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5. 첫 눈이 내리는 날 (85/121)

085. 첫 눈이 내리는 날2021.06.25.

“대체 황궁에선 또 무슨 짓을 벌인 건데? 잠깐사이 정말 부지런하잖아?”

클로이 역시 화를 냈으나, 레이얼이 먼저였다.

“그건, 나중에. 일단 그 자식이 네게 뭘 했는지부터 말해봐.”

레이얼은 제가 감아쥔 가는 손목을 들어 올려 보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도저히 레이얼 시오도르가 보이는 표정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날 서고, 비틀린 얼굴.

“손목을 잡았어. 그게 다야.”

“왜.”

“나도 몰라.”

“언제.”

“길롯을 정리하고 온 날 밤에.”

“어쩌다가.”

질문을 할 때마다 그의 표정은 생기를 잃고 차게 얼었다. 그 모습이 자비를 잃어버린 신처럼 보인다. 아아…… 무자비하고 냉혹한 절대자. 그것이 마치 본모습인 양 너무도 잘 어울려 위화감이라곤 느껴지지 않는다. 클로이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레이얼이 채근하듯 ‘어쩌다가’라고 다시 질문하는 것을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글쎄……. 왜 찾아온 건진 모르겠는데 마침 돌아온 내 모습을 봤더라고. 레이디가 있다고 소란을 부려 사람들이 알게 되었지.”

분명, 떳떳했는데 이상하게 말을 이을수록 목소리가 죽어 든다.

“의심을 살 수 없으니, 내가 나섰고.”

빤히 바라보는 연푸른 시선이 얼음인 양 시리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철장 너머로 손을 넣어서-.”

“너를 만졌군?”

“아니, 그냥 손목이야.”

“레이디 아르네, 내쉬 시오도르는 그대의 손을 함부로 쥐어도 되는 사이인가?”

“…….”

“그리고 그 내쉬 시오도르가 아무나 손을 대던 녀석인가?”

이어지는 질문에 클로이의 입이 오므라졌다. 그냥 손목이라니. 그럴 리 없지. 그리고 내뱉은 말도 그냥이라고 치부하기엔 하나같이 의미심장하지 않았나.

“내가, 쥐었어요. 라고 했어.”

“뭐?”

“내가, 쥐었어요.”

클로이는 내쉬가 말을 끊던 부분까지 완벽하게 흉내를 내 읊어주었다.

“내가 쥐었다고도 했고 몇 번쯤 그 소리를 했어.”

“…….”

“‘잡히니, 잡히네요.’라고도 했지.”

레이얼의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잡혔다고?”

이젠 누가 봐도 선을 넘었다. 첫시작이 무엇이었든 간에, 이제 그가 내보이는 건 그런 가볍고 귀엽게 아니다. 비틀린 호감과 소유욕 그리고 그보다 음험한 집착이 선명하게 보여 레이얼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쉬는 위험해.”

“걱정 마. 전하. 전에도 말했지만 내쉬 황자는 내 취향이 아니라니까?”

“클로이 아르네. 그대. 진심으로 부탁해. 제발 조심해줘.”

“조심해서 괜찮았어?”

웃자고 한 소리였는데, 레이얼의 시선에 날이 오른다.

“알았어.”

손을 들어 항복 자세를 취했건만, 레이얼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알았다니까? 응?”

클로이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들어 올린 손을 내리며 자연스럽게 그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걱정 마. 갑작스러워서 당했던 거고, 앞으로는 절대 그럴 일 없어.”

손에 힘을 주자 레이얼이 선선히 고개를 숙여 따라온다. 클로이는 제게 다가오는 잘생긴 그의 얼굴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내 취향은 좀 더 이쪽이야.”

“뭔데?”

레이얼이 되묻는 이유야 뻔했다. 안심시켜달라는 에두른 투정이리라. 방심하다 내쉬에게 틈을 내보인 제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클로이는 이 앙큼한 질문에 기꺼이 넘어가 주기로 했다.

“전하. 전하 같은 미인이 내 취향이야.”

“미인이 좋아?”

“응. 잘생기면 좋지. 그런데 전하는 잘생겼다는 말로는 조금 부족한 거 같아. 더 한 표현이 있으면 좋겠어.”

“과찬이군.”

“그럴 리가.”

뻔히 그의 마음을 달래보려 하는 아부라는 것을 레이얼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목덜미에 팔을 감은 채 당연하게 제 얼굴이 너무도 취향이라고 고백하는 클로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웃음이 난다. 클로이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를 레이얼 ‘시오도르’가 아니라 레이얼이라는 남자로 봐준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눈에 최고로 치는 ‘다음 대의 황제’가 될 고귀한 신분도, 제국을 세운 ‘시오도르’라는 혈통도 곁눈으로도 봐주지 않는다. 오직 그녀가 보는 것은 그 자신뿐. 아직 클로이 아르네에게 후한 점수를 받는 것이 이 얼굴뿐이라는 게 조금은 아쉬우면서도, 마음에 들어 해주는 구석이 있으니 기쁘기도 하다. 레이얼은 조금 더 욕심내고 싶어졌다. 그의 얼굴 거죽뿐만 아니라, 온전한 그를 원해주길.

“그러다 나이 먹고 주름이 지면 어쩌지?”

“우리 아빠 어때?”

그때에도 근사할 거라는 대답을 에둘러 해주며 클로이가 생긋 웃었다. 레이얼이 바라던 바로 그 대답이었다.

“입 맞춰도 될까?”

쪽. 차오르는 마음을 그녀도 이 순간 함께하면 좋겠다. 넘치는 이 감정을 네게도 쏟아주고 싶다. 그리고, 날 나로 봐주는 네게 ‘나’라는 남자로 각인 되었으면…….

“더 해줘.”

레이얼은 입술을 스치는 보드라운 감각에 진저리치듯 떨며, 속삭였다. 쪽. 클로이는 입술을 뾰족하게 모아 쪼듯이 그에게 입맞춤을 건넸다. 담백하고도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한번 불이 붙은 남자는 도무지 그 정도로는 차오르는 열기가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찔끔찔끔 건네는 입맞춤에 더 안달이 나고 말았다. 레이얼은 늘어뜨리고 있던 손을 들어오려 단숨에 클로이를 싸 안았다. 길쭉한 손가락이 풍성한 머리칼 속으로 파고 들고, 다른 팔은 가는 허리를 단단히 받쳐 안았다.

“키스해도 돼?”

내가. 생략된 주어와 감추지 않은 욕망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파랑이 이는 것 같은 그의 눈을 바라보던 클로이가 대답 대신 살며시 눈을 감자 기다렸다는 듯 그와 입술이 깊게 물렸다. 빈틈이라고는 없는 굉장히 짙고 강렬한 접촉이었다. 레이얼은 허기를 채우는 가련한 이처럼 몹시 갈급하게 굴었다. 말캉한 살점을 욕심껏 들이켜고, 물고 핥았다. 그리고 찰나에 실금처럼 벌어진 틈을 놓치지 않았다. 레이얼은 기껍게 클로이를 벌리고 들어섰다. 젖은 속살이 질척한 소리를 내며 휘감기고, 따끈한 체액이 뒤엉켰다.

“흡!”

힘줘 뾰족하게 세운 것이 볼 안쪽 어디를 쓰는 느낌에 갑자기 사지에 힘이 쭉 풀리며 클로이가 신음을 터트렸다. 등골이 저릿해지며 갑자기 오싹했다. 움찔 떠는 그녀가 밀어 내리라고 생각한 듯, 레이얼은 한층 더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느슨하게 벌어진 상체가 빈틈없이 맞물리고, 마치 먹이를 죄는 뱀처럼 그의 팔이 클로이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간간이 떼어주던 입술도 더는 떨어지지 않았다. 뒤엉킨 건 날숨만이 아니었다. 클로이는 온통 머릿속이 흐트러져, 제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레이얼이 안아들 듯한 것도 모를 만큼 클로이는 잔뜩 흐무러져 버렸다. 따끈한 팬 위에 오른 버터가 이 같을까. 구분 없이 섞인 숨을 나눠 마시며 근근이 호흡을 이어가던 클로이의 귀에 쪽 하는 소리가 울렸다. 깔끔한 소리와 달리, 그는 잠깐 사이 아랫입술을 마음껏 머금었다. 숨이 달려 색색거리는 클로이를 레이얼은 빤히 바라보았다. 아직 가시지 않은 흥분에 그의 눈꼬리는 붉게 달아올라 색정적으로 보였다.

“욕심꾸러기.”

무자비하리만치 달려들던 그를 타박해보지만, 레이얼은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더 해도 돼?”

“안 돼.”

“조금만.”

“이번엔 멈추지 못할 것 같은데?”

탁자 앞에서 입을 맞추었던 것 같은데, 그녀는 어느새 벽과 레이얼의 틈에 껴 있었다. 마치 잡아먹을 것처럼 달려드는 그가 버거워 주춤주춤 물러서다 보니 이 꼴이 된 것이다. 한몸인 듯 아직 꽉 붙어 있는 몸을 통해 그의 열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전신이 후끈하다.

“안 멈추고 싶어.”

“멈춰.”

“허락해줘.”

“안 돼.”

“왜?”

지금 그는 마치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 같다. 말끝에 심통 부리듯 반 발자국 더 다가선다. 더는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를 좁혔기에 두 다리 사이로 자연스럽게 그가 파고드는 모양새였다. 가뜩이나 꽉 물린 몸이, 그에게 짓눌리는 기분이 든다. 이제 심박이 뛰는 것도 고스란히 전해지리라. 쿵쿵쿵. 요란하게 뛰어대는 가슴이 그에게 평평하게 눌린 그대로 클로이가 입을 열었다.

“안달내지 마.”

“왜?”

“내 곁에 설 시오도르는 당신뿐이니까, 레이얼 시오도르.”

클로이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손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끌어 내렸다. 불안과 흥분에 눈이 돌아버린 남자가 가엽고 귀여웠다. 고작 입맞춤으로 궁지에 몰린 남자의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면야. 그리고 그의 입맞춤은 벅차긴 해도 그녀도 퍽 좋았으니까.

“입 맞춰줘. 살살.”

온통 빨려 붉게 달아오른 클로이의 입술은 그냥 봐도 꽤 부어 있었다. 다음날이면 필시 아플 테지만, 알게 뭐람. 클로이는 혀를 내밀어 홧홧한 입술을 식혔다.

“하아……. 너무하네.”

그 모습을 내리뜬 눈으로 바라보던 남자에게서 이를 가는 것 같은 소리가 울리더니, 다시 모든 소리가 뚝 끊어졌다. 이따금 울리는 것은 가는 신음과 젖은 살이 쓸리는 소리뿐.  

16566379759877.jpg

“바람이 바뀌었습니다.”

먼 하늘을 바라보던 에반이 천천히 내민 손을 거두었다.

“안 그래도 오늘 출발하려던 참이에요.”

그 옆에 있던 로지 역시 손을 거두었다. 매년 내리는 눈 구름이 드디어 덩치를 한껏 부풀린 모양이었다. 눈이 내리기 직전 특유의 공기가 수도를 짙게 감쌌다. 곧, 이 구름은 수도를 지나 북부로 향하게 되리라. 그리고 북부에 길고 긴 눈보라를 일으키며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고립시킬 것이다.

“준비는?”

“북부쪽 준비는 끝났고, 저랑 아가씨만 출발하면 됩니다. 그림자 기사단은 남습니까?”

“반만.”

대답하는 에반의 표정은 어둑했다. 공작과 소공작을 지키기 위해, 그가 남아야 했다. 다 아는 사실이고,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데 막상 아가씨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여간 마음이 무거운 게 아니었다.

“어차피 이전과 다른 방식이라 기사가 많이는 필요하지 않으니 굳이…….”

“공작님께선 전수를 보내주라 하셨답니다.”

“그럼 반만.”

공녀님도 중요하지만, ‘아르네’만을 놓고 본다면 회복기에 든 공작만큼 중요한 사람도 없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림자 기사단을 ‘반’이나 받겠다고 양보한 것은 북부에 보낸 이주민 때문이었다. 차라리 조금 늦게 보낼 걸 그랬나. 살짝 후회된다. 아직 아르네에 대한 감정이 가시지 않았을 텐데, 그것들을 본진에 두고 움직이려니 뒷머리가 당긴다. 로지의 ‘반만’은 그래서였다. 토벌대가 떠난 후 이주민으로부터 본진인 공작성을 완벽히 보호할 무력이 필요해서. 그렇게 두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하늘에서 눈송이가 떨어졌다. 작고, 차갑고 희다. 이 하찮은 것은 손에 닿기 무섭게 녹는다. 하지만 이것이 모여 쏟아지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위협적이다. 로지는 얼굴이 굳어 빠르게 뛰었다. 출발, 출발이다.

“아가씨!”

클로이를 부르며 달리는 로지는 더 이상 시녀가 입는 드레스 차림이 아니었다. 탄탄하게 뻗은 두 다리를 감싼 것은 북부 사냥꾼이 입는 사냥복이었고, 두툼한 가죽 허리띠엔 단검이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로브만 두르면 이대로 말을 타고 달릴 수 있다. 로지가 클로이의 침실문을 열었을 때, 그곳엔 평소와 다르게 무장이 끝난 클로이가 서 있었다.

“눈이 와.”

클로이의 뒤엔 활이 놓여 있었다. 단 한 번도 꺼낸 적 없던, 바로 북부의 활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