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 전하의 개가 되겠습니다2021.06.04.
“내일 밤인가요?”
“예. 전하.”
길롯은 내쉬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푸석한 피부과 푸르스름한 낯빛. 레이디와의 일전에 꽤나 신경을 쓰는 모습이다.
“지쳐 보이십니다.”
“아, 예. 뭐……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이 와중에 금고 방을 설치하신 소감은?”
“예?”
설마 내쉬가 그런 것을 알고 있을 줄 몰랐던 길롯 백작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런? 비밀이었습니까?”
찻잔을 집어 드는 내쉬는 몹시 나긋하게 웃었으나, 길롯은 목덜미를 짓눌린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갈고리 같은 시선이 배 속을 뒤져 꼭꼭 숨겨둔 것을 죄다 캐낼 것같이 음험하다.
“백작. 다른 귀족가엔 금고가 없었고 비밀 방이 없었습니까?”
며칠을 애쓴 그를 앞에 두고 쏟아내는 말이 가차 없었다.
“한심하긴. 차라리 그 시간에 서류나 한 번 더 들여다보시지.”
쯧. 핀잔으로 부족해 혀까지 차는 내쉬의 모습에 길롯 백작은 순간 울컥하고 말았다. 물론 금고 방을 만드느라 조금 더 바쁘긴 했지만, 그가 지금 이런 꼴을 하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황실의 뒤치다꺼리로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말을 이따위로 밖에 못 해? 눌러둔 못된 성질머리가 슬그머니 고개를 쳐든다. 이대로는 안 된다. 지금도 이런데, 제위에 오른 후엔 자신을 얼마나 하찮게 대할 것인가. 아무래도 이참에 눌러두어야겠다 싶어 백작이 입을 떼려던 차였다. 마주친 시선의 내쉬가 웃고 있었다.
“그 입.”
“…….”
“떼어봐. 난 어머니와는 달라.”
날것 그대로의 경고였다. 고작 반푼짜리 애송이라 생각했는데, 눈앞의 그는 마치 잔뜩 독오른 짐승 같다. 미소 짓는 입술 사이로 보이는 하얀 이가 맹수의 송곳니같이 차게 윤이 난다.
“잊었나 백작? 어머니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지. 어떤 망나니 덕에. 덕분에 늘 하는 짓이 다소 평면적이란 말이야.”
톡톡. 웃고 있느라 부드럽게 휘어진 눈꼬리를 손끝으로 두드린 내쉬가 어깨를 들썩였다.
“다 보인다고. 그런데 그대는 아둔하기에 교육을 받고도 어머니보다 더 투명하지.”
“……그…….”
“백작. 지금쯤 한번 생색을 내두어야 내가 제위에 오른 후 떵떵 큰소리를 치며 살 수 있을 것 같나?”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 본 듯 날카로운 지적에 길롯은 벌어진 입술을 발작적으로 오므렸다.
“그, 그럴 리가요.”
고개를 저어보지만, 이미 다 들켰다는 것을 그도, 내쉬도 알고 있었다.
“하나 더 알려줄까? 어머니는 그대가 혈육이라 더러 너그러웠을지 몰라도 난 아니야.”
“전하, 무슨 말씀이신지…….”
“거슬리면 너도 치우겠다는 뜻이다 길롯 백작. 어설픈 짓거리 하지 말고 납작 엎드려.”
자리에서 일어난 내쉬는 길롯 백작을 더러운 걸레짝 보듯 했다.
“바짝.”
“전하! 저는 황후 폐하의 오라비입니다. 폐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길롯 백작. 그대는 왜 이리 멍청해? 황후께서 가족의 빈자리에 애통해하시면 또 만들면 되잖아?”
“무슨!!”
연이은 매서운 말에 길롯 백작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푸들푸들 떨었다.
“가령 내가, 결혼한다든지?”
망나니 같은 오라버니보다는 힘 있는 가문의 영애가 ‘가족’이 되어준다면 황후께서 더욱 기뻐할 테지. 뒷말은 거의 혼잣말인 듯했으나 길롯 백작에게 들리기엔 부족하지 않았다.
“아르네 공녀라면 어떨까?”
레이얼의 약혼 이후 아르네와 시오도르의 조합이라며 연신 아쉬워하고 속상해하던 누이의 얼굴이 스친다. 내쉬 황자가 아르네 공녀를 낚아챌 수만 있다면야. 그렇다면……! 길롯 백작은 곧장 무릎을 꿇었다.
“제가 잘하겠습니다. 황자님.”
“이미 그대보다 잘, 하는 사람은 많아.”
유독 힘줘 발음한 ‘잘’한다는 말에 담긴 함의야 뻔했다. 유능하면서도 입안의 혀처럼 군다는 의미일 테다. 길롯 백작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충성을,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여전히 내쉬에게선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미 길롯 백작의 머릿속엔 내쉬가 그의 아들뻘이라거나 반푼이라는 몹쓸 생각은 싹 지워진지 오래였다. 지금 내쉬는 지배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길롯 백작은 무릎 걸음으로 기어가 내쉬의 발치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전하의 개가 되겠습니다. 뭐든, 시켜 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뭐든?”
“예, 전하.”
“그럼 나가 뒈져버리렴.”
“예?”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그를 향해 내쉬가 작게 웃었다.
“농담이야.”
하지만 길롯 백작은 내쉬 황자의 눈이 조금도 웃지 않음을 깨달았다. 오늘은 목숨을 부지했다지만, 그가 재위에 오르고 나면 아무도 그의 앞날을 장담하지 못하리라.
“추,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오직 내쉬의 마음을 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길롯은 절박한 목소리를 맹세에 맹세를 거듭했다.
날이 갈수록 악화되는 황제의 병세에 점차 소문이 새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야 쉬쉬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겨울감기라는데 도통 일어나지 못하는 황제의 모습에 누구라도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겨울감기가 아니라 중병이라더라, 중독되었다더라 암살 시도가 있었다더라. 온갖 말이 입과 귀를 통해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퍼졌다. 소문은 다양했으나 내용은 하나였다. 황제가 위중하다. 그건 ‘곧’ 황권 교체가 일어난다는 의미였다. 그중 가장 다급해진 건 다름 아닌 중립파들이었다. 그 어디에도 소속되어있지 않았기에, 제일 먼저 ‘회유’라는 이름의 압박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후작 각하께선 어쩌실 계획입니까?”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백작이 대표로 이베트 후작의 의중을 물었다. 길롯 측에서 입장을 밝히라며 으름장을 놓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어영부영 시간을 끌고는 있지만, 끝까지 이런 식으로 버티진 못한다. 중립파라는 이름으로 정치색을 철저히 배제한 이들은 이럴 때, 조금 난감해진다. 정치색이 없는 그들은 일개 개인에 불과해 구심점도 대표자도 없었다. 고심 끝에 그들이 찾은 곳은 바로 이베트 후작저다. 그런데 이베트 후작은 그들의 말에 대답 대신 차만 권하는 게 아닌가!
“후작님. 지금 상황이 다급합니다.”
“그래요?”
“오늘 저녁에 찾아온, 흠흠. 길롯 쪽에서 저녁 만찬에 초대한 터라 여러모로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적게는 두 번. 보통 세 번 이상 길롯의 연락을 받았다. 만찬입네 하고 불러서 하는 말은 온화한 으름장이었고, 이제 답을 달라며 독촉하는 상황이다. 이제 더는 버틸 구실이 없다.
“거두절미하고 여쭙겠습니다. 후작 각하께선 어느 쪽으로 가닥을 잡으셨습니까?”
“몰라 물으십니까? 이미 보여드렸다고 생각했는데?”
“……길롯은 제 편에 서지 않으면 훗날 혹독한 보복을 예고했습니다.”
“무서우면 굴복해야지.”
후작의 말이 빈정거림임을 모를 리 없다. 백작은 단번에 목덜미까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버렸다.
“굴복하지 않으려 지금 모인 게 아닙니까!”
“길롯이 아니면, 남은 건 황태자뿐 아닙니까? 설마, 그걸 몰라 이러실 리는 없고…….”
언짢아하던 백작의 입이, 후작의 말에 꾹 다물렸다. 길롯이 아니면 남은건 황태자뿐이다. 하지만 그게 내키지 않으니 온 것이다.
“아아, 썩은 동아줄 같아 잡기는 싫고 그렇다고 길롯의 밑에 기어들어 가기는 싫으니 어떻게든 해달라고 우는 겁니까?”
이베트 후작은 강퍅하기로 유명했다. 예외는 오직, 죽은 줄리아나 황후뿐. 황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이에게 제깟 게 뭐라고 고운 소리를 듣겠나.
“…….”
백작은 후작의 성정을 떠올리며 차오르는 분기를 눌렀다. 그리고, 후작의 말은 틀린 게 없으니 따질 소리도 없긴 하다.
“알면, 도와주세요.”
“나라고 달리 수가 있나. 길롯이냐 황태자냐. 둘 중 하나니…….”
꿀꺽. 흐리는 말 끝에 누군가가 긴장된 듯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요란했다.
“근본 없는 망나니보다야 저주 쪽이 좀 나겠다 싶었소.”
이베트 후작은 인정에 휘둘릴 위인은 아니다. 그랬다면 어미를 잃은 어린 황태자를 버리지 않았겠지. 그렇다면, 이건 혈연이 아닌 이베트가 수장의 눈이다.
“……그러십니까?”
“무섭소?”
되묻는 이베트 후작 위로 아르네 공작이 겹쳐 보인다.
“…….”
백작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아르네 공작 꼴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길롯의 망나니 꼴에 손뼉 치는 머저리가 되고 싶진 않다. 그건, 한평생 고아한 ‘귀족’으로 살아온 그의 자존심에 명백히 위배 된다.
“아닙니다. 절대.”
백작의 표정이 단단해졌다.
이베트 가에서 날린 새가 석양을 틈타 레이얼을 무사히 찾아왔다. 작은 종이에는 레이얼을 웃게 할 내용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중립파 귀족 모두를 포섭했다고.”
나직한 레이얼의 목소리엔 진한 만족감이 물려있었다. 일이 정말 풀리려니 이런 식으로도 풀리는구나 싶었다. 마치 누가 일부러 짜기라도 한 듯 일이 기묘하게 맞물린다. 로이의 정체를 알고 난 후, 레이얼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충격을 받았다. 여섯 번이나 잃었던 피앙세였다. 애정이 있건 없건 ‘레이얼 시오도르’의 피앙세라는 이유로 스러지고만 가여운 목숨이다. 그래서 또다시 징벌처럼 내려진 혼인 서약서를 보며 그의 일곱 번째 피앙세만큼은 반드시 지켜내겠다 맹세했다. 그런데, 그 소중한 사람을 자신이 사지로 내몰았다니? 그는 당장에라도 클로이를 꽁꽁 묶어 감춰두고 싶었으나, 클로이의 반발이 보통이 아니었고 그 역시 이해할만한 이유라 강경하게 굴 수 없었다.
‘내쉬가 노리고 있잖아.’
이대로라면 두 손 놓고 클로이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레이얼은 무릎을 꿇고 매달릴 생각으로 이베트 후작을 찾았었다. 잊혀진 과거가, 그리고 누군가의 의도대로 흘러간 시간이 단번에 돌이켜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쳐지면 다시 매달리고, 또 내쳐지면 다시 한번 더. 그는 이베트 후작의 거절보다 한 번 더 매달릴 생각이니 결국 승자는 자신이 될 터였다. 그렇게 찾은 이베트 후작이었건만, 외려 원망을 들은 건 바로 레이얼, 자신이었다. 버려진 건 그가 아니라, 이베트 후작이었다는 소리에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줄리를 지키지 못한 죄를 묻는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줄리아나 황후를 지키지 못한 건 황가다. 무슨 그런. 그런 말을 그가 했을 리가 있나. 상처받은 눈으로 더없이 시리게 말하는 이베트 후작의 목소리에 작은 속삭임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죄를 씌워 이득을 볼 자가 누구지?’
자존심이니 체면이니 하는 것을 그는 그때 버렸다. 있지도 않은 죗값에 눌려 누군가를 웃게 해줄 수는 없었다.
‘할아버지. 저 또 버리지 마세요.’
변명대신 열 살의 레이얼이 내내 하고 싶었던 소리를 낼 수 있었던 건 그래서였다.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을 알아차린 후작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었다.
‘내가 널 언제!’
감정이 절절히 배인 후작의 목소리에 문득 레이얼은 누군가가 떠올랐다. ‘시오도르’를 그렇게 다채로운 감정으로 소리 질러 부르는 여자가. 곧. 밤이 오면 볼 텐데도 떠올라서,
“보고 싶다.”
절로 애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