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 황후의 비명2021.07.09.
“아버지? 오빠? 반역?”
클로이는 반사적으로 수도에 두고 온 소중한 이들을 떠올리며 최악의 가능성을 읊었다.
“빨리 빨리.”
애가 타는 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새가 물어온 편지를 어서 확인해달라고 발을 동동 굴렀다. 추위에 몸이 얼도록 날아온 새에게 칭찬 한마디 건넬 정신 같은 건 없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새가 가져온 편지를 여는 순간, 클로이는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맙소사.”
삽시간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져 입을 틀어막는 모습에, 곁에 선 로지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클로이의 손에서 편지를 뺏어버렸다.
“아르네 소공작께서도…… 의식 회복?”
“나도, 나도 좀 줘봐요!”
이번엔 말레사였다. 믿을 수 없는 소식에 다들 예의 따윈 깡그리 잊어버릴 만큼 당황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편지를 마지막으로 보게 된 건 소식을 전한, 북부 기사였다.
“그럼 그렇죠. 겨우 황실 근위대에 쓰러질 분들이 아닌걸요.”
“황실 근위대가 아니지. 민란군을 보호하려다 그런 거지.”
감격한 기사의 말에 말레사가 거세게 콧김을 뿜으며 덧붙였다.
“말만 기사지, 시정잡배보다 못한 놈들 아니야? 뒤에서 공격하는 거로 부족해서, 인질까지 잡았잖아!”
분에 겨운 말레사의 말에 분위기가 냉랭하게 굳던 건 잠깐이었다. 지난날에 화는 나지만, 일단 공작도 소공작도 모두 일어났다니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
뭔가 왈칵 차오르는 듯 허공을 한참 바라보던 기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이 소식을 알려도 될까요?”
그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클로이에게 향했다.
“어떨까?”
“밝히든 안 밝히든 이쪽의 득실은 같습니다. 밝히면 사기가 고취되겠지만 봉문을 풀어야겠죠. 안 밝히면 불안한 채로 토벌에 나서야 할 테고요.”
“……안 밝히는 게 좋겠습니다.”
클로이의 질문에 말레사와 로지가 연이어 입을 열었다. 말레사가 경우의 수를 따졌다면 로지는 의견을 밝혔기에 자연스럽게 클로이는 로지에게 질문했다.
“왜?”
“차라리 눈을 못 뜨고 있는 편이 평판을 관리하기에 용이하니까요. 사람들에게 아르네는 무적에 가까워요. 눈을 떴으면 당연히 토벌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할걸요?”
로지의 말에 진정되는 것 같던 분위기가 급격히 싸늘해졌으나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하다못해 그들도 방금 소식을 듣고 그럼, 곧 오시겠구나 안심하지 않았던가. 미묘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기사가 머뭇거리더니 말문을 뗐다.
“그럼,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걸로 하겠습니다.”
“……즐거운 소식을 혼자 품게 해서 미안하군.”
기사에게 다정한 말을 남기는 클로이의 얼굴은 아직도 흠뻑 젖은 채였다. 하지만, 그녀는 눈물범벅인 얼굴을 해서도 더없이 고아했다.
“미묘한 불안을 덜어주지 못한 것도 미안한 일이야.”
“아닙니다. 공녀님. 함께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영광입니다.”
기사는 가볍게 묵례하고 자리를 비켰다. 새의 발목에 묶인 빨간 끈은 조용히 처리되었다.
“우리가 출발한 날이구나.”
조용히 날짜를 셈하던 클로이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소공작께서도 배웅하고 싶으셨나 봐요.”
“오빤, 다정하잖아.”
클로이의 말에 로지는 말없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나……살아있나?”
엘리오의 말에 머리맡을 지키던 에반이 재미난 소리를 들은 것처럼 웃어주었다.
“아무렴 제가, 빈손으로 돌아왔으려고요.”
“에반?”
오랜만에 깨어난 엘리오는 아직 정신이 맑지 못했다. 그의 기억은 난전이 펼쳐지던 평야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에반이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자네가…….”
“맞이하러 갔었습니다.”
에반은 동공이 풀려 한껏 새카매진 엘리오의 눈을 확인하곤 혀를 찼다.
“늦게 왔다고 타박하신 건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아아…….”
엘리오는 머리를 짚으며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손아귀가 찢어져 손이 제대로 오므려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검을 손에 묶고 무아지경으로 휘둘렀다.
‘도망쳐라! 아르네를 돕고 싶다면 도망쳐! 룻거! 사람들을 대피시켜라!’
힘에 부쳐 민란군에게 대피를 명령하고, 아버지와 등을 맞대고 검을 휘둘렀다. 더는 달려드는 검이 없을 때까지. 혹시 모를 잔당을 대비해 아버지를 끌고 덤불에 몸을 숨겼었는데…….
‘아버지 선물은 어떻게 할까요?’
‘…….’
‘아버지?’
“아버지는?”
“공자님이 꼴찌세요.”
“……그랬나.”
살아계신다는 말보다 훨씬 경쾌한 대답이었다. 엘리오는 굳은 얼굴을 당겨 가까스로 웃었다.
“우리 귀염둥이는?”
“잘 계십니다.”
“……하긴, 괜히 이런 꼴을 보여줘봤자 놀라기밖에 더 하겠나.”
오랜 시간 쓰지 않아 잠겼던 목은 빠르게 되살아났다.
“보아하니 아버지 침실인데?”
“예. 아무래도 두 분이 한 곳에 계시는 게 더 안전해서요.”
안전이라는 단어에 엘리오의 표정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그 와중에도 꾸준했던 모양이지?”
“그 와중이라 더 했지요. 다들 아가씨께 더한 위로를 건네고 싶어 몸이 달아있었거든요.”
“같잖은 것들.”
조금 전까지 의식도 없이 늘어져 있던 환자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엘리오는 흉흉한 눈빛을 뿌렸다.
“아버진?”
“굳은 근육을 푸신다며 산책이십니다.”
“……나 좀 일으켜봐.”
엘리오의 말에 에반은 뒷짐을 지듯 제 손을 감췄다.
“에반.”
“거버가 먼저 확인한 후에요.”
“에반.”
“몸이 망가지면 그건 평생 가겠죠. 전 흠 있는 주인은 싫습니다.”
나긋한 설명에 엘리오가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생긋 웃는 얼굴로 줄줄 읊는 소리가 적잖이 얄미웠던 탓이었다.
“……난 건방진 집사가 싫더군.”
“잘되었습니다. 이참에 인내도 배워보시죠.”
“나가.”
“그럼 거버를 불러오겠습니다.”
한마디도 지지 않는 에반의 모습에 혀를 차던 것도 잠깐이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그 누구보다 아르네를 위하는 그를 모를 리 없다. 이건 그러니까, 에반식의 환영인 사이리라. 혹은,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으리라는 격려? 코웃음을 친 엘리오는 눈을 굴러 창밖을 확인했다.
“얼마나 누워 있었던 거지……?”
그의 기억은 추수가 막 끝난 가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창밖에 보이는 하늘은 맑고 푸르렀던 그 날과 달리 우중충하기만 했다. 먹구름이 촘촘하고 두껍게 깔린 것을 보아하니 저건 그냥 구름이 아니다. 짙은 회색의 하늘을 바라보던 엘리오는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곧, 눈이 오겠군.”
그 순간 엘리오의 얼굴이 희게 굳었다.
“눈?”
그럼 토벌은? 입 밖으로 새지 못한 경악이 소리 없이 터졌다. * * *
“아기는?”
공작의 말에 길리언이 공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떠나신 지 이제 나흘째이니까요. 앞으로 엿새는 더 있어야 공작령에 도착하실 겁니다.”
“중간중간 새를 보내라고 일렀는데.”
“새를 세 마리 가져가셨으니. 오늘이나 내일쯤 오겠지요.”
“엘리오는?”
“아직 모르십니다.”
“흠.”
공작의 푸른 시선이 공작저에 잠깐 닿았다 떨어졌다. 그의 아들은 여동생에게 꽤 집착하는 면이 있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부터였다. 클로이가 아내를 닮아서인지, 그도 아니면 이르게 상실을 맛본 반작용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자신은 아들을 말리지 않았다. 그 역시도 제 아이들에게 꽤나 집착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알렉시스 드 발레르 아르네. 바로 아르네가의 가주이다. 북부를, 그리고 제국을 지켜야 하는 아르네 공작. 하지만 아들의 자각은 그보다 옅었다. 그는 종종 아르네 후계자보다는 클로이의 오빠로 구는 편이었다.
“걱정되십니까.”
길리언의 말에 공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클로이가 지금 어디로 무얼 하러 갔는지 알게 되면 아들이 부릴 난동에 벌써 골머리가 지끈거렸다. 거버가 흔쾌히 찬성하지 않았음에도, 무리해서 몸을 푸는 건 엘리오 때문이기도 했다.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잘려서도 움직이던 엘리오가 아니었나. 작정하고 날뛰면 에반만으로는 부족했다.
“흠. 아기가 소식을 전해오면 좋겠군.”
지금 그는 작은 위안이 필요했다. * * * 그 시각 북부에서 새가 날았다.
“오늘은 시종들이라고?”
황궁의를 죄다 잡아들여 전수 조사를 벌이더니 별다른 수확이 없었는지 시종들이 불려가기 시작했다. 레이얼은 키릭슨의 보고에 혐오를 감추지 않았다.
“황의는 매수가 잘 안 되었나 보지?”
“글쎄요.”
“흠…….”
뻔한 그림이 그려진다. 넉넉한 보상이나 혹은 고문을 통해 ‘희생자’가 선별되면 아마도 그는 레이얼을 지목할 것이다. 자신이 바로 황제에게 수를 썼으며 제 주인은 바로 레이얼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대충 흘러가는 분위기는 알겠는데, 그에게 부과할 ‘반역’의 이유.
“황제는 단 한 번도 나의 폐위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저도 그게 제일 궁금합니다. 뭐라고 엮을지.”
“그것 참. 기대되는데?”
보고 있던 서류의 마지막 장을 확인하고 사인을 한 레이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가지.”
“예 전하.”
키릭슨은 레이얼을 따라 일어서며 냉큼 꿀을 챙겼다. 매일 한 수저씩 황제에게 먹이는 바로 그 꿀이었다. 어쩌면 병환이 깊어진 황제의 목숨이 떨어지지 않고 버티는 건 이 꿀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미 꿀은 반밖에 남지 않았다. 엘피디오 제국인이라면 이 꿀이 가지는 효과를 알기에, 이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도 레이얼은 태연히, 그리고 당연하게 황제에게 들를 수 있었다. 번거로울 테니 두고 가라는 소리를 몇 번이고 들었으나, 레이얼은 매번 단호하게 거절했다.
‘제가 빼돌릴까 봐 염려되십니까?’
보다 못한 캐서린 황후가 저를 믿지 않는다고 노골적인 공격을 하기도 했으나, 레이얼은 천연덕스럽게 그녀의 말을 잘라먹었다.
‘폐하께서 마음만 먹으시면 이까짓 것 구하기는 일도 아닐 텐데요.’
‘그럼 왜요.’
‘이렇게라도 와야 아버님 얼굴을 뵐 수 있지 않겠습니까.’
처연하게 내리깐 눈. 자조하듯 슬쩍 비틀린 입매. 소원하던 사이를 자책하는 듯한 레이얼의 모습엔 그 누구도 더는 나설 수가 없었다. 그러니, 캐서린도 그 뒤로는 그를 타이르듯 달래는 것이다.
‘폐하를 대신해 국정을 보살피시느라 바쁘신 것 안답니다. 무리하지 말아요.’
매번 다정한 말과 함께 캐서린 황후는 희고 고운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죄책감이 들도록 유순한 표정을 짓는 건 덤이었다. 하지만 함께한 세월이 십수 년이었다. 어리고 순했던 황태자는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 레이얼은 캐서린의 말에 더욱 처연하게 굴며, 자비를 구했다. 물고 물리는 싸움은 그렇게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전하 오셨습니까.”
매일 정해진 시간에 찾아오는 레이얼을 이제는 당연하게 반기는 황후궁 시종장이 공손한 태도로 문을 열었다. 침실문이 열리자 달고 비릿한 공기가 확 쏟아진다. 맡아도 맡아도 구역질 나는 향이었다.
“레이얼, 어서 와요.”
생긋 웃으며 그를 반기는 캐서린 황후의 손에는 피 묻은 손수건이 들려있었다. 활짝, 미소를 지은 그대로 캐서린 황후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꺄아아아아!!!”
고막을 찢는 것 같은 비명이 한차례 울렸다. 독을 품은 짐승이 내는 울음같이 섬뜩한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