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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8. 화내지 마 (78/121)

078. 화내지 마2021.06.01.

평소와 달리 금방에라도 한입에 삼켜버릴 것 같은 거친 입맞춤. 레이얼이 이러는 이유는 뻔했다. 불안이다. 그가 자신을 두고 불안하게 여기는 이유는 뻔했다. 클로이는 헐떡이던 숨을 고르자마자, 물었다.

“혹시, 내쉬 전하 만났어?”

“친근하게 부르지 마.”

대번에 미간을 구겨버리는 모습이 너무 정직해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참 성격 이상하지. 어여쁘고 저 좋다는 영애가 널리고 널렸을 텐데 말이야. 굳이 내게 이러는 이유가 뭘까?”

“그대는 다음 대의 황후인, 아르네잖나.”

“뭐?”

“그대를 통해 혈통과 상징성 두 가지를 취하려는 거지.”

아직, 다 듣지도 않았는데 클로이는 벌써부터 비위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혈통……?”

잇새로 새 나가는 목소리가 남의 것인 양 딱딱하다.

“그래, 혈통. 길롯의 역린인 혈통의 정당성과 고귀함을 위해서라면 ‘형’의 피앙세를 갈취하는 건 아무것도 아닐 테지.”

“불가능한 일이야.”

“만약 내게 일이 생긴다면, 그대는 ‘황태자의 피앙세’라는 이름으로 내쉬의 곁에 서게 될 거다.”

“이런 개자식을 봤나!”

“제발.”

저 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레이얼은 클로이가 쏟아내는 험한 욕에 머리가 띵, 하게 울려 관자놀이를 짚었다.

“감히 그런 식의 말장난으로 나를 가지려 한다는 게 말이 돼?”

“안 될 건 없지. 어차피 전부 허울 좋은 말장난인걸. 애초에 혼인 명령서도 말이 되지 않았잖아.”

명분, 말싸움. 정말 짜증 나는 것들이다. 레이얼의 말에 클로이는 눈을 사납게 치뜬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따지자면 할 말이 너무 많았으나, 어차피 그녀가 따져야 할 사람은 레이얼이 아니었다. 괜히 그와 마음을 상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걱정 마.”

“걱정하는 게 아니라, 이건 화를 내는 거라고.”

“그럼, 화내지 마.”

“…….”

흐트러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는 손길이 자못 다정했다.

“화내지 마.”

매끄러운 머리칼은 쉽게 고정되지 않아, 레이얼은 몇 번이고 다시 매만져야 했다. 그때마다 그의 손이 귓바퀴를 스치는 것이 굉장히 신경을 솟게 했다. 은근하면서도 무심한 접촉. 귀 끝이 화끈거리는 것이 너무 선명하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화내지 마. 그대.”

이번엔 스치는 게 아니라 확실히 만졌다.

“이……!”

“이런 귀여운 모습은 나만 볼 거니까. 안심해.”

생각지 못한 소리에 내리깐 눈을 드는 것과 동시에 시선이 마주쳤다. 지척에서 서늘하게 빛나는 옅은 색의 눈동자. 그는 제 영역을 침범당한 짐승처럼 난폭한 눈빛을 하고 웃고 있었다.

“아무것도 내주지 않을 거야. 걱정 마.”

귓바퀴를 따라 느릿하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기어이 걸어둔 머리칼을 끌어가는 것이 보인다. 희미한 불빛 아래 빛나는 긴 머리칼에 레이얼이 인장을 내리찍듯 입술을 눌렀다. 태도는 정중하나 집착이 진득하니 깔린 시선이 사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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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랄 몸이 열 개도 아니고 내가 이걸 다 어떻게 관리한단 말이야!”

조용히 넘어가나 했더니, 기어이 밤에 소란이 터지고 말았다. 집사는 길롯 백작이 집어던진 서류를 조용히 챙기기 시작했다. 성질 나는 대로 뭉텅이째 집어 던져 서류가 온통 섞여버렸지만, 그는 한숨 쉬지 않았다. 길롯 백작이 성질부릴 만했다. 그가 누군가? 황후를 등에 업고 한량처럼 즐기고 마시며 돈을 물처럼 쓰는 작자가 아니었나. 그런데 갑자기 이것저것 일을 처리해내려니 아주 죽을 맛일 것이다.

“대체가 일이 줄어들질 않잖아!”

길롯 백작은 서류로는 부족했는지 이젠 잉크병도 집어 던졌다. 잉크병이 날며 검은 비같이 잉크가 떨어져 내렸으나 집사는 반듯한 표정으로 얌전히 서류를 집어 들었다. 지금은 침묵할 때였다. 하지만, 한 번씩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것까진 참을 수가 없었다. 집사는 허리를 깊게 숙여 제 얼굴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몹시 노력했다. 길롯가의 망나니. 집사가 모시는 건, 서쪽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소문난 망나니였다. 전대 길롯 백작도 볼품없긴 마찬가지였으나, 지금의 길롯 백작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지금 그의 주인은 볼품없는 정도가 아니라 망나니 그 자체였다. 캐서린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아마 길롯 가는 진작에 망하지 않았을까. 늙은 집사는 오래전 기억을 더듬었다. 내쉬 황자가 태어나기 전, 그리고 캐서린 황후가 아직은 길롯의 아가씨일 적의 얼굴이 남아있던 그 옛날이었다. 캐서린은 황후가 되어서도 길롯 백작에게서 벗어나질 못했다. 황후의 가문이 되면 정신을 차릴 법도 했는데, 길롯 자작은 백작이 되며 오히려 더 위세 등등해 온갖 일을 벌였다. 덕분에 캐서린은 이전과는 규모가 다른 뒤처리를 티 없이 해내느라 아주 애를 먹었다. 차라리 그가 정말 수습할 수 없을 만큼 악독했다면 황후도 손을 놔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길롯 백작은 그쪽으로는 눈치가 비상했기에 선을 넘지 않는 안에서 곧잘 대범하게 굴었다. 그러다 캐서린이 황후가 된 지 2년째 되던 해 기어이 문제가 터졌다. 아무리 쥐어 짜내도 생각만큼 돈이 나오지 않자, 길롯 백작이 황후의 이름을 팔아 사기를 친 것이다! 길롯 백작이 황후를 들먹여 ‘작위’를 팔아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캐서린은 잔뜩 겁에 질려 황제에게 달려갔다. 그녀가 수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라비를 버리고 ‘길롯’을 살려보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날 황제는 잔뜩 겁에 질려 눈물로 죄를 고하는 캐서린을 웃음으로 덮어주었다.

‘귀여운 분. 이건 울 일이 아니라, 위엄을 보이셔야지요.’

황제는 그길로 길롯 백작을 불러들여 캐서린에게 손수 시범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그날 이후 길롯의 목에 목줄을 채워 마음껏 휘두르기 시작했다. 황후가 길롯 백작에게 휘둘려 괴로워 한 건 고작 이 년에 불과했다. 그 일로 황후가 배운 건 길롯을 다루는 방법뿐만이 아니었다. 캐서린은 자비를 바라는 척, 어리광을 부리며 황제도 쥐락펴락했다. ‘권력’의 단맛을 맛본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제게 주어진, 그리고 제가 얻어 쓸 수 있는 권력으로 과거를 말끔히 청산했다. 돈은 더 이상 그녀의 짐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의 권력을 바라는 이들이 바친 돈이 쌓이고 넘쳐났다. 하지만 황후는 그 돈을 절대 황후궁에 두지 않았다. 길롯 백작의 이름으로 영지를 사들이고, 재화를 차근히 모았다. 그녀가 돈을 움켜쥐기만 한 건 아니었다. 캐서린은 돈을 쓰기도 잘했다. 살롱을 운영하며 거둬드린 돈은 반드시 살롱을 통해 지출했다. 귀부인들이 그녀의 살롱을 그렇게 뻔질나게 드나든 것은 어차피 그것이 제게 돌아올 것을 알아서였다. 몇몇은 캐서린의 그런 행동을 비웃었다. 기껏 운영해봐야 남는 게 없으니, 살롱 유지가 제대로 되겠느냐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귀부인들은 어느새 캐서린에게 길들여 졌다. 그녀의 살롱은 무료이면서 ‘황실’을 드나든다는 자부심이 되었기에 한번 황후의 살롱에 들어온 이들은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오히려 황후가 출입을 금하진 않을지 전전긍긍하며 살롱에 소식을 물고 돌아왔다. 캐서린이 얻은 것은 지배력과 ‘정보’였다. 이유야 뻔했다. 권력. 한 번 맛본 권력이 너무도 달고 황홀해 캐서린은 빌려 쓰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개처럼 빌거나, 눈물을 쥐어 짜낸 것 말고 언제든 제가 내킬 때 원하는 만큼. 더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휘둘러도 될 완전한 그녀의 것. 그래서 캐서린에게 내쉬는 너무 소중하고 너무 사랑스러웠으며 너무도 간절한 사랑이었다. 제 꿈과 욕망을 대신해 모두 거머쥘 그녀의 아들이었으니 당연하였다.

“이게 진짜, 사람을 개같이 부린다니까? 하이 씨.”

그런데 그걸 길롯 백작만 모른다. 끓어오르는 성질을 어쩌지 못하고 찻잔마저 집어 던진 길롯 백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술 가져 와!”

늙은 집사는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개는 종종 눈치 없이 짖을 때가 있으니까.

“아기는?”

묽은 수프를 삼킨 공작의 첫마디는 클로이의 행방을 묻는 것이었다. 에반은 공작의 말에 곧장 대답하는 대신 그릇부터 받아들었다.

“밤이 늦었는걸요.”

“에반.”

에반은 공작의 부름에, 입을 꽉 다물었다.

“우리 아기를 내가 모르는 게 아니잖나.”

타고나길 영특한 아이였다. 아르네 공녀님이라 불리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고 클로이라 불러달라며 웃는 아이는 철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아이는 제 오빠에게 위협이 되는 것이 싫었던 거다. 아르네는 대대로 손이 귀해 후계를 간신히 하나 보는 게 전부였다. 사정이 그러니 방계도 없고, 있는 것은 넘치도록 많은 가신뿐. 그런데 이번대의 아르네는 둘이었다. 남아와 여아. 근력과 체력이 필수인 북부이니 당연히 남아 쪽이 후계가 되는 게 옳았다. 그런데 문제는 여아 쪽도 자질이 상당했다는 거다. 오히려 클로이는 제 오빠와 달리 부족한 힘을 꾀로 메꾸어 결과가 더 좋을 때도 많았다. 마음먹고 후계싸움을 벌이면 호각을 다툴 것이다. 그런데 그걸 클로이가 대놓고 피했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는 ‘아르네 공녀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질색하며 밖으로 돌았다. 사냥꾼들과 어울리고, 영지를 돌아다니며 시시덕거렸다. 그뿐인가 제1 사냥꾼이라는 기가 막힌 호칭도 따오기까지 했다. 대대로 아르네들이 솜씨가 부족해서 제1 사냥꾼이 되지 못한 게 아니었다. 그건 ‘가신’들의 몫이었기에 아르네는 손대지 않은 것이었다. 가신을 자청하며 노골적으로 물러서는 클로이의 모습에 엘리오 역시, 어느 순간부터 그 궤를 틀었다.

‘난, 몸 쓰는 쪽보다는 역시 행정 쪽이랄까.’

어떻게든 제 동생을 옆에 두려는 발버둥이었다. 상냥한 척, 다정한 척, 서툰 척. 두 아이들은 서로를 위해 자꾸 한발씩 뺐다. 그러나 그 기저에 깔린 것이 상대를 향한 강한 애정과 신뢰임을 알아 공작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저것이 남매가 택한 것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제 오빠를 위해 후계 자리도 미련 없이 내팽개치고 밖으로 도는 아이가 망가진 아르네를 보고도 얌전히 있는다고? 공작은 눈뜨던 순간 클로이에게서 풍기던 옅은 피 냄새를 기억하고 있었다. 다가올 때 본능적으로 죽이던 기척과 그를 반기던 눈빛 아래 진득하니 깔린 복수심. 모두 다 보았다. 그래서 그는 매번 눈을 뜰 때며 엘리오가 아니라 클로이를 찾았다. 더는 그의 아이들이 아프지 않길 바라서.

“공녀님의 마음을 헤아려주세요. 그리고, 곧 떠나실 분이니 너무 염려 마시고요.”

“떠나다니?”

“토벌 선봉장이 되셨습니다.”

“아…….”

까맣게 잊고 있던 소리에 공작의 낯빛이 단번에 해쓱해졌다.

“거버를 부르게. 당장. 어서!”

“공작님, 병석에 누운 아버지가 그래도 괴수 밥이 된 아버지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고집부리지 말라는 말을 이렇게나 따갑게 한다.

“그렇게 엉망이었나?”

죽다 살아난 게 다행이라 생각했으면서도, 이 순간 공작은 침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제 몸뚱이가 못마땅했다.

“엘리오 소공작님보다 더 하셨잖습니까.”

“그럼 에반 자네가 클로이의 뒤를 따르게.”

“안 됩니다. 지금 황실에서 공녀님께 ‘위로’를 건네고 싶어 얼마나 안달하는지 모릅니다.”

에반의 말에 공작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시오도르의 교만이 선을 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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