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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 그대를 가지고 말 거야 (82/121)

082. 그대를 가지고 말 거야2021.06.15.

바로 코앞에서 살랑이는 보드라운 금발. 보고 있자니 치미는 갈증이 더더욱 거세진다. 목구멍이 바싹 마르고, 시선이 갈고리라도 된 듯 공녀의 얼굴에 걸린 채 꿈쩍도 하지 않는다. 바로 그때. 불어오는 바람에 공녀가 눈을 깜빡이며, 푸른 시선이 일순 차단되었다. 그 모습이 마치 달아나는 것 같아 내쉬는 불쑥 손을 뻗어 철창 너머의 공녀를 움켜쥐고 말았다.

“아!”

잡힌 레이디 아르네보다 놀란 표정을 지은 게 내쉬라면 믿어질까. 손아귀로 채우지도 못하는 가는 손목. 실재하는 느낌에야 비로소 내쉬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눈치였다. 클로이는 당혹한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내쉬를 보며, 가만히 숨을 골랐다. 내쉬가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아르네 기사들의 손은 모두 폼멜 위에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주인을 향한 완벽하고도 충성적인 경계 반응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황족이었다. 클로이는 내쉬에게 잡히지 않는 다른 손을 허리 뒤로 돌려, 물러나라는 신호를 주었다. 손가락을 까딱이는 것으로 기사들은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고 멀어졌다. 하지만 형형한 시선은 전부 내쉬에게 붙들린 제 주인의 가는 손목에 매인 그대로였다.

“전하.”

놀란 표정에 고의는 아니었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알면서도 끝까지 손목을 쥐고 있는 건 다른 문제다.

“전하?”

클로이는 붙들린 손목을 채근하듯 가볍게 흔들며 그를 불렀다. 내쉬의 시선은 제가 쥔, 클로이의 손목에 닿아 있었다.

“레이디 아르네.”

그녀를 부르는 내쉬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 눌려 있었다. 잔뜩 혼란한 듯 이상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클로이는 대답 대신 손목을 가볍게 비틀었다. 그러나 손목은 빠져나오지 않았다. 내쉬가 비트는 클로이의 손목을 더욱 촘촘히 옭아맸던 것이다!

“제가, 쥐고 있네요.”

“…….”

눈을 내리깔아 제대로 보이진 않으나, 기다란 속눈썹에 가려진 그의 눈빛에 기묘한 열감이 물려있는 것 같다. 그 모습을 봐서였을까. 한 박자 늦게 그에게 붙들린 손목을 타고 내 것이 아닌 온기가 낯설게 스민다.

“제가, 잡았어요.”

미쳤어요? 클로이는 삐죽 튀어 나가려는 말을 꼴딱 삼키고, 천천히 고개를 드는 그에게 시선을 맞댔다. 하지만, 그의 무례를 지적하려던 생각은 그의 녹안과 마주한 순간 단번에 기화하고 말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화사하고, 어여쁘게. 정말로 기쁘다는 듯이.

“제가 쥐었어요.”

“…….”

“그대를.”

쿵. 움켜쥔 그녀의 손목을 들어 보이는 남자의 모습에, 클로이는 가슴이 철렁했다.

“잡으니까, 잡히네요……. 몰랐어요.”

내쉬가 하는 말이 이해되지 않는 건 똑같았는데, 그가 방금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건 알겠다. 그리고 그것이 절대 클로이에게 유리할 리 없는 것이라는 것도.

“아…….”

잇새로 마치 궁지에 몰린 것 같은 나직한 탄식이 터진다. 허공에 드러난 그녀의 손끝이 바람에 차게 얼어 있었다.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클로이는 방문을 닫고 기대서서 숨을 골랐다. 할딱이는 숨이 놀라서인지, 아니면 달려와서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미, 미친놈.”

부르르 떠는 클로이의 뺨엔 솜털이 죄 바짝 일어서 있었다.

‘레이디 아르네 듣고 계세요?’

머릿속에서 조금 전 밀쳐내었던 남자의 목소리가 울린다.

‘전 정말이지 황태자가 되고 싶어졌어요.’

‘전에도 느꼈지만, 전하의 정치포부는 이곳 아르네가 아닌…….’

‘아니! 아니야.’

아니라고 말하며 산뜻하게 미소 지은 그는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줘 클로이를 바짝 끌어당겼다. 철장을 사이에 두고 바짝 달라붙은 채, 내쉬가 속삭였다.

‘정말 모르세요? 아니면 모르는 척하고 싶으세요? 내가, 지금 말하잖아. 그대가 탐난다고.’

‘……!’

설마 대놓고 말할 줄 몰랐기에 당황했던 그녀를 보며 내쉬는 기어이 선언하듯 엄숙히 말을 이었다.

‘그대를 가지고 말 거야. 황태자 자리도 그래서라는 것만을 기억해요.’

내쉬는 개자식이었다. 자신의 야욕을, 제가 레이얼 황태자를 밀어내는 하극상을 죄다 그녀의 탓인 듯 책임을 떠넘기고 있었다. 그녀에게 마음을 품었다는 것 자체가 용인될 수 없는 배덕한 짓이라는 것을 왜 모르나. 그것이 어째서 그녀의 탓이 되어야 하나. 그러나 클로이는 야무지게 따지는 대신 가까스로 손을 비틀어 멀어지는 것이 고작이었다.

‘기억해요. 레이디 아르네. 가볍게 넘길 수 있었던 것을 이토록 크게 키운 건 레이얼과 그대였다는 것을.’

‘작작하세요.’

‘그러게, 작작하지 그랬어요.’

난, 그저 그대가 정말로 쓰러진 건지 그게 궁금했을 따름이었는 걸. 덧붙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와 설명을 듣는다 한들 상황이 바뀌지도 않는다. 그랬기에 클로이는 분한 표정 그대로 뒷걸음질로 물러섰었다.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전하. 아르네의 관용은 죄 바닥나버렸습니다.’

일방적인 축객령이었으나, 내쉬는 여전히 웃는 그대로였으며 클로이 역시 그의 답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문을 닫아걸어라! 나무판자를 대서, 다시 한번 단단히! 외부 손님이 보이지 않도록! 확실히 보이도록 해.’

기사들은 클로이의 명령에 한목소리를 대답했다. ‘네’라고 울리는 대답이 밤하늘을 우렁차게 울렸다.

“미친 자식.”

내쉬에게 잡힌 손목을 잡아 문지르며 클로이가 이를 갈았다.

“개자식, 개자식!”

클로이는 쉬지 않고 욕을 쏟아냈다. 길롯과의 일전을 마지막으로 레이디의 날이 끝났다. 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으나, 생각보다 화려하고 속이 시원한 끝이라 돌아오는 길이 즐거워서 들떴었다는 것을 부인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르네의 담벼락 안을 걷다가 들은 내쉬의 목소리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허겁지겁 나왔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르네의 가신을 대신해 자신이 나서 수습하기 위해서. 그런데 이런 꼴을 당할 줄이야!

“개자식! 개자식! 쓰레기 같은 자식!”

뒤늦게 그의 질척한 눈빛이 떠오르며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자신이 헌팅 트로피도 아니고 전리품도 아닌데 ‘곧’ 가지러 오겠다는 식으로 군 녀석의 태도가 굉장히 불쾌하다.

“놀란 척하며 차버렸어야 했는데!”

“차긴요, 따귀를 갈겼어야죠!”

아득바득 이를 가는 사이로 로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로지의 표정이 선득하다.

“‘레이디’라면 발길질보다는 뺨이 잘 어울릴 테니까요.”

유독 힘줘 발음하는 ‘레이디’소리에 괜히 등골이 오싹해지며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인지는 아가씨께서 더 잘 아시지 않을까요? 아님, 레이디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건방 떨지 말고 제대로 말하지 못해?”

“제가 건방 떠는 걸로 보이세요. 아가씨?”

로지의 표정은 끝까지 흔들림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들켰구나. 클로이는 짜증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입술을 말아 물고선 질겅질겅 씹었다. 정말이지 되는 것 없는 밤이다.

“에반 님이 기다리고 있어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지금? 아님 내일 아침. 어차피 에반 님도 저도 물러설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요.”

요는 시간문제라는 것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다갈색 눈동자는 그저 엄혹하기만 했다. 클로이는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에반을 불러와.”

  * * *

“…….”

레이얼은 클로이가 사라진 방향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열린 창틈으로 쉴 새 없이 찬바람이 휘몰아쳤으나, 아쉬움에 잠겨 춥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라고 해서 이렇게 등 떠밀 듯 허겁지겁 돌려보내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직접 나서기까지 했는데 보란 듯이 증서를 빼앗겼으니, 잔뜩 약 오른 내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 운이 없어 이런 날 내쉬와 마주치기라도 해지면 일이 걷잡을 수 없어질 것이다. 당연히 안전을 고려해 등을 떠민 것이나, 레이얼은 아쉽기만 했다. 내내 고생한 ‘레이디’에게 마지막에 어울리는 제대로 된 감사 인사를 충분히 전하지 못했다는 생각. 곧, 토벌을 위해 북부로 떠난다고 했는데 그게 언제인지 제대로 묻지 못했다는 깨달음. 온갖 것이 ‘서운함’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흐음…….”

옅은 한숨을 희게 뿜던 순간이었다. 열린 문틈으로 한밤의 정적을 뚫고 희미한 소란이 새어 들어왔다. 레이얼은 그림자가 밖으로 비치지 않게 조심히 움직인 다음 최대한 창문 께에 바짝 붙었다.

‘내쉬인가.’

왁자한 소음이 이는 사이로 내쉬의 호위기사들이 튀어나오며 호들갑스럽게 반겼다.

“황자님! 이제 오십니까? 저희도 조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지? 지금 호위와 따로 움직였었단 말인가? 어째서? 어디로? 생각지 못한 소리에 레이얼의 얼굴이 희게 굳었다. 이 밤, 내쉬가 길롯 백작저에 있었던 게 아니었나?

“늦었군?”

“길롯 백작님께서……한 지라 수습에 시간이 걸렸습니다.”

“흥, 호들갑은.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닌데 적당히 하지 않고선.”

분명, 기분이 좋지 않을 텐데 수하의 말을 받는 내쉬의 음색은 전에 없이 상냥한 편이었다.

“백작님께서 너무 상심하셔서요.”

“앞으로는 일일이 받아주지 말아라.”

“……예? 예.”

제 편이 아니었나? 선이 긋는 게 여실한 말투에 수하 역시 의외였던지 대답이 한 박자 늦었다. 레이얼이 아는 내쉬라면 분명히 빈정거리고도 남을 태도였건만, 내쉬는 이번에도 쯧, 하고 혀를 차는 것을 대신으로 갈음했다. 분명 이상했다. 너무 수상하다. 날리는 커튼 뒤에서 숨죽인 레이얼은 가슴이 불안에 두방망이질 치는 것을 느끼며 숨을 골랐다. 자신의 가장 큰 세력인 길롯이 레이디에게 조롱당했다. 그런데 오히려 평소보다 기분이 좋을 수가 있나? 길롯은 절대 버릴 수 있는 패가 아니다. ……뭐지? 눈을 내리깐 채 생각에 골몰하던 레이얼은 이어지는 내쉬의 나직한 속삭임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놀라긴.”

“아닙니다.”

“명심하렴. 네가 비위를 맞추고, 시중을 들어야 할 이는 길롯 백작이 아니야.”

“당연합니다. 저희의 주인은 황자님이신-.”

“아니.”

내쉬는 수하의 호들갑스러운 충성맹세를 짧게 쳐내며 웃었다.

“너희가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할 분은 바로, 내 비가 되실 분이지.”

“아. 예예.”

비? 언제 혼담이 들어왔지? 최근 이베트 후작이 보낸 동향 보고엔 그런 말이 없었는데……? 생각을 더듬느라 집중한 레이얼의 미간이 잔뜩 좁혀졌다.

“다들 성격이 다르잖나. 멀리 갈 것도 없지. 길롯 백작과 레이디 아르네만 하더라도 너무 다르지 않던가.”

“예, 아, 예예.”

수하는 ‘예시’라고 생각한 모양이었으나, 레이얼은 내쉬의 말을 듣는 순간 몸이 딱 굳어버렸다. 휘잉. 때맞춰 불어오는 바람에 커튼이 사납게 날렸다.

“레이디 아르네께서는 백작보다 더 호방하고, 칼같이 엄혹한 면이 있지 않으시던가.”

“예예. 아르네이시니까요.”

“그래. 맞아 바로 그거야.”

이어 겨울 바람을 타고 만족감이 짙게 물린 웃음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그제야 레이얼은 이 모든 것을 이해했다. 내쉬는 일부러, 바로 이 자리에서 굳이 꺼낸 소리였다. 레이얼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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