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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7. 달콤한 것 (77/121)

077. 달콤한 것2021.05.28.

레이디의 예고장을 받은 길롯은 서른 명의 황궁 기사를 받아 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사를 늘리는 것으로 부족해 용병 길드도 셋이나 계약했다지요?”

“너무 많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시잖습니까. 길롯 백작저가 어떤지.”

“……흠. 그래도 조금 과한 거 아닌가 싶습니다.”

과하다는 말이 나오면서 문득 사람들의 목소리가 훌쩍 낮아졌다.

“백이 넘는다면서요.”

제국법에서 변경백인 아르네를 제외한 귀족이 보유할 수 있는 사병은 백이 최대였다.

“용병 길드 셋만 해도 백이 넘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들리는 말에 이미 모인 인원이 오백에 가깝다 합니다.”

“오백?”

히익, 누구에게서 난 건지 모를 소리와 함께 모두의 얼굴이 희게 질려버렸다. 오백이라니. 황실 직속 기사를 다 끌어모아도 오백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길롯이 단독으로 오백이라니? 제아무리 레이디의 예고장을 받아서라지만 누가 봐도 이건 이상하다. 우연히, 황제가 몸져눕고. 때마침, 레이얼 황태자가 칩거를 깨고. 하필이면, 내쉬 황자가 사람들 앞에 나선 이 상황에 길롯이 증병을 했다고? 우연에 우연의 연속이라고 해도 수상해 보인다.

“……피바람이 불려나.”

누군가의 입에서 망연한 소리가 떨어지는 것으로 사방은 소름 끼치는 침묵이 맴돌았다. 이따금 황궁 정원을 가로질러 달리는 차가운 바람만이 새된 소리를 냈다. 바야흐로 겨울이었다.  

  겨울감기라던 황제는 고비라는 일주일이 훌쩍 지나도 도통 눈을 뜨지 못했다. 아무래도 장기전이 될 것 같다는 황의의 말에 캐서린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평생, 제 그늘이 되어줄 것 같던 황제는 이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혼자 내동댕이쳐졌다고 생각한 걸까? 캐서린은 전에 없이 몹시 경계하며 사람들의 출입을 금했다. 이제 더 이상 달콤하게 미소를 짓지 않는 그녀는 흉흉한 눈을 해서 늘 날을 세웠으나 아무도 그녀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마치 궁지에 몰린 어린 짐승 같은 모습에 사람들은 외려 캐서린 황후를 동정했다. 그런 캐서린이 막지 못하는 것은 황제의 간호를 위한 최소한의 인원과 혈족이었다. 우연인지 오늘 황제의 머리맡에 모든 황족이 모였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그래 내쉬. 오랜만이구나.”

며칠 못 본 사이 내쉬는 캐서린 황후만큼이나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살이 아주 조금 빠졌을 뿐인데,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았다. 부드럽던 눈매에 그늘이 지고 턱선이 도드라지며 그의 사랑스러운 면모는 죄다 휘발되어버렸다. 눈앞에 있는 건 이제 막 성체가 된 짐승을 닮아 있었다. 침잠하듯 가라앉은 눈빛이 잘 벼려진 날카로운 발톱같이 빛난다. 내쉬는 자신의 변화를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제 모습을 과시하듯 드러내 보였다면 모를까. 심지어 내쉬는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얼에게 ‘차’를 한잔하지 않겠느냐며 따로 시간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그럴까.”

레이얼은 눈을 번뜩이며 웃는 내쉬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았다. 내쉬가 짐승이라면 자신은 짐승의 목에 줄을 매달아 주인이 되어줄 작정이었으니까. 황제의 곁을 지키겠다는 캐서린을 두고 응접실로 나와 찻잔을 기울이기도 한참, 차를 두 잔째 받도록 내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딱히 조급할 이유가 없었기에 어느 순간부터 레이얼은 진심으로 차를 음미하기 시작했다. 혀끝에 남는 맛 없이, 아주 산뜻하다. 그러면서도 수색이 선명하고 향이 거슬리지 않을 만큼 희미해 레이얼은 차가 마음에 쏙 들었다.

“입에 맞으세요?”

“좋군.”

“언제고 형님과 마시게 될 것 같아 준비해두었답니다.”

엄연히 황후궁이었는데 내쉬는 마치 제궁인 양 스스럼없이 굴었다. 하긴. 길롯이 캐서린 황후이며, 황후가 곧 내쉬였으니 굳이 나누는 것도 우습다.

“제 것과 다른 차인데, 꺼림칙하진 않으셨어요?”

내쉬는 한 모금 마신 찻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달콤한 향이 진하게 풍기는 노란빛의 차는 붉게 우러난 레이얼의 것과 보기에도 많은 차이가 있었다.

“짐승도 배려를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는단다.”

“종종 짐승만도 못한 것들도 보이던걸요.”

“휘둘리면 똑같이 짐승밖에 더 되겠니.”

점잖게 말을 잇고 있지만, 사실 레이얼이 선뜻 차를 입에 댄 건 차에 장난질을 치지 않았음을 알아서였다. 아니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아서였다. 황제는 병명과 달리 상태가 위중했고, 황후는 잔뜩 날을 세우고 있다. 이 와중에 황태자 독살 시도가 일어난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 모두가 황후와 내쉬를 지목할 것이다. 제아무리 길롯이 바보라지만, 뻔한 일을 할 리가 있나. 그것도 ‘황후궁’ 안에서. 언제나 궁지에 몰아넣었던 황태자라는 직위가, 이 순간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단단히 그를 지키고 있음을 레이얼은 알고 있었다. 그의 여유는 그래서였다. 내쉬는 그런 레이얼을 빤히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마시는 건 로열 크라운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차예요. 향이 달콤하고 그 맛이 진득하죠. 전부 형님이 전부 싫어할 만한 것뿐이네요.”

아……. 로열 크라운. 레이얼은 차를 설명하는 내쉬를 보다 작게 미소를 지었다. 차를 설명하는 듯 하지만, 속에 담긴 함의가 너무 노골적이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이제 막, 성체가 된 짐승 같아 보이더니 그의 눈이 정확한 듯했다. 어쩌면 이렇게 제 발톱 하나 숨길 줄 모르고 으르렁거릴까. 천박하게.

“내쉬. 네가 이렇게 차를 즐기는 줄 몰랐구나. 진작 알았더라면 로열 크라운에 대해 가르쳐 줄 수 있었을 텐데.”

“차에 대해 잘 아신다고요?”

레이얼은 코웃음 치는 내쉬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아니지, 차를 아는 게 아니라, 황실 납품 품목이기에 아는 것이지. 그것이 바로 내 일이니까.”

맹렬한 주시를 웃는 얼굴로 넘기며 레이얼은 ‘로열 크라운’을 차분히 설명해주었다.

“극남 지방에서 자생하는 로열 크라운이 더위에 지친 이들에게 특효약이란 건 비밀도 아니지. 애초에 그 효능을 인정받아 황실에 납품하게 된 것이고 말이야. 차갑게 우려낸 로열 크라운의 단맛과 자극적인 향은 모두 빠르게 활력을 북돋아 주기에 적합하단다.”

레이얼의 시선이 훈김이 올라오는 내쉬의 잔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느릿하게 올라 다시 마주한 시선은 조금 전 조곤조곤하게 설명해주던 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차게 빛난다. 만년설로 빚어도 저보다는 따스하리라.

“알고, 마시렴.”

“아차, 그런 거라면 형님께 양보할 걸.”

한 꺼풀 두른 레이얼의 경고에 내쉬가 돌연 한숨을 쉬었다.

“늘 고군분투하시니까.”

“괜찮아. 차 따위는 네게 양보하지.”

“차라도 줄 때 받으시는 건 어때요?”

내쉬의 오만한 말에 레이얼은 흔한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내쉬는 진심이었고, 레이얼 역시 이 순간 그 누구보다 진지했으니 웃음 같은 걸 흘릴 수는 없었다.

“훗날 대공의 자리가 아쉬워지지 않겠나?”

지금이야 내쉬는 ‘황자’이니 결혼해서 대공이 되는 것이 기정사실이나, 만약 후계싸움을 선포하게 되면 그마저도 불가하다. 황제의 자리를 노린 불온한 자가 아니겠나. 가볍게는 추방이고 무겁게는 추살이다.

“저는 너그러우니 대공좌를 내려드릴 겁니다.”

“아쉽구나. 내 자비는 네게까지 미치지 못할 것이란다.”

“그럼 형님께선 제게서 ‘자비’를 실컷 맛보세요.”

“내쉬. 그 또한 아쉽겠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그럴 기회가 있을 것 같지 않아.”

“기대하고 있을 테니 부디. 힘내주세요.”

로열 크라운이 든 찻잔을 집은 내쉬가 마치 축배를 권하듯 손을 허공에서 가볍게 들었다. 레이얼은 턱짓으로 응수했다. 허공에서 가볍게 흔들린 찻잔에서 코가 찡한 달콤한 향이 사방을 짙게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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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히 겁이 나는 건 아니다. 어차피 그의 미래는 단 한 번도 희망찬 적이 없었다. 늘 시련에 시련, 그리고 조금의 절망으로 점철되었다가 잊을 만하면 다시 불운이 눈처럼 도탑게 쌓였다. 내쉬와의 후계싸움은 어차피 시간문제였다. 다만 그것이 그의 생각보다 갑작스러웠다. 조짐 없이 불쑥. 지금 이 두근거림은 그래서지 불안이 아니다. 절대. 레이얼은 금방이라도 갈비뼈를 부러뜨릴 것 같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툭툭 두드려준 뒤 담장에 손을 올렸다. 그래도 한 번 와봤다고 공작가의 담장을 넘는 것이 저번보다 능숙했다. 훌쩍. 담을 뛰어넘은 레이얼은 소리 없이 테라스를 타고 올랐다. 똑똑. 그리고 그의 로이가 그랬듯 작게 노크하자, 눈이 잔뜩 커진 클로이가 문을 열고 나왔다. 열리는 문틈을 타고 새 나오는 따끈하고도 상쾌한 향이 반갑다.

“전하?”

속삭이는 여자의 숨결엔 청량한 내음이 가득했다.

“블랙잉그리드가 생각나서 왔어.”

그의 말에 눈을 휘어 뜨려 미소 지은 클로이는 그를 침실로 이끌었다.

“마침 잘 왔어.”

오늘은 무려 에반이 끓여준 차거든. 작게 덧붙이는 목소리가 다정하다. 찻잔을 하나 더 꺼내오려는 듯 몸을 돌려 멀어지는 클로이를 바라보던 레이얼은 충동적으로 그녀를 붙들었다.

“응?”

“앉아. 내가 가지고 올게. 환자잖아.”

차마, 저도 모르게 붙들었다고 할 수 없어 둘러댄 소리가 급조한 것치고는 쓸만했다.

“상처는 거의 다 아물었어.”

“그래도 완벽히 나을 때까진 조심해야지.”

“연회만 아니었어도 진작 다 나았을 텐데.”

“나한테 들킬 일도 없었고 말이야. 그렇지?”

“어휴.”

레이얼은 표정을 구긴 클로이를 보며 작게 웃었다.

“앉아 있어.”

너스레를 떠는 사이 치밀었던 불안이 사그라든다. 멀어지는 뒷모습에 치밀었던 까만 감정이 차분하게 꽉꽉 눌러져 여며진다. 마치 제 궁인 듯 자연스럽게 찻잔을 챙겨 자리를 잡자 클로이가 잔을 채워주었다. 쪼르륵. 찻물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마음에 안정감도 같이 차오른다.

“전하도 블랙잉그리드 좋아하지?”

“응.”

“단 거 싫어하더라.”

“응.”

“북부 사람들은 다 좋아해.”

“응?”

“전에 먹어봤잖아 초콜릿케이크. 어? 그러고 보니 그땐 잘 먹었네?”

“괜찮더라고.”

“북부는 추우니까 든든하고 열량 높은 음식을 즐겨 먹는 편이야.”

왜 갑자기 단 것 이야기를 하나 했더니, 말 끝에 클로이가 슬그머니 뭔가를 꺼내왔다. 초콜릿을 입힌 마들렌이었다. 아마 차와 함께 먹을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싫어?”

단내를 질색할까 봐 눈치 살피는 모습에 레이얼은 한숨과 웃음이 뒤엉킨 이상한 소리를 터트렸다.

“싫어하면?”

“나중에 먹으려고. 전하 가고 나면.”

“안 싫어하면.”

“같이 먹으려고.”

“그럼, 안 싫어하는 거로 하지.”

“그게 뭐람?”

핀잔하는 것 같으나, 이미 눈이 반짝거린다.

“말했잖아. 네 취향이 되고 싶다고.”

“전하. 내가 말해주지 않았나?”

클로이의 시선은 이미 마들렌에 꽂힌 후였다.

“전하는 그냥 숨만 쉬고 있어도 내 취향이라니까.”

레이얼은 두껍게 초콜릿을 입힌 마들렌을 깨무는 클로이를 보며, 얼굴을 붉히지 않으려 애썼다. 상대는 지금 마들렌에 정신이 팔려 제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이렇게 기쁜 건 이 순간 너무도 절실했던 소리여서였다. 클로이 아르네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자각 없이 사람을 몬다.

“전하, 나 마들렌을 허락해줘서 하는 농담 아니야. 맹세해.”

어느새 마들렌을 꼴딱 삼킨 클로이가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진짜로 진짜야. 거짓말 아니야. 티가 난다며. 나 전하가 좋아. 엄청 내 취향이야. 잘 봐, 다시 말해 줄, 읍!”

순간, 목덜미가 잡혀 끌려간 클로이는 그대로 레이얼에게 숨을 빼앗기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란 것도 잠시, 클로이는 자신이 레이얼이 싫어하는 ‘달콤한 것’을 먹었단 것을 깨닫고 그를 밀어냈다.

“잠깐, 나 단 거 먹…… 으읍!”

그러나 밀어내기 무섭게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 레이얼은 입안에 남아 있던 초콜릿 향이 말끔히 사라지도록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마지막 날숨까지 죄다 빨려 더는 달큼한 향이 피어오르지 않을 때까지.

“나도 말했잖아. 단 거 안 싫어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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