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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4. 그 자식이 네게 손댔나? (84/121)

084. 그 자식이 네게 손댔나?2021.06.22.

“아가.”

클로이는 공작이 내미는 손에 답삭 뺨을 밀어 넣었다. 뺨 끝에 닿는 공작의 손은 거칠거칠했다. 공작은 응석 부리듯 그의 손바닥에 뺨이 뭉개지도록 비비는 클로이를 보며 살짝 웃었다. 어려서도 이렇게 다 자라서도, 클로이는 그의 아기이며 귀염둥이였다. 제국의 검이라는 별호가 무색하게 침대 신세를 지고 있으나 이 와중에도 그는 클로이가 말끔하다는 것이 가장 기뻤다.

“아가, 북부로 갈 거라고?”

“네. 아빠.”

“토벌은…….”

“전, 아르네예요.”

클로이는 공작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는 듯 생글거리는 목소리로 그의 말을 잘랐다.

“알지, 알아. 우리 아기도 어엿한 아르네인 것을 내가 모를 리 있나.”

클로이의 여린 살에 혹시 쓸린 자국이라도 날까 봐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고 있던 공작이 문득 손끝에 힘을 주었다. 공작이 힘을 주는 대로 고개가 들리고, 서로의 시선이 맞물린다. 똑 닮은 새파란 두 시선이 마주하는 순간. 공작은 여태 짓고 있던 미소를 싹 지운 채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클로이 아르네, 토벌은 만만히 볼 것이 아니다.”

“네.”

지금 그는 클로이 아르네의 아버지인 알렉시스 아르네가 아니라, 북부를 책임지는 아르네 공작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동면에 들었다가 둥지에서 기습을 당한 괴수는 굉장히 흥분해 있어서 노련한 기사들도 예측하기가 어렵지.”

클로이는 공작의 말에 바짝 귀를 기울였다.

“그때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건, 바로 살고자 하는 본능이다.”

“……!”

본능?

“클로이 아르네. 우리는 검을 쓰는 사냥꾼이야. 체면이니 명예니 하는 것은 다 두고 가렴.”

공작은 토벌이 마냥 점잖은 것이 아님을 애써 다정하게 속삭여주었다.

“땅을 구르고, 팔을 내주고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란다. 수세에 몰렸다면 도망쳐야 해.”

그는 아르네의 위명에 집착해서 딸이 만용을 부리지 않기를. 그리고 ‘퇴각’이라는 단어에 눌려 살 수 있는 기회를 자존심 따위에 버리지 않기를 가르치고 있었다.

“살아남아야 지킬 수도 있단다. 아가. 네 목숨과 너를 보좌할 기사들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지 말렴. 희생으로 누군가를 지키겠다는 생각도 버리렴. 그건 남은 자들에게 짐을 지우는 거야.”

“예.”

“무조건, 목표는 살아 돌아오는 거란다.”

“그럼요. 걱정 마세요.”

굳은 얼굴로 공작의 말을 경청하던 클로이는 제 웃음이 너무 헤퍼 보이지 않길 빌며 웃어주었다.

“토벌전 후 여는 연회가 그렇게 굉장하다면서요?”

“하하하. 클로이. 이 귀염둥이야.”

“올해는 더더욱 성대하고, 모두의 마음에 쏙 들게 열 작정이에요.”

“좋아. 좋지.”

“그리고 수도로 돌아오면 아버지가 한 번 더 열어주세요.”

“그러지.”

손아귀에 뺨을 묻으며 클로이와의 시선이 풀리자 공작의 얼굴엔 묵직한 기운이 감돌았다. 사실, 그는 아직도 클로이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토벌은 생각보다 더 끔찍하다. 무얼 생각하건 그보다 더. 괴수는 기본적으로 맹수과의 거대 짐승들이 변이한 것이다. 곰의 두세 배가 족히 되는 것을 시작으로 정말 집채만 한 것들이 수두룩하다. 그런 것들이 한두 마리도 아니고 잔뜩 흥분해서 무리를 이루어 달려든다. 날카로운 발톱과 그보다 흉포하게 생긴 이. 잡히는 순간 걸레 조각처럼 찢기고 만다. 피와 살이 튄다는 건 바로 그럴 때 써야 했다. 그 어떤 전쟁도 이보다 잔혹하고 무자비하지 않다. 지금 그런 곳을 클로이, 그의 귀염둥이가 가는 것이다. ‘아르네’의 이름을 걸고. 정말 보내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림자 기사단이며 토벌단 정예가 아르네 가의 공녀를 위험하게 두지 않겠으나 이 순간 그는 ‘아르네’의 사명보다는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자꾸만 커진다. 딸의 기개를 그리고 아르네의 긍지를 꺾고 싶지 않아 보내기는 하나 자꾸 표정이 무너지고 만다.

“아가.”

공작은 손안에 든 온기를 다정히 불렀다.

“아가.”

“응.”

“조심히 다녀오렴.”

“응. 그땐 오빠도 같이 반겨주세요.”

“그럼, 그럼.”

“오빠, 꼭 깨워서.”

“그럼.”

  클로이가 아르네 공작과 다정한 한때를 보내는 사이, 황궁은 한없이 살벌했다. 황제가 앓아누운 것이 그냥 병이 아닌, 누군가의 음모일 수 있다는 소식이 입에서 입으로 은근히 그러나 무섭게 퍼져나갔다. 생각지 못한 소식에 사람들은 놀랄 겨를도 없이 몸을 낮춰야 했다. 제국의 태양을 해하려 한 배후를 밝히겠다며 황후가 직접 나서, 범인 색출 작업을 벌였던 것이다. 가장 처음 지목당한 것은 다름 아닌 황궁의였다. 황제를 가장 가까이 모시고, ‘병’으로 장난칠 수 있는 가능성이 제일 큰 사람. 내쉬 황자가 제시한 불측한 가능성에 모든 황궁의는 황후궁에 끌려갔다. 의료원 수습 의사까지. 단 한 명도 예외는 없었다. 잘못 대답했다간 제 목숨뿐만이 아니라, 가족들까지 처형당할 것이라 황궁의들은 납작 엎드리다 못해 바닥을 핥으라 해도 핥을 기세였다. 하나, 황후궁의 심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는 대로 전부 털어놓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상당수가 감옥에 갇히고, 일부는 고문을 당했다는 소리도 있었다. 분위기는 삽시간에 흉흉해졌다. 사람들은 이제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저런…….”

레이얼 역시 키릭슨을 통해 그 소식을 들은 참이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도통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짐작 가는 일이 있으세요?”

“글쎄……. 언제는 명분이 있어서 내 사람들이 그런 꼴을 당하였고?”

레이얼 진영의 귀족들의 파직과 좌천 및 피앙세들의 일까지 모든 사건은 모두 일방적이었다. 레이얼의 말에 키릭슨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하긴, 횡액을 맞이한 이중 잘못한 이가 있기나 했던가. 갑자기 어느 날, 전조도 없이 끌려 나갔다. 으득. 이를 악문 키릭슨이 이전보다 한층 침잠한 표정을 해선 입을 열었다.

“분명, 황태자 자리를 노리고 벌이는 짓이겠지요?”

“황태자 위를 바꾸는 건 여태처럼 억지만으로는 안 될 텐데…….”

“그런데도 이런 무리수를 둔 이유는 뭘까요?”

“글쎄.”

레이얼은 이번 일의 배후로 자신이 지목될 것을 너무 당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대응해야 합니다. 죄다 억지겠지만, 손 놓고 있다가 크게 역풍을 맞을 수 있습니다. 이번엔 심상치 않아요.”

“어떻게? 어차피 증거는 조작하기 마련일 테고, 없던 증인도 나올 텐데.”

“그건 당연하죠. 하지만 전하는 ‘황위’에 조바심을 낼 이유가 없잖습니까.”

“…….”

“그거야말로 가장 확실한 이유 아니겠습니까. 전하의 처지는 늘 옹색했으나 단 한 순간에도 전하의 자리는 흔들리지 않아져요. 그런데……를 암살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톡톡. 레이얼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누가 봐도 허술하고, 억지임이 분명한 일이다. 그런데도 이런 일을 벌이는 건……. 레이얼의 시선이 느릿하게 굴러 내쉬의 궁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득한 그의 시선은 마치 그의 집무실에서 보이지 않는 내쉬 황자를 보고 있는 듯도 했다.

“곧, 일이 벌어진다.”

서늘한 선언에 키릭슨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곧이야. 곧.”

톡톡. 톡.

“이베트 후작에게 새를 날려 귀족가의 포섭을 서두르라고 해. 그리고 증병도 해두라고 해둬. 가신들의 사병도 죄다. 한 명이라도 더.”

이번 일은 이전처럼 ‘암투’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무려 황제까지 끌어들여 벌인 일이 아닌가. 끝을 보려고 할 것이다. 레이얼은 바람을 일으키며 뛰어나간 키릭슨을 보다 문득 시선을 돌렸다. 창 너머, 희뿌연 풍경 너머 어딘가를 더듬던 그는 찰나에 작게 웃었다. 푸른 산을 두른 그곳은 아르네 가의 타운 하우스가 있는 곳이었다. 그의 레이디가 몸을 물리고, 북부로 소명을 다하기 위해 떠나기 위해 한참 분주할 그곳. 곧 일이 닥칠 것을 아는데도 그는 전혀 겁나지 않았다. 오히려, 안심되었다. 클로이 아르네, 그의 레이디가 이 순간 누가 봐도 너무도 당연하게 이곳을 떠날 수 있게 되어서. 그녀는 안전하리라는 확신에. 레이얼은 웃었다.

“초대는 글렀으니 오늘 밤 뵈러 갈까.”

톡톡. 탁자를 두드리는 손가락은 여전했으나, 그는 웃었다. * * *

“그러고 보니, 언제 북부로 출발하는지 말해준다는 걸 계속 깜빡했네.”

서류를 보던 클로이가 턱을 괴고 작게 중얼거렸다. 요즘 길롯 일로 바쁘기도 했고, 뭔가 단둘이 되면 분위기가 따끈해져서 정신을 차릴 때쯤이면 혼자가 되고 나서랄까.

“곤란한데.”

하루가 다르게 공기가 무거워지는 것이 곧 눈이 올 모양이었다. 눈이 내리는 날, 북부로 출발한다고 다음엔 꼭 말해주어야지 생각하는 순간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엇?”

순간, 클로이의 뺨으로 예쁜 홍조가 확 끼쳤다.

“전하?”

“……문을 너무 쉽게 여는 거 아닌가?”

테라스에 있던 건 레이얼이었다. 한 번 더 문을 두드릴 생각이었던 듯 손가락을 접어든 상태로 서 있는 남자는 그 와중에도 참 신사적이고 근사하다. 슬쩍 뒷짐 진 자세며, 적당히 굽힌 허리와 단정한 차림새까지. 품위는 정말 타고 나는 모양이었다.

“이 밤 나를 찾아올 사람이 전하 말고 또 누가 있겠어?”

“내쉬?”

“정말, 농담 취향이 고약하다니까. 진짜 싫어.”

클로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실례하지.”

그녀가 바르르 떠는 것이, 갑자기 쏟아지는 바깥의 찬 공기 때문이라 생각한 레이얼이 클로이를 슬쩍 떠밀며 같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 미친놈이 전하한테도 뭐라고 했어?”

“응? 아직 직접 찾아온 건 아니다.”

“……그럼 담에 만났을 때 실수인 척 꿀밤 한 대 때려줄 거지?”

물을 데우는 클로이는 레이얼에게 차를 내줄 생각에 조금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레이얼은 아니었다. 그는 방금 말이 묘하게 엇나간 것을 눈치챘다. 황궁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는 건가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 소식을 문을 닫아건 아르네에서 이렇게 빨리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르네는 그 누구와도 특별한 친분을 나누지 않는다. 세작도 두지 않는다. 그렇기에, 지금 클로이가 말하는 ‘미친놈’이라는 건 다른 일 때문이리라. 클로이를 보고 반사적으로 지어진 미소가 순식간에 휘발되었다.

“왜, 직접 안 때리고?”

“좀 놀라서 말이야.”

이것 봐. 입꼬리를 사납게 비튼 레이얼이 찻잎을 더는 클로이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아?”

“아, 뭐……. 그냥 손목이 잡힌 정도인걸. 그때야 좀 놀랐지 지금 생각하니 괘씸한…… 전하?”

갑자기 몸이 확 돌려져 그만 집어 든 찻잎이 허공으로 날았다. 하지만, 클로이는 찻잎을 쏟았다고 레이얼을 타박할 수 없었다.

“그 자식이 네게 손댔나?”

그녀를 돌려세운 레이얼의 눈에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제 영역을 침범당한 짐승이 이를 내보이듯, 그는 원색적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클로이는 작게 신음했다.

“아…….”

다른 이야기였구나.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클로이의 얼굴에도 노기가 서렸다.

“부지런하기도 하지. 그 미친놈이 전하에겐 뭘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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