒤로는 황태자에게 힘을 실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시오도르의 교만이 선을 넘는군.’

달밤 나직이 뇌까리던 분노 어린 목소리가 문득 머릿속에서 생생히 재생된다.

“……아르네의 중립을 버리시는 겁니까?”

공작의 말뜻을 알아들은 건 에반뿐만이 아니었다. 질문하는 엘리오 역시, 얼굴을 잔뜩 굳힌 채였다.

“엘리오 착각하지 마라. 우리는 중립을 버리는 게 아니야. 언제나 제국을 위해 살아온 아르네가 이번에도 제국을 위해 더 나은 선택을 하려는 것이다.”

번드르르한 말처럼 들리지만, 공작은 진심이었다. 이대로 길롯이 황위를 집어삼키면 제국은 오래지 않아 200년 전의 그 날로 돌아가고 말리라. 아르네가 나서서 시오도르의 숨통을 끊기 전, 그는 마지막으로 레이얼 시오도르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수세에 몰려서도 심지 곧게 목청을 높이던, 그의 황태자에게. 그런 의미에서 공작은 이런 상황을 만들어 준 길롯에게 고마운 감정이 들기까지 했다. 만약, 민란지로 보내져 황궁 근위대의 습격을 받지 못했다면 그는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없었으리라.

“에반. 이제 그만 출발 준비를 해주겠나?”

“……네.”

갑작스러운 출발은 그렇게 순식간에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날 정오 전, 아르네 공작저의 뒷문으로 나온 인영이 산길로 은밀하게 접어들었다. 눈이 오던 날의 일이었다.

  집결지에 모인 지도 두 시간 째. 자리를 털고 일어선 클로이가 로지를 불렀다.

“아직 안 온 게 아니라 못 온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두 시간 사이 해를 훌쩍 기울어 그림자가 땅바닥에 눌어붙듯 길게 늘어졌다. 말하는 잇새로 하얀 입김이 너울처럼 뿌려진다.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죠.”

로지는 어깨를 으쓱이며 클로이의 시선을 피했다.

“매년 토벌대에선 수많은 사상자가 나오는 것을요.”

로지의 제1 임무는 토벌이 아니었다. 아르네의 핏줄을 지키는 것이었다. 심지어 제 몫의 괴수들도 정리하지 않았던가. 무기도 떨어진 지금, 위험을 자초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뜻이었다.

“공작님께서도 그러셨죠, 내 목숨이 남의 짐이 되지 않게 하라, 만용을 부려 죽지 말아라, 수세에 몰리면 도망쳐라.”

“난, 짐이 되지도 않고 만용을 부리지도 않았고 수세에 몰리지도 않았지. 게다가 내 몫의 괴수도 다 정리하지 않았나? 아르네의 가신들의 소식을 추적할 만한 자격이 있다는 거지.”

“…….”

“가서 보고 아니다 싶으면 도망칠 거야. 나도 내 목숨은 소중해.”

제 앞의 눈을 꾹꾹 발로 짓이겨 단단하게 뭉치고 있던 로지가 기어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라고 해서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 로지에게 그들은 이웃이며 사촌이었고 또한 친구였다. 외면이 쉬운 건 아니나, 그녀는 제가 보호해야 할 이가 누구인지를 열심히 되새겼다. 아르네의 하나뿐인 공녀. 장차 황후가 될 이 제국의 또 다른 군주. 그러니까, 이 미안함은 내리는 눈 아래 꼭꼭 묻어 버릴 작정이었는데…….

“아, 빨리 못 와? 미적거리면 두고 간다!”

버릴 수도 없게 되었다. 어느새 클로이가 첫 번째 갈림길로 달려가고 있었다.

“자, 자, 잠깐만요!”

눈이 흠씬 묻은 발을 탁, 털어버린 후 로지가 다리에 속도를 올렸다. 하지만, 예사로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곳이다. 제아무리 빨라 봐야 앞에서 기다려주지 않으면 따라잡기가 힘들다는 소리다. 심지어 상대는 클로이 아르네, 그녀의 수제자이자 제1 사냥꾼이기도 하다. 몸놀림이 보통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클로이는 그녀가 막기라도 할까 봐 전력으로 달리는 중이니 두 사람의 격차가 좁혀질 리 없다.

“아, 좀! 아가씨! 같이 가요. 예?”

“같이 가는 중 아니야?”

“나란히 가자고요!”

“뒤에서 엄호해.”

이런 씨! 엄호는 무슨, 앞에서 달려들 판인데! 중간에 뭐라도 튀어나올까 봐 로지는 달리는 내내 사정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앞서 달리던 클로이가 손을 들더니 허공에서 주먹을 쥐더니 그대로 바로 옆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전력 질주하던 로지의 움직임이 단번에 은밀해졌다. 저건, 전방에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뜻이었다. 발을 끌 듯이 해서 클로이에게 다가간 로지는 뜻밖의 광경을 보게 되었다. 백작과 남작이 끄는 병력이 모두 이곳에 집결해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죽지 않았으면 귀환이 마땅한 법이다. 그런데, 병력을 물리지 않고 저러고 있다고? 결코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바로 그때. 뻑! 귓가를 찡하게 울리는 강렬한 타격음이 울렸다. 거리가 좀 떨어진 그들에게도 이렇게 선명하게 들릴 정도면…….

“명령 불복종이라도 한 걸까요?”

로지의 질문은 합당했다. 괴수 토벌은 거의 준전시 급의 사항이었다. 지휘관의 말을 듣지 않고 이탈하는 순간, 수많은 사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에 아르네에선 토벌 중엔 절대복종을 요구한다. 당연히, 그 뒷감당도 오직 아르네의 두 어깨에 올린다.

“뭐……. 규율을 잡는 중이라면 그냥 가죠?”

“그럴까.”

어차피 기사단을 통솔하는 것은 대장들의 몫이니까. 그렇게 정리하고 슬그머니 걸음을 떼려던 순간 무시무시한 고함이 그들의 뒷머리를 잡아챘다.

“발칸 남작! 네가 한 짓을 봐라!”

목이 터지라 고함을 지른 건 다름 아닌 1갈래를 맡은 백작이었다.

“…….”

결과가 좋으면 좋겠지만, 그것을 추궁해선 안 된다. 좋은 결과를 강요당하면 위기의 순간 제대로 생각을 할 수 없게 되니까. 물러나려 했던 클로이가 안 되겠다 싶어서 막, 나서려던 때였다.

“왜 덫을 쓰지 않았나!”

백작의 노성이 그녀의 발목을 콱, 붙들었다.

“어째서 쓰지 않았어! 너의 건방 때문에 모두가 위험할 뻔했다. 남작!”

“…….”

“심지어 너는 공녀님의 기사까지 받아 가지 않았나! 1갈래의 두 배가 되는 병력으로 가니 눈에 보이는 게 없었나? 꼴같잖은 만용으로 지금 소중한 기사들을 괴수의 아가리에 처넣을 뻔 했잖나!”

백작은 잔뜩 화가 나 남작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죄 집어치우고 소리를 질러댔다.

“고작, 어린애 장난 같은 덫에 기사들의 목숨을 걸 수 없어서 그랬습니다!”

내내 조용하던 남작 쪽에서 반격하듯 고함이 터져 나왔다.

“한 번도 시험해 보지도 않은 것을 무턱대고 믿을 수 없어서요! 내 기사를! 함부로 시험할 수 없어서! 저 어린 것이 한 말을 무턱대고 믿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닙니까!”

빡! 이번에도 어김없이 뼈가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그 소리가 울린 후, 남작에게선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남작 괜찮나? 설마 죽진 않았겠지. 덫을 쓰지 않았다고 이렇게 화낼 일인가? 어쨌거나 남작도 기사를 지켰지 않나? 나가서 말려야 하나? 이대로 둬야 하나? 클로이는 충격에 다소 멍한 상태가 되어 마구잡이로 생각을 피워냈다.

“네 고집에 얼마나 많은 기사가 고립되어 애꿎게 피를 흘렸나?”

“…….”

“저들은 오늘 너 때문에 입지 않아도 좋을 상처를 입었다. 반성하라. 남작.”

남작의 진심 어린 항변에 백작은 더는 그를 때리지 않았다. 하지만, 백작은 그를 이해해주지도 않았다.

“저 어린 것이라고 했나? 남작, 방금 넌 얼마나 비열한 소리를 한 줄은 알고 있나? 넌 아르네 공작에게 충성해서라고 말했겠지만 넌 감히 네가 모시는 주인을 판단하고 고르고 있었던거다. 그러니 감히 그런 건방진 소리를 하며, 주인의 판단을 의심했겠지!”

휘이잉. 산줄기를 타고 숨이 멎을 것 같이 찬 바람이 불어와 덮쳤다. 클로이는 눈을 감고 숨을 멈추었다.

“네가 정말 공녀님을 ‘아르네’로 생각했고, 정말로 기사가 걱정되었다면 무작정 정면 돌파가 아니라 적어도 덫을 한번은 써봤겠지. 굳이 많은 인원을 시험하지 않아도 좋지 않았나? 덫으로 유인하기 위해선 한 사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백작의 말이 굉음 같다.

“정, 못 미더웠다면 너를 미끼로 써보면 됐을 것이다. 치졸한 변명은 그만두어라.”

“…….”

“아르네의 어린 계집애가 못마땅했다고 솔직하게 말했으면 네가 이렇게 구역질 나진 않았을 거다.”

하……. 클로이는 길게 숨을 뿜었다.

“충성심이라는 개소리로 변명하지 마라. 넌 그냥 편견에 찌든 머저리일 뿐이다.”

몰아치는 바람보다 훨씬 싸늘한 소리에 클로이가 입안으로 중얼거렸다.

“잘한다!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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