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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8. 빨간 끈을 맨 1급 서한 (88/121)

088. 빨간 끈을 맨 1급 서한2021.07.06.

“목숨을 걸고 막겠습니다.”

로지와 에반이 그녀의 ‘레이디’ 생활을 이해하고 넘어간 건 그것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그 위험천만한 일을 또 한다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클로이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하…….”

이런 멍청이가 있나. 클로이는 서릿발 같은 로지의 음성에 한숨을 감추지 못했다.

“주무세요.”

도란도란 이어지던 이야기는 그대로 끝이 났다. 심란함에 심란함이 겹쳐 클로이는 그날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허우. 너무 푹 자서 나도 내가 부끄럽다.”

손이 얼어버릴 것 같은 개울물로 세수를 하는데도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게요. 저도 당황했어요.”

정작 잠을 자지 못한 건 로지였다. 생각지 못한 소리에 너무 심란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설득해볼 생각에 말을 걸었는데…….

“코까지 고실 줄이야……. 역시 우리 아가씨구나. 했지 뭐예요.”

로지의 말에 좀 식는 것 같던 뺨이 다시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아침 얼른 먹고 갈까?”

“아가씨.”

“아, 왜! 좀! 대충 넘겨!”

“밤새 생각해봤는데요 아가씨가 말린다고 말려질 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아요. 그렇다고 공작저 감옥에 가둘 수도 없고요.”

“…….”

클로이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로지를 바라보았다.

“가두면 좋겠지만, 그러면 공작님께서도 아시게 되겠죠.”

후. 말 끝에 바람을 불어 앞머리를 날리는 로지의 얼굴은 침통해 보였다.

“아마 그렇게 되면, 공작님이 황가를 쓸어버릴지도 몰라요.”

“그렇겠지.”

“그러니 감옥을 쓸 수가 없죠. 아가씨를 가두려면 그것 말곤 없는데.”

요는, 이거였다. 클로이를 가두려면 공작님이 알게 될 테고 그랬다간 정말 큰일이 난다.

“고마워 로지. 조심히 다닐게.”

“넘겨짚지 마세요.”

대충 힘 빠진 소리를 하기에, 눈감아주려나 했더니 그건 또 아닌 걸까? 로지의 일갈에 클로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를 데려가세요. 에반님에게도 행선지를 알리시고요.”

“로지.”

“안 그럼 저 공작님께 다 말씀드릴 거예요.”

“로지! 수도에 좀 살더니 엄청 악랄해졌잖아!”

웬만하면 저자세로 나가야겠다고 다짐했지만, 로지의 말은 해도 너무했다. 그러나 불만에 가득 찬 클로이의 포효에도 로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데려가 주세요. 위기 상황이 아니면 나서지 않을게요.”

이건 로지의 최선이다. 흔들림 없는 다갈색의 눈동자를 가득 채운 밀도 높은 애정을 보자, 버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대로 해.”

  맨 처음에 끌려간 건 황의들이었다. 한사람 허투루 넘기는 법 없이 이어지는 강도 높은 조사에 황궁을 감싼 긴장감은 한층 더 지독해졌다. 하나, 황제의 병을 외부인력에 맡길 수도,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도 없으니 맨 처음 조사를 받고 풀려난 이들이 계속 곁을 지키는 건 당연했다. 이전에도 더할 나위 없이 공손했으나, 한번 추국장에 끌려갔다 온 황의들은 숨 한 번 크게 쉬지도 못하고 떨어댔다. 벌벌거리는 모습에 황후 캐서린은 못마땅해 연신 미간을 찌푸렸으나, 그녀는 황의를 내치지 않았다.

“진정하시게.”

매우, 언짢은 목소리로 다독일 뿐이었다. 오히려 그 말에 한층 더 겁을 먹게 되는 건 황의였으나, 아무도 황의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애초에 일을 이렇게 만든 건 저 바보들이 아닌가. 황후궁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시선은 한결같이 차갑기만 했다. 황후는 하루 세 번, 황제를 진찰할 때를 제외하고 다른 이들의 접견을 모두 막았다. 제 곁의 시녀들도 최소한으로 줄였다. 안팎으로 가차 없는 모습에 사람들이 조금 더 위축되었으나 그건 캐서린이 알 바가 아니었다. 이즈음 그녀의 관심사는 황제의 병과 황제가 약속한 콰이펄른의 별장뿐이었다. 틈틈이 황후의 업무까지 보고 있으니 가뜩이나 가녀린 사람은 안쓰럽게 말라버렸다.

“식사는 하고 계십니까?”

황후는 자신을 찾아온 내쉬를 침실에 딸린 작은 응접실에서 만났다. 진료 시간이 끝났으니 함부로 황제를 보여줄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한결같은 모습이라, 시녀들은 당연하게 생각했고 황제에게 큰 관심이 없던 내쉬는 그런 태도에 신경 쓰지도 않았다.

“난 걱정 말렴.”

“거울은 보고 계시죠.”

걱정 말라는 말에, 에두른 질책이 돌아왔다. 내쉬치고는 참 다정한 표현이었다. 그걸 캐서린 황후가 모를 리 있나. 내내 피곤한 낯빛이던 캐서린의 얼굴 위로 순간 환한 미소가 맴돌았다.

“난, 정말 괜찮아 내쉬. 네가 있는데 걱정할 게 뭐가 있겠어. 모든 건 잘되고 있어.”

“……잠은 좀 주무세요?”

무언가를 가늠하듯 내쉬의 눈매가 잠깐 가늘어졌다. 모든 게 잘 되고 있다며 웃을 때, 캐서린 황후는 어딘지 조금 이상했다. 분명 웃고 있는데도, 소름 돋게 위협적이었다. 광기에 잠식된 듯 시푸르게 빛나던 눈동자. 아주 잠깐이지만, 내쉬는 캐서린 황후가 미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의 총애에 기대 세상을 호령하던 그녀가 아닌가. 그런 황제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불안에 미쳤다는 것도 과한 짐작은 아니리라.

“내쉬, 나는 잘 먹고 잘 자고 있어. 다만 조금 피곤할 뿐이야.”

광기는 찰나에 사라졌으나, 내쉬는 자신의 눈을 믿었다. 캐서린 황후는 이상해졌다. 하지만, 그의 감상은 딱 거기까지였다. 어려서부터 그에게 캐서린 황후는 모친이라기보다는 ‘황후’에 가까웠다. 다정하지 않았다는 문제가 아니다. 캐서린에게 내쉬는 황좌에 오를 가능성 정도로 보였다는 것이다. 어려서 몰랐을 거라 생각했을까? 아쉽게도 내쉬는 꽤 영리한 편이었다. 그녀가 안달복달하는 것을 알면서도, 손만 뻗으면 이 제국을 쥐락펴락하는 길롯이 제 뒷배가 될 것임을 아는데도 시큰둥했던 건 바로 그래서였다. 장기말 따위로 전락하고 싶지 않아서. 저 비루한 욕심에 발목 잡히고 싶지 않아서.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등에 업고 여태처럼 제국을 호령하고 싶은 거겠지만, 글쎄……? 내쉬는 저를 향해 웃고 있는 캐서린을 향해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당겨 주었다. 마치 거울에 비친 듯 그녀와 똑 닮은 미소가 그에게도 새겨졌다.

“다행이에요. 전, 어머니만 믿고 있는걸요.”

“그럼. 내쉬.”

예상했던 그대로의 열성적인 대답이었다. 그래서 내쉬는 그녀에게 하려던 사병 이야기를 다음으로 미루었다. 걱정에 미친 여자에게 제 이야기는 먹히지 않을 테니까. 뭐, 정 안되면 약점으로 남겨두어도 좋고. 입꼬리에 매달린 그의 미소가 한층 더 농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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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날 이후 클로이와 로지는 잘 때 말고는 쉬지 않고 달렸다. 살인적인 강행군이었으나 클로이는 앓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빨리 가서 빨리 돌아올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돌아가면 이전과 달리 로지와 함께 활동해야겠으나, 한편으로 든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지와 함께였다면 옆구리에 구멍이 나는 일 같은 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여차하면,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여 레이디에 대한 만일에 순간 혐의를 분산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황궁 분위기가 이런 마당에, 든든한 동료가 있는 건 정말 큰 도움이 될 거다. 쏟아지는 날 선 바람을 맞으며 클로이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 수도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불안하고 뒷머리가 당겨, 조금만 방심하면 말머리를 틀어버릴 것 같았다. 단 한 번도 자신이 이렇게나 초조해하는 사람인 줄 몰랐다. 그런데 자꾸 황궁의 삼엄한 경계가 자꾸 떠오른다. 그 살기등등한 곳에 레이얼만 남겨두다니! 이 불안은 그래서다. 하루라도 빨리 괴수를 정리하고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이 매순간 더 강렬해진다. 클로이가 어째서 이러는지 로지도 알아 더는 잔소리를 하진 않았으나, 다만 북부령의 입구에 다다랐을 때 한마디를 덧붙이긴 했다.

“아시죠?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괴수가 동면에 들어가야 토벌도 시작인거.”

“……자장가라도 불러주지 뭐.”

비장한 한마디에 로지가 이마를 탁 소리나게 쳤다.

“아가씬 노래 못하시잖아요.”

“그건 로지도 마찬가지잖아.”

내내 굳어 있던 클로이의 얼굴이 실없는 농담에 비로소 조금 풀렸다.

“그래도 제가 좀 나아요.”

“설마, 그럴 리가.”

“승복할 수 없으시다면, 우리 공평하게 말레사에게 물어봐요.”

“좋아.”

클로이는 검문이 끝나자마자 말을 박찼다. 며칠째 전력으로 달린 말이 살짝 지치는 듯도 싶었으나, 제 고향에 돌아와서일까. 수도와는 결이 다른 칼바람을 들이킨 말이 갑자기 땅을 힘껏 박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밤, 클로이는 아르네 공작령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열흘 거리를 지금 사흘 반 만에 주파했다고요?”

말레사가 그들을 반기는 대신 미친자 보듯 했다.

“진짜 죽고 싶어 미쳤어요! 누가 말을 그렇게 타요!”

아니, 대놓고 소리까지 질렀다. 그도 그럴 게 사흘을 내달린 그들의 꼴은 거지보다 더했고 모질게 쏟아진 바람에 푸르게 질려 다 죽어가는 꼴을 하고 있었으니까.

“일단 먹을 것 좀. 육포만 좀 씹었더니 눈이 핑핑 돌아.”

클로이는 허리에 손을 얹고 잔소리를 쏟아낼 기세인 말레사에게 안겨들었다. 안겨 온 아르네가의 아가씨에게선 어마어마한 냉기가 흘러나왔기에 말레사는 잔소리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목욕물 준비해줘!”

“배고파.”

“두툼한 스테이크도 넉 장 구워!”

“말레사. 보고 싶었어.”

“저도요.”

아휴. 하는 한숨 소리와 함께 말레사가 한 줌도 안될 것 같은 클로이의 몸을 마주 안아주었다. 뜨거운 물에 푹 담가놨다 건져낸 클로이에게 곧 막 구워낸 스테이크가 주어졌다. 로지와 클로이는 말 한마디 없이 스테이크를 썰고, 씹고 삼켰다. 정말 ‘와구와구’라는 소리가 날 법한 엄청난 속도로 해치우고 나서야, 그들은 비로소 한숨을 내쉬며 늘어졌다.

“아, 살 것 같아.”

“왜 이렇게 서두르셨어요?”

배를 두드리는 클로이를 향해, 말레사가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산맥 쪽 상태는?”

“안 그래도 그제 대 이동이 있었어요.”

괴수의 대이동은 동면을 하기 위해서다. 말레사의 이야기를 들은 클로이의 눈이 반짝 빛이 났다.

“말레사, 이래도 내가 서두른 거야?”

“아직 눈도 오지 않았는데 너무 조바심 내지 마세요.”

진짜 속내는 따로 있었으나,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클로이는 북부 걱정에 달려온 꼴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말레사가 속을 법했다는 뜻이었다. 클로이는 맞은 편의 로지가 엄한 것을 씹은 표정으로 보고 있었지만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어차피 전면전도 아닌데.”

말레사는 대번에 누그러져 클로이를 보드랍게 타박했다.

“무슨 소리야. 항상 선봉은 아르네지.”

클로이는 말레사가 건네는 달콤한 코코아를 받으며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주민은 쓸 만하고?”

품에 끼고 기른 아기를 보듯 말캉하게 풀어진 말레사의 얼굴이 이주민이라는 단어에 대번에 흉흉해졌다.

“이주민이라면, 늘어진 것도 있고 쓸만한 것도 있지만, 결국 모두 제 몫은 해낼 거예요. 그렇지 못하면 괴수밥이 되고 말테니까.”

“아무렴.”

“이번 토벌에 선발대로 차출하시죠?”

“누굴?”

“이주민요.”

말레사의 말에 클로이가 들고 있던 코코아 잔을 내려두었다.

“말레사. 말레사, 말레사.”

“…….”

“아르네의 긍지를 똥물에 처박진 마. 우린 길롯이 아니야. 짐승 밥으로 쓰고 버릴 것 같았으면 굳이 살릴 필요가 없었어.”

“하지만…….”

말레사가 뭐라고 말을 덧붙이려던 순간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시종이 클로이를 찾았다.

“아가씨! 수도에서 전서구가 날아왔습니다! 빨간 끈을 매달고 왔어요!”

빨간 끈, 1급 서한이다. 보통 괴수가 민가를 덮치거나 토벌단이 구조 요청을 보내는 위급한 상황에서나 쓰는 표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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