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3. 드러나는 진실 (83/121)

083. 드러나는 진실2021.06.18.

저 개자식! 레이얼은 이를 아득 물었다. 아르네 공작저에 다녀왔구나. 길롯이 털리고도 묘하게 기분 좋아 보이던 것은 그래서였던가.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건가? 커튼 뒤에서 나온 레이얼은 곧장 편지지를 챙겼다. 그리고 화려한 문체로 더없이 사랑스럽고 정중한 ‘초대장’을 썼다. 내쉬가 물밑으로 노력한다면 ‘피앙세’인 그는 보란 듯이 힘쓸 예정이었다. 밤 나들이는 내쉬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벌건 대낮에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건 그가 유일하다. 봉문하였으니, 굳이 찾아가지는 않을 셈이었다. 그에게 문을 열어주었다는 소문이 나면 그것을 빌미로 내쉬도 밀고 들어갈 테니까. 그의 사랑스러운 로이가 너무 귀찮아 지리리라. 그러니 그는 비공식적으로 ‘레이디 아르네’를 초청할 작정이었다. 봉문하였다고는 하나, 그것이 감금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사유는…….”

많았다. 아르네 공작 대리인 그녀에게 그들의 결혼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편지지를 채우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넘치는 마음에 오히려 날아갈 것 같이 움직이는 펜을 멈추는 게 힘들었을 뿐. 순식간에 초대장을 마무리한 그가 반지를 돌려 실링에 인장을 꾹 눌러 찍는 것으로 내쉬의 도발에 대한 준비를 모두 마쳤다.  

16566379614133.jpg

“…….”

클로이는 제 앞에서 말없이 찻잔만 기울이는 에반을 보며, 눈을 굴렸다. 표정 없이 차를 마시는 에반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자꾸 흘끔거리게 된다.

“차, 더?”

그 표정이 어찌나 서늘한지 씩씩거리던 로지도 눈치를 살필 정도였다.

“됐습니다.”

하얀 장갑을 낀 손이, 다가오는 찻주전자를 우아하게 저지하는 것과 동시에 에반이 클로이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가씨.”

“응?”

“전 아르네가 아닙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아르네를 저와 분리해서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에반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도 같았다.

“미안해. 에반.”

“주제넘게 아가씨의 사과를 듣자는 게 아니에요.”

“……미안해 에반.”

“아가씨.”

순식간에 무겁게 깔리는 목소리에, 클로이가 움찔하기도 전 에반이 무릎을 꿇었다. 조금 전까지 얼굴을 굳히고 그녀를 혼내기라도 할 것 같이 굴던 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굴욕적인 자세에 클로이가 절로 움찔하고 말았다.

“아가씨.”

“에반.”

“분명, 생각하신 게 있으실 겁니다. 아가씨께서 허투루 움직이실 분이 아니란 건 압니다.”

“에반, 내가 미안하다니까.”

“아르네의 책임 또한 저보다는 ‘아르네’이신 아가씨께서 더욱 잘, 보다 무겁게 통감하실 거라는 것도 압니다.”

“…….”

말 끝에 고개를 들어 클로이를 바라보는 에반은 조금 전과 달리 희게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들을 속이고 수도를 뒤흔드는 일을 한 그녀를 탓하는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말간 표정. 그는 후련한 듯도 했고, 어딘지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비밀로 하셨겠지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로지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

“감히 공작님과 소공작님처럼 힘이 되어드리진 못하겠지만 아가씨.”

로지의 표정 역시 평소 때처럼 풀려있었다.

“아가씨, 그래도 들어드릴 수는……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 싶으니까요.”

무섭게 굳었던 얼굴은 사실 속상함을 감추기 위해서였던가. 다정한 얼굴로 속삭이는 로지의 모습에 클로이는 침음을 괴롭게 삼켰다.

“에반, 로지.”

에반은 대답 대신 무릎 걸음으로 다가왔다.

“큰 힘은 되지 못해도, 안전하게 돌아오실 수 있도록. 오셔서 쉬실 수 있도록 준비할 수 있게는 도와주세요. 아가씨.”

“…….”

“네?”

에반의 부탁과 로지의 재촉이라니. 버텨낼 수 있을 리가 없다. 클로이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터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그런데 오늘로 레이디의 활약은 끝났어.”

“네.”

“그러시군요.”

안다는 대답과 달리 그들의 표정에선 안심하는 기색이 읽히지 않았다.

“정말 끝났다고, 레이디는 길롯의 일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고.”

“……은퇴가 가능한 일입니까?”

“그러게요? 수도는 넓고 길롯 일파는 많은데요.”

“그래도 이젠 은퇴야.”

“왜요? 아! 혹시, 부상 때문에?”

제가 한 말에 제가 속이 상한 듯 말 끝에 로지의 얼굴이 아까처럼 무섭게 구겨졌다. 그 모습에 클로이는 작게 웃었다.

“다 나은 지가 언젠데. 부상 때문이 아니야.”

“흐음……. 그러고 보니 레이디가 ‘황궁’기사에게 베였다는 말이 있었죠.”

에반은 ‘부상’을 이제야 떠올린 듯 미간을 한껏 구겼다. 의지가 되지 못했던 것과 아픈데도 숨긴 건 결이 다른 문제였다. 이번에 표정을 구긴 그에게선 못마땅함이 여실했다. 이크. 클로이는 애써 그 표정을 모르는 체하며 말을 돌렸다.

“토벌에 가야 하잖아. 그리고 레이디가 아니어도 전하를 지지할 또 다른 세력도 곧 나올 거야.”

“……아아?”

침통하다가 속상해하다가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언짢아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에반과 로지는 이제야 레이디의 ‘배후세력’에 대해 눈치챈 모양이었다. 들켰다는 생각에 너무 생각 없이 떠들었던 거다. 뒤늦게 클로이는 입을 꾹 다물었으나 그녀를 올려다보는 두 가신의 얼굴에 새겨진 분노가 무시무시하다.

“레이얼 전하께서?”

“세상에나, 비열하기도 하지 원.”

무릎을 꿇은 건 두 사람인데, 이상하게 클로이의 처지가 궁색하다. 클로이는 어깨를 한껏 옹송그린 채 중얼거렸다.

“쓸데없이 영리하네.”

“영리한 게 아니죠. 아가씨께서 너무 많은 걸 감춘 게 아니겠어요? 세상에……. 세상에. 전 그것도 모르고. 세상에.”

“예사롭지 않은 녀석이, 모시는 주인일 줄은 저도 몰랐지 뭡니까.”

이제 와 생각하니 새삼 기가 찬다는 듯 에반이 후, 하고 숨을 뿜어 흘러내린 앞머리를 치웠다. 기실 이들은 무릎 꿇은 것 외엔 더할 나위 없이 불경한 태도를 내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클로이는 그것을 ‘주인’ 된 모습으로 꾸짖지도, 그들의 귀염둥이로서 웃어넘기지도 못한 채 뻣뻣하게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말처럼 너무 많이 감췄었고, 생각지 못하게 제 입으로 다 불어버린 터라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던 탓이었다.

“하…….”

“또 뭐가 있으세요? 그냥 다 알려주세요. 그래야 저희도 뭐라도 준비하지 않겠어요?”

에반보다 한걸음 정도 뒤에 있던 로지가 무릎 걸음으로 잽싸게 다가와 클로이의 손을 움켜쥐었다. 애원처럼 보이겠지만 이건 완연한 협박이다. 게다가 손을 야무지게 잡혔으니 도망도 글렀다. 클로이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외쳤다.

“없어. 없어. 이게 전부야. 가서 토벌 준비하자.”

하지만 제대로 열이 오른 두 가신들은 어린 주인의 항복에 퇴로를 열어주기는커녕 동이 틀 때까지 아주 살뜰하게 죄다 털었다. 처음 ‘도둑’ 데뷔부터 길롯에 이르기까지 전부. 그리고 밝아오는 햇살 아래 그 누구보다 산뜻한 표정이 되어 자리를 떴다.

“그러고 보면, 그 광산이 토벌지에서 그리 멀지 않네요.”

에반이 말하는 ‘광산’은 다름 아닌 레이얼이 준 그곳을 말하리라.

“핑크 다이아몬드라니, 정말 낭만적이시네요.”

제 작은 주인을 감히 도둑으로 만들어 수도를 탈탈 털어댔다는 대목에 에반은 그 누구보다 살벌한 기색을 뿌렸다. 그런데, 클로이가 그에게서 광산을 받아왔다는 것을 들은 후 그는 내내 웃는 얼굴이었다.

“로지 양, 이번 토벌 연회는 광산 중앙부에서 여는 건 어떨까요?”

“좋은 생각이네요. 에반 님. 남다른 의미가 될 거예요.”

“말레사가 좋아하겠군요.”

“어머나! 말레사 님을 깜빡했네요. 안 그래도 방책 수리비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그런데, 로지 양 생각해보니 저를 속인 건 아가씨뿐만이 아니었네요.”

“예? 아, 그…….”

“잠깐 봅시다.”

에반이 로지를 끌고 나가는 소리와, 끌려나가는 로지가 살려달라며 클로이를 부르는 소리가 혼재한 가운데 클로이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죽다 살았네.”

침대 위로 대자로 뻗으며 중얼거리는 소리는 완벽한 진심이었다. 하지만 지친 표정과 달리 클로이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볍고 행복했다. 모두를 속여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아쉬움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이들을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모든 것을 털고 용서받고 이해와 지지를 받지 않았나. 날아갈 것 같았다. 가물거리던 눈이 감기며, 순식간에 잠이 든 건 어쩌면 당연했다. 그날 클로이는 그 어느 때보다 달게 그리고 깊게 잘 잤다.

“폐하께서 왜 이러시는 거지!!”

황후의 새된 질책에 황궁의들의 고개가 바닥에 처박힌 채 올라오지 못했다.

“겨울 감기라고 하지 않았나! 내 이런 증상은 처음이야!”

황후의 손에서 펄럭이는 것은 각혈로 흥건하게 젖은 붉은 손수건이었다. 겨울 감기에 각혈이라니 그럴 리가 있나. 이건 완벽한 오진이었다. 감히, 황제의 병증을 잡아내지 못하고 ‘겨울 감기’같은 소리를 했으니 이 자리에서 목이 떨어져도 할 말이 없었다. 제 끝을 직감한 궁정의들의 얼굴이 까맣게 죽어버렸다.

“이럴 리가 없다고,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대들은 뭐라고 했나! 입이 있으면 말을 해보게!”

황궁의들은 서슬이 퍼런 황후의 노성에 그저 벌벌 딸뿐이었다.

“그대들의 아집 탓에 폐하의 상태는 더욱 위중해졌어!”

“인재가 이다지도 없단 말입니까.”

공기를 찢어발기는 날카로운 목소리 뒤로, 나긋하고 다정한 미성이 이어졌다.

“내쉬? 내 황자님!”

조금 전까지 칼날 같던 황후의 목소리가 단번에 봄바람처럼 온후해졌다.

“화내지 마세요. 어머니.”

“아아, 내쉬. 이 어미가 못난 꼴을 보였어요.”

저벅거리는 묵직한 발걸음에 이어 빠르고 가벼운 발소리가 이어진다. 아마 황자를 마중하려는 황후의 걸음이리라. 머리를 처박은 황궁의들은 다가오는 내쉬 황자의 발걸음에 절로 마른침을 삼켰다. 내쉬 황자의 성격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오히려 이 궁에서 제일 사납고 자비 없기로 따지면 내쉬 황자 쪽이 아닐까? 황후야, 화가 풀리면 너그러운 선처를 기대해 볼만 하다지만 앞뒤 사정없이 독하게 사람을 대하는 내쉬 황자가 나선다면 오늘 꼼짝없이 죽고 말리라. 이대로 죽겠거니 싶어 모두 한마음으로 눈을 찔끔, 감던 그때였다.

“어머니. 울지 마세요.”

황후가 울었다니! 곱게 죽지도 못하겠구나! 황궁의들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네? 보통 일이 아니라니요?”

“황궁의들이 바보가 아닌데, 겨울 감기와 중병을 구분하지 못했으려고요?”

“그, 그럼요?”

파르르르 떨리는 황후의 목소리에 황궁의들은 오금이 달달 떨렸다.

“겨울 감기와 비슷한 증세가 보이도록 누가 수를 쓴 거지요.”

“예?”

놀란 황후의 목소리에 황궁의들도 고개를 번쩍 들고 말았다.

“수를 썼다고요? 그 말은…….”

“단순한 병이 아니에요.”

똑떨어지는 단언에 황후궁은 무서운 적막이 깔리고 말았다.

“누, 누가 황제폐하를 해하려고 했다고요?”

황후의 비명같은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공포로 첨예하게 얽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